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고향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1)

  • 민병래 작가
  •  
  •  승인 2020.08.10 15:22

 

 

88세 폐암말기의 비전향 장기수 강담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있을까요?”

2차 송환을 기다리시는 14분의 장기수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새로 연재합니다.

2000년 9월, 제1차 공식 송환을 통해 63명이 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송환되어야 하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러지 못해 2차 송환을 기다리며 염원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기에는 비전향장기수로서 1차 송환대상자에 포함되었어야하나 통보를 받지 못했던 분도 있고, 정전협정 이후 60일 이내에 마땅히 송환되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재판에 회부되어 수십 년을 감옥에 갇혀있었던 전쟁포로도 있습니다.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라면서 전향무효선언을 하고 송환을 적극 희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며 전향무효선언을 한 장기구금양심수들이 계십니다. 강제전향제도는 전향공작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등 사상전향제도의 위헌성과 강제전향공작의 위법성이 밝혀져 잘못된 법과 제도에 항의하다 희생된 민주화운동에 기여했고 국가는 이들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정리된 사안입니다.

이제 14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분들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하루 속히 2차 송환을 염원합니다. 집필에는 민병래 선생님이 수고해 주십니다. [편집자 주]

▲ 금강둑에서 떠나 보낸 아내를 생각하는 강담 코로나로 모든 요양원의 면회가 금지, 그는 생이별 상태다 [사진 : 상록수 요양원 제공]
▲ 금강둑에서 떠나 보낸 아내를 생각하는 강담 코로나로 모든 요양원의 면회가 금지, 그는 생이별 상태다 [사진 : 상록수 요양원 제공]

강담은 오늘 아내와 양심수후원회 이정태 위원 손을 잡고 공주에 있는 '상록수'요양원에 들어갔다. 해질 녘에 원장이 바람이나 쐬자며 휠체어를 밀어주어 금강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5월의 저녁 바람은 부드러웠고 멀리 강너머로 저물어가는 햇빛은 주변을 은은하게 어루만지며 한걸음씩 저물어갔다.

원래는 집과도 가깝고 같은 처지의 장기수들이 함께 있는 김포의 요양원에 가려 했다. 그런데 대기가 길어져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을 했던, 정숙희 원장이 운영하는 이곳으로 왔다.

"집 사람은 잘 가고 있을래나, 차가 막힐 텐데..."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강담은 중얼거렸다.

올해 88살, 비전향 장기수 강담은 지금 말기 폐암 환자다. 올해 초 건강검진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폐가 까맣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가슴이 자주 아팠다. 1월 22일 이대 발산병원에 가니, 이미 폐암 4기라며 입원을 시키고 3일에 걸쳐 물을 뺐다.

병원에서는 약과 항암치료 중 선택을 하라고 했는데 1월 29일과 2월 9일 두 번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아보니 구순을 바라보는 그에게는 무리였다. 그는 견디지 못하고 몇 번씩이나 토하고 쓰러지길 반복했다. 결국 항암치료는 포기하고 약만 한 보따리 처방 받았다.

강담은 2005년 모델 하우스 야간경비 일을 하던 시절 처음 뇌경색을 앓았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고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다행히 회사 동료가 재빨리 대처해줘 치료를 받았고 잘 회복되었다. 그런데 2017년에 다시 뇌경색이 왔고 이후부터 말이 어눌해졌다. 움직임도 굼뜨게 되고 치매 증상도 나타나 점심 먹고서는 "이제 저녁 먹었으니 자리피고 자자"는 얘기를 종종 해 아내에게 구박도 받았다.

▲ 서대문 형무소 감방 앞에서 1988년 12월에 출소 후 처음 찾은 서대문형무소 수형 당시 감방 앞에서. (당시 66세) [사진 : 강담 제공]
▲ 서대문 형무소 감방 앞에서 1988년 12월에 출소 후 처음 찾은 서대문형무소 수형 당시 감방 앞에서. (당시 66세) [사진 : 강담 제공]

강담은 1965년 울릉도 해상에서 잡혔다. 함남 홍원이 고향인 그는 1933년 10월12일 가난한 소작농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해방 후인 1946년 의무교육제 덕분에 초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했다. 전쟁이 끝난 54년, 고등학교 재학중에 그는 해군에 입대했다. 두만강유역 경비함대에서 8년간 특무상사로 경비정의 갑판정에서 복무했다.

61년 제대 후 강담은 스물 아홉에 박원옥(당시 24세)을 만나 결혼하고 김책시 인근 단천수산사업소에서 선원으로 일을 했다. 군입대로 마치지 못한 학업을 위해 62년에는 진남포 해양고등학교 특설반에 들어갔다. 여기서 항해사 자격증을 땄고 청진수산사업소의 3등 항해사로 사할린을 오가며 명태 수송하는 일을 맡았다.

1964년 8월, 중앙당 대남연락사업소는 해군 시절 노동당에 가입했던 그를 소환했다. 그는 "통일사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고성 해금강부대에서 기밀문서를 전하거나 연락원을 실어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1, 2차 업무는 주문진과 속초, 속초에 갔을 때에는 기관 고장으로 붙잡힐 뻔 했는데 겨우 빠져나왔다. 3차 업무는 1965년 3월 5일 공해상에서 울릉도 바다 쪽으로 돌아 들어가 삼척으로 상륙해 접선하는 것이었다. 이 날 새벽, 파도와 눈보라가 심했는데 멀리 암벽같은 게 보였다. 50톤 디젤기관선을 10노트 정도 속도로 몰려 천천히 다가가보니 남측의 구축함인 DD-91(충무함)이었다.

일장기를 달고 일본 어선 흉내도 내봤지만 속일 수 없었다. 황급히 선장 주재로 8명의 대원들이 회의를 열어 전투를 결정했다. 무장선이 아니어서 가지고 있는 화력은 기관총 몇 정과 반탱크 수류탄이 고작이었다. 500톤 정도 구축함과 맞서기엔 보잘 것 없는 화력이었다.

결국 방향을 돌려 도주하는데 구축함에선 "멈춰라" "항복하라"는 방송이 계속되었다. 도망가는데 뒤쪽 먼 하늘에서 비행기가 다가왔다. 강담 일행은 원산에서 지원이 온 줄 알고 환호했다. 알고 보니 강릉비행장에서 구축함과 협공을 하려고 뜬 전투기였다. 공중에서 강담이 탄 배의 앞쪽으로 기총소사를 퍼부어대니 결국 배는 멈출 수밖에 없었고 강담을 비롯한 8명은 모두 체포되었다.

강담은 강원도 삼척항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으로 이송되어 미군 합동수사본부와 방첩대에서 6개월간 조사를 받았다. 그해 10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비밀법정에서 라병구 선장과 이준영 부선장은 사형을 언도받고 강담은 탁해섭, 최수일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강담은 그로부터 24년간이나 복역하고 1230 수번을 달았던 광주교도소에서 1988년 출소했다.

금강둑으로 스며들던 노을은 금세 빛을 잃어갔다. 해가 떨어지면서 기온이 내려가 강담은 쿨럭쿨럭 기침이 잦아졌다. 아내가 집으로 잘 가고 있는지 전화하려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아내는 오후에 올라가면서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지금 걸면 “그새를 못 참아 전화했냐”고 타박할 것 같았다.

강담이 남쪽에서 결혼한 것은 89년 12월 1일,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처형이 다니던 교회의 권사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그때 초혼에 실패하고 동생 집에서 얹혀서 사는 신세였다.

첫 번째 만남은 서울 화곡동의 숙다방, 열 다섯살 아래인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강담은 나이를 열 살이나 속여 47살이라고 하였다. 또 북에서 내려왔다는 얘기도 못하고 "화곡동에서 보증금 150만 원짜리 방 한 칸에 살고 있고 모델하우스에서 야간 경비일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두 번째로 숙다방에서 만났을 때 강담은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털어놓기로 했다. 그래도 나이만은 고백하지 못하고 "나는 북에서 통일사업 하러 내려왔다가 잡혔다, 24년간 교도소에서 살고 작년 88년에 출소했다, 북에 아내와 두 아이들이 있고 내려올 때 막내는 임신 상태였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결혼하면 어떻게든 집은 해결하겠다"는 얘기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숨죽이며 듣던 아내는 어느새 식은 커피를 냉수처럼 들이켰다. 숙다방의 마담은 중늙은이 남녀가 데이트인 듯 아닌 듯 나누는 대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마담이 '커피 세 잔' 주문 전화를 받을 때 그녀는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다. 오빠들과 상의를 해야 한다"며 강담을 마담 눈길에 남겨놓고 빠져나갔다.

처가에서는 단연코 반대였다. 큰 처남은 6.25 참전 군인이었고 장교로 예편한 몸이어서 더 단호했다. 둘째 처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내는 오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 집에서 짐을 꾸려 강담의 화곡동 단칸방으로 찾아왔다.

비키니옷장과 개다리 소반 하나 달랑 있는 방에서 둘은 마주 앉았다. 황급히 물을 데워 강담이 탄 커피를 받아들고 아내는 입을 열었다. 북에서 내려왔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무섭지 않았다, 외려 불쌍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숨을 멈췄던 그녀는 착한 눈매로 다음 얘기를 기다리는 강담을 보며 다음 얘기를 이어갔다.

“당신이나 나나 오갈 데 없는 몸이다. 나는 결혼에 실패했고 당신도 여기 남쪽에서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지 않냐, 우리 잘 살아보자. 여기서 실패하면 안 된다”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녀가 얘기를 마치자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단칸방의 형광등이 깜박 졸 때 강담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움켜쥔 그의 손등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그렇게 해서 둘은 화곡동 방 한 칸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다행히 강담을 챙겨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당시 화곡동 동장이 동사무소를 결혼식 장소로 내줬다. 사진 촬영은 생략했고 신혼여행은 먼 훗날을 기약했지만 의젓하게 예식을 올렸다. 동장은 또 임대아파트도 알아봐 주고 서류까지 챙겨주어 92년에는 입주할 수 있었다. 강담의 말대로 "집은 어떻게든 해결"된 셈이다.

징역에서 알게 된 사람 소개로 만난 창의건설 대표는 모델하우스 경비 일을 할 수 있게 자기 회사로 거둬주었다. 결혼 음식까지 장만해줬던 그는 92년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때 집들이 겸 강담의 환갑잔치까지 차려주었다. 강서호텔 뷔페를 빌려서 마련한 환갑잔치에 아내는 적이 놀랐다. (결국 이 날 강담이 열 살이나 속여서 결혼했다는 것이 들통나게 되었다.)

강서경찰서 보안과도 '사찰'만이 아니라 나름 역할을 했다. 창의건설이 부도가 나 모델하우스 경비 일이 끊어졌을 때 강담은 경찰서에 밀고 들어갔다. "먹고 살게 해주든지, 북으로 보내주든지 한 가지를 택하라"하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보안 2계장은 "강 선생님, 왜 이러세요"하며 분주히 움직여 강서구의 한 아파트 단지 경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런 도움 덕에 연명했다. 물론 아내도 쉼 없이 유치원 청소며 반찬가게 같은 데서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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