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산하, 아직 평화롭지도 하나되지도 못했다”

‘분단시대의 망명객 故 정경모 선생 추도식’ 열려

 

‘분단시대의 망명객’ 정경모 선생의 추도식이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분단시대의 망명객 故 정경모 선생님 유해봉환위원회’ 주최로 열렸다. 배우 문성근 씨가 고인과 부친 문익환 목사와의 각별한 관계를 회고하는 추도사를 했다. [사진 - 조천현]

‘분단시대의 망명객’ 정경모 선생의 추도식이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분단시대의 망명객 故 정경모 선생님 유해봉환위원회’ 주최로 열렸다. 배우 문성근 씨가 고인과 부친 문익환 목사와의 각별한 관계를 회고하는 추도사를 했다. [사진 - 조천현]

 

“2000년 6.15선언에 그 내용이 그대로 옮겨앉은 89년 4.2공동성명이 발표된지 벌써 32년, 그 선언들을 아직도 우리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천은커녕 그 선언을 만들어내신 정경모 선생님을 생전에 고국에 모시지도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51년 만에 유해로 돌아온 ‘분단시대의 망명객’ 정경모 선생의 추도식이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분단시대의 망명객 故 정경모 선생님 유해봉환위원회’ 주최로 열렸다.


이날 추도식은 [통일의집] 유튜브 채널과 <통일뉴스>를 통해 생중계됐다. 

 

1989년 고인과 더불어 방북길에 올랐던 문익환 목사의 3남 배우 문성근 씨는 추도사에서 “정경모 선생님과 문익환 목사는 영혼의 동지셨다”며 이부영 선생이 “이제라도 정경모 선생을 문익환 목사가 누워계신 모란공원에 유원호 선생과 함께 나란히 모시자”고 제안해 “아~ 정말 좋다. 김구 여운형 장준하 선생이 어울리고 계신 ‘찢겨진 산하’에 이제 정경모 선생님도 문익환 목사 손을 잡고 들어가시겠구나”라며 반겼던 심경을 전했다.

『찢겨진 산하』는 고인이 일본에서 발간한 잡지 <씨알의 힘> 제6호(1983년 6월)에 여운형, 김구, 장준하의 구름 위 정담(三先覺雲上經綸問答) 제목으로 발표했고, 1984년 이를 단행본으로 엮은 책으로 국내에도 번역돼 널리 읽혔다. 죽임을 당한 세 분의 선각자 여운형, 김구, 장준하가 사후세계에서 만나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다.

51년 만에 유골로 고국에 돌아온 정경모 선생(1924-2021).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51년 만에 유골로 고국에 돌아온 정경모 선생(1924-2021).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924년 서울에서 출생한 고인은 1970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고국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을 지원하며 한 평생을 바쳤고,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지난 2월 16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영면에 들어 2월 19일 유해로 돌아왔다.

하루 전인 지난달 31일과 1일 서울 중구 충무로역 인근 ‘공간 채비’에서 일반인 조문을 받았고, 2일 오전 19시 ‘채비’에서 발인해 오전 11시 고 문익환·박용길 부부의 자택이었던 서울 수유리 ‘통일의 집’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오후 2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사진 - 조천현]

[사진 - 조천현]

 

[사진 - 조천현]

[사진 - 조천현]

 

이승환 통일맞이 이사장은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89년 선생님과 문익환 목사님께서 한반도 탈냉전과 화해의 일념으로 방북하셨고, 그때 만들어진 4.2공동성명을 우리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며 “4.2공동성명은 민(民)의 투쟁과 성찰의 성과 속에 만들어진 기념비적 남북합의이며, 이 민의 성과를 이어받아 6.15공동선언이 탄생할 수 있었다. 또 6.15를 계승한 숱한 남북선언들의 초석이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나아가 “우리는 4.2공동성명을 6.15선언의 마중물로만 해석하는 일반의 오해를 넘어 민이 만들어낸 평화와 통일의 장정으로 이해하고 이를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라며 “4.2공동성명의 정신은 바로 오늘의 위기 앞에 남북이 사상과 제도, 신념과 가치를 뛰어넘어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힘을 합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익환 목사와 정경모 선생은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4.2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문익환 목사는 감옥에 갇혔고 정경모 선생은 일본 망명객 신세를 면치 못했다.

“쌍방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는 4.2공동선언 4항은 이후 6.15공동선언 2항의 통일방안 합의의 토대가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소선합창단과 평화의나무합창단이 추도곡을 공연했다. [사진 - 조천현]

이소선합창단과 평화의나무합창단이 추도곡을 공연했다. [사진 - 조천현]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4.2 남북공동성명은 바로 2000년 6.15 남북정상선언의 기초가 되었고 그 이후 여러 차례 이어진 남북정상선언의 길을 열어놓았다”며 “문익환 목사님과 정경모 선생님이 내놓으신 길을 갈아엎으려는 그 어떤 만행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선생의 생애 대부분을 망명객으로 살게 한 국가보안법의 낡은 틀은 여전하다”며 “둘로 찢긴 산하는 아직 평화롭지 않고 하나되지도 못했다. 소중한 겨레의 약속들이 결실도 맺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고 “이제 남은 몫은 우리들에게 남겨 놓고 부디 영면하소서”라고 추도했다.

유가족을 대표해 고인의 장남 정강헌 씨는 조카 정진영 씨가 대독한 ‘감사의 말씀’을 통해 “아버지께서는 작년 가을부터 오연성폐렴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다 11월에 퇴원하시고 퇴원한 지 3개월 만인 2월 16일 목숨을 다했다”며 “기소정지 상태인 아버지는 ‘정보 당국과 화해하려고 했었는데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사라진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역사에 남길 것도 의의가 있다’고 귀국에 대해서는 그리 고집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정강헌 씨는 “민주화니 통일이니 분주했기에 문자 그대로 무일푼, 식구들은 경제적으로 고초를 겪어온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저희 아버지가 마석 모란공원에 문익환 목사님, 유원호 선생님과 함께 안장되게 된 것에 대해 유가족으로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사의를 표했다.

추도식 마지막 순서는 분향과 참배로 마무리됐다. [사진 - 조천현]

추도식 마지막 순서는 분향과 참배로 마무리됐다. [사진 - 조천현]

 

김재규 전 통일맞이 사무처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도식에는 함세웅 신부, 이낙연 전 총리,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 등이 추도사를 했고, 이소선합창단과 평화의나무합창단이 추도곡을 공연했다.

추도식은 영정을 앞세우고 만장을 휘날리며 모심굿으로 시작했고, [통일의집]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됐으며, <통일뉴스>를 통해서도 중계됐다.

추도식에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 임재경 <한겨레> 초대 부사장, 이해학 겨레살림공동체 이사장, 조성우 겨레하나 이사장,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 등이 참석했다.

 
정경모 선생 연표
1924년 7월11일 - 서울 영등포 출생

1942년 - 경기중학교 38회 졸업

1943년 - 일본 게이오대학 의학부 입학, 45년 3월 본과 입학

1945년 - 6월 도쿄 공습 피해 귀국

1945년 - 9월 서울대 의대 입학

1947년 - 이승만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 에모리대학 화학전공

1950~53년 - 도쿄 맥아더사령부 통역관 차출, 한국전쟁 정전회담 통역 배석, 주일 미군 한국어 교사

1951년 7월 - 요코하마 하숙집 딸 일본인 나카무라 지요코와 문익환 목사 주례로 결혼

1956년 - 귀국, 서울 원남동 거주

1962~67년 - 상공부 기술고문으로 울산공업센터(석유화학단지) 건설 참여, 기공 기념 박정히 축사 작성

1970년 9월 - 박정희 군사독재 반대 일본으로 망명. 반체제 인사로 입국 불허.

1973년 -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 기고 계기로 한국문제 시사평론가, 문필가 활동 시작

1973~78년 - 재일 한민통 기관지 <민족시보> 주필, 김대중 납치 구명운동 등 민주화운동

1981년 - 한국문제 전문지 <씨알의 힘> 발행, ‘씨알 어학숙’ 설립 운영

1985년 - 몽향 여운형 선생의 39주기 첫 번째 도쿄 추도강연회 주최

1988년 12월 - 몽양 둘째딸 여연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초청으로 첫 번째 북한 방문

1989년 - 늦봄 문익환 목사·유원호 씨와 두 번째 방북, 김일성 주석 면담, ‘4.2공동선언’ 초안 작성

1991년 - 일본의 평화와 조선의 통일을 생각하는 ‘씨알의 힘’ 모임 발족

1994년 - 문익환 목사 별세 충격으로 뇌경색 와병

1995년 7월 - 김일성 주석 1주기 추모식 초청으로 박용길 장로와 함께 세 번째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 접견.

1999년 -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와 통일맞이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귀국 추진, 준법서약서 요구로 무산

2001년 - 제6회 늦봄통일상 선정(동생 정성모 대리 수상)

2003년 - 노무현 참여정부에 귀국 의사 표시, 자수서 요구 거절. 송두율 교수 구속 사태로 무산

2009년 5월~11월 - <한겨레> ‘길을 찾아서’ 회고록 ‘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연재

2010년 - 연재 회고록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 출간

2011년 - 회고록 일어판 <역사의 불침번>(후지와라서점) 출간, 도쿄에서 출판기념회

2019~20년 - 문재인 정부와 귀국 협의, 자수서 요구로 또 다시 무산

2021년 2월16일 - 요코하마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 향년 97. 망명 51년째. 

 
[자료제공 - 유해봉안위원회]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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