“‘국가보안법 체계’에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인터뷰]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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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27 23:32

 권오헌 명예회장은 '새 용어 제조기'답게 이번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오헌 명예회장은 '새 용어 제조기'답게 이번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저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표현을 쓴다. 국가보안법 체계에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새 용어 제조기’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이같이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권 명예회장은 일찍이 운동의 발전에 따라 그에 맞는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을 만들어 왔다.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 ‘송환’ 그리고 ‘양심수’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개념들은 당시 기독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에서 받고, 국제사면위원회에서 따르니까 나중에 유엔인권이사회까지도 인정했다. 정부에서도 일부 인정했다. 특히 양심수 개념이 규정되자 “양심수 석방과 송환까지 큰 힘을 받았다”는 것이다.

권 명예회장은 이번에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작태들을 열거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의 대북전단 살포, 정광훈 목사의 일장기 동원 시위 그리고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 등. ‘국가보안법 체계’란 한마디로 “반공, 반북만 하면 남쪽사회에서 어떤 일이든 용인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보안법 철폐운동만이 아니라 평생을 자주통일, 민주주의, 인권, 양심수 등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 왔다. 그가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하자면 이론과 실천의 겸비는 필수일 터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출신자다. 이에 그는 “책도 보고 견문도 넓히려고 했지만 그것이 책에서 얻어지기보다는 어떤 현실조건에 내가 대응하면서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겠다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논리가 생기게 된 것 같다”고는 “그런 논리가 형성되면 그 논리의 힘 때문에 추진하는데 힘이 생기는 것 같다”며 실천을 통해 이론이 형성됐음을 내비쳤다.

이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스팔트에서 집회도 하고 단식도 하고 투쟁도 하는 힘든 활동 중에도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다름 아닌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과 그해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시 방북해 고려호텔에서 만난 비전향장기수들. 권 명예회장은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삶은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감동적이었다”고 표현했다.

거의 모든 사안마다 거침없이 답을 해가던 그도 이재문 선생에 대한 질문에서는 말을 아꼈다. 참고로 권 명예회장은 3년 전인 2017년 6월에 폐암4기 진단을 받았으나, 항암 신약을 복용하자 그게 유전자와 잘 맞는지 다행이라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몇 번이고 이재문 선생에 대해 묻자 그는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는 정도로 비켜갔다. 남민전 성원으로서 최고지도자에 대한 어떤 ‘배려’(?) 때문일까?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게 자서전이 아닐까 해서 묻자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소중한 삶이라 자서전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며 일단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의 삶은 간단히 일별해 봐도 ‘독학, 농촌 사회운동, 정당운동,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 등등’으로 이어진다. 그의 파란장한 삶의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언제쯤 주어질까?

이번 인터뷰는 ‘통일뉴스 창간 20주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20주년’을 맞아 이뤄졌다.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이계환 기자와 이승현 기자가 함께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권 명예회장은 2시간 30분에 걸쳐 모든 사안에 대해 쉼 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답하는 노익장을 발휘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2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는 10월 20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2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항암 신약이 잘 맞아 다행이다”

□ 먼저, 독자들이 선생님 건강에 대해 궁금하실 것 같다. 2017년 폐암4기 진단을 받으셨죠. 지금 건강이 어떠신가요?

■ 감히 저에 대한 염려를 해주신데 대해서 너무 감사하고 사실 그런 염려들 때문에 생각했던 것 보다는 현재 상태는 잘 버티고 있다고 말씀드리겠다. 정확히 2017년 6월에 판정을 받고 7월경부터 이레사라는 항암 신약을 복용했는데, 그게 제 유전자 검사하고 그 약이 잘 맞았다. 그 약을 투약한 사람 중 저처럼 오래 견딘 사람도 흔치 않았다. 2019년 9월까지 정확하게 2년 3개월을 견뎠다.

그리고 내성이 생겨서 작년 9월경에 그 약을 끊었다. 전적으로 처음부터 저를 담당했던 서울대 김동완 교수가 항암주사를 놓았다. 처음에는 먼저 먹는 약도 그렇지만 주사제도 전신에 피부발진이라든가 위 장애, 식용부진, 변비 등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것도 얼마 지나니까 적응이 됐다. 어제(10월 19일)가 주사 맞은 지 1년 되는 날이었다.

어제 병원에 가서 담당의사에게 물어보니까 지금 상태로는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나아지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런 걸 물어보기도 어렵고... 나쁜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으니까.

어제 처음으로 '암세포가 줄어드는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이 약을 쓰고 나서 (암세포가) 줄어들고 정지상태가 유지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병원에서도 제가 실험대상이라면 성공한 것이라는 거다. 언제 또 내성이 생겨서 다시 또 잘못될지도 모르지만.

그전에도 1년쯤 지나서 척주로 옮겨진 적이 있다. 폐암이 무서운 게 척추로 전이되는 것 하고 뇌로 가는 것인데, 척추로 간 것은 방사선 치료 한 번에 괜찮아진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한 것이 나한테는 잘 맞은 것이다. 지금 현재로는 다행히 잘 견디고 있다.

□ 그전에 잘 안 오시다가 엊그제 6.15산악회에도 오셨는데, 그렇게 산에 오시는 것 보니까 건강이 호전되는 것 같다.

■ 다른 것보다는 처음으로 느낀 것이, 올해 1월에 북한산을 올랐는데, 나는 무릎 아픈 것만 걱정했는데 오르다보니까 숨이 차더라. 숨이 차서 도저히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릎이 아프다고 하고는 뒷풀이에 갔었다. 그 다음에 병원에 가서 알아보니까 항암주사 때문에 빈혈증이 생겼는데 적혈구 치수가 보통 성인남자가 13~14라면 저는 8이 나왔다. 이거는 수혈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낮은 수치하고 하는데, 제가 그냥 견뎌보겠다고 했다.

단백질 섭취라던가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는데, 지금은 9까지 올라왔다가 어제는 8.5까지 떨어졌더라. 이거는 항암치료 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병원에서도 조심하고 될 수 있으면 단백질 섭취를 많이 하라고 한다.

지금은 그 일 때문에 산에 못가는 것이고 어제는 제가 제안해서 둘레길을 가겠다고 한 것인데 다 같이 가게 된 것이다.

“난 초등학교 출신자. 현실조건 극복 위해 고민하니 논리가 형성돼”

□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활동해 오셨기 때문에 선생님에 대해 '양심수의 대부', '한국의 호치민', '평생청년', '이론과 실천의 양수겸장' 등 별칭이 많다. 이에 대한 소감은 어떠신가요?

2019년 11월 제25회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권오헌 명예회장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2019년 11월 제25회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권오헌 명예회장이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 사실 너무 지나치고 분수에 넘치는 호의라고 생각된다. 사실은 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일은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지닌 감성이랄까, 이런 것과 사회적 여건과의 조건반사적인 만남의 결과라고 보인다.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성과는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그런 생활을 해 왔을 뿐인데 저한테는 분수에 넘치는 호의라고 생각한다.

□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늘 청년처럼 움직이고 외모도 호치민과 같이 안온한 모습이 있으며, 양심수를 위해서 평생 일해 오셨고, 말 그대로 이론과 실천을 두루 아우르는 활동을 해 오신데 대해 좋은 의미에서 이런 종합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 이론과 실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초등학교 출신 아닌가.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물론 노력은 많이 했다. 지금은 민간인이 갖고 있는 책도 거의 없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1946년에 나온 자본론 3권을 제가 갖고 있다.

6학년 담임이었던 정인무 선생이 '이건 자네가 봐야 할 책이네'라며 건네 주셨다. 그건 보물이었다. 지금도 진품명풍에 나갈 수 있는 책이라고 알고 있다. 당시 노트하면서 봤던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잉여가치라든가 용어 하나 하나를 외우다시피 했다. 내용을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알다시피 그걸 다 읽은 사람이 많지 않다. 역사, 경제, 문화 등이 다 있다. 그걸 보면 완벽한 인격도야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을 비롯해서 책도 보고 견문도 넓히려고 했지만 그것이 책에서 얻어지기보다는 어떤 현실조건에 내가 대응하면서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겠다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것이 논리가 생기게 된 것 같다.

그런 논리가 형성되면 그 논리의 힘 때문에 추진하는데 힘이 생기는 것 같다. 가령 양심수나 비전향장기수 규정이라든가 하는 새로운 개념은 그분들 석방하고 송환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큰 도움이 됐다. 그전에는 한국의 양심수에 대해서도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양심수로 인정하지 않았다. 엠네스티에서 만델라도 양심수가 아니라고 했다.

제가 이 양심수 개념을 규정하고 난 후 처음에는 기독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이걸 다 따랐다. 그리고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이 개념을 따르니까 나중에 유엔인권이사회까지도 그렇게 해서 이 분들을 양심수로 규정하고 석방과 송환까지 큰 힘을 받았다.

그래서 정확한 논리라는 것이 굉장한 힘이 된다. 맹목적으로 사업을 하면 힘이 없다. 반드시 논리가 있어야 한다. 양심수 석방의 당위성, 국가보안법 폐지의 논리라든가. 뭐 다 마찬가지이다. 저는 활동하면서 그냥 목소리 높이는 것보다는 논리성을 찾고 그에 따라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 실천으로 옮길 경우 그에 합당한 이론이나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식에 맞춰 하는 경우가 많다. 선생님은 그걸 스스로 깨우치면서 이론이 올라가고 실천이 쌓여져 가니까 그런 점에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 그동안 제가 써놓았던 원고를 두 번에 걸쳐서 책을 냈지 않았나. 거기에도 이런 이론화 과정이 나온다. 그냥 덮어놓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전문 학자들의 논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반 시민사회의 성명서 같은 것과는 다르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논리가 형성되어서 글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 선생님께서 6.15산악회에서 산상강연을 하시는데 10~20분 즉흥적으로 하시면서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것을 보면서 평소에 늘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방북한 권 명예회장이 리인모 묘소를 참관했다. [사진제공-권오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이 리인모 묘소를 참관했다. [사진제공-권오헌]

■ 그것이 생활화되고 하다보니까 그냥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하긴 어렵다. 그냥 이야기하면 권력자나 시민사회 상대에게 힘을 못 받는다.

비전향장기수 송환하는 과정에서 제가 글을 많이 썼다. 정확하게는 1993년 리인모 선생 송환 때부터 시작해 1995년 함세환, 김인서, 김영태 등 세분 송환 활동(고향이 이북이고 한국전쟁 기간에 체포된 비전향 장기수는 제네바협약에 따른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송환해야 한다)을 거쳐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됐다.

당시 송환운동에 많은 단체들이 같이 했지만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제 논리에 따라 활동했다. 잘 모르면 논리도 세우기가 어렵다. 논리가 별건 아니다. 이런 현상들이 있었는데 이걸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할 것인지 방법을 추구하다보면 논리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게 시대상황마다 다르게 나온다. 통일부가 입장을 밝히는데 따라 반박논리도 나오는 거다. 이렇게 해서 송환운동 과정에서 통일부의 상호주의론, 자격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대응논리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비전향장기수 송환, 방북해 다시 만난 비전향장기수들.. 감동적이었다”

□ 선생님께서는 평생을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 나라의 민주주의, 인권, 양심수 등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 오셨다. 특별히 애착이 있는 분야가 있는가?

■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주어진 조건에서 처음엔 감성으로 대하다가 이성적 판단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처음엔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통일사회당에 들어가서 김철 씨 구속되고 옥중 관련된 일을 하게 되다보니까 그쪽으로 쏠리게 되고 양심수후원회 만들어져서 통일운동과 연계되어서 그쪽으로 더 저의 활동영역이 달라지게 됐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자주통일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국가보안법, 양심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고 하면 노동문제도 다 포함되지 않나. 결사의 자유라던가 노동3권 등, 또 생존권이라고 하면 노동자·농민·빈민이 다 해당되지 않나. 제 글속에는 그런 것이 다 있게 된 거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 더 관심이나 집착이 있다기보다는 가장 보람 있고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을 꼽는다면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동안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1988년 12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비롯해서 시국사범이 전원 석방됐다. 물론 저 사람들이 말하는 공안 쪽은 나오지 못했지만. 남민전이 나왔으니까 제헌의회(CA)라든가, 반제청년동맹 등 반국가단체 관련자들까지 전원 다 나온 것이다. 남민전이 다 끌고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비전향장기수'들도 상당히 많이 나왔다. 전향서를 썼던 분들은 거의 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김영식, 양원진, 박희성 선생 등 지금 낙성대에 계신 분들이 그때 나온 분들이었다. 그때 저는 남민전 석방운동에 온 정력을 투여했기 때문에 보람을 느꼈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야당이었지만 당시 민주당 인권위원장이 저하고 석방 규모와 내용 등을 상의하고 그랬으니까.

(통혁당 재건위와 남민전 준비위 사건으로 쌍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임동규 선생(2020년 9월 21일 별세)의 석방을 위해 광주를 찾아가 봐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그 사람을 나오는 방향에서 '그걸' 해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우리 동지한테 뭘 써달라'고는 말 못하지 않나. 박현채와 함께 가기로 했다가 나 혼자 가서는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했는데 결국은 다 나왔다. 그때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 다음으로는 1999년 2월 25일 우용각 선생을 비롯한 17명이 석방되었다. 1999년 손성모, 신광수 등 두 분이 나왔다. 이 분들은 7.4성명 이후 이쪽 공안에 의해서 유인되었다는 혐의가 역력하다. 일본에서 들어왔다가 김포공항에서 다 잡힌 사람들이다. 신광수는 일본인 납치와 연관되었다고 해서 낙성대에 와서 시위가 있었다. 그때 내가 그것도 다 막아냈다. 일본 NHK방송에 다 나가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비전향장기수가 다 나왔는데 그때 그 감동과 보람은 말도 못했다.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 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은 고려호텔에서 그해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대부분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2000년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 때 방북한 권 명예회장은 고려호텔에서 그해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대부분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2000년 63명 송환됐을 때의 감동, 그해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경축 행사에 남측에서 42명이 참관을 하게 됐다. 제가 서둘러서 전국연합에서 참관 결정을 했고 홍근수 목사, 백기완 선생 등이 개별적으로 가기도 했다. 그때는 열병식이나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이 문제가 아니라 비전향장기수들을 고려호텔에서 다 만났다는 것. 이게 저한테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살면서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삶은 후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 활동하시면서 아스팔트에서 힘들게 집회도 하고 단식도 하고 투쟁도 하면서 너무 힘든 삶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크게 보면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 따지자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건 정말 내 일생에 대표적인 감동적인 장면들이었다.

□ 얼마 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 20주년을 맞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됐다. 20년이 지난 소회가 어떠신지요.

■ 20년이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그때 장면이 떠오른다. 몇 가지로 나눈다면, 첫째 당사자들이 끈질긴 노력이다. 조국통일을 위해 수십 년 감옥을 살면서도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왔다는 것. 이것이 아니었다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의 불굴의 투지와 신념의 강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분들이 '인간승리'로 갔다는 생각이다.

비록 외세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지만 남북이 합의해서 이런 인도주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걸 시초로 해서 당시 6.15공동선언이 말했던 자주원칙, 통일방식, 다방면적인 교류협력 등을 차근차근 엮어져서 이어졌던 것.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이어지게 한 계기이면서 우리민족이 세계에 대해서 자주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질 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 6.15선언 이후 많은 분들이 북측에 갔는데, 선생님은 몇 번이나 가셨나?

■ 평양은 제가 7번인가 8번 갔었다. 공동행사도 있고 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서 하던 콩우유돕기운동 차원으로 평양에 가서 좋은 이야기들 많이 나누었다.

□ 평양에서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해 달라.

■ 평양에 갈 때마다 안 만난 일은 거의 없다. 당창건 55돌에는 병원에 계신 네 분인가 빼고 고려호텔에 다 나오셔서 사진도 같이 찍고 그랬다. 2001년 8.15민족통일대회 때였는데, 아주 뙤약볕이었다. 남측에서 간 분들이 고려호텔에서 아웅다웅 늑장부리는 바람에 비전향장기수들이 3대헌장기념탑 앞에 얼굴이 새까맣게 탈정도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들도 휠체어 타고 기다렸다. 찍히기도 했지만 우린 모두 거기로 가서 선생님들 다 뵀다. 그리고는 선생님들이 제가 묵었던 고려호텔 '초호화실'(침실이 있고 응접실이 따로 있고 화장실이 2개 있고, 회의실도 굉장히 컸는데 혼자 쓰도록 했다)에 찾아 오셨다.

방북해 김선명 선생 등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방북해 김선명 선생 등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났다. [사진제공-권오헌]


선생님들이 찾아오셨다고 해서 빨리 내려가서 맞이하려고 했더니 북측 담당자들이 그냥 계시라고 하더라. 그런 의전을 철저히 하더라. 홍경선·황용각 선생이 대표로 오셔서 공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같이 내려가서 아홉 분을 만나 다른 회의실로 옮겼다.

그렇게 여러분을 만난 일은 그 뒤로는 없었다. 고려호텔이나 양각도호텔에서 신청을 하면 비공식으로 만나서 선물도 전해드리고 애기한 적은 있다. 사진으로 공개된 것도 몇 번 있다. 2001년까지는 많이 만났고 그 이후에는 그렇게는 못 만났다. 그 뒤로는 적게는 세 분에서 많게는 일곱 분의 대표성 있는 분들을 만났다.

□ 연로하신 선생들이 별세할 때마다 북측 매체에서는 부고를 알렸는데, 2010년 이후부터는 소식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몇 분이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돌아가신 것 같다.

■ 2012~2013년쯤에 재미언론 <민족통신>에서 정리한 적이 있다. 노트에 다 정리를 해두었는데 지금 노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때 25명 정도 남아 계셨다. 그리고 2017년 제 출판기념회 때 22명으로 확인했다. 그때 아홉 분이 영상으로 축사를 보내주면서 22명이 남았다고 알려오신 거다. 그 뒤 3년이 지났는데 15명이 남아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확치 않고 그 후 더 돌아가셨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서 공식적으로 인사드리고 싶다. 그때 출판기념회 때 영상메시지를 손수 보내주셨는데 너무 감사드리고 그 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동안 많은 선생님들이 별세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명복을 빌고 살아계신 선생님들은 항상 건강하시면서 평생 염원이셨던 자주통일 세상을 이루면서 그 영광과 축복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공식적으로 전해드리고 싶다.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 ‘송환’ 그리고 ‘양심수’의 개념

□ 지난 10월 10일 기독교회관에서 '비전향장기수 송환 20주년 기념 및 2차 송환 촉구대회'를 하셨다. 이때 ‘비전향장기수’와 ‘송환’의 개념을 말해주셨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해 달라.

■ '비전향장기수'와 '2차송환희망자'는 다르다. 비전향장기수는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반민주악법으로 구속기소 되어 수십 년을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온갖 고문 등 핍박을 이겨내고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낸 불굴의 투사, 신념의 강자들"을 말한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생겨서 감호처분을 받았던 분들 중 1989년에 사회안전법 폐기로 인해 그해 후반부터 1990년에 전향을 하지 않고 나온 분들이 이에 해당된다. 또 1990년부터 대전 등 전국 교도소에 있던 비전향장기수 중에 노약자·병약자를 비전향으로 내보냈는데, 김석형·이종환·권양섭 선생 등 15명 정도가 비전향장기수에 포함한다.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은 명칭 자체가 개인이 아니라 복수이다. 역사적 개념에 속하는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사회안전법이 폐지(1989년)된 이후 사상전향제도가 폐지(1998년)되고 준법서약제도가 폐기(2003년)된다.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사상을 전향시키는 것은 제도 폐지와 함께 당연히 원인 무효가 된 것이다.

비전향장기수 송환자 중에도 사실 쓰고 간 분이 있다. 청주감호소에서 나오기 전에 썼던 분들이 북으로 간 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사회안전법이 폐지됐기 때문에 원인무효라고 본 거다. 정부에서 이런 역사인식이 있다면 강제 전향자들에 대해서 원인무효임을 확인하고 보내드려야 한다는 거다.

이런 분들은 개별적으로 '비전향장기수'는 아니지만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는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2년과 2004년에 걸쳐서 강제전향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강제급식 과정에서 돌아가신 5명에 대해 사상전향제도의 위헌성, 강제전향공작의 위법성을 지적하고 이분들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강제전향은 사실상 전향이 아니라고 사실상 인정했다.

이때까지 양심수후원회에서도 송환 대상자와 관련해 '장기구금양심수',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 등을 혼용했는데 2004년 통일부에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로 규정한 뒤로 2006년부터는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로 용어를 단일하게 했다.

이 분들을 엄격한 의미에서 '비전향장기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실상 강제전향을 원인무효로 해석하는 상황인 만큼 복합적인 명칭에서 '비전향장기수'라는 표현을 이렇게 정리해도 된다. 그리고 인권개념이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다. 이 분들은 어디까지나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금까지 지키고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이다.

2020년 7월 통일부 앞에서 열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기자회견에 참가한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2020년 7월 통일부 앞에서 열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기자회견에 참가한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은 처음에 33명이었다가 13명이 추가되어 총 46명이었으며, 이중 33명이 돌아가시고 현재 13명이 남아 있다. 이 분들이 전부 그런 분들이다. 13명 중 박종린 선생이 병원에 계신데 오래 견디지 못하실 것 같다.

'송환'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쓴 것이 정전협정문에서였다. 그 이전에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협정에서 전쟁이 끝나면 송환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송환을 뜻하는 리페이트리에이션(repatriation)은 전쟁포로가 본국 또는 원적지로 돌아간다는 뜻이고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다.

리인모 선생과 2000년 9월 2일 63명 송환 때에는 '북한 방문'을 목적으로 했으나 2005년 정순택 선생의 유해가 육로로 보내질 때에는 '유해송환'이라는 표현을 남북이 합의해서 정확히 썼다. 미묘하지만 용어의 변화가 있다. 남과 북 어느 쪽도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송환에 대한 '자격문제'도 짚고 넘어가자. 얼마 전 통일부에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들의 송환을 촉구하는 서한에 대해 과장 전결로 '가야할 분들은 다 보냈다'고 답을 보내온 것은 아주 인권개념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북합의 정신에 대한 역사인식이 없는 것이다. 민족과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무엇이고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다. 너무 무식한 것이다. 송환은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이미 인정한 만큼 나머지 분들은 모두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 한 가지 더 여쭤보겠다. ‘양심수’ 용어도 처음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 양심수라는 개념은 한마디로 '국가권력과 사회정의실천 사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사회정의를 위한, 개인이나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공동선을 위해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라고 제가 처음 표현했다. 조국통일, 노동3권, 생존권보장, 양심적 병역거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활동을 했기 때문에 '확신수'라고도 했고 예전에는 ‘정치범’이라고도 했다. 전에는 정치적 사건과 관련해서 구속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안당국에서도 일반 형사피의자와는 다르게 취급했다. 그런 것을 인권감수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문재인 정부에서는 양심수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없는 것 같다.

인권변호사라고, 촛불정부라고 자임하면서도 양심수, 국가보안법 철폐문제에 대해 취임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양심수는 숫자가 많고 적은 문제가 아니라 단 한사람이 갇혀 있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 대표적인 양심수는 누가 있나.

■ 현재 12명이 갇혀있다. 양심수가 제일 많았던 1989년에는 1,700여명이 갇혀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천지차이이지만 양심수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발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양심수가 갇혀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또 그 내용이 감옥에 갈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갇혀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먼저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이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과 인터넷 논객인 김경용 씨, 조종원 평화협정운동본부 국보법폐지 특별위원장 등 3명이 있다.

이밖에 금속노조 소속 유성기업 노조원 4명과 제주해군기지내 기습항의시위로 구속된 송강호 박사,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대사 피습 사건으로 구속된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 오세훈 낙선운동에 나섰다 구속된 유선민 서울대학생진보연합 운영위원장, 양심에 따른 병역법 위반으로 구속 중인 송상윤 씨 등 12명이다. 예전에 비하면 참 숫자는 작지만, 양심수이기 때문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문재인 정부의 인권 감수성에 대해 지적하셨는데...

■ 적폐세력들과 대항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노력을 한다. 또 경제, 코로나19 등 질병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남북문제,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고심하는데 민주주의와 정권의 건전성,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이게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갖기 때문에 중요한데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도 사면 성격으로 한 게 아니지 않나.

사회정의와 기회균등, 공정성 등에 대해서도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당한 전교조 법외노조는 부처 행정명령으로 한 것이어서 고용노동부의 철회만 있으면 되는데 그걸 하지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서 무척 아쉽다.

“‘국가보안법 체계’에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박상학, 전광훈, <반일 종족주의> 등

□ 양심수 문제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국가보안법은 민주화시대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2004년 12월 동토에 삭발도 하고 정치적 이슈도 되어 국회에도 갔지만 결국 국회 상정은 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전 국민적인 투쟁으로 흔치 않은 기회였지만 굉장히 중요한 투쟁이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다시 평가한다면?

■ 참 아쉽다. 그때 그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대중적으로 가장 규모 있게 벌어졌던 때였다. 그전에는 1998년 명동성당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과 개정운동이 진행되다가 통합하여 1990년 500여 단체가 망라된 국보법폐지 국민행동이 발족하게 됐다.

당시 국보법 폐지가 안 된 것은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의 의지 부족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의지가 있었다면 국회의장의 합법적 권한인 경호권을 발동했으면 된다. 그때 폐지했으면 국가 기강, 체면, 국격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의 형편이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대규모적으로 처절한 투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천추의 한이다. 앞으로 그런 기회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2004년 12월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 권오헌 명예회장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농성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집단 삭발과 함께 1천명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2004년 12월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서 권오헌 명예회장이 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농성자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집단 삭발과 함께 1천명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 국보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지, 왜 폐지가 어려운지에 대해 말해 달라.

■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족인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 양심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학문 예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면 목적이 정당하고 수단이 적합하며 제한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방역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헌법 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여기에 해당한다.

국보법은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이나 공안당국이 자의적 해석에 따라서 유무죄를 결정하는 애매모호성 때문에 법으로서의 균형을 잃고 있다. 사회가 변하면 법률과 제도도 바뀌어야 하는데, 오늘날 남북관계는 이 법이 있어서는 안 되지 않나.

최근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도 있지만 특히, 10.4선언에서는 남북관계 발전에 저해되는 법, 제도 폐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국보법 적용을 받고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특성이 있다. 지금 8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이석기 의원의 경우 대법원에서 내란음모, 지하혁명조직 등이 모두 ‘혐의없음’으로 판결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내란 선동으로 급조, 뒤집어 씌워서 국보법 제7조 찬양 고무죄를 엄격하게 적용했다.

보수정부에서도 찬양 고무, 이적표현물 소지 등 국보법 7조 적용해서 구속시킨 사례는 거의 없는데, 무려 8년 징역을 살리고 있다.

또 일심회 사건으로 7년 옥고를 치른 장민호 씨의 경우 간첩죄, 이적단체 구성 등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적표현물 소지 등 하찮은 죄목을 적용해 만기를 꽉 채우게 하고는 만기출소하는 날 80살 노모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게 하고 미국으로 강제출국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에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다가 노모가 위급한 병환에 이르자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 입국제한조치 일부 해제를 하는 엄격한 국보법 적용을 하고 있다.

최근 범민련에 대한 가혹한 탄압의 경우까지 보면 미국을 반대하고 민족자주에 투철한 경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가혹하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부만의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는 '국가보안법 체계'라는 표현을 쓴다. 국가보안법 체계에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 벌어진다. 박상학을 비롯한 대북전단 살포 주도자들은 정부와 시민사회에서 막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국의 반북단체까지 끌고 들어와서 터무니없는 대북모략 내용의 전단 살포를 보장받고 있다. 반공, 반북만 하면 남쪽사회에서 어떤 일이든 용인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북에서 잔인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이 세계 언론에 공개된 자가 남쪽에 와서 국회의원이 되는 이런 사회는 국보법 체계 속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정광훈 목사가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면서 온갖 얘기를 다하고 태극기부대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 최근에는 일장기까지 동원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오로지 반공, 반북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이영훈 교수가 쓴 <반일 종족주의>까지 국보법체계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남북대화 복원하려면 정상 간 합의문 이행해야”

□ 선생님께서는 정세에도 관심이 많다. 지난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과 김정은 위원장 연설이 있었다. 광경이 파격적이었고 화제가 많이 됐다. 소감이나 평가를 해주신다면.

■ 이런 표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민주사회인데. 우리 사회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보안법 체계가 있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평자들이 말하는데 공감하는 바 있다. 열병식에서 한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었다.

권 명예회장이 인터뷰 도중 발언의 정확성을 위해 가끔 돋보기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권 명예회장이 인터뷰 도중 발언의 정확성을 위해 가끔 돋보기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크게 두 가지 아닌가. 이른바 인민을 위한 ‘인민대중제일주의’라는 것이 하나 있고,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부당한 외침으로부터 자위적 억제력을 갖추고 만약 침략하면 강력하게 물리치겠다는 것 두 가지이다. 이번 연설에서는 인민대중제일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인 것 같다.

"하늘같고 바다같은 우리 인민의 너무도 크나큰 믿음을 받아 안기만 하면서 언제나 제대로 한번 보답이 따르지 못해 정말 면목이 없다. 나는 우리 인민의 하늘같은 믿음을 지키는 길에 설사 온몸이 찢기고 부서진다 해도 그 믿음만은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무조건 지킬 것이고 그 믿음에 끝까지 충실할 것을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엄숙히 확언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국가지도자가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느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연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병식에서 연설을 통해 '핵억제력'이 아니라 '전쟁억제력'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새로운 전략무기체계와 개인장비를 선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는 자주권과 생존권을 위한 군사력 보유 의지를 과시하고 외세에는 경고한 것으로 본다.

□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장기전으로 보고 정면돌파전으로 가는 흐름이 있을 것 같고, 남측에 대해서는 보건문제 풀리면 손을 잡자는 언급도 있어서 남북관계 복원을 점칠 수 있지 않나 하는 평가들도 있다.

■ 현재까지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노이 결렬 연장선에서 새로운 셈법을 가져오라는 것 외에는 없다. 기본적인 것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인정하는 것인데, 거기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북쪽만의 비핵화는 아니지 않나. 일본이나 남쪽의 핵우산까지 포함되는 거다. 더 확대하면 오키나와, 괌까지 포함된다. 이렇게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국이 함부로 대들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사이의 적대 관계 해소는 원칙적으로 7.4남북공동성명에서부터 시작됐다. 7.4성명과 6.15남북공동선언, 10.4평화번영선언을 비롯해서 문재인 정부가 직접 만나서 합의했던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이행하면 되는 것이다.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 이걸 가지고 남북 사이에 더 이상 전쟁이 없다는 것을 합의하고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국면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하지 않고 첨단무기 도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남북 간 대화가 복원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민전 이재문 선생.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

□ 사적인 질문을 좀 드리겠다. 활동하면서 많은 조직사건과 연루되었고 또 많은 운동가들과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도 치렀는데, 40년이 지난 남민전을 한국 운동사에서 평가한다면?

■ 지금까지 웬만한 공안사건은 다 평가되고 대부분 부당한 권력에 의해서 탄압받은 것으로 규정되어서 복권되거나 보상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안 된 사건이 남민전 하고 통혁당 사건이다. 통혁당 사건은 일부가 한국영토 바깥에서도 활동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역시 남쪽에서 활동한 내용이 자주통일과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기 금기시될 만한 일도 아니다.

남민전은 전혀 외부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국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국회의원을 임명하는 유신체제의 그 포악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거기에 더해 2차 인혁당 사건에서 사법살인이 자행된 상황에서 비공개조직으로 활동한 것이 남민전 사건이다.

그때 농촌은 말할 수 없이 피폐했고 저농산물 정책을 토대로 임금을 낮추는 노동착취를 통해 수출지향 정책을 펼쳤다. 거기에 공안탄압, 폭정까지 있었다. 남민전은 대외적으로 민족자주를 주장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남북 연방연합정부를 수립한다는 강령이 있었는데, 지금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하는 것보다 심하지도 않다. 한 사람은 사형집행 당하고 한 사람은 강제로 죽임을 당했다.
2019년 10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내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 열린 남민전 열사 첫 합동추모제인 ‘고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박석률 남민전 민족민주통일열사 합동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2019년 10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내 이재문 선생 묘역에서 열린 남민전 열사 첫 합동추모제인 ‘고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박석률 남민전 민족민주통일열사 합동추모제’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통일뉴스 자료사진]

남민전 사건은 유신폭정에 항거해서 일어났던 반파쇼 민주화운동이었고, 반외세 민족자주운동이었다. 실제 활동한 내용은 반파쇼 민주화운동이었고 그 일환으로 최원석 가에 대한 응징투쟁도 있었다. 남민전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한다. 자주통일운동과도 관계가 있지만 특히 유신철폐 투쟁에 가장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참여한 단체였다. 어떤 단체도 3년간 성명 하나 내지 못했던 시기에 빈틈없이 투쟁했다. 현재 일부 회원들이 재심 청구해서 재판하고 있다.

□ 만나본 분들 중에서 특별히 영향을 받은 운동가는?

■ 이재문 선생이다. 우리 집에도 몇 달간 있었다. 저는 학교도 안다녔고 학연이 없으니까... 농촌에서 농촌청소년 운동을 하다 군대 갔다 와서 다시 농촌사회 운동하고 그 다음에 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심할 때 처음으로 사회에 나갔다. 현장에 있다가 몰래 서울로 올라왔다. 장준하 선생 사무실이 교보문고 부근에 있었다. 데모대에 섞여서 그곳에서 국회의사당(현재 서울시의회)에 같이 들어갔다가 잡혀서 종로경찰서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여러 사람이 끌려들어갔기 때문에 몰래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해 시골에서 여름을 지내고 9월에 서울로 왔다. 그때 굉장히 혼란을 겪었다. 농촌에서는 혼신을 다해서 농촌사회운동을 했는데, 서울에서는 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상계의 오랜 독자로서 종각 옆 한청빌딩에서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을 만났다. 최초로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분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때는 현장에서 하루 40페이지 글을 읽고 40페이지 글을 쓴다는 생각으로 지냈다. 장준하 선생이 농촌소설을 쓰면서 당시 경복궁에 근무하던 박경수 선생을 소개해주었는데, 그 분이 내 글을 읽고 '위험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웃음) 그 글들은 지금도 내가 갖고 있다.

67년께 서울에서 공사장 장비 관리 일을 하다가 충북 제천의 충북시멘트 공장으로 옮겨 근무하던 중 지금은 돌아가신 박금서를 만났다. 박금서는 당시 성신여사대 교수를 지내다가 5.16후 해직되어 인텔리 노동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를 미스터 권이라고 부르던 박금서 씨는 '미스터 권은 정치 한번 해보지'라고 권하면서 통일사회당 김철 씨를 소개했다. 정식으로 일을 한 것은 1968년이었고 김일성대 교수를 지낸 이동하 교수와 이몽 등과 함께 통일사회당에 들어간 것이 1970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 만난 사람이 김철, 안필수, 양호민 등이고 단둘이 자주 만나 술도 많이 마셨던 천관우(동아일보 주필) 와는 절친하게 지냈다. 더 지나서는 참여문학 동인지인 상황파에서 비문인으로서 구중서, 임헌영, 신상웅 등과 동인 활동을 했으며, 농촌운동을 하던 이우재도 발탁해 글을 쓰게 했다. 두세 살 위인 박현채, 두 살 아래인 임헌영과는 특히 가까웠다. 학연은 없었지만 여러 토론회에 빠짐없이 참여해서 다 기록하고 영어, 일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 아무래도 이재문 선생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신다면.

■ 임헌영 추천으로 안재구 선생 주재로 남민전에 가입했다. 이재문 선생은 그 다음에 우리 집에 오게 됐다. 우선 믿을 만하고 지휘부를 보호해야 할 때여서 우리 집에 왔지만, 그때 나는 현장도 다녀야 하고 통일사회당도 끝낸 것이 아니었다. 상황파 등과의 교우관계도 있지 않나. 여러 가지 맺는 관계가 있어서 사실 참 어려웠다. 이재문 선생은 참 좋은 분이었다. 집에 있던 자본론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금도 내가 그건 가지고 있다. 그때 몇 가지를 신상웅한테 주어서 치워두었었다, 신향식 선생도 돌아가셨지만 참 좋았다. 남민전과 관련해서는 임헌영도 그렇고 다 인간관계로 맺은 분들이다.

독학, 농촌 사회운동, 정당운동,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
“소중한 삶이라 자서전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은 있다”

□ 지금 말씀하신 내용만 해도 상당한 양이 될 텐데... 자서전 권유를 받지 않으시지 않나. 선생님에 대해 ‘한국현대사의 보고’라는 평도 있는데, 자서전을 검토해 보시면 좋겠다.

■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화려한 자서전이 나오지 못하죠. 학교도 안다녔고 그렇다고 큰 단체를 이끌면서 연대체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양심수후원회라는 사회단체 중의 일부를 애써 꾸린 것이어서 대단한 자서전이 나올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온 속속들은 참 소중하다고 본다.

2019년 11월 6.15산악회 산행에서 도봉산에 오른 권오헌 명예회장.. 그는 6.15산악회 회장도 맡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2019년 11월 6.15산악회 산행에서 도봉산에 오른 권오헌 명예회장.. 그는 6.15산악회 회장도 맡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고 일제가 패망한 다음 날 하루아침에 달라진 세상을 겪으면서 느낀 혼란. 학교에 갔더니 신사가 불태워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교장이 발가벗겨서 쫓겨나는 큰 변화. 전쟁이 나자 우리 마을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 혼자 공부도 하고 농촌 사회운동도 하고 사회에 나와서 정당운동에 남민전, 인권운동, 통일운동까지 이어지는 역사. 이것도 참 소중한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다. 한번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어 이 일을 단절하기도 어렵고 그렇다.

또 하나는 나의 건강상태가 2년만 더 살 수만 있다면 달려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런데 장담하지는 않는다. 저만큼 기록을 가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군대생활 당시 일기도 아직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눈이 나빠서 볼 수도 없다. 아주 유치한 일도 있지만, 4.19당시 기록만 봐도, 그 때 상황을 볼 수 있고 '70년대의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낼 생각이 있다.

그때 통일사회당 문화국장이었는데 감히 '문학예술인들에게 보내는 글'이란 걸 쓴 적이 있다. 이렇게 보면 지금 봐도 유치하지 않다. 당시 국내외 정세에 대해서도 통일사회당에서 보고를 한 것을 보면 그때 30대 초반이었을 때이니까 비례대표로 국회에 나와도 되지 않았을까?(웃음) 사실은 71년 총선 때 비례 후보였다.

1960년대까지는 기록이 상당히 많은데, 73년 이후에는 일체 기록을 하지 않았다. 남민전 들어갔다 나오고 할 때에도 상당 부분 기록이 없다. 엄혹한 시기에는 기록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일체 기록이 없다. 상상이고 다른 연관된 기록이 있다.

□ 창간 20주년을 맞는 통일뉴스와 통일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 통일뉴스 하면 2001년 금강산에서 남북해외 대토론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관 기자와 송정미 기자가 그때 그렇게 열심히 뛰던 모습이 떠오른다. 통일뉴스가 창간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기자가 와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서는 ‘야 이렇게 헌신적으로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민족정론지로서 장구한 발전을 해 주었고 변함없이 일관성 있는 큰 역할을 해 주셨다. 정말 축하드리고 여기에는 통일뉴스를 이끄는 대표님을 비롯한 성원들의 헌신이 있었지만 또 많은 독자들과 여러분이 함께 노력한 것이 포함된 것이라고 본다. 이계환 대표께서 지금까지 통일뉴스가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 통일을 이룩해내는 시기로 빨리 전환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는데 그 시기가 빨리 앞당겨지기를 바란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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