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산악회

2월 고대산 산행기

2010.03.14 00:16

김재선 조회 수:8515

 오늘 산행지는 고대산이다. 이 산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일대에서 강원도 철원군에 걸쳐있는 산으로 정상은 832m이며 일반인들이 등산할 수 있는 산으로는 민통선에서 가장 가깝다. 아직도 비교적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고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는 남쪽에 있는 몇안되는 산이다. 전쟁 전에는 이북에 속했으며 참숯이 유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범바위 계곡에는 수려한 폭포가 있으며 물이 맑아서 돌멩이만 들치면 가재들이 나오고 가을에는 머루와 다래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산이기도 하다. 고대산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지리적 여건상 그리 주목받지 못한 산인데 지금은 명산 반열에 든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소요산역까지 전철이 개통됐으며 동두천역에서 신탄리역까지 예나 지금이나 매 시간마다 열차가 운행되고 있으며 열차에서 내려 바로 산행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대산은 낮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높지도 않아서 일반 등산객들이 정상까지 등산하는데 별 무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일 코스로는 등산객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다.

 
집결지인 동두천역에는 변숙현, 유기진, 박희성, 권오헌, 이규재, 류종인, 유인오, 노중선 선생님을 비롯하여 통일뉴스  이계환, 유영호, 오창근, 김양희, 평통사 신재훈, 한상근, 양심수후원회 모성룡, 나순석, 김래곤, 박윤경, 김효수, 김재선 총 20명 회원이 시간 맞게 도착했다. 열차는 정확히 9시 50분 동두천 역에서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늘 산행 때마다 먹을거리를 푸짐하게 준비해 오시는 유인오 선생님은 오늘도 삶은 계란을 넉넉하게 준비해 오셨고 유영호 회원도 땅콩과 호두를 준비해 와서 모두 추억 속으로 옛날 기차타고 여행가는 맛을 느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며 북악산 밑에 사는 서일필이 백내장 수술한 이야기도 화제가 되고 그동안 궁금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오래지 않아 열차는 더 이상 갈래야 갈 수도 없는 철도중단점인 신탄리역에 도착했다.

 여기 신탄리는 개인적으로 30여 년 전에 군대생활을 했던 곳이다. 고대산 계곡에 위치한 우리 중대는 독립중대이기 때문에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당시 흔한 구타 사건도 타 중대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었다. 보병부대다 보니까 조그마한 신탄리 마을과 고대산 구석구석은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로 쏘다녔었다. 지금 신탄리역 앞에 있는 경일슈퍼(그때는 경일상회) 아주머니는 그당시 새색시였으며 시어머니 밑에서 가게 일을 도왔는데 물건 사러온 군인들에게 부끄러워 말대답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옛 시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그때 시어머니 보다 더 긴 세월의 흔적이 뚜렷한 할머니로 변해 있다. 그래도 자세히 보니 곱게 늙어서 예전에 고왔던 자태는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매표소 입구 개울가 언덕에 조그마한 집이 있었는데 (집은 음식점으로 개조 됐으며 옛 주인의 행방은 모름) 우리는 그냥 염소집이라고 불렀다. 염소 몇 마리 키우는 할아버지와 우리들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손녀가 함께 살았는데 부모들은 대처에 나가 사는지는 몰라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청순한 외모하며 옷차림새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산골처녀답지 않게 말쑥하게 하고 다녀서 황순원 작 소나기에 나오는 윤초시네 손녀 같은 느낌을 연상하게 했다 우리는 염소집 손녀를 알프스 소녀로 지칭했고 그때 알프스 소녀는 지금 김연아 이상의 인기를 몰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되며 군부대 주위에 살면서도 자기관리가 철저한지 그 흔한 스캔들 한번 나지 않았다.

 그해 초여름 우리 대대에서는 매복훈련 중 총기난동 사건이 크게 난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전방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그 이상의 인명피해가 난 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났으면 직속지휘관은 인사상 면책되기가 힘들다는 것이 최소한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 아는 상식이다. 다들 똑똑한 대대장 재수 없게 걸려서 군대 생활 끝났다며 안쓰러워했는데 웬걸, 우리 대대장은 그 뒤 김영삼 정권이 하나회를 손볼 때까지 별을 세 개나 달고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오히려 상급부대의 연대장은 그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임기가 만료되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출되었다. 후임으로 온 연대장은 순진한 우리들이 보기에도 보병 연대장이라기보다는 정치군인 냄새가 확연히 풍기는 사람으로 남앞에 으스대기를 좋아하고 자기자랑을 즐겨하였다. 이 양반도 노태우 정권 때 참모총장과 장관까지 했다. 지금도 노욕은 끝이 없어서 야당이라고 볼 수도 없는 총재가 있는 유일한 야당에서 국회의원직을 갖고서 반통일 수구세력들과 붙어서 코쟁이들 보다 더 미국을 걱정하고 있다. 두 사람 다 군부실세인 하나회 소속이었으며 능력과 업적에 관계없이 예정된 출세코스였다. 지금은 하나회라고 하면 많이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 시절에는 특수한 부류는 모르겠으나 일반 사병들은 아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다만 두 사람 다 군부 내에 상당한 배경이 있다는 정도의 소문은 떠돌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이웃연대 대대장이 백마고지 부근에서 월북을 하여 (우리 대대장은 북괴에 의해 납치됐다고 교육했음) 우리 연대하고 교체가 됐으며 그것도 부족하여 몇 개월 뒤에는 양평에 있던 사단과 우리 사단이 교체가 됐다. 그래서 나는 양평서 제대를 했지만 그 뒤 우리 사단은 전두환의 충실한 앞잡이로 화해서 민주화항쟁을 하는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총칼로 잔인하게 진압하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못된 역사를 남겼다. 표범바위 계곡 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내가 근무하던 조립식 막사가 나왔다. 위병소와 울타리는 흔적도 없고 무슨 개발을 하려고 하는지 연병장은 다 파헤쳐져 있고 막사가 무너져가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방치했는데 어디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다. 이 좁은 연병장에서도 라면땅 내기 야구를 즐겨 했는데 야전곡괭이로 깎아 만든 방망이로 공을 치고 포수만 야구글러브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없으니까 도루가 원천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엉터리 게임을 재미있게 했다. 또 기억나는 것은 지금 다 쓰러져가고 있는 저 막사에서 세계적인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 리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약물중독으로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우 신문을 통해 알았다. 눈뜨고 아침 점호 때 마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 이 구호를 북쪽을 향해 고대산이 떠나갈 듯이 악을 박박쓰고 소리를 질러야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통상 거수경계구호는 ‘충성’이니 ‘단결’이니 하는 두 글자인데 반해 우리부대는 ‘초전박살’이라는 네 글자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박정희가 평생 대통령을 해먹든 말든 크게 신경을 안 썼으며 유신군대시절 모든 상황들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그것들을 진정 애국으로 받아들였다. 부끄럽지만 그 때 나는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었다. 사회구조 모순에 눈을 조금 뜨고 올바른 역사 인식과 세상이치를 다소 깨달았을 때는 그 뒤 5 ~ 6년 정도 세월을 허비하고 난 뒤였다. 아직도 유신공주가 가당찮게 아버지를 팔고 신뢰정치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면 쪼다 이명박과 비교가 돼서 그게 먹혀들어가고 그래서 쫄랑거리며 따라다니는 시정잡배들을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며 차기 권력인양 행세를 한다. 웃지 못할 이런 현상들도 따지고 보면 다 지난날 나같이 어수룩한 사람들을 계산에 넣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이 없다. 너무 숨이 찬다.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인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데는 산을 좀 탔다는 나도 무척 힘이 든다. 그렇다고 힘든 내색을 할 수가 없다. 86세 되시는 유기진 선생님이 한창 청년처럼 앞서서 산행을 하시는데 어찌 힘들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두보의 유명한 시 중 곡강시에 있는 인생칠십고래희 (人生七十古來稀)라는 구절이 있는데 줄여서 보통 고희라고 한다. 풀이하면 살아있는 사람 칠십은 예로부터 드문 나이라고 하는데 오늘 산행에는 고희를 여러해 전에 넘기신 칠십대 중후반 선생님들이 여러분 계신다. 이분들도 유기진 선생님과 같이 등산을 하시니 힘들다고 하시기가 어려운 입장인데 황차 그 아래 훨씬 젊은 사람들이야...

 사실 우리는 오늘 정상까지 갈 생각을 못했다. 우리 통일산악회는 창립 이후에 인왕산, 불암산 등 낮은 산 몇을 제외하고는 고대산 정도의 높은 산을 정상까지 올라간 예가 없다. 고령층이 많다보니 오히려 정상까지 못 올라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문제가 조금 생겼다. 통제에서 벗어난 이규재 의장님이 물병 하나만 들고서는 혼자 앞서서 가셨다. 산에서는 연락이 잘 되지 않으니까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다. 정 힘들어서 못 따라갈 몇 사람은 왔던 길로 다시 하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앞만 보고 따라갔다. 따라가다 보니까 정상이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드디어 고대산 정상에 우뚝 섰다. 유기진 선생님을 포함하여 14명이다. 지금까지 누적되어온 피로가 눈 녹듯이 일시에 사라진다.

 온천지가 하얀 눈이다. 눈뿐만이 아니라 등산객도 만원이다. 동쪽 건너편에는 고대산보다 100여m 높은 금학산이 위풍당당하게 홀로 자리를 지키며 우뚝 서 있고 남으로는 멀리 지장산이 자리잡아 서로 동무하며 잘 어울린다. 갈비뼈 같은 산줄기는 항공사진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저 만큼 발아래 뚜렷하게 보인다. 서북쪽으로는 드넓은 철원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옛 노동당사와 월정리역 백마고지가 흐리지만 어렴풋이 보인다. 백마고지너머 북녘산들도 가물가물하지만 어림잡아 대충 조망이 된다. 저 아득한 북녘을 바라보니 가슴이 뭉클하며 그저 우리민쪽끼리 조국통일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다. 북잡한 가운데 차례를 기다려 고대봉 표지석을 전면에 넣어서 겨우 기념 촬영을 하고 뒷사람들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산전체가 눈이다 보니 어디 자리를 잡을 데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반듯한 정상부근이 점심 식사자리로는 제격이다. 김밥은 사정상 빠졌지만 그래도 준비한 도시락하며 복분자술, 막걸리 등 푸짐했다. 포천 막걸 리가 우리가 즐겨먹던 서울 막걸리보다 맛이 더 좋네 못하네 하면서 나름대로 취향을 말하지만 정상에서는 모든 술이 다 명주가 되는 법.
 이것저것 속을 든든히 채우고 나니 하산 걱정이 된다. 올라온 만큼은 반드시 내려가야 하니까 서둘러 하산길로 들었다. 대
광봉을 지나 제2등산로로 향하는데 눈 쌓인 하산길은 경사가 아주 급한 암릉구간이 많아서 평상시 산행보다 갑절이나 힘들고 위험했다. 하지만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모두 무사히 하산했다.
 
하산 후 다 같이 모여서 뒷풀이 장소로 정한 신탄리의 명소 욕쟁이 할머니집에 짐을 풀었다. 뒷풀이 역시 산행의 중요한 부분임은 물론이다. 연탄불위 철판에는 돼지고기와 두부김치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입안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갈 때 권오헌 회장님의 산상강연이 있었다. 주제는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북한 인권 법안”이다. 이 법은 남북기본 합의서와 6.15선언과 10.4 선언 정신에도 어긋나며 탈북자 유도와 반북단체를 합법적으로 지원하는 법이며 반통일 반인권 내정간섭법이고 이들이 인권중의 상위 개념인 생명권을 파괴하는 부흥 계획과 선제타격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떠들면서 남의 인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느냐 하는 요지로 강연을 하셨다.
 그리고 변숙현 선생님과 유기진 선생님의 건배사에 이어 “조국 통일을 위하여”라는 힘찬 구호와 함께 잔을 높이 들었다. 가끔씩 산행시간보다 뒷풀이 시간이 더 길 때도 있지만 오늘은 거리도 멀고 열차시간도 빠듯한 관계로 비교적 빨리 일어섰다. 다음 달 불암산 시산제 산행을 기다리며.
6.15산악회

CLOSE

회원가입 ID/PW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