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30년 간 곁에서 본 민가협 임기란 회장님의 투쟁
                                                   (사)정의 평화 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  
사회적 약자 곁에서 오직 한 길만을 걸어오신 ‘양심수의 어머니’, 임기란 민가협 전 회장님을 보내드리며
                                         
9일 낮 서울 종로구 종각에서 열린 국가보안법폐지 결의대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는 임기란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 2006.12. 09
9일 낮 서울 종로구 종각에서 열린 국가보안법폐지 결의대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는 임기란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 2006.12. 09

임기란 회장님, 기어이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랜 투병에다 살아오신 세월의 무게가 있었기에 불길한 염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땅 민중운동과 인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으셨던 큰 별을 잃은 슬픔을 차마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당신께서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지킴에 헌신을 다 하셨던, ‘이 땅 양심수의 자애로운 어머님’이셨습니다. 개인이나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바로 공동선을 위해 양심에 따라 활동하다 구속된 양심수의 석방과 그 양심수를 잡아 가두는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집시법, 노동관계법, 테러방지법 등 반민주악법 철폐 투쟁에 언제나 앞장서 실천하는 모범이 되셨습니다. 부당한 압수 수색, 강제 연행, 강압 수사, 구속 기소를 막으러 경찰, 검찰, 법정, 교도소를 수없이 항의 방문하시고 집회와 농성을 주도하셨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특유의 포효로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상에서는 상대를 이해하고 뜻을 함께 하려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으신 자애로운 어머님이셨습니다.

모든 사안에 대해 빠른 이해와 판단을 보이셨고, 마음속 결정이 되면 지체 없이 실천에 옮기시는 결단력을 발휘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스스로 오류를 바로 잡아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셨습니다. 회장님의 정의 진실 추구 의지와 몸에 밴 실천력이 그 오랜 시간 한결같이 만인을 위한 길을 걸으시게 한 동력인 것 같습니다.

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 제 647회 목요집회서 발언하는 임기란 민가협 전 상임의장. 2007-01-04
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 제 647회 목요집회서 발언하는 임기란 민가협 전 상임의장. 2007-01-04

임기란 회장님은 1930년 8월 5일(음력)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포항여고를 졸업하시고 포항중앙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1953년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를 졸업한 수재 박희봉님을 만나 가정을 이루셨고 부군의 직장을 따라 서울, 부산, 충주등으로 옮겨 사시면서 2남 3녀를 두시고 훌륭히 교육시키셨습니다.

회장님께서 가정이란 단란했던 작은 사회로부터 험악한 큰 사회로 눈을 돌리시게 된 것은 어머님만큼 정의감이 강했던 둘째아드님 박신철 서울대 학생이 전두환 군부 정권에 반대하는 민정당사 점거 농성 사건으로 1985년 구속된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 처음으로 공권력과 양심적 활동 관계를 익히기 시작하셨고 다음해 두 번째 구속 기로에 선 아드님의 재판까지 지켜보시면서, 부당한 권력에 맞선 정의의 투쟁을 온몸으로 익히셨습니다.

이 때까지 회장님의 외부활동은 YMCA 운동 등 교회와 신앙과 관련되었던 것이었다면, 이후에는 거대한 권력기구에 맞서는 일이 되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개인적 울분이 아니라 집합적 담론과 실천으로 불의한 권력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1985년 12월 12일 창립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회원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과거 단체활동에서의 판단력 결단력을 지도력으로 발전시켜, 민가협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셨습니다. 활동기간 한국진보연대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본부 고문 등을 맡으셨으나, 주요 활동영역은 양심수와 국가보안법 없는 통일된 세상을 바라는 민가협 활동이셨습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665회차 목요집회에 참석한 임기란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 회장. 2007.06.07
불편한 몸을 이끌고 665회차 목요집회에 참석한 임기란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 회장. 2007.06.07



회장님의 활동을 몇 가지 되짚어 보겠습니다.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6.29 선언 이후, 양심수 전원 석방 방침을 확인하기 위해 임기란 회장님과 회원들은 면담요청을 했고 마침내 면담이 이뤄졌습니다. 이 때 회장님은 어머님들 기세에 어물쩍 자리를 피하려는 노태우 대표위원에게 보이는 것을 마구 던지며 광주 학살 주범이라고 규탄하셨습니다.

1988년 겨울엔 광주 학살 주범 전두환이 백담사에 칩거한 일로 분노하시며 영화 13도의 추위도 아랑곳 않고 백담사까지 찾아가 항의농성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파출소에 연행되셨는데, 당시 경찰 건물마다 써 있던 ‘정의 사회구현’ 이란 글자를 매직펜으로 몽땅 지우시기도 했습니다.

1989년 문익환 목사님이 분단의 벽을 허물고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역사적 상봉을 하시고 일본을 거쳐 김포공항에 오시던 날, 어머님들은 공항에 가셨다가 폭력 경찰에 가로막혀 경찰서에 연행되셨습니다. 그 때 이미 학생들 150여명이 연행되어 있었는데, 임 회장님을 비롯해 어머님들은 학생들이 전원 석방될 때까지 농성을 하셔서 모두 풀려나게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1992년 이른바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 당시 기독교회관에서 36일간 농성을 하셨을 때는 저녁마다 어김없이 남산 안기부 입구에 가셔서 ‘안기부 해체 국가보안법 철폐 시위’를 하셨습니다. 이 일들은 모두 임기란 회장님이 자주 말씀하신 투쟁 사례입니다.

9일 낮 서울 종로구 종각에서 열린 국가보안법폐지 결의대회에 참석한 임기란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맨 앞줄 가장 오른쪽)과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맨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2006.12. 09
9일 낮 서울 종로구 종각에서 열린 국가보안법폐지 결의대회에 참석한 임기란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맨 앞줄 가장 오른쪽)과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맨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2006.12. 09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제 1150회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에서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제 1150회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에서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우리 머릿속엔 ‘임기란’, ‘민가협’ 하면 ‘목요집회’가 떠오르게 됩니다. 1993년 5월 10일, 민가협은 운영위원회 결의로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목요집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해 9월 23일부터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임 회장님은 늘 청와대에 들리도록 양심수 석방을 외치셨습니다.

1994년 6월 7일엔 이 목요집회에 아르헨티나 ‘오월 광장 어머니회’ 회원들이 함께 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어머니 단체가 서로를 격려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99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 제정 50년과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로 국가보안법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날도 행진의 맨 앞에 회장님이 서 계셨습니다.

2004년 온 국민의 의지를 모아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노숙농성을 할 때, 민가협은 목요집회 장소를 여의도로 옮겨 큰 목탁을 치며 국가보안법 사망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회장님의 30년 가까운 투쟁과 헌신을 어찌 짧은 글로 다 하겠습니까. 회장님께서는 수많은 실천활동의 여독으로 말년엔 요양병원에 가셨습니다. 그 전까지 사회적 약자들의 대변인으로, 정의와 진실의 전파자로, 생명 평화의 실천자로, 자주 통일의 기수로 가장 소중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이제 회장님께서 다하지 못한 일을 남은 사람들이 할 것입니다.
마음 편히 잠드시기를 빌겠습니다.

2020년 7월 1일
(사)정의 평화 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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