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환갑 때는 올 수 있겠지?” 큰 누님 목소리 지금도 쟁쟁

  • 민병래 작가
  •  
  •  승인 2021.10.07 15:23

 

  •  

20년 복역한 장기수 이광근의 고향가는 길

 

1945년생 이광근, 그는 요즘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굴 쪽을 향한다는 데...”하며 혼잣말을 자주한다. 1988년 12월 광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되어 어느덧 칠십 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 혼자 산 세월이 30여 년이다.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떨어지고 집안에는 날로 적막감이 더해간다.

남파되기 며칠 전, 휴가를 얻어 다니러 간 집을 나올 때 이광근의 큰 누이는 “내년에 아버지 환갑 때는 돌아 올 수 있겠지”하며 목도리를 둘러매 줬다. 누님의 머릿결 뒤로 평양 하늘은 잿빛이 무거웠고 굶주린 늑대 마냥 겨울바람이 으르릉거렸다. 35년생이니 지금 살아있으면 구십을 바라볼 누이는 ’돌아오겠다‘는 답변을 원하는지 동네 밖까지 먼 배웅을 했다. 그게 1966년 12월, 헤어진 지 벌써 55년 세월이다.

이광근은 1965년 봄 대남공작 연락부 342호실의 소환을 받았다. 그때 21살의 나이, 그가 평양 시내 대학들의 설비를 관리하는 회사에 다닐 때였다. 평양 대동강구역 소룡동 출신인 이광근은 ’성분‘이 좋은 편이었다. 큰 형님은 인민군으로 참전해 1950년에 전사했고 아버지는 조선미술가 동맹에서 동상제작 일을 했다. 이광근의 고종사촌 형은 사회안전부에 다녔고 어머니의 사촌 남동생은 중앙당의 지도원이었다. 그 자신도 소년단을 거쳐 민청단원으로 활동했다. 이런 집안환경과 경력을 갖고 있으니 소환대상에 오를만했고 그가 통신학교 출신이라는 것도 선발에 한몫 했다.

이광근의 임무는 파견될 공작원들에게 줄 신분증의 확보였다. 이광근이 남파된 때가 1967년 1월인데 그때 남쪽에서 주민식별 장치는 시도민증이었다. 이 증은 사진만 갈아 끼우면 될 정도로 위변조가 쉬웠다.

그런데 1968년부터 사정이 많이 바뀐다. 그 해 5월 29일에 이루어진 주민등록법 개정이 계기였다. 이때부터 18세 이상 주민은 반드시 등록을 해야 하고 개개인별로 번호가 부여되었다. 또한 시도민증이 폐지되고 주민등록증으로 일원화됨에 따라 1970년 1월 1일 2차 개정 이후에는 주민등록증을 반드시 발급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주민등록법이 바뀌게 된 계기는 1968년 1월 21일의 김신조사건, 121사태였다. 이 사건은 파장이 커서 내무부 주도하에 범국민적인 ’간첩 찾아내기 운동‘이 벌어지고 경찰에서는 ’간첩색출경진대회‘까지 벌일 정도였다. 모든 국민에게 번호가 매겨지고 주민등록증 발급이 의무화된 것도 바로 그 여파였다. 또 시도민증에 비해 위변조도 쉽지 않게끔 바뀌었다. 그러니까 이광근이 목표로 했던 것은 주민등록증으로 바뀌기 직전의 신분증인 시도민증이었다.

 

 

이광근은 남쪽으로 내려올 때 임진강을 거쳐 문산으로 들어오는 루트를 택했다. 그해 겨울 추위는 매서워 달빛마저 추위에 쩍쩍 갈라졌고 임진강은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얼어있었다. 여러 대의 서치라이트가 얼어붙은 강물 위를 비추는 틈 사이를 노려 이광근 일행은 하얀 광목을 뒤집어쓰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서 탐조등의 경계불빛 사이로 빠져나왔을 때 이광근의 등엔 식은 땀이 가득했다.

시계추처럼 오고가는 서치라이트를 뒤로 하고 이광근과 조장, 조원 최00 등 세 명은 그때부터 내달렸다. 파리한 달빛을 의지해 파주 마산리의 영평산을 옆으로 두고 금곡리의 비학산을 마주보면서 뛰었다. 큰 눈이 내렸던 탓인가 눈구덩이에 발은 푹푹 빠졌고 얼어붙은 비탈에 이광근은 몇 번인가를 구르고 발목까지 접질렸다. 조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고 이광근은 발목을 부여잡은 채로 뛰고 또 뛰었다. 법원리의 지정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입에서 단내가 올라오고 흥건한 땀에 외투까지 축축했다.

이광근 일행은 그곳에 배낭을 묻고 일제 잠바와 농구화로 새단장을 했다. 권총 한 자루씩을 바지 춤에 꽂고 파주읍에서 서울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떠나간 갈곡천에는 1월의 짧은 해가 노을을 뿌리고 있었다.

서울역 광장의 시계탑이 밤 9시를 가리킬 때 이광근 일행은 버스에서 내렸다. 이광근은 훈련소에서 사진으로 서울역을 익혔는데 역사에서 광장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는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때 양동에서 건너온 호객꾼이 그들 손을 잡아끌었다. 당시 서울역 맞은 편 양동은 집창촌이면서 싸구려 여인숙이 즐비했다. 이광근 일행은 임진강을 건넌지 만 하루가 지났지만 잠 한 숨도 못잔 터라 삐끼 손에 이끌려 방을 잡았다. 양동의 여자들은 큰 구경을 만난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여다봤다. “오빠들 그냥 잘거야”하며 가슴을 드러내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간신히 여자들을 돌려세웠으나 20대 초반인 그들의 가슴은 벌렁거려 밤내 진정되지 않았고 눈을 붙였을 땐 새벽녘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이광근은 역전마당에서 국밥을 먹을 때 염천교쪽에서 밀려오는 인파에 또 한 번 놀랐다. 당시 서울역 뒤 만리동과 중림동에는 무작정 상경한 시골사람들이 터를 잡았었다. 이들이 일거리를 찾아 아침부터 서울역으로 종로로 걸어가는 모습이 하나의 물결을 이뤘던 것이다.

이광근은 조장과 함께 며칠 동안 시청이며 용산역, 명동 부근을 오가며 분위기를 익혔다. 열흘이라 되었을래나 이광근은 조장과 달리 움직이다가 저녁에 만나기로 되었던 서울역 광장 벤치에서 조장과 다른 조원 최00를 기다렸다. 열 여덟 시 정각에 나타난 최00 조원은 이광근을 쳐다보다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중에 잡혔을 때 확인해보니 조장과 최00 조원은 이광근이 미행을 당한 상태로 판단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날로 귀환을 시도했고 휴전선 부근에서 발각되었는데 남파 경험이 있었던 조장은 경계망을 뚫고 북쪽으로 돌아갔지만 조원 최00는 잡히고 말았다.

당시 이광근은 갑자기 사라진 조장의 행동에 불안해 혼자 북쪽으로 귀환을 시도하려다 여의치 않자 조장이 돌아오겠거니 하고 숙소인 양동으로 돌아갔다. 바로 그때 조원 최00의 진술을 듣고 출동한 경기도경 대공팀에게 붙잡혔다.

 

이광근은 65년에 소환되어 2년 가까이 평안남도 신양군의 산골에서 교육을 받았다. 훈련소래야 천막이 전부였고 밤에는 산등성이를 달리는 바람이 승냥이 울음소리를 내고 부근을 둘러싸고 있는 배롱나무 숲에서는 여우의 눈동자가 어른거리는 곳이었다.

훈련소 초기에는 통신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450V 배터리에 연결된 무전기를 썼는데 배터리는 양초를 먹인 종이로 몇 겹이나 둘러싸여 있었다. 비에 젖을 수도 있고 물에 빠질 수도 있기에 방수대책을 한 것이다. 무전은 다섯 개의 아라비아 숫자로 이루어진 1조의 암호문을 12조, 즉 60자를 1분 내로 치는 훈련이었다. 보안 수준을 높이려면 24조까지 쳐야 하나 시간이 많이 걸리고 위험했다. 곳곳에 감청시설이 있고 감청 차량까지 급파될 수 있는 터라 무전시간이 3~5분을 넘으면 발신지가 추적당하고 퇴로가 막히기 때문이다. 수신은 일제 트랜지스터에 리시버를 꼽고 신호를 받아 난수표 책을 보며 해독했다. 당시에는 깨알같은 글씨를 인쇄 할 수 없어 손으로 직접 그린 난수표책을 받았다.

 

통신훈련 외에 사격훈련과 체력단련은 기본이었다. 20kg 모래주머니를 메고 하루에도 몇차례씩 3km 안팎을 뛰었다. 물론 신분증 확보 훈련도 거르지 않았다. 평안도 산골에서 먹고자는 시간외에는 오직 훈련만으로 시간을 보냈건만 서울에 도착한 지 불과 보름도 안 되어 신분증 확보는 커녕 시도조차 못하고 허망하게 잡힌 것이다.

이광근은 체포되어 인천에 있었던 경기도경에서 열흘 정도 조사를 받았다. 거기서 공작훈련의 내용, 남파임무들을 기술하고 옮겨간 곳이 대방동에 있던 미군 첩보부대였다. 10개월 정도 머물며 출생 이후 전과정을 진술하고 거듭 심문받았다. 그리고 옮겨간 서울구치소에서 1,2심 재판을 받으며 사형을 언도받았고 대법원에서 무기로 감형을 받았다.

이광근은 무기징역이 확정된 후 대전을 거쳐 73년 11월 3일 광주로 옮겨갔다. 가석방된 게 88년 12월 24일이니 20년 징역살이를 한 셈이고 광주에서만 15년을 산 것이다.

이광근이 징역생활에서 잊지 못할 일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잊지 못할 일은 전향공작 때 겪은 고문이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첫 번째로 비행기 고문을 당했다. 두 팔을 어깨 뒤로 제쳐서 묶고 발도 묶은 다음 그 사이로 긴 봉을 끼워 몸을 활처럼 뒤로 꺽어지게 한 후 두드려 패는 고문이었다. 자칫 허리를 크게 다칠 수 있었지만 전향서에 도장을 안 찍었다. 그 다음은 자그마한 원통형 방에서 당한 고문, 사람이 한 명 들어가면 꽉 차는 좁은 공간 안쪽으로 대못이 내부를 향해 박혀있어 조금만 움직이면 몸이 찔리는 구조였다. 그리고 위에서는 뜨거운 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머리가 데일 것 같은 고통에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못이 살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렇게 하루종일 시달리다가 밤에 들어간 곳은 높은 벽 안쪽에 철조망을 치고 500촉짜리 전구를 심어놓은 방이었다. 눈이 너무 부셔 잠을 잘래야 잘 수 없는 방, 잠안재우기 고문이었다. 그렇게 시달리며 이광근은 결국 강제전향을 당했다.

이광근은 광주교도소로 옮겨와서는 미싱 출역에만 전념했다.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는 목공장에 나가서 학교에 납품하는 책걸상을 만들었다. 목공은 작업장에 먼지가 많이 날리고 이광근 자신이 목공에 취미가 없던 터라 장기수 선배의 권유로 미싱반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처음으로 브라더미싱, 싱거미싱을 만져봤다. 군수품 생산용 답게 성능이 좋았다. 이때 만든 것은 간호원 제복과 방직공장 직공들의 작업복이었다. 일이 많아 바쁠 때는 주야 교대작업을 했고 수당으로 밀가루포대와 특별부식을 받았다. 그놈 갖고 수제비나 부침개를 만들어 먹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이광근은 광주교도소 미싱반에 있을 때 은인을 만났다. 바로 장명자 집사. 전향공작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난 후 노태우 시절인 88년, 법무부에서는 교화를 명분으로 목사를 비롯한 종교인을 교도소에 드나들게 했다. 사상범들이 집중 포교의 대상이었다. 이때 장명자 집사가 광주교도소에 들어왔고 이광근은 그의 전도를 받아들여 기독교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광근은 88년 동료 장기수 양원진, 박희성, 김병호, 강담 등과 함께 감옥 문을 열고 나왔다. 손에 쥔 돈은 20년간의 징역수당 360만 원. 갈 곳이 없던 그가 출소 후 머무른 곳은 갱생보호소, 이광근은 이곳에서 살길을 알아보다가 드맹의상실의 문광자를 찾아갔다. 서울에 앙드레김이 있다면 광주에는 문광자가 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의상디자이너였다. 박명자와 함께 두어 번인가 교도소 위문을 온 적이 있어 얼굴을 익혔던 사이여서 실낱같은 기대를 안고 찾아간 것이다.

 

 

 

고맙게도 문광자는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했고 덕분에 이광근은 드맹의상실에서 육십 세에 이를 때까지 근무하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여기서 만난 동료의 친구가 광주신안교회의 권사여서 그를 따라 신안교회를 다녔다. 교회 교우들과 친분을 맺은 이광근은 드맹의상실을 나왔을 때 교회 앞에 옷 수선소를 차렸다. 신도 수가 천여 명이 넘던 대형교회이고 이광근의 성실함을 교인들이 높이 사 먹고살 만큼 일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광근은 수선소와 살림집에서 동시에 월세를 내기가 부담스러워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을 주던 단독주택 2층의 자기 방으로 수선소를 옮겼다. 어려움이 닥친 건, 2020년 코로나가 발생하고부터다, 예배도 중단되고 접촉을 꺼리는 분위기여서 수선집을 찾던 교인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지금은 기초수급자에게 나오는 돈 60만 원과 수급자 반찬, 부식으로 어찌어찌 생활은 해나가고 있다. 간간히 들어오는 수선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반갑다. 사람들은 임대아파트를 신청하라고 권하지만 9평 아파트에는 수선대를 놓고 여러 부자재를 쟁여 놀 공간이 못되어 일찌감치 포기했다. 임대아파트를 배정받은 다른 장기수 출신들은 아파트 생활에 잘 적응하는데 이광근은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으면 마치 감옥소에 들어간 느낌도 들어 이래저래 단독주택을 고집한다.

그의 나이 이제 70대 후반, 2000년 일부 장기수들이 송환되는 것을 지켜본 그는 강제전향 무효선언을 하고 2001년 2차 송환 희망자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 환갑 때는 돌아올 수 있지”라는 누님 말이 귀에 또렷했는데 이제는 아스라하다.

살아 계시면 누님도 벌써 90을 바라볼 나이, 그의 말대로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날 굴을 향한다고 하는데 그는 죽기 전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까?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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