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어느 날, 길고 길었던 박희성의 하루

  • 민병래 작가
  •  
  •  승인 2020.11.19 17:24

 

광주시 문흥동, 광주교도소 옛 터가 그의 본적지입니다

“동철아! 동철아!”

박희성은 허우적거리면서 이름을 불렀다. 이제 세 살 된 녀석은 고샅길로 막 내달렸다. ‘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텐데...’ 달려가 잡고 싶은데 발을 뗄 수가 없다. 밑을 보니 발에는 절구통 같은 쇳덩이가 족쇄로 채워져 있었다. 기어서라도 가려 하는데 동철이는 어느새 저 멀리 개울가로 향했다. “너 이 녀석 빠진다고!” 소리치며 박희성은 땅을 짚고 기어갔다. 쇳덩이의 무게에 꼼짝을 할 수 없다. 팔꿈치가 흙바닥에 긁혀 어느새 붉은 피가 흥건하게 배어 나온다. 아무리 외쳐도 동철이는 멈추지 않고 개울로 뛰어든다. 박희성은 사방을 돌아보며 “동철엄마, 동철엄마”하고 외쳤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내는 개울가에서 박희성을 보고 웃었다. 박희성이 개울가로 빠져드는 동철이를 가리키며 소리쳐도 아내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박희성은 “안돼!”하고 비명을 질렀다. 눈이 번뜩 떠졌다. 창밖에는 아직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꿈이었나?” 박희성은 긴 숨을 내뱉었다.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요즘 아내와 동철이가 꿈에 자주 보인다. 고약하게도 볼 때마다 악몽이다. 벌써 헤어진 지 50년이 넘는 세월, 첫 아이 동철이는 환갑을 바라볼 테고 아내가 살아있다면 팔순이 머잖을 것이다.

▲10월 만남의 집에서[사진 : 민병래]
▲10월 만남의 집에서[사진 : 민병래]

 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며 

“꿈에 자주 나타나는 건 어서 오라는 얘기일 텐데...”
박희성은 혼잣말을 하며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와 팔목이 쩌릿하다. 관통상을 당했던 부위가 나이가 들어가니 밤낮으로 쑤신다. 그는 오늘 ‘만남의 집(양심수후원회가 운영하는 장기수들의 생활터전)’에서 같이 기거하는 김영식과 적십자사 서울사무실로 가 이산가족상봉 서류신청을 할 계획이다.

2000년 10월,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에서 제외된 그는 2차 송환을 손꼽아 기다렸다. 2016년 여름이 되었으니 벌써 15년이 넘게 기다린 세월이다.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귀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팔십이 넘고 2차 송환은 기약이 없으니 죽기 전에 가족들 얼굴이라도 한 번 보는 게 소원이 되었다. 그래서 개별 상봉을 신청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박희성은 그렇게 작정하고 적십자사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의 주민등록번호를 치면 올바른 입력이 아니라고 계속 접수가 거부되었다. 몇 날을 씨름하다가 결국 현장에 가서 접수키로 하고 이 날을 택했다.

“할아버지, 신청서에 헤어지게 된 경위를 안 쓰셨네요”
박희성이 서류를 내밀자 적십자사 직원은 친절하게도 빈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난 북에서 임무 받고 내려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헤어졌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담당자는 못 알아 듣겠다는 표정과 함께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등 뒤로 창문에는 소낙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박희성은 군에서 제대 후 고향인 평안북도 구성에서 영화상영기사로 일하던 중 59년 중앙당 연락부의 소환을 받았다. 1952년 어린 나이로 화선입당(火線入黨) 했던 그는 ”많은 당원 중에서 선발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기꺼이 ‘통일사업’에 응했다. 몇 번의 신체검사를 거친 후 그는 곧바로 황해도 해주로 이동했다. 거기서 훈련을 마치고 선장·수부장·기관장·안내원과 함께 제 3조가 되었다. 그는 운전병 경력이 참작되어 부기관장을 맡았다가 금세 기관장이 되었다.

박희성의 조가 맡은 일은 연락업무, 해주에서 남측 작전 수역까지 목선을 타고 다섯 번 정도를 오가며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 62년 6월 1일, 남양만에서 안내원을 내려주다가 작전이 노출되면서 경비함에 쫓겨 뻘밭에 갇혔다. 교전 끝에 그는 허벅지와 팔에 관통상을 입었고 선장 박창수 등과 함께 체포되었던 것이다.

박희성은 적십자사 직원의 되물음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북에서 통일사업 하려구 내려왔다가 잡힌 사람이라구요“ 박희성이 크게 대답하자, 담당 직원은 그제서야 이해가 된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해당이 안 될 것 같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희성은 함께 온 김영식과 함께 ”분단으로 이산가족된 건 매 한가지이니 상봉신청을 받아줘야지요. 신청도 안 받아주면 말이 됩니까?“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박희성이 다시 빈칸을 채워 제출하니 이번에 주민등록번호가 문제였다. 담당 직원은 주민번호를 제대로 쓰지 않으면 접수가 안 된다고 나무라듯 얘기했다.

 광주교도소에서 출소, 교도소가 본적지가 되었다 

박희성의 본적지는 광주시 북구 문흥동 88-1번지, 지금은 이전했지만 과거 광주교도소가 있던 자리다. 박희성은 이곳에서 만 27년을 복역하고 88년 12월 22일, 강담(2020년 8월 21일 작고)과 같이 출소했다. 그래서 광주교도소가 본적지가 되었고 출소하는 날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 다음 일곱 자리 중 여섯 자리가 특별한 번호를 부여받았다.

박희성은 남양만에서 체포된 후 62년 재판에 넘겨져 사형구형을 받고 27년 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다가 비전향 장기수가 대전으로 집결되는 바람에 그곳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68년 북악산을 통해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급습할 때 “대전교도소도 습격해서 좌익수를 구출할 계획이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그래서 법무부는 부랴부랴 대전교도소 사상범들을 전국으로 분산 수용하였다. 이때 박희성은 집안 내림으로 고혈압과 심장병이 있어 수용 생활이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전주교도소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박희성은 여기서 극심한 전향공작을 당했다. 전주교도소는 박희성에게 이른 바 ‘대포수정’을 채웠다. 왼팔은 어깨 위에서 등 쪽으로 내리고 오른팔은 등 뒤에서 어깨 쪽을 향하게 한 다음 위에서 아래로 강제로 두 손을 당겨 수갑을 채웠다. 상체가 등 뒤로 젖혀지고 몸통이 뒤틀리는 고통이 왔다. 이 상태에서 전향 공작반은 무릎을 꿇리고 허벅지를 내리눌렀다. 밥도 그 상태에서 먹고 잠도 수갑을 차고 자야 했다. 대소변을 볼 때만 잠깐씩 풀어주는 정도였다.

박희성이 전향을 거부하고 버티자 교도관들은 수정을 채운 상태에서 집단 구타를 했다. 몸이라도 오므리면 다소나마 나을 텐데 상반신이 등 뒤로 젖혀진 상태에서 주먹이 쏟아졌고 군화발이 온 몸을 짓밟았다. 마룻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나중에는 떡이 졌다.

전주교도소 전향 공작반은 “너희를 고문하는 방식이 일본군이 하던 거를 모두 모았으니 견딜 수 없다. 빨리 항복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고통스런 날이 일주일 넘었을 무렵 박희성은 거의 실신 상태에서 강제전향 당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박희성의 몸에서 ‘대포수정’이 풀렸다. 그리고 그의 본적지가 되는 광주교도소로 이감이 되었고 여기서 양원진, 강담을 만났다.

강제 전향 당하고 고문은 없어졌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배고픔이었다. 주먹만큼도 채 안 되는 밥을 먹으면 언제나 배가 고팠다. 다만 한 끼라도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북에서 내려 온 사람들은 연고자가 없어서 영치품은 물론 사식도 없었으니 88년 출소할 때까지 서러운 세월이었다. 출역도 오랜 세월 나갔지만 출소할 때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일급 도장 자격증, 그리고 특별한 주민등록번호 뿐이었다.

▲10월 만남의 집에서[사진 : 민병래]
▲10월 만남의 집에서[사진 : 민병래]

 잊을 수 없는 남양만에서의 전투 

박희성은 적십자사무실에서 나왔다. 명동 거리에는 인파가 북적거렸다. 아침에 만남의 집에서 나올 때 ‘부질없다’고도 하고, ‘한 번 해보는 것이 좋다’고도 하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도 박희성은 한 가닥 희망을 걸고 혹시 ”장기수들은 우선 배정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걸었다. 하지만 접수 자체를 마땅찮아하니 기분이 씁쓸했다.

그는 2000년 1차 송환에서 제외되고 상심이 컸다. 아내와 동철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잠을 설쳤지만, ”전향서를 썼다”는 이유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함께 출소한 강담도 마찬가지였다. 통일부에 “고문에 의한 강제전향이다”라고 설명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박희성과 김영식은 발걸음을 종로 탑골공원 쪽으로 옮겼다. 소나기에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허벅지 쪽이 쑤신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기력도 떨어지고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특히 그날의 부상 때문에 몸이 화끈거리면서 쩌릿쩌릿하다.

그날, 남양만의 62년 6월 1일은 박희성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박희성이 해주에서 출발한 게 62년 5월 31일.

8노트 정도 속력을 낼 수 있는 목선이었다. 원래는 30일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출발하자마자 엔진 소리가 이상했다. 평양에 무전을 하니 “귀환해서 다른 배로 바꿔 타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배가 31일 새벽에 준비될 예정이어서 그날 박희성은 집으로 돌아갔다. 짧은 거리지만 항해도 있었고 다음 날 아산만까지 먼 길을 가야 하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엄마 품에서 자는 동철이가 그날따라 박희성의 품을 파고 들었다. 엄마가 데려다 어르고 자장가를 불러줘도 뿌리치고 박희성에게 매달렸다. 박희성은 엄마 손만 타던 놈이 자신을 찾으니 피곤하면서도 흐뭇했다. 칭얼대는 아들을 달래다 희붐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로 마련된 배를 타고 해주를 출발, 6월 1일 어두운 밤중에 안내원을 내려줄 남양만입구에 이르렀다, 국화도 근처에서 잠시 정박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룩기룩 기러기들은 서해 먼 바다 쪽으로 달빛을 물고 달아나고 잔잔한 파도가 뱃전에 제 몸을 부딪히며 물꽃을 일으켰다.

평양과는 오전 8시, 10시, 오후 2시 30분, 4시 30분, 6시 30분. 이렇게 다섯 차례 무전을 주고 받았다. 마지막 교신이었던 오후 6시 30분, 그대로 작전을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박희성이 탄 배는 국화도에서 서서히 움직였다. 멀리 행담도 쪽에서 민가의 불빛이 별빛처럼 가물거렸다. 남양만 깊이 들어가 평택방면으로 안내원을 내려주는 것이 그날의 임무였다. 전조등 없이 항해를 하려니 까막눈 신세였다. 평소 같으면 고깃배들이 한참 조업 중일 텐데 이날은 거의 볼 수가 없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한발 한발 들어갔다.

이윽고 안내원이 배를 대야 하는 곳을 가리킬 때 갑자기 ‘피용피용 두두두’ 기관총 소리가 났다. 선장이 뱃머리를 돌리면서 “전투준비! 전투준비!”를 외쳤다. 하지만 목선에 실려 있는 무장이라고 해야 경기관총 두 정. 이것으로 대항할 수는 없었다. 뒤에서는 사격과 함께 함성소리와 경적이 계속 울려댔다.

“에쿠” 몸이 확 쏠리더니 배가 멈췄다. 남양만의 깊고 너른 뻘에 갇힌 모양이다. 허겁지겁 쫒기다 수심이 얕은 물길로 접어든 것이다. “모두 뛰어내려” 선장의 다급한 목소리를 따라 박희성도 뻘로 내려섰다. 방풍림을 바라보며 달리는데 옆에 달리던 안내원이 목이 꺾이며 푹 쓰러졌다.

뒤를 돌아보니, 국군이 보트로 옮겨 타면서 계속 총을 쏘고 있었다. 옆에서 달리던 선장이 뻘밭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사격준비를 했다. 박희성도 따라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박희성은 중심을 잃고 무릎이 꺾였다. 왼쪽 허벅지에서 불에 덴 느낌이 올라왔다. 동시에 오른 쪽 팔이 기역자로 꺾이면서 불꼬챙이가 쑤시는 것 같이 아팠다. 피가 불컥불컥 쏟아지고 있었다. 팔꿈치를 붙들면서 박희성은 뻘밭으로 쓰러졌다. 허벅지와 팔의 통증에 몸이 뒤틀릴 정도였다. 박희성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리춤에서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눈앞에는 아내와 아들 동철이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 동철이가 지난밤에 품속을 그렇게 파고 들었는데... 이빨로 물어 겨우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총소리 사이로 동철이 웃음소리와 남양만의 잔물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눈앞이 갑자기 아득해졌다. 저 앞쪽에서 다가오는 군화발들이 어슴푸레 해질 때 박희성은 그만 의식을 잃고 뻘밭에 얼굴을 묻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인근 파출소였다. 박희성은 인천 해군병원으로 이송되어 팔깁스를 했다. 그런데 이때 응급조치가 잘못되어 뼈가 제대로 붙지를 않았다. 대방동에 있는 502 첩보부대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부평미군병원에서 다시 치료를 받았다. 6개월 만에 뼈가 붙어 깁스를 풀었지만 관통상이 심해 후유증이 컸다. 나이가 들면서 욱신욱신 쑤시는 증상이 더 심해졌다.

박희성과 김영식이 명동에서 을지로를 따라 청계천을 건너니 멀리 탑골공원 정문 쪽에서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희성은 김영식과 손을 잡고 힘을 내서 걷는 속도를 높였다. 오늘 민가협이 주최하는 집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 구호가 들리기 시작한다.

2008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 박희성은 “국가보안법 철폐집회”를 비롯한 각종 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어떤 주말에는 하루 3~4개 장소를 오가기도 했다. 박희성은 바삐 걸으며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 나이까지 전선에 서 있단 말인가?”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10월 만남의 집에서[사진 : 민병래]
▲10월 만남의 집에서[사진 : 민병래]

 영화감독이 꿈이었습니다 

1950년 10월 19일 박희성은 소년병으로 자원했다.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평안북도 구성에 금세 전해졌다. 후퇴하는 행렬도 마을 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터였다. 이미 학교 선생님들이 모두 입대한 터라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소년단으로 활동했던 박희성은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형과 함께 입대신청을 했다. 형은 결핵 판정이 나 입대를 할 수 없었다.

박희성의 부모는 근심이 컸다. 박희성의 부친은 삼성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면서 해방과 동시에 입당했고 세포위원장까지 맡고 있는 입장에서 반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겨우 열여섯 살에 몸무게가 38kg 정도였던 아들이 입대하겠다고 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박희성의 입대는 받아들여졌다. 전황이 워낙 화급했기 때문이다. 이미 압록강까지 전선이 올라간 상태에서 그는 후퇴하는 병력과 함께 중국 심양으로 향했다. 삭주를 거쳐 수풍댐을 넘을 때는 참전하는 중국인민의용군과 마주치기도 했다. 심양에서 3개월간 사격과 전술훈련을 받고 51년 1월 6군단 18사단 24연대 3대대 9중대 3소대에 배속되어 백두산 밑 창성을 통해 귀국했다. 박희성의 부대가 배치될 장소는 강원도 양구군이었다.

전선으로 가는 길은 고되었다. 솜으로 몇 겹이나 누빈 겨울옷을 입고 담요까지 두툼하게 얹은 군장 무게는 30kg이 넘었다. 어린 소년이 자기 몸무게에 해당하는 등짐을 진격인데 행렬의 맨 뒤에 있어서 거의 뛰다시피 가야 했다. 낮에는 폭격으로 이동할 수가 없어 밤에만 움직였다. 행군을 마치고 나면 찬 겨울인데도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배급은 보병인 그에게 하루 3,700kcal가 제공되었다. 쌀, 콩기름, 콩, 미역, 소금이 나왔다. 가끔 몽골에서 양고기, 중국에서 돼지고기가 보급되었다. 먹고 싶은 야채는 부피가 커서 공급이 안 되었다. 채소를 먹지 못한 부대원들은 비타민 부족으로 발이 붓고 각기병에 걸려서 행군과정에서 고생이 심했다. 박희성은 몸이 말라 더 고생이 심했다. 봄이 되어 산에서 나물을 캐서 먹고 솔잎을 끓여 마시고서야 많이 좋아졌다.

양구군에 배치되고선 길고 치열한 방어전이었다. 51년 7월부터 장장 2년여에 걸쳐서 정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중부전선을 따라 양측은 한 뼘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처절한 공방을 벌였다. 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1211고지 등의 전투가 그랬다. 1211고지는 특히 격렬했는데 포격으로 1211미터 지표가 몇 미터가 낮아졌다고 할 정도였다. 이 뺐고 뺏기는 전선에서 그는 총 알 한방 맞지 않고 파편 하나 맞지 않고 무사히 버텨냈다.

박희성은 52년 말 최현이 군단장이 2군단으로 옮겨져 13사단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원산방어작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원산이나 남포에 ‘인천상륙’같은 작전이 전개될 것이라는 첩보가 있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2사단은 안변, 27사단은 마식령, 13사단은 원산을 바라보는 내륙 안쪽에 배치되었다. 박희성은 낮에는 깊은 토굴 속에서 은신했다. 찐쌀을 보급 받아 이를 물에 불려서 먹었다. 우려했던 상륙작전은 없었고 이렇게 대치상태를 보내다가 휴전을 맞았다.

박희성은 화선 입당을 했다. 전선에서 불꽃이 튀는 가운데 입당했다는 말이다. 51년 양구군에서 공방전을 벌일 때 군공메달을 받았고 52년 원산방어작전 때 전사영예훈장 2급을 받은 게 높이 평가되어 군대정치부 중대장(세포위원장)의 보증으로 입당했다. 52년 5월 24일 생일을 두 달 넘겨 가입했고 당원 번호는 0466171였다. 사단에 가서 당원증을 받았는데 물에 젖을까봐 기름종이에 싸서 품에 보관했다.

휴전을 하고도 군대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는 사단에서 추천을 받아 208탱크 군관학교 후보생으로 들어갔는데 집안 내림인 고혈압 때문에 퇴교되었다. 그리고는 운전병으로 교육을 받아 엔진분해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습을 받고 120mm를 비롯한 주로 포를 운반했다.

▲10월 만남의 집에서[사진 : 민병래]
▲10월 만남의 집에서[사진 : 민병래]

57년에 제대한 그는 다시 구성으로 돌아갔다. 군당에서는 두 가지 직업을 권했다. 하나는 군의 경력을 살려 트럭운전수를 하는 일과, 다른 한 가지는 극장의 상영기사였다. 박희성은 운전이 군에서 오랫동안 해온 일이어서 내키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기에 그는 선뜻 촬영기사를 택했다.

극장에서 그는 소련과 중국에서 들어온 전쟁, 애정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틀었다. 그는 상영기사 일이 자리를 잡으면 재직반으로 다닐 수 있는 대학의 연극영화과를 알아보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중에 당의 소환을 받았고 그날부터 고난의 세월 2막을 살게 된 것이다.

탑골공원에 도착하니 강담과 양원진 등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모두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한 벗이며 동지들이다. 이제는 세월의 무게 탓인지 다를 주름은 말할 것도 없고 허리도 구부정하다. 지팡이를 쥐고 나온 이도 여러 명이다.

모두 출소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보통 30년 안팎으로 징역을 살고 대부분 쉰이 넘은 나이에 출소했다. 징역에서 나름 배운 기술이 있어 일자리를 전전했지만 월급이 떼이기 일쑤였다. 박희성도 광주교도소를 나와 강담과 함께 곤지암의 가구공장에서 잠시 일했다. 의정부의 샷시 회사에서 시공일을 따라 다니기도 했다. 잠시 돌부치는 작업을 해보기도 했고 대부분은 공사장 잡부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돈이라도 조금 모아 월세방이라도 얻으면 경찰이 주인집으로 찾아와 “북에서 내려온 사람이다”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주인은 방을 빼달라고 했다. 그 이후부터는 그냥 여인숙을 돌아다녔다. 다행히 「양심수후원회」 도움을 받아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2008년부터 살게 되어 끼니 걱정, 잠자리 걱정을 덜게 되었다.

사회자의 선창으로 구호가 시작되었다.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양심수를 석방하라”, “2차 송환 즉각 실시하라”

지나던 행인들의 시선이 잠깐잠깐 머문다. 몇몇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춰서서 관심 깊게 바라보았다. 팔순이 넘은 노인들의 모습이 시선을 잡아 끈 모양이다. 그들이 돌아서면서 남긴 얘기가 박희성의 귀에 박힌다.

“뭐야 아직도 양심수가 있어, 2차 송환은 뭘 말하는 거야?!”

쫒아가서 설명하고 싶지만 박희성은 발걸음을 꾹 참았다. 소나기가 그친 저녁 하늘엔 아직 구름이 남아있다. 그 사이로 하늘에서 붉은 노을이 신비롭게 다가왔다. 요즘 부쩍이나 흐려진 박희성의 눈가에 구름 너머로 간밤에 꿈에서 만났던 동철이와 아내가 언뜻 보였다.

간밤에는 동철이가 개울물에 들어가는데도 멍하니 바라보고 웃기만 했던 아내가, 동철이를 품에 꼭 안고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어서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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