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류기진 선생 타계에 부쳐

                                                                                                                  권오헌 /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조선인민군 출신으로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인 북녘 조국으로의 송환을 한결같이 요구해 오던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희망자’ 류기진 선생이 평생염원이던 통일조국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지난 1월 23일 같은 인민군 출신 전쟁포로 김동섭 선생의 안타까운 별세에 이은 올해 들어서만 두 번째 슬픈 소식이다.

이 분들은 전쟁포로이면서도 제네바협약이 규정한 전쟁포로규정, 7.27정전협정, 그리고 4.27판문점선언에서 명시된 ‘민족분단으로 발생한 인도주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로 한 남북정상합의가 외면된 채로 분단장벽의 회한을 가슴에 묻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셨다.

   
▲ 6.15산악회에서 2017년 2월 북녘땅이 보이는 경기도 연천군 소재 고대산에 갔을 때의 류기진 선생(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2년여 전인 이때만 해도 류기진 선생은 6.15산악회 산행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사진제공-권오헌]

평소에 등산, 속보, 아령 등 체력단련을 생활화하면서 건강관리의 모범이었지만 지난해 폐암 진단을 받은 뒤 주변에 알리지도 않고 혼자서 어려운 투병을 해 오셨고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온 청력장애가 최근 심해지면서 빠짐없이 참가하던 6.15산악회 산행마저 못 나오시더니 끝내 90년을 넘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셨다.

94살이란 나이는 오늘날 장수시대라 하지만 결코 짧은 생애는 아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입에 달고 말씀하시던 통일세상을 보지 못하고 가신 점, 전쟁포로의 정당하고 합법적 권리로서 조국과 그리운 가족, 신념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 가지 더한다면 조선인민군 군관이었던 자긍심, 그 떳떳한 군복을 입고 전역신고를 하려 했던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점 역시 선생으로서는 큰 아쉬움이었을 터이다.

선생은 1925년 1월 16일,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 축상리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로 피폐해진 가난한 농민의 1남 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나셨다. 태어난 지 3년째, 부모들은 이웃 산간마을인 삼수갑산 화전민촌으로 생활터전을 옮겼지만 식민지 땅 그 어느 곳도 살만한 곳이 못돼 1930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선생은 어린나이에 집안일을 도우면서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937년 하원천면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1941년에 졸업을 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선생도 부모들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함흥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비싼 수업료와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어 2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944년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진보적 사회의식으로 야학을 하고 농촌계몽운동 하던 6촌 형님(류종진)의 영향을 받아 항일민족의식을 키우기도 했다. 6촌 형님은 뒤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8.15해방을 맞아 출소, 고향에 와서 당 조직을 했다고 한다.

일제는 패전말기 무차별적인 징용, 징병을 강제하였는데 선생도 1944년 징병 예비병력으로 차출, 흥남비료공장에 노력징발 당하였다. 공장에서는 일본인 십장과 다투다 헌병대에 끌려가 구금당했으나 유치장을 탈출, 은신하다가 8.15해방을 맞았다고 한다.

8.15조국광복은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었다. 강도 일제와 그 앞잡이들이 독점했던 토지와 공장이 해방된 민중들 손에 들어왔다. 저항하고 쫓기던 조건에서 나라와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이 지워졌다. 선생은 민주청년동맹원으로 활동하면서 흥남비료공장 가동에 참여하셨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해방 전 보국대로 끌려갔던 사촌동생이 돌아오면서 옮겨진 열병으로 숙부모님, 사촌동생, 조카들이 차례로 전염병으로 숨졌고 부친께서도 해방 몇 달 전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1947년 8월 면당위원장 추천으로 군에 입대하셨다. 포병훈련을 받고 하사로 진급, 부분대장, 1948년 해주 포병 직속부대 45미리 포병중대 1분대장, 38선 인근 까치산전투·은파산전투 참가, 1949년 보위성 산하 38경비대에 배치된 뒤 특수훈련을 받고 군관으로 임명, 직속포병중대 소대장을 역임한 것이 선생님의 6.25전쟁 전 군 경력이었다.

그리고 강대국의 전후 패권전략의 필연적 산물이면서 우리 민족에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을 맞게 되셨다. 조선인민군 9사단에 편입하여 서울로 진격, 제1중대장으로 진급되셨고 이후 낙동강 2차 도하작전에 참가, 성공하여 진격중 미군전략폭격대의 융단폭격으로 부상, 남원 야전병원으로 후송치료를 받으셨고, 다시 일사후퇴 시기 전북도당의 도움으로 전북 회문산, 가막골 등으로 옮기면서 치료와 유격전을 하셨고 치료가 웬만큼 이뤄져 덕유산 이동활동 중 변절자의 배신으로 체포, 남원 임시수용소, 광주포로수용소로 옮겨 전쟁포로가 되셨다.

그런데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협약을 지키지 않았다.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처형당했고 부당한 대우로 목숨을 잃었다고 말씀하셨다. 1954년 12월, 청주형무소로 이감시켜 이른바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적용, 정식재판도 없이 1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여기서 ‘전쟁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Geneva Convention Relative to the Treatment of the Prisoners of War)을 짚고 갈 필요가 있겠다.

협약에 따르면 전쟁포로는 어떤 경우에도 인도적 대우와 인간적 존엄성이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몇 가지 요약하면 생명 및 신체에 대한 폭행, 상해, 학대, 고문을 받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부당한 재판과 형의 집행도 금지한다 했으며 전쟁포로는 종전 후 지체 없이 석방하고 송환해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포로송환을 지연시키는 이유로 되지 않는다 했다.

또한 전쟁포로로부터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압박을 가할 수 없고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인격과 명예를 존중할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전쟁포로인 선생을 마치 죄인 취급을 했고 부당한 재판을 거쳐 그 형을 집행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본국으로의 송환을 하지 않았다.

1961년 10월 1일, 선생은 부당한 재판과 그 형 집행 8년 만에 특별사면령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목포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이후 목포와 서울 갱생보호소를 거쳐 동두천 두부공장에 취업하였는데, 선생의 성실성은 곧바로 인정받았고 쉴 새 없이 찾아오는 공안기관들도 사장님이 인우보증하면서 못 오게 했다.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근면하며 누구에게도 존중받는 인품으로 공장 전무가 직접 소개하여 박초순 님과 결혼을 하여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3남 1녀 자녀를 두는 등 단란한 가정을 이루셨다.

이처럼 행복한 시기도 있었지만 불행한 일도 있었다. 작은 구명가게를 운영하며 오붓하게 지내시던 부인께서 1971년 결혼 10년 만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처제의 소개로 1972년 반금순 님을 맞아 재혼하셨다. 참으로 수호천사였다. 전 부인이 낳은 자식들을 아낌없는 사랑으로 잘 키우셨다. 그리고 선생님 반생의 반려자로 희·노·애·락을 함께 하셨다. 그런데 신혼 초 운동을 하다 다친 발목을 제때 치료를 하지 않아 이상비대중과 탈골로 번져 여러 차례 큰 수술을 했지만 끝내 2017년 1월 12일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께는 생애 중 큰 아픔이셨다.

   
▲ 2017년 11월 서울 중랑구 소재 시립전문노인요양원에 계신 당시 101세이던 박정숙 할머니를 면회 간 류기진 선생(맨 왼쪽). [사진제공-권오헌]

필자가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99년쯤으로 다른 장기구금 양심수 선생들보다는 매우 늦은 시기였다. 1957년 전주형무소에 함께 복역하였던 김교영 선생의 소개로 처음 인사를 나누었는데 바로 우리 동네에 살고 계셨다. 단체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첫 만남에서의 말씀에 통일의지는 분명하셨다.

선생은 1970년경부터 택시운전을 하였는데 생활수단으로서의 택시운전 못지않게 중요한 사업을 하셨다. 손님들을 상대로 군부독재에 대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바로 민족의 진로에 대해 발전적 방향으로 유도하시는 일이었다.

이후 선생님은 양심수후원회 산행(뒤에는 6.15산악회)과 역사기행, 월례강좌에 함께 하시고 회비를 내는 회원으로 활동하셨다. 당연히 통일광장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양심수후원회에서는 2000년 12차 총회 때 장기구금양심수 명단, 2006년에는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희망자’ 명단에 올리게 되었다.

선생은 두 가지 주장을 하셨다. 어떠한 외세의 간섭 없는 우리 민족끼리의 자주통일과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협약 정신에 따라 조국으로의 송환요구였다. 이 주장과 요구는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선생님 생애 중 70년을 조국 남쪽에서 치열하고 처절한 삶을 마치셨다. 남북이 가장 최근에 합의한 민족분단으로 발생한 인도주의 문제해결을 끝내 못 보고 가셨다.

아니 지금은 보다 근본적인 합의, 민족 자주. 민족 자결 원칙이 지켜지고 있지 않다. 한미동맹 강화와 한미연합 대비태세로 국가안보와 완전한 핵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개탄할 일이다.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서로 싸우게 했으며 지금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가로막는 침략외세와의 공조를 우선하고 있으니 선생께서 숨을 거두기 전 얼마나 속앓이를 하셨는지 짐작한다.

이제 선생님 가시고 나니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희망자도 열여섯 분으로 줄었다. 이중 절반은 전쟁포로 출신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7.4남북공동성명 이전의 대치 국면 속에서 체포되었기에 사실상 전쟁포로와 다름없다 할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선생님의 주장과 요구가 실현되길 바란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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