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300호(2016년 10월)입니다

2016.12.02 10:59

양심수후원회 조회 수:729

소식지 300호(2016년 10월)입니다

 

 

 

 

 

양심수후원회 소식지 지령 300호에 부쳐 양희철 _장기수선생님 

근심과 걱정을 넘어 억울과 분통이 있는 곳 반민주 반평화 반언론 반통일이 있는 곳 독선 독재 전횡이 판을 치는 곳 

그것을 바로잡고 

분단조국 하나로 하고자 

평화 민주를 되찾고자 

로동 삼권을 누리고자 

민주정론을 펼치고자 싸웠다. 

투사들에게 차례진 건 

종북주의자로 질서파괴자로 

국가보안법에 엮고 묶어 

유치장으로 감옥으로 깊이 유폐시켰고 목숨을 교수대에, 총살로 지워 없앴다. 

이들의 뒷바라지 발벗고 나선 

엄마 아빠 아내 남편 누나 동생들의 모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일떠섰고 민가협을 돕고 강화하려 세워진 

민가협양심수후원회와 만남의집 그리고 탄생한 양심수후원회의 소식지 ‘후원회소식’이 면면히 이어 300호 

푸르름도 있었고  

열매도 주렁이 맺히고 보람도 있었다. 

사십사 년의 세계 최장기수가 나왔을 때 환호했다 함께 기뻐했다 

신념의 고향으로 그들을 환송하고 다음을 기약했을 때 

내 일처럼 좋아했었다. 

미주와 유럽 소통이 됐을 때 

민주의 창달은 이미 됐노라 했다. 

왜 추위가 없었겠는가 

엄동을 맞받아 싸웠기에 

후원회소식지의 내용은 다달이 풍성했고 기자들의 필진은 당당했다. 

소식지를 통해 역사가 새로 쓰여졌고 문예와 정치 만평들이 빛을 냈다. 

꾸겨지고 구석진 인권의 사각지대를 누비고 유치장 형무소의 동지들께 운기를 불어넣고 결코 그대들 전사들을 잊지 않고 있노라,고 

이 땅의 통일이 완성되고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 

소식지여! 분발하라 척결하라 

그리고 빛나거라 

후원회소식지여!!

300호 축시

300호 발간에 부쳐 300호 발간에 부쳐-후원회 소식300호를 내면서 

‘후원회 소식’ 300호를 내면서 

-걸어온 자욱과 나아가야 할 길 

권오헌_명예회장 

양심수의 석방과 후원을 목표로 출범한 민가협양심수후원회가 단체 고유의 임무를 다하기 위 한 주장과 활동을 담아냈던 ‘후원회소식’이 300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양심수도 국가보안법도 없는 세상, 민주주의발전과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 그리고 마침내는 조 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려는 한결같은 지향과 열정이 있어 단체기관지로서는 드물게 30 년 가까이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1989년 3월 19일. 민가협양심수후원회(양심수후원회)가 발족하고 그해 4월 12일 처음으로 신문 형태의 4면을 내면서 ‘발족선언문’, ‘발기인 명단’, ‘창립총회 소식’, ‘양심수명단 회비납부현황’ 등을 담아낸 것이 ‘후원회 소식’ 1호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0일 퍼낸 2호에서는 ‘사회안전법폐지 국회결의, 보안관찰법으로 대체 입 법(5, 29)’이란 당시 최대의 관심 대상이었던 사회안전법 폐지 소식과 양심수 면회등 활동상황을  실었고 이어 9월 20일 발행의 ‘3호’에서는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있었던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 심수 석방을 위한 시민대회’ 소식 등을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후원회 소식’ 1,2,3호를 부정기획으로 내었지만 그 뒤 2년 넘게 소식지를 내지 못했었습 니다. 그것은 소중한 후원회비를 수십 년 갇혀있는 양심수(당시 장기구금 양심수)를 위해 써야지  다른 비용은 될 수 있는 한 절약해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소박한 생각은 분명히 앞을 내다보지 못한 짧은 소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92 년 1월 20일, ‘복간 4호’이름으로 ‘후원회 소식’을 다시 내게 되었습니다. 

바로 후원활동을 통해 수십 년 갇혀있는 장기구금 양심수들의 처참한 실상을 세상에 알리고 고 난 받는 이들의 아픔을 나누려는 선의의 후원자를 모으며, 일터와 삶의 조건이 서로 다르면서도  양심수의 석방과 후원이란 공동의 목표에 함께한 회원들 사이의 소통을 위해 소식지의 필요성 을 절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초창기 15쪽 안팎으로 시작한 소식지가 오늘 50쪽이 넘는 규모로 후원회가 지향하고  요구하는 주장들과 이를 실천하는 활동상황을 여러 형태의 쪽지를 통해 담아내게 되었습니다.  (1992. 1. 20) 

여기서 ‘후원회 소식’ 제호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복간호(4호)부터는 양심수후원회 회원으로 서초동에서 꽃동네놀이방 선생님이시고 뒤에 푸른 영상 김태일 감독(지금은 독립영화)과 결혼한 주혜민 님이 써주신 글씨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 고 31호(1994.4.11)부터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 옥고를 치루고 나오시어 재심판(검도장)을  열어 체력과 의지의 후예를 길러 내주시던 오병철 선생님께서 써주신 글씨꼴로 다시 바꾸어 오 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후원회 소식’은 말 그대로 후원회의 활동소식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장기구금양심수를 중심으로, 명단과 복역연수, 적용법규(대부분 국가보안법)등을 알려 내고, 이들의 석방과 후원을 위한 활동, 회비납부현황, 분반모임 등 회원활동, ‘나의 삶, 나의 일 터’ 쪽지, 그리고 특히 ‘출소 장기수를 찾아서(사회안전법 폐지를 전후해 1988년 하반기부터 1989년 전 반기에 청주감호소에 감호처분을 받고 수감 중이던 비전향장기수들이 모두 석방되었음)등 취재 글이 실렸 습니다. 

그리고 후원대상이 전 양심수로 확대되면서 소식지의 발행부수도 늘어났고 ‘양심수 가족을 찾 아서’, ‘이런 회원’, ‘이달에 구속된 양심수’, ‘새로 가입한 회원’, ‘감옥에서 온 양심수편지’등 쪽 지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후원활동과 인원상황을 총괄하여 ‘알려드립니다’란 쪽 지가 있었고 뒤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로 이름을 바꿔 후원회활동과 전반적인 인권상황, 부당 한 권력에 맞선 연대사업 등을 담아냈습니다.  

‘이런 일...’은 더욱 폭을 넓혀 인권 개념을 민족자주권과 연계시켜 ‘민족자주권 없는 인권은 없 다’는 슬로건으로 이 땅에 양심수가 있게 된,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존치되어 있는 근본 배경이  조국분단에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래서 양심수석방운동과 국가보안법철폐투쟁이 자주통 일운동이었으며 통일운동이 바로 양심수석방운동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이런 일...’도 국내 인권상황뿐만 아니라 남북사이 화해협력시대, 외세공 조 동족대결시대에 진행되고 있는 긍정적 또는 부정적 통일정세 상황을 ‘이런 일...’에 담아냈습 

2 300호 발간에 부쳐

300호 발간에 부쳐-후원회 소식300호를 내면서 300호 발간에 부쳐-후원회 소식300호를 내면서 

니다. 당연히 민족자주권 차원에서 미군강점, 전쟁연습, 평택 미군기지확장,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투쟁이 포함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그 분량에서도 그렇고 취재, 조사, 연구, 비판 등  엄청난 시간이 요구되는 양심수후원회활동사이면서 현대사를 조명한 기록으로 후원회로서는  자긍심을 갖고 이뤄낸 쪽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쪽지는 ‘후원회 소식’ 294호(2016.5.7)만으로 끝 

나고 이후에는 양심수후원회활동만으로 축소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십 년 옥고를 치루고 나오신 비전향 장기수들과 통일원로들이 평생염원을 보시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시게 되면서 ‘후원회 소식’은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란 쪽지가 새로 생기게 되었 습니다. 오늘까지 이렇게 통일애국열사로 소식지에 보도된 선생님들이 2000년 9월 2일 북녘 신 념의 고향으로 가신 비전향장기수를 포함 거의 10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감옥에서 보낸 양심수들의 편지가 큰 비중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록 인신구속 상태 이지만 시대상황을 반영한 양심수들의 정의의 외침이었습니다. 

한 사례로 1999년 1월호(63호)에는 아래와 같은 양심수들이 새해 인사말을 보내주셨습니다. 김 성만(구미 유학생사건) 강희남(범민련 남측본부의장) 이윤정(광주시의원 양심수후원회원) 서영완(충남 대 활동가 조직사건) 박영희(시인 방북사건) 강용주(구미유학생사건) 김창원(비전향장기수 29년 옥고) 백태웅(사노맹사건) 손민영(민애전사건) 유성한(구국전위사건) 김대우(목포대 학생) 황인구(동국대  

학생) 차익종(사노맹사건) 황석영(작가 방북사건) 김진국(구국전위사건) 박경근(광주대 학생)입니다. 

또한 ‘꼭 알아야 할 법률소식’(이유정변호사), 1992년부터 한번도 거르지 않고 이어오고 있는 ‘후 원회 산행’(뒤에는 6.15산악회)과 관련 ‘산행기’ 1993년부터 이어진 ‘회원역사기행’과 각종 행사 등의 참가기 등이 한자리를 차지했고 1993년 9월 23일부터 시작된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민가협 목요집회’에서의 양심수가족들의 피해사례발표인 ‘목요일의 외침’도  

‘후원회 소식’에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부정기적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온 후원회의 ‘월례강좌’내용, 양심수후원회의 재정 투명성을  분명히 하는 회비수입, 지출내역, 최근 년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미주본부가 발족하면서 ‘미주소 식’ 후원회 운영위원들과 회원들의 ‘단상’ 그리고 시대상황을 반영한 ‘만평’이 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간호 등에서는 ‘사설’란이 있고 복간 뒤에는 ‘보안관찰법을 폐지하라’(32호) ‘또 

공안정국인가’(33호) ‘언론이여 제 갈 길을 가라’(34호)로 자리를 잡은 이후 거의 빠짐없이 이어 온 ‘우리의 주장’이 있습니다. 양심수후원회가 목표로 하고 지향하며 실천 활동을 해 온 ‘양심수 석방, 정치수배 해제, 사면복권을 주장하고, 국가보안법, 보안관찰법 등 반인권 반민주 반통일  악법 철폐, 부당한 권력 심판, 공안기구 해체, 민중들의 생존권 보장 등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분 단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7.4남북공동성명, 6.15공동선언, 10.4평화번영선언 등 남북 합의 이행촉구, 외세공조, 동족대결을 반대하고 미일제국주의와 패권주의 배격, 전쟁반대 평화 실현 등을 주장해왔습니다. 

이 제한된 지면에 ‘후원회소식’이 담았던 소중한 글들을 온전히 조명할 수는 없지만 300호에 이 르는 동안 분단시대와 군부독재시대, 거짓 문민정권,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시대, 이명박박 근혜 정부의 반동시대를 겪으면서 그에 대응해 온 투쟁을 담았다는 데서 민족민주운동에서의  자료적 가치가 결코 작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후원회소식’을 내는 데는 많은 회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글을 써주고 발송 작업 등 일손이 되어준 일들이었습니다. 

먼저 ‘출소 장기수를 찾아서’‘양심수가족을 찾아서’‘만나고 싶었습니다’‘이런 회원’‘재미있는  이야기’ 등 취재 글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출소 장기수를 찾아서’는 분단시대 자주통일운동과정의 고난사이자 현대사의 축소 판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초창기부터 2011년 말까지 이어오 게 되었습니다. 

이 쪽지의 필자로는 양심수후원회 출발 때부터 사무국 일까지 열정적으로 일손이 되어 주었던  홍전영 회원(편집위원)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리종, 류한욱 선생님 등 최고령자를 비롯하여  주로 청주감호소에서 출소한 선생님들과 대전, 대구, 광주, 전주교도소등에서 노약자, 병약자들 이 비전향으로 출소한 선생님들을 취재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 뒤를 이어 고현희 회원(편집위원)이 김도한 선생님을 비롯한 1차송환 전,후를 통한 많은 선생 님 인터뷰와 글을 써주었고 이어 안일순(소설가)님이 ‘과천 만남의 집’ 홍문거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선생님을 심층취재하면서 한분 한분이 작은 일대기가 될 긴 글을 써주었습니다. 이때까지  

4 300호 발간에 부쳐

300호 발간에 부쳐-후원회 소식300호를 내면서 300호 발간에 부쳐-후원회 소식300호를 내면서 

이 세 분 말고도 김혜순, 이승아, 손일순, 김현희, 안윤정, 유영순 회원 등이 이 쪽지 글을 써주었 습니다. 

1차 송환 이후에는 주로 곽인석, 안진걸, 임미영, 김양희님이 2차 송환을 기다리는 비전향장기 수들의 살아오신 길을 조명하였고 김현희, 이승미, 박소연, 하재광 회원들과 대구경북양심수후 원회와 대전충남양심수후원회에서 지역에 계신 선생님들을 취재 글을 썼습니다. 

‘양심수가족을 찾아서’와 ‘이런 회원’의 필자로는 박성희 이승미 안소영 유정희 류현미 임미영  외 여러 회원이 맡아했고 ‘논평’ 또는 ‘논단’급 글로는 김언경, 한상권, 안병길, 임미영 회원이, 그  밖에 ‘산행기’, ‘역사기행기’ 각종행사 참관기, 보고서등은 소수영, 이현근, 모성용, 김혜순, 이득 형, 김명희, 이창희, 강남욱, 송창학, 남보현, 박정범, 정은주, 리정애, 김재선 회원 등이 좋은 글들 을 많이 써 주었습니다. 

이러한 글들을 모아 엮어 펴내는 데는 초기에는 ‘개마서원’에서 그리고 오랫동안 ‘창 미디어’가  맡아 했으며 민영진, 여혜정 회원들이 교정, 교역, 편집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사무국에서 원고 를 모아 안현숙 회원의 편집을 거쳐 배송업체인 ‘필 포스트’가 발송작업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식지는 회원들의 일손을 거쳐 양심수들과 국내회원들과 단체, 해외단체 또 는 개별회원들에 발송하게 됩니다. 바로 발송 작업이었습니다. 소식지가 기획사에서 후원회 사 무실로 보내지면 미리 연락된 회원들이 와서 이른바 봉투작업을 했습니다. 책 한권 한권마다 지 로용지를 넣고 받는 이의 주소, 성명, 우편번호가 인쇄된 용지를 붙인 봉투에 소식지를 넣어 우 편번호별(시군별)로 묶어 우체국에 싣고 가 발송하는 과정이었습니다. 1천 수백부에 대한 이 같 은 발송 작업은 매우 큰 일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름을 다 거론 할 수 없는 많은 회원들이 이 발송  

작업에 함께 했습니다. 

끝으로 ‘후원회 소식’을 내는 데는 사무국 간사등 집행일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기획과  집필, 원고청탁, 양심수명단작성, 회비납부현황, 매달 회계보고 등을 작성해야 하고 발송 작업을  총괄 지휘해야 했습니다. 초창기에는 노태운 간사가, 그 뒤를 이어 송록희, 송소연, 이창기 간사 가. 그리고 김은, 김혜정 사무차장, 임미영, 이민숙, 김익, 류제춘 사무국장이 애써주었습니다.

이제까지 ‘후원회 소식’이 걸어온 자욱을 단편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어떤 발전된 모습으로 엮어 내야할 것인지 몇 가지 원칙적 문제를 짚어보기로 하 겠습니다. 

양심수가 갇혀있고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한 민가협양심수후원회의 깃발은 내려지지 않을 것 이며 ‘후원회소식’도 어김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식지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성격, 어떤 모습의 소식지가 돼야 하는지도 매우 소중하다 할 것입니다. 

첫째, 양심수후원회가 목표로 하고 추구하는 고유임무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양심수석 방과 후원사업,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개선, 민중들의 생존권 보장,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편집위원회의 정상적 가동이 필요합니다. 지난 호에 대한 평가, 이번호의 기획, 필자선정,  원고청탁, 기사의 중요성에 따른 쪽지 순서를 정하고 ‘빠른 소식지’ 발행일자의 정례화 등 편집 위원회 고유임무를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기사내용에 대한 책임감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이전에 있어왔던 ‘양심수 가족을 찾아서’, ‘이런 회원’, ‘만나고 싶었습니다’ 등 취재글을  많이 담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 글쓰는 회원을 더 많이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넷째, 더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는 소식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전에 있었던 ‘나의 삶, 나의 일터’,  최근의 ‘회원동정’ 등 회원들이 다양한 삶과 의견으로 회원사이의 소통의 폭을 넓히고 양심수의  석방과 후원이란 공동의 의지를 공유할 수 있는 매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감옥에서 온  편지’에 많은 회원들이 답신을 보내어 양심수와 회원사이의 굳건한 연대감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300호 발간에 부쳐

300호 축하합니다 

민가협양심수후원회를 위한 축하의 글 

박순경_이화여대 명예교수 

자주•민주•통일운동에 헌신하다가 부당하게 구속된 양심수들의 석방운동과 체계적 후원을  목적으로 오래 전에 창립된 민가협양심수후원회에서 전개해 온 모금운동과 후원회 소식지 300 호 발행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권오헌 선생님의 한결같은 노고에 뜨거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권선생님께서는 1980년대 부터 양심수후원회 일을 감당해 오셨으며,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고 늙으신 어르신들을 지극정 성으로 돌보시다가 2000년 남북관계의 화해와 교류 물결을 활용하여 장기수 어르신들을 북으 로 보내드리는 일에 큰 공헌을 하셨을 때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양심수후원회를 지탱하고 이끌어 오시는 자문위원들, 안병길 회장님과 위원, 실무자들을 비롯 한 여러분들의 헌신에 대해 머리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양심수 없는 세상이,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이, 자주평화통일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속히 오기를  바라신다”는 권오헌 선생님을 비롯한 양심수 식구들의 바람이 우리 민족 모두의 바람이라면, 그 러한 날이 당장 이루어질 텐데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오늘의 일련의 사태들은 더욱 더 암울 하기만 합니다.  

저 박순경, 이제 94세 줄에 있는데, 죽기 전에 그런 세상이 오기를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1980년대 말, 장기수 어르신들을 처음 발견하고 저 아주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왜 그렇게까지 우리 동족을 학대하고 박해하는지. 

분단체제가 무엇인데 그렇게까지, 지금까지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으니.  

오늘날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 살기도 어려운데, 감옥에서 괴로워하고 있으니.  

그런데도 제가 도울 길이 없으니 참으로 슬프기만 합니다. 제가 척추압박골절에다가 대상포진  후유증을 앓고 있으면서, 2014년 10월에 출판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 제1권 구약성서 편에  이어 제2권 신약성서 편을 위한 총 서론을 집필 중에 있어요. 과연 내가 살아생전에 이를 다 마칠  수 있을지를 염려하며 집필에 총력을 기우리고 있습니다. 

“양심수 없는 세상이, 국보법 없는 세상이, 자주평화통일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속히 오기를” 우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민가협양심수후원회의 소식지 300호 발행을 다시금 축하드립니다.  원초(原草) 박순경 드림 

300호 축하합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념 앞에 시련은 없다 한상균_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모진 세월을 온몸으로 살아오신 어르신들이 찾아오셔서 남기고 가신 ‘동지’라는 한마디가 오래 도록 남습니다. 국사독재, 악질자본, 국가폭력에 맞서 싸우다 옥살이를 한 수 많은 양심수 동지 들이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가슴으로 전한 ‘동지’라는 한마디였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민중이 행복해야 할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잊고 연대를 게을리 한 시간이 쌓여 동지를  가슴이 아닌 입으로만 부르게 되었고 동지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습니다. 조국의 독립, 해방세상 이 오리라 믿었던 신념이 옳았습니다. 군부독재를 끝장낼 수 있다고 믿으며 민주화 운동에 온몸 을 던진 신념은 승리했습니다. 고개 너머 있고 절망의 끝자락에 있었던 신념을 부여잡고 모진 세 월을 견뎌왔지만 당신의 신념이 옳았음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먼저 가신 의인들께 부끄럽지 않 기 위해 신념을 세워 행동하려 합니다. 그 길에 민가협양심수후원회는 언덕이자 동지입니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이게 나라인가 한탄하고 있습니다. 무능함은 그렇다 치고 파렴치한 박근 혜정권의 패악질은 극에 달하고 있지만 정치는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한 번 당선되고 나면 절대 권력이 되고 마는 난장판 세상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무능한 정권임을 알아 서인지 북핵, 사드, 종북, 외부세력, 불온세력, 전쟁위기 등 죽고 사는 문제로 분노와 저항을 잠재 우려 하고 있습니다. 

민주공화국이 아닌 왕정시대에도 백성은 신문고를 두드려 억울함을 고했고, 충신들은 목숨을  걸고 충언을 해서 군왕의 잘못을 바로 잡았는데, 지금 이 나라는 절대군주가 되어 군림하는 대 통령과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들뿐입니다. 온갖 권력형 비리, 무능한 경제와 외교, 극한대립으로  몰아가는 남북관계로 이 나라가 송두리째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지만 반성은커녕 오직  치부를 감추기 위해 공안탄압, 공포정치만 강화하고 있습니다. 

여당은 대표가 단식을 하고 국정감사를 보이콧하면서까지 박근혜정권 측근들의 부패와 비리 를 덮느라 호위무사 노릇을 하고 있는데, 다수당을 만들어주었더니 야당은 야성을 상실한 채 무 기력하기만 합니다. 권력을 잡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정권을 바꿔주라 응석을 주리고  있는 한심한 야당만 믿다가는 절망만 깊어질 것 같습니다. 

정치를 가르치는 학자들은 듣도 보지도 못한 박근혜 정권의 난장판 정치를 무어라 정의하고 가

8 300호 축하합니다

300호 축하합니다 300호 축하합니다 

르칠지 궁금합니다. 초헌법적 행정독재로 노동자 민중을 통제하는 국가폭력으로 민주노조, 민 주주의가 완전히 무력화 되었다고 가르칠 것 같습니다. 이런 괴물이 생겨난 데는 민주주의, 민주 노조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온 시간이 자양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성합니다. 무한경쟁에 내모 는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나만 내 자식만 잘 먹고 잘되면 그만이며 자본에 무릎 꿇었 던 책임도 큽니다. 머릿속에 가득한 분노를 가슴으로 끌어내려 행동하지 못한 비겁함도 반성합 니다. 

연대가 신념이 될 때까지 실천하면서 희망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연 대를 하지 않고 공안탄압 공포정치를 투쟁으로 맞서지 않으면 너희는 개돼지로 살아가야 한다 는 것을 박근혜정권이 가르쳐주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선동할 수 있을 때 광장정치가  정권의 폭주를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백남기 농민 살인진압, 국가폭력 책임을 묻고 세월호  참사 진상을 규명하고 노동개악을 멈추게 하고 사드배치에 반대하고 위안부 합의에 반대하는  분노를 모아냅시다! 

단순히 권력만 바꿔서는 1%가 지배하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 99%가 행복할 수 없으니 그 내용 도 저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시민들도 함께 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읍시다. 그 첫 번 째 자리가 11월12일 민중총궐기입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기회가 있다고 했습니다. 20만을 조직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 20만을 모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50만 100만이 모였을 때 함께 공감할  

꿈과 승리의 내용이 명쾌하다면 노동자·민중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될 거라 믿습니다. 노동 하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문제는 민주노총이 책 임지겠습니다. 

되지도 않는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때가 가장 참담합니다. 감옥도 사람 사는 동네 라 그런지 분위기가 예전과는 사뭇 다릅니다. 박근혜정권이 나쁜 정권인 줄 다 압니다. 최저임 금, 노동자의 권리와 민생문제 등 사회문제 전반에 대해 정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민 주노총이 힘을 더 내어야 한다고 합니다. 

대단결은 시대정신이 되었고 정치적 격동기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과 다른 민주주의, 재벌이 아 닌 노동존중시대, 전쟁이 아닌 평화의 길을 열어갈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의 대반격을 다짐합니 다. ‘동지’가 무엇인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념 앞에 시련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민가협양심수후원회의 한결같은 지지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2016. 10. 23 

서울구치소에서 한상균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소식지는  

보편적 인권의 보루, 자주 민주 통일의 등불입니다. 김시환 _ 미주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 

소식지 300호 발행을 축하드립니다.  

창간 이래 갖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인권과 생명, 평화와 통일을 위해 싸우다 갇힌 양심수들 을 위로하고 그분들의 소식을 전하고 석방을 위해 애써 오신 여러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만리타향 이국에서 받아보는 후원회 소식지를 통해서 저희들은 양심수와 장기수 어르신들의  소식을 접하고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시의적절한 칼럼과 다양한 주제의 국내 투쟁소식 등을 반 가운 마음으로 받아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그리운 고향의 소식 모두를 만날 수 있는 후원회 소식지를 만 드시는 여러분의 거듭되는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다시 한 번 후원회소식 300호의 발행을 축하드립니다. 

미주LA 백남기농민분향소

10 300호 축하합니다 11 

후원회소식지를 말한다 후원회소식지를 말한다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 300호를 축하하며 

홍전영_회원(전 편집위원) 

그게 1990년인지 91년인지 정확하지 않다. 전에 장기수 선생님을 인터뷰하면 50년 전의 일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셨는데 고작 이십여 년 전의 일이 가물거리니 송구스러 울 따름이다.  

한겨레신문에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의 자살 기사가 났다. 그 모진 전향 공작과 고문을 견디고  27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나오셨는데 자살이라니.... 마지막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추도식이 있던 명동성당에 찾아갔다. 1950년대 60년대부터 수감 중인 장기수분들이 아 직도 감옥에 수십 분이 계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가 세계 최장기수라고 알려져 있던 시절이었다. 45년 최장기수 김선명 선생 님을 비롯해서 20~30년 복역하고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호관찰중인 장기수 선생님들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나도 그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하는 생각에 사회를 본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노태훈 간사를 찾아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자발적으로 회원이 찾아오면 담당자들이 환 대를 해주기 마련이다.  

학생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양심수는 점점 늘어나고 민주화 투쟁의 성과로 비전향 장기수 선생 님들도 석방되고 있던 때라 할 일은 많은데 손이 모자란다고 했다.  

권오헌 회장님이 소식지를 정기적으로 만들어 감옥에도 보내고 후원회원에게도 홍보해야 하는 데 그것을 못해서 안타까워 하셨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직장인이 된 새내기 회원들이 몇 명  있었다. 참 신나게 회의를 하고 역할을 나눠서 취재를 하고 원고를 썼다. 

마침 내가 시간 여유가 있어서 지방에 홀로 떨어져 계신 선생님들을 뵈러 다녔다. 남한에 연고자 가 없는 선생님들이 출소 후 시설에 계신 경우가 많았는데 권오헌 선생님께서 그분들 대부분을  만나서 지지와 연대의 뜻을 전했다.  

특히 충북 음성 꽃동네에 류한욱*선생님을 여러 번 찾아갔는데 수감 중 반쪽 몸이 마비되었으면 서도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다. 처음 찾아간 날, 면회가 되니안되니 실랑이를 한 끝에 마뜩찮 

아 하는 직원 뒤로 머리가 하얗게 세신 할아버지가 한쪽 발을 끌며 담담히 나오셨다. 우리가 누 군지 아시고 왈칵 눈물을 흘리면서 성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젊은 시절 전설의 싸움꾼 시라소니와 어울리던 이야기, 권투선수를 하다가 해방 투쟁과 통일 운 동에 나선 이야기를 하시며 환하게 웃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결국 선생님은 당신의 희망 대로 2000년 북한으로 돌아가셨다.(6.15 정신에 입각한 제1차 장기수 송환) 

후원회 소식지 300호를 발행한다니 감회가 새롭다.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는 시간 동안 이 일에  매진하신 권오헌 선생님과 사무국 일꾼들, 후원회원들의 따뜻한 마음에 박수를 보낸다. 세상에  많은 후원회가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지만 양심수후원회는 그 중에서도 참 귀한 존재이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처럼 후원회 소식지가 앞으로도 서두르지 않고 나아가기를 바란다. 

류한욱선생님 

평안북도 철산 출생. 해방 후 철산군 백량면 면당위원장을 맡아 북조 

선임시인민위원회의 토지개혁 정책을 시행. 1954년 가을에 공작원 

으로 남파되었다가 의정부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 전향을 거부하고  

비전향 장기수로 대전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고문의 후유 

증으로 1969년에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심. 1991년 회생가 

능성이 없는 환자로 판정받아 약 36년만에 출소. 음성 꽃동네를 거쳐  

낙성대 ‘만남의집’에서 다른 출소 장기수 선생님들과 공동생활을 하 

던 중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 

로 송환, 조국통일상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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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소식지를 말한다 후원회소식지를 말한다 

소식지 300호를 맞이하며 드는 바람 

유영호_운영위원 

대부분의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소식지를 받아보는 처지에서 내가 소식지 편집에 처음 관여하 게 된 것은 장기수선생님들의 인터뷰기사를 써보라는 제안을 받은 다음부터다. 그 전까지 선생 님들을 자주 만났지만 그저 생활 속에서 현상적인 이야기가 주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들과의 정식 인터뷰야 말로 내가 그들의 삶 속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전하는 그들의 삶을 흘려듣지 않고 다시금 글 로 정리하여 우리 후원회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참으로 유의미하고 도 뿌듯한 일이었다.  

아마 그렇게 한 2~3년 정도 매월 선생님들의 삶을 듣고 정리한 것이 그 동안 현상적으로만 생각 했던 그분들의 삶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듯 나 역시 이 일을 계속 할 수는 없었고 그 뒤로 우리 소식지에서도 선생님 들 삶에 대한 인터뷰 기사는 드문드문 실리게 되었고, 그러다 그만 최근에는 아예 사라진 코너가  되어 버렸다.  

물론 생존해 계시는 선생님들의 인터뷰기사는 지난 후원회소식지 속에 아마 모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장의 작은 지면에 한 인간의 삶을 모두 그려낼 수 없듯이 이후로도 이런 장기수선생님 들에 대한 인터뷰기사는 계속적으로 소식지의 한 부분을 차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이 변하면 그에 대응하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각 역시 당연히 변화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변화하는 정치정세 속에서 선생님들의 생각과 말을 전할 수 있는 통로로 후원회소식지 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청치정세의 변화 속에서 온몸을 바쳐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싸우신 선생님들의 생 각과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우리 후원회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이라고 나는 생각 한다.  

비록 백발에 허리가 굽은 노인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의 삶과 심장은 다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재산이다. 그런 소중한 재산이 너무도 우리와 가까이 있다 보니 잠시 잊고 지낸 것  

같아 아쉽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번 300호 소식지를 기점으로 앞으로는 다시 장기수선생님들의 인터뷰기사 가 매월 연재되기를 바란다.  

특히 최근 선생님들에 대한 부고소식이 전해올 때마다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비록 조국통일의 환희와 기쁨을 자신의 육체로 느끼지 못하고 떠나시더라도 그에 대한 그들의  신념과 그를 위한 그들의 투쟁모습을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놓아 기록으로 후대에 넘겨주는 것 이 우리 젊은 후원회원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운 사람들, 이런 좋은 추억을 주신 양심수후원회에 감사합니다. 김언경_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며칠 전 권오헌 선생님이 양심수후원회 소식지가 300호라고 글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부탁 이든 들어드리고 싶은 분이니 선뜻 그러겠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막상 뭔가 써보려니 제가 뭘 했 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거짓말처럼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같이 송록희, 송소연 두 간사를 비롯한 후원회 지인들과  장기수 선생님들 얼굴. 송환 전 많이 울었던 기억. 김남주 선생님 관련 글을 썼던 기억 등 아주 단편 적인 것들뿐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맘에 양심수후원회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거기 예전 소식지가 다 올라와 있더군요. 바 쁜 와중에 그걸 보다가, 일손을 놓고 한참 울고 웃고 그리움에 잠겼습니다. 

저와 양심수후원회는 우연히 1991년 겨울 세종대에서 하는 <양심수 석방을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보러 갔기 때문입니다.  

공연 마지막 순서에 출소하신 장기수 선생님과 후원회 회원들이 나와서 모임을 소개하고 노래 를 불렀습니다. 솔직히 노래는 참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나라에 만델라보다 오래 투옥중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렇게 오래 계시다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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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소식지를 말한다 후원회소식지를 말한다 

신 분들이 어렵게 지내신다는 것도 짠했습니다. 그들께 편지를 쓰고 영치금을 보내고, 출소하신  분들과 벗이 되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졸업 후 푼돈이었지만 월급이란 걸 받고 있었으니 돈 좀 쓸  수 있다 싶었나봅니다. 

은근 실행력이 있는 저는 대학시절 동아리 친구들까지 꼬드겨 ‘여울’이라는 이름으로 후원금을  내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아주 적은 후원금을 내고, 매달 산행에 따라가기로 했습니 다. 당시 저는 컴퓨터란 것을 매우 잘 한다고 생각해서(?) 소식지 편집을 도와드리겠다며 나댔는 데, 진짜 선수가 있었는지 저는 엉뚱하게 인터뷰 기사 쓰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늘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글쓰기가 힘든 게 아니었습니 다. 장기수 선생님을 인터뷰하러 가면 생각보다 선뜻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으셨습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분 냉장고를 뒤져 된장국이라도 끓여서 밥을 해서 함께 먹고 치우고 그렇 게 시간을 보내야만 겨우 마음을 열고 입을 떼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 저는 밥을 해먹을  줄 몰랐기에 인터뷰 자체보다 그게 더 어려운 일이었지요.  

민가협 어머니 아버지와 인터뷰할 때에는 감옥에 있는 자식 생각에 울컥하시며 너는 몇 살이냐,  우리 아들과 몇 년 차이구나 이런 이야길 하시면 죄송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은 인터뷰를 하면 다들 전화기 등으로 대화내용을 녹취하고 뭔가를 쓰지만, 저는 도대체 무 슨 베짱인지 아무것도 없이 메모도 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냥 그분들 말을 끊거나 뭔가 끄적거리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인터뷰 기술 같은 것도 없어 거의  뭘 여쭙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말문만 열어 드리면 봇물 터지듯 말씀하시고 저는 듣다가 울기도  하고,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고 나면 내가 이런 분들을 인터뷰하고 이런 분의 인생을 소개할 자격이 있나, 난 너무 부담스 러운데 이건 내 깜냥이 아닌 일인데 싶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힘들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희는 편집부라는 이름으로 인터뷰 글을 게재했기에 제가 쓴 글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투병중인 시인 김남주 선생님을 뵙고 썼던 글, 선생님 돌아가신  후 사모님과 유치원생이 되던 토일이를 만나고 썼던 글은 잊히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제 주례를 서주셨던 장기수 이경구 선생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주례를 부탁드리니 아직  총각인데 어떻게 주례를 서냐고 거절하시면서도, 주례 설 때 입을 옷도 없다 하셨습니다. 저희도  여유가 없었던 터라 한복 한 벌 해드리지 못하고 친구 아버지 한복을 빌려서 입혀드리고 주례를  

서달라고 했네요. 제 가족은 그 흔한 교수 하나 주례로 못 세우고 ‘간첩’이 주례를 서다니 말이 되 냐고 저를 혼내셨습니다.  

그래도 그때 우리 부부는 선생님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습니다. 2000년 송환 때 양복 한 벌이 라도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때도 맘에 여유가 없었습니다. 와이셔츠 몇 벌 사드리며 안 가시면  좋겠다고 철없는 소리만 했는데, 아이들 잘 키우라며 돌도 되지 않은 둘째딸을 마냥 안고 계셨 던 선생님. 그때 이미 전 이리 가시면 다신 뵙지 못할 것 같아서, 길어질 이별이 답답해 힘들어했 습니다.  

소식지를 보다 보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제 그만 봅니다. 한참 뒤로 가니 2000년 도에 둘째 아이를 안고서도 회원 인터뷰를 하러 간 제 모습이 실려 있더군요. 가끔 뭐 하며 나이 만 들었나. 도대체 뭐하고 살았는지 한심스럽지만, 소식지를 보며 이거 하나는 칭찬해주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재주도 없고 사상도 없고 어리기만 했던 저에게 일을 시켜주신 후원회 덕분이지요.  양심수 후원회는 저에게 정말 좋은 인연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분들 의 이야길 듣고, 그분들이 저에게 아주 작은 희망을 걸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 저의 삶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힘으로 제가 이렇게 부족하나마 계속 시민사회 활동을 하며 살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삼 모두 그립습니다. 올해는 연말 송년회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어려 운 시기이지만, 그럴수록 모두 건승하십시오.

 

국가사유화 당장 멈춰라 

안병길 _ 회장 

인간에게 행복은 일차적 먹을 것이 있고 잠잘 곳, 입을 것 소위 의식주만 해결되면 가능 하다. 이것이 행복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사회적 관계에서 더 행복을 찾을 수 있고, 느 껴야하지 않겠는가.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정부 신뢰도가 34%에 불과한데 인도  73%, 러시아 64%이고, 사법제도 신뢰는 한국 27%에 미치고 일본 65%, 노르웨이 83% 란다. 한국에서 사법제도가 왜 이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필자의 진단은 사법부의 권력 사유화라 본다.  

이승만은 농림부 장관까지 지낸 진보당 조봉암 선생을 사법 살인했는데, 판사가 ‘간첩 죄 무죄’선언하니 이승만이 나서 그 판사놈 죽이고 싶다니까 그 다음 간첩으로 엮어 형 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나라를 훔쳐놓고, 자기에게 반대 하는 인물들을 수 없이 감옥에서 감옥으로 무수하게 많이 가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 지게 했고, 그것도 모자라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 만들어 국가법제도를 사유화했었 다. 박근혜는 자신의 모자람과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도 를 넘었다.” 국민의 소리를 듣기는커녕 국민들에게 훈화를 하고 있다. 이 땅에서는 권력 이 시민을 위하여 봉사하는 게 아닌 마치 점령군처럼 시민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헌법 에 명시되어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 다.”가 아닌 정반대의 현상, 권력은 청와대 주인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대한민 국 법은 ‘개’법이고 사법정의는 무덤에 파묻힌 지 오래다.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대통령과 공직자들, 공권력은 국민을 위하여 행사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윤리이건만  이 땅의 사법부는 검찰은 더 말할 것 없고 국민의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닌 최고 권력자의  심기만 살핀다. 이 땅은 법으로 통치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심기와 박근혜의 가신 최 순실이 통치하고 있다.  

전 진보통합당 조작된 내란음모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명박의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서 군 사이버부대는 말할 것 없고,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까지 동원하여 불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가 ‘대선 불복종’을 내세워 가며 탈출구로 만들었던 게 소위 내란음모 사 건 아닌가. 북한과의 연계도 없었고 지하조직인 RO의 실체도 없다면 당연히 무죄 아닌 가. 헌데 선동죄 9년이라는 헛웃음도 안 나오는 판결이 나왔고 통진당은 해체되었고,  통진당 국회의원들의 의원직도 빼앗았다. 그들을 지지했던 시민들은 어떤 존재이고 그 들의 주권을 엉터리 재판으로 빼앗은 법조계는 조폭 범죄 집단과 다를 바 없다. 용산참 사 때 무시무시한 국가폭력에 누가 사과했던가? 당시 경찰청장이었던 김석기의 승승 장구 영전을 보라. 故백남기 농민에게 직사물대포로 살인을 저지르고 강신명 경찰청장 의 후안무치하고 정말 뻔뻔한 국가권력의 말을 들어보자. 유족들에게 사과 거부해가며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국가가 국가 의 폭력을 저질러 백성이 죽었어도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근혜 정권은 제 자신의 생존본능만 남아있는 암적인 존재다. 최고 권력의 요구대로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전경련에게 돈 뜯어내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속살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5시간 만에 군사작전 하듯 재단설립을 인가해준 문 화체육관광부, 기업이사들의 동의도 없이 수십 억 원의 회사 돈을 한날한시에 갖다 바 친 재벌들, 문제가 되자 자료파괴나 일삼고 권력자의 요구에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움 직였다는 것은 이 나라의 정경유착이 얼마나 강고한지 알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은 검찰,  사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보수언론도 사유물로 삼아 이렇게 노골적으로 법규정, 절차 를 뭉개놓고 노골적인 정권욕과 끝없는 이윤추구 욕망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말이 다. 박근혜 정권 친박세력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여당을 시녀로 삼아 방패막이로 삼 고 있다. 소신과 양심을 가진(불법 대선 검사 윤석렬 등) 사람들은 모두 내쫓았고, 출세욕 에 눈멀어 있거나 자신의 약점 때문에 권력자에게 맹목적 충성만 하는 이들을 심복으로  삼고 있다. 이게 박근혜의 생존본능이다. 윤상현, 현기완, 최경환 등 총선 불법자에게 눈 감고, 박근혜 측근 비리를 들춰내려는 국감을 보이콧한 조원진, 이장우, 박대추, 김대흠 은 국회를 만신창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정권은 조폭보다 더한 범죄 집단이다. 비리 백화점이요 범죄 종합 선물세트인  박근혜 정권은 더 이상 국가를 자신의 사유물로 삼지 말고 청와대를 떠나라. 국가폭력,  국가 사유화! 사죄는 꼭 하고 떠나라. 

26 우리의 주장 27 

/ 만 평 / 

말한마디에... | 민중의 소리_최민의 시사만평 사망진단서 | 민중의 소리_최민의 시사만평 

모녀의 행방? | 한겨레그림판_권범철의 그림마당 

종북타령 | 민중의 소리_최민의 시사만평 

●‘구금시설 교정 관련 법규집’ PDF파일로 제공 ● 

2012년 5.18기념재단의 2012 국내 시민사회연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구금시설  교정 관련 법규집’ 책자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양심수후원회의 어려운 재정 상황으로 다시 제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조만간 개정된  법규들을 수정보완하여 양심수후원회 홈페이지(www.yangsimsu.or.kr)에서 PDF파일로 제 공할 예정입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PDF파일을 출력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 단상

그 시절 용문산의 추억  

김재선 _ 운영위원 

며칠 전 라순석 회원이 615산악회 밴드에 용문산 정상 사진을 올렸다. 그 사진을 보고 나니 나도 옛 생각이 나서 정상에 한번 가 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 주변 산들은 다  가보았지만 정상에 가보지 않은 이유는 과거 유신시절 그 산꼭대기에서 몇 달 동안 기 거했기 때문에 미답지 산행을 선호하는 입장에서는 새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날로  용문사에서 출발해서 용조봉, 천사봉, 용문산을 포함해 한 바퀴 16km 원점회귀 산행 계 획을 세웠다. 이틀 뒤 출발을 했는데 양평부근에는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 했다. 가을날 남한강 영향이 아닌가 싶었지만 계속 이 모양이면 오늘 산행은 재미가 적 을 수밖에 없다. 다행이 용문사 입구에 도착하니 짙은 안개는 다 사라지고 쾌청한 가을  날씨를 보였다. 험한 용조봉을 지나 오르락내리락 거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끝에 헉 헉거리며 천사봉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완전히 멧돼지들의 해방구다. 헬기장을 표시한  보도블럭까지 이놈들이 다 헤집어 놓아 공사장을 방불케 했다. 첩첩산중에 나 밖에 없 으니 어디서 무엇이 후다닥 튀어 나올 것도 같은 두려움에 온몸이 긴장된다. 인적이 드 문 산은 혼자 가지말자고 속으로 다짐하지만 욕심이 앞서다보니 자신과의 약속은 늘  뒷전이다. 다시 끝없는 오르막 끝에 용문산 정상 언저리에 닿으니 용문사에서 정상으로  바로 올라가는 등산객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28 단상 29 

● 단상 상되니 더 허전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다. 그 긴 세월 40년 동안 나는 무엇을 했으며 무 

아 용문산! 이 얼마 만인가? 38년 전 이산 꼭대기에서 한겨울 넉 달간을 꼬박 살았다. 목 

욕이란 감히 생각도 못했고 세수한 기억도 별로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문 열기가 힘들고 산 아래 구름바다가 펼쳐지면 저 멀리 아득한 곳에 북한 산이 망망대해에 돛단배같이 떠 있을 때도 있다. 가끔 술 생각이 날 때엔 눈치껏 저 아 래 용문사 쪽으로 내려가 동네 점방에서 한잔 걸치고 올라왔다. 올라오면 하루가 다 갔 고 먹은 술은 이미 다 깨서 마신 놈이나 안 마신 놈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그 소주 한 잔  마시려고 하루 발품을 팔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용문산은 그대론데 세상은 그리 달라 지지 않았다. 그때도 박아무개가 대통령질을 했고 지금도 그 딸이 제일 높은 자리에서  제 세상인 냥 앙탈을 부리고 있다. 내가 있던 사단 대대장이 월북을 하여 사단 전체가  이곳에 있던 사단과 교체가 됐는데 그때 월북한 대대장은 살아나있는지 살아있다면 지 금 북에서 뭘 하는지? 우리가 있던 곳으로 교체된 사단장 노태우 처남은 국회의원 하다 가 지금은 고인이 됐고 하나회출신 우리 대대장은 군단장까지 하다가 김영삼 정부에서  된서리를 맞았다. 행정고시 준비하던 똑똑한 최상병은 합격을 했는지 아마 합격됐어도  새누리당은 지지하지 않을 사람이다. 한문 실력이 출중하고 마음씨 좋은 류병장, 평소  착한 사람인데 말년휴가 갔다가 객기로 사고치고 들어가 그 뒤 소식도 모르는 속초출 신 김병장 둘 다 궁금하다. 그리고 이 친구는 지금도 간단히 찾을 수 있지만 찾을 생각 이 없다. 보병소대에 있으면서도 일없이 항상 중대본부나 대대본부에 줄을 대고 있는  서울대출신으로 머리 좋고 눈치 빠른 윤하사다. 이 친구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서울대  교수라고 바로 나오며 국회의원보다 더 상세히 소개를 하고 있다. 

가을이란 다른 계절과 달리 무엇에 쫓기듯이 마감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차라리 겨 울은 추위를 견디고 나면 새봄이 온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가을은 결실과 단풍은 잠 시뿐이며 곧 그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에 찬바람이 쌩쌩 불어 다 얼어붙는 것이 연 

엇을 이루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냥 허송세월을 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장가가 고 자식 둘 낳고 그리고 몇 년간의 직장생활 그 뒤 20여 년간 벌린 꼴난 사업은 무능 탓 으로 적자생존사회에서 도태되어 벌기는 고사하고 조상으로 물려받은 땅뙈기도 간수 하지 못하고 그나마 팔리지 않는 땅이 조금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부분에는  

뭘 좀 이루어 놓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마저 전혀 실적이 없다. 또한 건강도 남들처럼  제대로 챙기지 못해 한참 고생을 하다가 지금에 이르렀으니 객관적으로 지나온 나의  이력은 총체적 실패라고 본다. 그러니 지금은 욕심이고 뭐가 다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내려놓을 것이 없으니 마음은 편안하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하루 세 끼면 족하다 배가  큰 사람은 조금 더 먹을 수도 있겠지만 큰 저택을 가졌어도 누워 잘 자리는 여덟자면 넉 

넉하다고 한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은 나이 들어서 집 걱정이나 하고 쓸데없이 재물에  욕심을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 스스로 자신을 경계해서 지은 시가 있다. 특히 물질만능 세상에서 혜택을 덜 본 사람들은 위안으로 삼기에 적합한 시라고 생각되어 한번 소개 해 본다. 

自警詩 白樂天 

蠶老繭成不庇身 (잠로견성불비신) 누에는 늙어서 고치를 만들건만 제 몸을 가리지 못하 고 (비단옷은 인간이 입는다.) 

蜂飢蜜熟屬他人 (봉기밀숙속타인) 벌은 굶어 가며 열심히 꿀을 만들어도 남에게 먹히네  (꿀도 인간이 먹는다.) 

須知年老憂家者 (수지년로우가자) 모름지기 알지니 늙어서도 집 걱정하는 자는 恐似二蟲虛辛苦 (공사이충허신고) 누에나 벌의 헛수고와 무엇이 다르리

30 단상 31 

● 도란도란 — 회원동정 

연지연 곰탕집 

의강_회원 

 ● 도란도란 — 회원동정

지상철님를 만나게 된 인연은 김포 애기등탑 철거운동으로 고난당한 이적 목사를 통해 서였다. 이목사는 북쪽을 자극하여 남북관계를 적개심으로 가득 찬 증거의 사람들로  이끌어가는 애기봉등탑 반대는 물론 남북 민족통일운동에 온 몸을 담고 있다.  처음 연지연 곰탕집을 찾았을 때, 식당의 위치로 보아 ‘장사가 될까?’였다. 위치가 강화 대교 건너기 바로 전, 옛적에 검문초소가 운영되던 바로 그 옆에 있다. 서울 방면에서는  건너야 되고, 강화방면에서 들어가야 하는데 강화에 들어갔던 이들은 현지에서 거의 먹 고 나올 것이고. 그런데 곰탕은 잘 팔리고 있었다. 입소문은 물론이요 인터넷을 통한 판 매였고, 직접 식당을 찾아 드시는 손님들도 많다.  

식당입구에는 통나무 왼편에 세월호 상징이 새겨져 있는데, 한 번은 몇 십 명을 태운 관 광버스가 와 곰탕집으로 들어서며 종편에서 본 세월호 이야기를 해서 돌려보냈다 한 다. 당신 같은 미물들에게는 음식 안판다고. 그 뿐 아니다.  

얼마 전 가보니 민중연합당의 현수막이 큼직하게 걸려있었다. 민중연합당을 아시는 지? 한겨레신문에서조차 지면에 안올리는 민중연합당! 흙수저당(청년들), 노동당(노동 자), 농민당(농민)들이 연합하여 작년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준비대회를 가진 뒤,  같은 해 성남 체육관에서 창당 대회를 했었지만 어느 언론도 관심 없었던 민중연합당.  사실 이 땅의 주인인 청년들, 일하여 몸으로 세상을 먹여 살리는 노동자들, “농자천하 지대본”이지만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며 짓밟혀 죽어가는 농부들이다. 윗자리,  높은 자리는 하늘이 아니다. 이들이 하늘이요, 주인이다. 그 주인들이 모여 그 누구의 힘 

도 아닌 우리 스스로 힘으로 우리 밑바닥 보듬는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민중은 개, 돼지, 미국은 상전이냐? 사드배치 철회” 라는 아주 커다란 폭 1.5m에 길이  10m 짜리의 현수막이 걸려 있는 곰탕집에 또 한 손님이 뭐라고 지적질하자 안주인 나리 께서 ‘당장 나가라. 당신은 이 땅에서 밥 먹을 자격이 없다.’며 내쫓았다니 웃기는 부부다.  지난해 나의 소개로 그 자리에서 양심수후원회원에 들어오셨고, 통일이 되면 평양에서  곰탕집을 내겠단다.  

그의 곰탕은 가마솥(큰솥단지)에 24시간 달여 만들어진다. 고기는 호주산 와규를 쓰고  있고, 그렇게 끓여, 고우니 맛이 안날 수 없다. 한번은 강남의 어느 식당에서 곰탕을 대 어놓고 받고 싶다는 제안도 왔는데 거절했다 한다. 그러면 힘도 들지만 음식의 맛도 변 하게 되고, 자본주의 속성에 물들기 싫었단다.  

하긴 자본주의 속성이 뭔가? 더 많이, 더 빨리빨리에 1등주의 아닌가? 헌데 지상철 회원 은 “빠른 세상에서 바른 느림을 택했습니다.”는 삶의 푯대를 정하고 살아가는 이다.  

강원도 인제 신남이 고향이라는 지상철님.  

꽁지머리에 거위, 닭 몇 십 마리, 삽살이 하나, 통혁당 20년 살으셨던 오병철 선생님 댁 에서 이사 온 연지라는 흰 개, 고양이들과 한 식구를 이루고 있는데, 김포 쪽은 물론이요  강화에서도 생각 있는 사람들의 사랑방이다.  

전화를 하면 닭 잡아먹으러 오라 성화인 지상철님. 생김새만큼 우직스러운 그의 삶에 서 우러나는 연지연 곰탕, 강화에 들르실 적 잊지 말고 들러보시길.  

식당에 들어서면 양심수후원회 회지는 물론이요, 시사인 주간지도 내어놓고, 보고 싶 은 이가 가져가게 하는 열려있는 주인네의 인심도 맛볼 수 있다. 그의 말대로 분단세력 인 미제국주의 군대를 몰아내고 민족자주 통일을 속히 이루어 ‘우리의 소원인 통일‘ 그  때 평양에서 그가 맛내는 ‘평양 연지연 곰탕집’에서 들쭉술과 고려 인삼주에 곰탕 한 그 릇! 꿈만 꾸어도 좋다. 

32 도란도란 — 회원동정 33 

❖ 기쁜 일이 있었어요 

강담 선생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홍휘은_회원 

 ● 소식 

출소를 환영합니다

11일 오후 7시 

사당동의 ‘명동 보리 

밥’ 식당에서 여러 선 

생님들과 양심수후 

원회 회원들이 한 자 

리에 모여 강담 선생 

님의 84세 생신 모임 

을 하였습니다. 

해가 지날 때마다  

부쩍 건강이 쇠약해 

지시는 선생님들이 걱정이 되는 요즈음, 그래도 걱 정보다는 건강하신 모습으로 생신 모임에 나오신  강담 선생님을 뵈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낙성대 만남의 집의 김영식, 박희성 선생님과 양 원진, 양희철, 권오헌 선생님, 며칠 전 따님 혼사를  치루고 참석하신 김지영이사님과 김순자 선생님,  김호현 전 후원회회장님과 후원회 회원 십여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한 분 한 분씩 돌아가며, 그동안 강담 선생님과 지 내며 생각나는 추억을 떠올리며 생신 축하 인사말을  하였는데, 특히 여성 회원들과의 관계가 탄탄하신 강 담 선생님의 열정적인 회원 관리의 모습은 본 받을  만 하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큰웃음이 터졌습니다.  

84세 생신을 축하하는 케이크에 촛불을 끄고 축 하 노래를 합창한 뒤, 선생님과 가장 친하고 가까운  

사이인 양원진 선 

생님과 서로 얼굴에  

케이크를 묻히며 장 

난치시는 모습으로,  

여든 넘으신 어르신 

이 아닌 천진난만한  

소년의 모습이 되어  

모든 회원들의 웃음 

보따리를 터뜨리게  

해 주셨습니다. 

모임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들께서는 한 분씩 생 신 축하 노래를 불러 주시며 흥을 돋우어 주시더니,  오감시롱 으뜸일꾼의 흥겨운 가락에 맞추어서는 덩 실덩실 춤도 추며 흥겨워 하셨습니다. 순수한 소년 의 감성을 가진 강 담선생님은 ‘고향의 봄’을 선창하 시고,회원 모두 손을 잡고 합창하며 즐거운 생신 모 임을 마쳤습니다. 

항상 이차모임까지 가시던 강담 선생님은 일찍 귀 갓길에 오르시고, 남은 몇 회원들은 선생님의 건강 하셨던 예전 모습을 아쉬워하며 회원끼리 오붓하게  정을 나누는 시간으로 모임을 마쳤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에 부는 바람은 어느새 쌀쌀 해지고 몇 장 남지 않은 달력이 아쉬움이 들면서, 통 일되는 날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씩씩하게 걸어가 실 수 있는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해 봅니다. 

● 

2003년 국정원이 발표한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으 로 구속 수감된 이석기 옛 통합진보당 전 의원 등 7 명 가운데 김근래님과 조양원님이 29일 만기를 채 우고 당당히 출소했다.  

김근래 전 경기도당 부위원장은 이날 오전 5시쯤 안 양교도소를 나와 3년 만에 사회로 복귀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가족과 옛 통합진보당 당원 등 자신을  기다리던 200여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감사를 표현 했다. 그는 “잊지 않고 기다려줘서 고맙다”며 “이제  

함께 이석기 의원 구명에 힘쓰자”고 말했다. ● 

또 전주교도소에서는 조양원 전 사회동향연구소 대 표가 역시 3년 만에 교도소 문을 나섰다. 조 전 대표 도 가족 등 마중 나온 100여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김 부위원장과 조 전 대표가 복역을 마치면서 내란 음모 사건으로 이 전 의원과 함께 형을 확정받은 7 명 중, 이 전 의원과 김홍열 전 경기도당 위원장, 이 상호 전 수원진보연대 지도위원 등 3명이 아직 복역  

중이다. 

● 

지난해 1월 대법원은 이 전 의원 징역 9년, 김 전 위 원장 징역 5년, 이 전 지도위원 징역 4년, 조 전 대표 와 김 전 부위원장홍순석 전 경기도당 부위원장 각  징역 3년, 한동근 전 수원시위원장에게는 징역 2년 을 확정했다. 

● 

‘내란음모사건’은 불법대선개입으로 조직해체의 궁 지에 몰린 국정원과 박근혜정부의 대국민사기극,  조작극이며 통합진보당을 겨냥하여 이 땅의 민주  

진보세력을 말살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 

그리고 ‘11.14민중총궐기’로 구속된 우람 알바노조  정책팀장(인천구치소), 고복철 민주택시노동조합 전 남지부조합원(광주교도소), 이재식 공공운수 화물연 대본부 구미지회 지회장(서울구치소)님이 출소하였 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김대봉 코리아연대 회 원(수원구치소)이 출소하였다.  

34 소식 35 

● 소식 

통일할머니 박정숙 선생님께서  

요양원에 입소하셨습니다. 

 ● 미주 소식  

사드반대 미주연대 촛불시위 

김은경(Kim Angie)_미주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원

260년이 넘게 자주통일의 한 

길만을 걸어오셨던 박정숙  

선생님께서 지난 10월5일 서 

울시립중랑노인요양원에 입 

소하셨습니다.  

동생 김선분 선생님이 작년  

먼저 돌아가신 후, 박윤경 회 

원을 비롯한 손주들(?)의 보 

살핌을 받고 백수(99세) 축하  

상을 받으셨던 박정숙 선생 

님은 이제 요양원에서 상주 

하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요양보호사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동고동락을 함께 한 박윤경님 최지수님이  이제는 교대로 주말마다 선생님을 찾아뵙고 말벗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족과도 같은 양심 수후원회 회원님들께서도 요양원에 들리셔서 박정 숙 선생님과 따뜻한 만남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조국사랑정신으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위해  

평생 몸바쳐 싸우다가 이제 고 

령과 기억장애 등 노환으로 인 

한 투병을 하고 계십니다. 통일 

세상을 꼭 보고 눈 감으시겠다 

는 선생님의 의지는 올해 100세  

인생을 맞아 아직도 현재진행 

형입니다. 통일운동가로 일생 

을 살아오신 선생님은 지금도  

통일세상을 꿈꾸고 계십니다. 

“우리같이 이렇게 생활은 그저 그래도 생각이 행 복하다고 사는 사람도 많지 않지” 

통일할머니 박정숙 선생님의 요양생활에 지속적 으로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내주십시오.  후원계좌: 국민은행 408801-01-278519 권오헌 

10.21.5pm. 

워싱턴 백악관 앞, 

10.21.6pm.  

엘에이 영사관 앞 

미 반전 진보단체 Answer  

Coalition과 함께 사드반 

대 미주연대 촛불시위를  

하였습니다. 

미국의 양심적 진보세력들이 한반도 평화를 염원 하는 한인동포들과 함께 사드반대, 평화를 외치며  한미 당국의 위험천만한 사드 배치 결정을 규탄하 였습니다.  

워싱턴 디씨에서 시위에 참여한 전 CIA 간부 Ray  Mcgovern씨는 반세기전 미 아이젠하우어 대통령 의 경고를 인용하며 미 군산복합체의 위험천만하고  약탈적인 군사모험주의를 비난하였으며  

미 반전 평화단체 Answer Coalition 대표, Brian 

Becker씨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량살상무기로  오백만 명 이상의 한국인 생명을 앗아갔던 미 제국 주의자들이 오늘날 다시 한 번 한국인들의 생명을  볼모삼아 위험천만한 군사도발을 강행하고 있다며  미 당국을 강력히 규탄하였습니다. 

시위가 두 시간 이상 지속되며 어둠이 밀려오자 참 가자들은 준비한 촛불을 밝히며 사드반대,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성주군민과 한국 민중에 대한 응원 과 연대의 의지를 다짐하며 시위를 마무리 했습니다. 멀리 10시간 거리의 켄터기에서 워 

싱턴 디씨까지 시위에 참여해 주신 정 

영철 선생님, 비 오는 궂은 날씨에 2시 

간 운전 하여 오신 팔순의 이복신 선 

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심수후원회 엘에이 동지님들, 장 

민호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36 미주 소식 37 

● 보고 투쟁  

백남기농민 사망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 처벌하라!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행진 중 경찰 

의 고압살수직사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져  

317일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백남기농민이  

9월25일 13시 58분 끝내 숨을 거두었다. 

서울대병원 장례예식장에서 ‘생명과 평화 

의 일군 백남기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규 

탄 범국민대책위원회’는 대표자회의를 갖 

고 대책위 명칭을 이날부터 ‘백남기농민 국 

가폭력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및 살인정권 

무나 명백하다.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주장 하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이 준 힘으로, 더 이상 국민을 짓밟지 말라!”  ● 백남기추모제 참관기  

-백남기 농민 사망에 대해 정부는 사죄하라! -특검 등을 통한 철저한 수사와 책임자 처벌하라! -유가족이 반대하는 부검시도 즉각 중단하라!  -국가폭력 종식과 물대포를 추방하라! 

규탄 투쟁본부’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이어  장례예식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검· 경의 부검영장 재청구를 규탄하고 고인을  두 번 죽이며 사인을 은폐조작하려는 시도 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투쟁본부는 백남기농민 사망을 국가폭력 이라 규정짓고 ▷고 백남기농민 사망에 대 한 정부의 사죄 ▷특검 등을 통한 철저한 수 사와 책임자 처벌 ▷유가족이 반대하는 부검시도 즉 

각 중단 ▷국가폭력 종식과 물대포 추방 등 대정부  요구를 하였다. 

박정희정권의 유신독재에 반대해 싸우다가 4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딸 박근혜정권의 물대포에 의해 쓰 러져 사투를 벌이다 끝내 돌아가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공권력에 의한 명백한 타살이다. 백남기 농 민과 가족들은 지금까지도 정부로부터 단 한마디  사과도 듣지 못했으며 책임자 처벌이나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죽인 것도 모 자라 시신을 넘보고 있다. 백남기 농민께서 공권력 에 의해 돌아가셨다는 것은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사 실이며 그 책임이 정부와 경찰에게 있다는 것은 너 

우리가 백남기다 

손일순_회원 

유난스럽던 여름의 무더위가 갑자기 물러나며 가을 

에 접어든 어느 날. 

우리들의 아버지인 백남기 농부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사경을 헤멘 지 300여일 뇌사 상태에 있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나는 88학번으로 대학 입학 후 많은 학생 노동자  

농민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정의”를 외치는 모 

습을 보았다, 

우리의 농부 백남기씨도 작년 이맘때쯤 전라도에 

서 서울로 농민회분들과 올라와 그토록 바랬던 노 

동자 농민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한 바램에 한  

목소리를 보태고자 했다. 결국은 경찰이 쏜 물대포

38 보고 — 투쟁 39 

 

에 맞아 쓰러져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로 뇌사 판정을 받았다. 북과 장 구를 치며 들녘에서 흥겨워하시던, 신나하시던 신 문 속 사진을 보며 우리의 농부 백남기는 바로 그런  세상을 염원했던 것 뿐인데, 

왜 물대포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을까?

범국민 대회가 있던 10월 첫째 토요일. 나는 오전  내내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나름 핑계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오후에 대학동아리 모임이 잡혀 있어서 40 대 중반 아줌마가 하루에 두 곳을 다 챙기기엔 체력 이 안될 듯 싶어서 집안일 마무리하고 늦게 수원에  가려 했던 저에게 남편이 한마디 했다. 

당연히 갔다 가야지!!!! 

순간 너무 창피했다. 수도권에 산다는 핑계로 참  많이도 무심하게 지내왔구나 싶어서...  

곧바로 서울로 출발해 대학로에 도착해 지하철 계 단을 오르는데 앞사람들이 멘 가방에서 빛나던 노 란 리본 물결은 감동 그 자체였다, 세월호를 기억하 는 사람들의 물결은 바로 농민 백남기의 죽음도 용 서하지 않고 있었다. 

그 누구도 농부 백남기 죽음에 대해서 책임도 지지  않고 사과 한마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리고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반드시 책임자 처벌과  농부 백남기를 두 번 죽이지 않도록 지킬 것이다. 

행진을 끝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길을 나서며  고3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농부 백남기의 죽음을 지키고 있 고 함께 하고 있다. 너도 공부하는 중간 잠시라도 추 도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 보고 

북녘돕기 모금은 계속됩니다!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북녘큰물피해돕기 성금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국내는 1차 마감결과 24,745,000원이 모아졌으며 10월 27일 유엔세계식량계획 한국 사무소를 방문하여 성금을 전달, 북녘동포에게 보낼 것입니다. 미주양심수후원회도  10월 28일 미주지역 WFP로 성금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추가되는 소식은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1차는 마감했지만 년말까지 모금은 계속되니 많은 성원 바랍니다. 

40 보고 41 

양심수후원회와 오감시롱이 함께 하는 가을 역사기행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마라’ 

보성 명문가 정길상 선생님 댁을 찾아서 

 ● 연재-도성기행  

발로 읽고, 눈으로 듣는 서울 이야기 (4) 재미동포 신은미와 박근혜대통령이 한 때 이웃 사촌? 

유영호 _ 운영위원 

보성에는 소설 태백산맥의 문학적 성과를 기리는 태백산맥 문학관이 있 습니다. 그리고 그 소설보다 더 극적으로 올곧게 살아낸 영광 정씨의 일 가의 흔적을 잘 간직한 고택으로 가을여행을 떠납니다. 질펀한 율포 바 다에선 꼬막축제가 한창이고요. 11월초에는 남도의 단풍들이 절정을 이 룹니다. 이 뜻깊은 역사기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언제 2016. 11. 5~6(1박 2일) 

어디로 보성 영광정씨 일가, 낙안읍성, 고즈넉산 산사 등 

회비 회원 10만원, 장기수선생님 5만원 

출발 11월 5일(토) 8시 양재역 서초구민회관앞 

참가신청 02)874-4063 / 010-5219-9117 

최근 청와대 앞 1인 시위가 벌어지는 곳의 동명은 종로구 ‘궁정동(宮井洞)’이다. 이 동명 의 유래는 이곳에 위치한 육상궁(칠궁)과 자연부락 온정동, 박정동 등을 합치며 육상궁 (毓祥宮)의 ‘궁(宮)’ 자 이들 지명의 ‘정(井)’ 자를 합쳐 궁정동이 된 것이다.  

이곳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였던 숙빈 최씨의 신위가 모셔졌던 곳이다. 하지만  그 후로 이처럼 왕을 배출한 여섯 명의 후궁의 신위가 추가되면서 일명 ‘칠궁’으로 불리 는 곳이다. 이들은 후궁이란 지위로 인하여 죽어서도 자신의 남편과 아들이 있는 종묘로  가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육상궁이 위치한 이 일대는 조선 최대의 세도가문이었던 안동김씨의 일파인 장동 김씨의 세거지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에게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로 널리 알려진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 청음 김상헌이며 바로 이곳 무 

청와대 권역의 남서쪽  

모퉁이에 위치한 종로 

구 궁정동

42 연재-도성기행 43 

궁화공원에 이 일대가 그의 집터 

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한편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가 함락되자 자폭한 그의 친형 선 

원 김상용은 바로 옆 동네인 청운 

동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청운동 

에는 그의 집터였음을 알아 볼 수  

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고 새겨진 각자바위가 남아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인물 김삿갓, 김옥균, 김좌진 등 모두 장동김 씨이며 조선후기 왕비는 거의 모두가 장동김씨였다고 할 만큼 세도정치의 최대파벌이기 도 했다.  

현대판 후궁, 안가의 여인들 

한편 이 육상궁 남쪽으로 바로 아래는 청와대 비밀요정이었던 ‘궁정동 안가’가 있던 곳 이다. 김영삼 정부 때 이곳을 폐쇄하고 지금은 일반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잠시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획이 되었던 1979년 10월로 되돌아가 보자. 1960~70년대 는 밤의 정치로 알려진 요정정치가 극성을 부린 시기로 당시 청운각, 대원각, 삼청각, 오 진암, 선운각 등이 그 위세를 크게 떨치고 있었다. 한일협상, 남북적십자회담, 7.4공동 성명 등의 막후에 이곳 요정들이 존재했으며, 급기야 선운각 기생 정인숙이 한강변에서  

아직도 미제로 남은 채 피살되고 만 것이다. 3공화국 때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이동원이 

선원 김상용의 집터임 을 알리는 ‘백세청풍’ 각자바위 

10.26사건 때 현장에  있었던 여대생 신재순 이 현장검증을 위해 나 오는 모습 

2014년 신은미씨는 자 신의 통일토크쇼가 논 란을 일으키자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신 청하였다.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에서 “아마 4공의 비밀을 궁정동이 간직 하고 있다면, 3공의 비밀은 청운각의 기둥에 배어있지 않았나 싶다”고 기록했을 정도 였다. 1965년 한일회담의 일본측 대표였던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썼다. 이처럼 당시의 요정은 단순히 권력가들 의 ‘배설의 욕구’만을 충족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이처럼 음주 가무 속에서 대한 민국의 역사가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이에 박정희는 부정부패척결을 강조하며 요정정 치 엄단을 강력히 지시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 또한 관제 비밀 요정인 바로 이곳 궁정동 안가였다.  

이곳 궁정동 안가를 거쳐 간 박정희의 여인들은 200명이 넘었으며, 당시 “대행사(측근  3~4명과 함께 즐기는 행사)는 월 2회, 소행사(대통령 혼자 즐기는 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 졌다”고 하니 어쩌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처 

럼 권력자들의 음주가무  

속에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상상까 

지 하게 된다.  

박근혜와 신은미, 역설의 공간 

자그마한 한 동네에서 이처럼 커다란 역사를 담고 있는 곳도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궁 정동 이 일대는 일반 국민이 대한민국 최고권력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마지막 물리적  공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가 과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청와대 앞에 서서 자신의 억울함으로 호소하지만 내게 유독 기 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그의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014년 12 월 ‘통일토크쇼’가 소위 ‘종북’이란 마귀사냥에 자신의 조국에서 강제추방 당한 ‘재미 동포 아줌마 신은미’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북한 방문 후 자신의 DNA 속에 내재되 어 있던 통일열망를 새롭게 발견한 그는 졸지에 수구언론들에 의하여 종북세력으로 몰 렸다. 이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이곳에 와 대통령면담을 요구했지만 당시  

청와대는 그를 외면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 청와대에 머물 때 신은미씨 역시 청와대 담장 넘어 살고 있었다. 그러니 결국 둘은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소위 ‘이웃 사촌’일 터인데 현실은 전혀 다른 공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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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살아가 

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 궁정동은 신은미씨 

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 

다. 이곳에 대한 추억을 그는 다 

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저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7 

살부터 서울 종로구 궁정동으 

로 이사왔죠. 그러다 보니 실제 내 어린 추억을 생생히 담고 있는 기억은 궁정동에서 살 던 초등학교 때에요. 우리 집 뒷문을 열면 바로 앞에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근처 

 ●연재-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평양시민 김련희 여성이 말하는 북의 진실 

평양시민-김련희 

이 글은 자주시보에 실린 김련희 씨의 북녘생활을 담은 내용입니다. 남녘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 

으면 하는 바람으로 자주시보와 김련희씨의 동의하에 후원회 소식지에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김 

련희씨는 평양시민으로서 2011년 중국 친지를 방문 중에 남한 국정원의 지휘하에 있는 탈북브로 

커의 거짓말에 속아 남한에 오게 되었습니다. 오자마자 단식을 하며 바로 북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국정원에 요구했지만 들어주지 않아 현재까지 5년째 억류 중에 있습니다. 김련희씨 관련 정보는  

이미 언론에 많이 알려졌고 본 소식지에도 이미 실린 바가 있기에 구체적인 소개는 생략합니다.

신은미씨가 어린 시절  

‘빈 궁’이라고 불렀다 

는 육상궁(칠궁) 

에 칠궁이 있었답니다. 어린 나는 보초를 서고 있던 군인 아저씨들 목마를까봐 수시로  물과 음료수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죠. 또 칠궁은 당시 비어 있어 우리는 이곳을 ‘빈  궁’이라 불렀답니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그 빈 궁 앞을 지나오면서 아이들과 귀신 나온 다고 급히 뛰어 오던 아련한 추억이 아름답게 문신처럼 박혀있는 그런 곳이랍니다” 

이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그가 종북세력으로 몰려 이곳에 다시 찾아왔을 때 마치 자 신이 “흑백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양 초연한 아픔”을 가지고 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그는 대구 경북출신에 독실한 기독교 장로교 신자로서 외할아버지는 국가보안법 제 정을 주도한 3선의 국회의원이었고, 아버지는 육사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시 절 리틀엔젤스로 전세계를 누빈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상류의 집안이다. 이런 환경 속 에서 자란 그가 소위 종북세력으로 몰렸다는 것은 그야말로 반통일세력이 집권하고 있 는 분단된 이 나라에서만 연출 가능한 정치코메디였다. 하지만 이제는 통일만이 우리 민족이 살 길이라는 확신 속에 이러한 현실에서도 통일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 다. 현재 정부는 북한의 수해에 대하여 군사적 이유로 일체의 인도적 지원을 외면하고  

있지만 그는 개인자격으로 수 천 만원의 수해지원금을 모금하였고, 중국을 통해 직접  쌀을 사서 가지고 갈 계획이다. 비록 슬픈 역사가 새겨진 궁정동이지만 이곳에 살던 한  여인 신은미씨에 의해 새롭게 통일의 역사가 쓰여질 것을 기대한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아버지(김 세환), 어머니(조원희)의 1남 2녀 중 장녀로 1969년  11월 21일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대동강 텔레비죤 수상기공장 부문당비서로, 어머니는 평양시 동대원 구역병원 의사로 일하셨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 니 세 분만이 계시던 집에 첫 손녀가 태어난 것은 온  가정의 큰 경사였고 기쁨이었다. 불면 날아갈세라,  놓치면 잃을세라, 온갖 사랑을 독차지 하고 행복 속 에 평양시 동대원구역 삼마동에서 나의 첫 삶은 시 작되었다.  

 

우리 집은 단층주택였는데 본채는 방2칸과 부엌으 로 되어있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3형제가  살고 본채에 잇닿인 사랑채에서는 할머니가 계셨 다. 집주변에 60평(북녘 평방수) 정도의 텃밭이 있어  할머니는 항상 여러 가지 작물과 남새를 가꾸는 일 을 제일 좋아하셨다. 이른 아침에 부엌문을 열고 밖 을 나서면 나보다 더 높은 키를 자랑하며 무성하게  뻗은 오이넝쿨에 매달려 있는 파아란 오이들이 아 침이슬을 함뿍 담고 나를 제일 먼저 맞아주었다. 

그 사이를 지나면 상추, 가지, 고추, 도마 도, 찰강냉이가 분열행진을 하둣 질서정 연하게 줄을 맞추어 있었고 요것들이 바 람에 흔들릴까봐 걱정스러운지 그 둘레에 는 왕당콩(큰강낭콩)넝쿨이 든든하게 울타 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특히 상추와 오이  

가꾸기를 즐겨했는데 그것은 제일 좋아하 는 야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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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당콩이 건강에 제일 좋다며 텃밭에서 수확한 콩 을 넣어 해주시던 밤같이 구수한 밥맛은 지금까지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밥그릇이 들어오면 먼저  왕당콩을 골라먹고 당콩을 안 좋아하는 동생이 끄집 어 내놓은 콩까지 내가 다 모아 먹군 하였다. 막내 녀 동생이 키가 제일 작은데 할머니는 막내가 왕당콩을  싫어해서 키가 작다고 항상 꾸지람하군 하셨다.  

우리집 마당 한옆에는 몇 십 년은 넘었을 아름드리  수양버들이 우아한 잎새를 드리우고 자리잡고 있었 다. 또한 그 높은 가지에 해마다 겨울이면 많은 명태 들이 쇠줄을 입에 물고 가지런히 매달려 있었다. 겨 울 내내 여러 차례 눈비를 맞으며 얼었 

다, 녹았다를 반복하면 명태들은 제김 

에 꼿꼿하게 말라버린다. 그러면 우리 3 

형제는 심심하면 버드나무에 기어올라 

가 명태를 하나씩 챙기고 망치로 여러  번 두드려 먼저 눈알을 파먹고 다음 몸 

통을 뜯어먹군 하였다. 그 맛 또한 별맛 이여서 어린 시절 우리 남매가 제일 즐 

겨 먹던 간식거리였다.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 할머니로부터 해방 전 만주 에서 항일운동을 하시다 일제놈들에게 학살당하신  할아버지에 대한 투쟁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할 아버지는 만주에서 민족주의 량세봉사령과 함께 투 쟁하시다가 1941년 일제놈들에게 붙잡혀 희생되셨 고 할머니는 그분들과 생사를 함께 하며 밥도 해드 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아들 3남 매 중 팔로군에 가있는 두 아들은 중국에 두고 당시  9살이었던 막내인 나의 아버지만 데리고 조선으로  나오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직장생활 하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해 

서 우리 3형제 손자들을 무척이나 사랑해 주셨는데  그래도 맏손녀인 나를 제일 예뻐해 주셨다 우리 아 버지와 어머니는 제대군인들이시다. 아버지는 무용 으로. 어머니는 독창가수로 “전국군무자축전”에 참 가하여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다정다 감하면서도 섬세하고 철저하며 강하신분이셨다. 담 배는 안 피우셨으나 술은 즐기셨는데 지금까지 살 아오면서 술에 취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고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아버지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 결했을까 하고 생각해보군 한다. 아버지는 직총(직 업총동맹)에서 진행되는 전국로동자예술축전 집행 

을 책임지고 참가자들을 인솔하고 백두산도 여러  번 다녀오셨다.  

어머니는 제대 후 신의주의학대학을 나오고 병원의 사로 일하시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구역의 초청 을 받아 방송차를 타고 다니며 노래를 부르시군 하 셨다 어릴 때 방송차를 함께 타고 다니며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듣던 생각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중에서도 초소의 꾀꼴새, 평북연변가, 도라지, 고 사리, 등의 노래가 기억에 생생하다.  

어머니는 나를 딸로, 때로는 친구로 다정히 대해주 

셨고 무슨 일이 생겨도 아버지보 

다 맏딸인 나와 함께 의논하는 것 

을 제일 좋아하셨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만성간염으로 가정에 가장 큰  

걱정거리여서 부모님은 간에 좋다 

는 소의 눈알을 포함한 소고기, 산 

청을 나에게 자주 먹여주셨고 애지 

중지 키워주셨다. 이렇게 온 가정 

의 따뜻한 사랑 속에 우리 3남매는  

유달리 서로 우애가 깊었고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자랐다. 

나는 1976년 9월 1일 7살에 드디어 소(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어린 때를 벗은 당당한 학생이 되었다. 부 모님의 손을 잡고 국가로부터 공급받은 예쁜 교복 을 입고 학교 첫 등교를 했던 그때의 날아갈듯 기쁜  마음은 지금도 심장을 다시 높뛰게 한다. 

우리는 소학교 입학할 때부터 고등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2년에 한번 씩 국가로부터 교복을 무상으로  공급받는다. 

여자 소학교로써 학급인원은 총 25명이였는데 모두  우리 집 동네에 사는 애들이라 함께 소꿉놀이 하며  지내던 가까운 친구들이였다.  

하루는 오전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음악선생님 이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우리들에게 손뼉을 쳐보아 라, 소리를 내 보아라, 하시더니 나를 포함한 12명의  친구들을 음악소조실로 데리고 가셨다. 나머지 친구 들은 체육선생님과 미술선생님이 들어오셔서 각기  자신들의 소조로 데러갔다. 이렇게 학교에 입학하면  각 분야 선생님들이 매 학급마다 돌면서 소질이 있 

 

는 아이들을 골라 소조에서 재능을 키워주신다. 선 생님들에게 선발되지 못한 애들은 그들의 선택에 맡 겨 본인들이 가고 싶다는 소조에 가게 된다.  

이렇게 모든 학생들은 오전에 수업을 마치면 오후 에는 각자 소조들에 가서 과외활동을 한다. 우리가  들어간 음악소조실은 삼면이 악기로 꽉 차있었는데  처음 보는 이상하게 생긴 악기들도 있었다. 선생님 은 우리들에게 해보고 싶은 악기를 하나씩 골라보 라고 하셨다. 나는 한쪽 옆에 듬직하게 있는 드럼이  좋아보여 그것을 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그 악기 는 경음악 기악중주를 할 때 기본 중심이여서 좀 예 쁜 애가 했으면 좋겠다 라며 나에게 바이올린을 안 겨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쁜아이 측에 끼울  수 없는 그야말로 정말 안전하게 생긴 얼굴이다. 우 리 3남매 중에서도 내가 제일 못생겨서 늘 예쁜 동 생들의 미모가 부러웠다.  

이렇게 하여 나는 소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고, 우리는 자신들이 선택한 악기를 하나씩 배 정받고 매일 오후마다 음악소조실에 가서 악기연습 을 하였다. 

(다음호 계속)

48 연재-김련희 수기 49 

6.15산악회 산행기 

도봉산 산행기 

김재선_615산악대장,운영위원 

 

 다소 흐린 날씨지만 18명의 회원이 도봉산 입구에 모였다. 우리 산악회 권오헌 회장님 이 심한 감기몸살로 참석하지 못한다고 전화를 하셨다. 피로감이 짙게 배어있는 목소 리로 오늘 산행 잘 하라고 당부말씀을 하신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 격무에 시달려 몸 에 큰 무리가 오신듯해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하루빨리 쾌차하실 것을 바라는 마음 간 절하다. 오늘은 또 강덕환, 박윤경 회원이 오랜만에 나와 자리를 빛내니 회원들 모두가  

반가이 맞이했다. 왜 그리 무심하냐? 그 동안 뭐가 그리 바빴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오늘 오를 산은 도봉산이다.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산이다. 사족을 조금 달면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한북정맥을 타고 내려오다 한강봉에서 갈라져 도봉지맥이란 이 름을 달고 사패산을 이루고 이곳에 이르렀다. 이 줄기는 우이령을 지나 노고산으로 나 아간다. 북한산 국립공원의 일부로 주봉인 자운봉과 함께 산 전체가 커다란 화강암으 로 이루어져 있으며 풍화작용으로 벗겨진 봉우리들이 솟아 기암절벽을 이루며 절경을  자랑한다. 

올 사람 다 왔음을 확인하고 산악회 깃발을 앞세우고 듬성듬성 물든 단풍을 감상하며  암릉으로 이루어진 다락능선을 타고 정상으로 향했다. 올라가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 만 주말에는 수많은 등산객 때문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 현 명하다. 정상부근에 있는 와이계곡 병목현상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가던 선인 봉이 훤히 보이는 맞은편 망경대로 올랐다. 선인봉에는 날씨가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 고 가을이 가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오르려고 암벽에 산꾼들이 제비같이 붙어 있는 것

이신바예바라는 여자장대높이뛰기 선수가 있다. 아직까지 현역인지 모르겠으나 이 선 수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러시아 출신으로 반듯한 외모와 늘씬한 몸매에 세계신 기록을 여러 번 세우다보니 유명세와 함께 엄청난 인기를 누린다. 라이벌이 없을 정도 로 실력이 워낙 출중하다보니 자신의 기록이 세계신기록이며 마음먹고 뛰었다 하면 또  

자신이 세운 그 기록을 경신하는 순환구조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신바예바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산악회도 최고령 산행신기록이 있다. 자격은 대원들과 같 은 조건으로 코스를 완주해야 한다. 유기진 선생님은 1925년 을축생으로 92세다. 7~8 년 동안 매달 당신께서 몸소 세운 신기록을 경신하셨으니 그 신기록 숫자가 얼마인지  계산하기도 어렵다. 이신바예바 선수의 기록도 대단하지만 선생님의 기록도 이에 못지 않게 소중하다. 매달 봐온 기록이다 보니 당연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정말 대단한 기록이 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제일 빨리 나오셨으며 최고령 산행 신기록을 경신하신 것이다. 

50 6.15산악회 산행기 51 

 

이 한눈에 보인다. 도봉산에서 경관이 제일 좋은 곳으로 이름난 이곳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시장하다는 회원이 다수라 밥먹을 자리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알차고 푸짐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산상강연시간을 가졌다. 강사는 앞에서 도 말씀드린 최고령산행 신기록 보유자이신 유기진 선생님이 맡아주셨다. 선생님께서 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말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보인다.“며 당신께서 살아오 신 삶에 대해 회고를 하셨다. 어머니당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한없는 자부심을 늘 갖고  계시며 후회 없는 한 생을 살아오셨다고 하시면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다 방면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어느 곳에 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항상 남에게 모범 

6.15산악회 미주지부 산행기 

산정호수 둘레길

Kim Piter_미주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 

을 보여주라는 말씀을 하셨다. 다 듣고 싶었지만 빗줄기가 훼방을 놓으니 어쩔 수 없이  못 다한 말씀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서둘러 강연을 마쳤다.  

비가 오는 가운데 돌이 많은 하산 길을 무척 미끄러웠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결국 문 제가 생겼다. 이규재 의장님이 미끄러운 바윗길에서 넘어지신 것이다. 얼굴에 상처가  나고 양쪽다리에도 상처가 났다. 넘어진 자리를 보니 그래도 속으로 그만하기를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회원들이 부축을 해서 겨우 하산을 했지만 팔십 성상 조국 통일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의장님도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듯 기력 없음을 눈으 로 확인하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하산 후 부근 뒤풀이장소에서 유기진 선생님 의 건배제의로 “조국통일을 위하여”라는 힘찬 구호와 함께 건배를 하고 이야기꽃을 피 우다가 11월 낙성대역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10월 정기산행을 모두 마쳤다.  

10월 정기산행이 San Bernardino 국유림에 있는 Rock fall과 Gregory 호수 둘레길에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간 산행지의 샌 베르나디노 국유림은 LA에서는 약 2시간 정도 떨어져 있지만 남 가주에서 최고로 높은 산 San Gorgonio(3506m) 와 많은 산정호수들을 품고 있어 산들 이 웅장하고 계곡은 깊어 수림이 울창한 고산지대로 큰뿔 양, 사슴, 곰과 함께 남가주에 서는 보기 드문 사시나무 군락지가 있고 그 접근성이 좋아서 사시사철 남가주 사람들 에게 야외생활의 즐거움을 주는 곳입니다. 

10월 단풍 산행에는 우리 양심수후원회에 새내기 회원이 되신 이태선님이 함께 해주셨 습니다. 

52 6.15산악회 미주지부 산행기 53 

2시간여 차를 타고 가며 산길은 꼬부랑길이지만 올 

해 가을을 몹시도 탄다고 하신 가을 남자 왕샘의 구 

수한 입담을 들으며 가면, 오가는 시간이 느껴지지 않 

을 정도로 재미와 긴장의 연속입니다. 

울창한 숲속에서 낙엽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를  

내며 흩어지고 떨어진 햇도토리들이 발길에 채여 이 

리저리 구르는 오솔길을 걷습니다. 때로는 산림향이  

코를 찌르기도 하니 산림욕이 따로 없습니다. 산림 속 

에서 치유를 생각해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 때 

문에 참석 못하시는 후원회 회원들도 생각해봅니다. 

봄에는 눈들이 녹아 수량이 풍부한 내를 따라 걷지만  

계속되는 가뭄으로 내가 말라 폭포도 역시나 멈추었 

지만 바위에 정교하게 새겨진 하트모양이 우리를 반 

겨줍니다. 자연이 새겨놓은 하트에서 따뜻한 사랑이  

왕샘에게도 흘러들어 올가을 뻥뚫린 가슴을 사랑으로 채우길 기대합니다.^^ 

왕샘께서 가져오신 빵과 커피로 점심을 하며, 문재인에 대해서 국민이 차려준 밥상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힘없는 야당이 역사 속에 있었는가, 야당에 게서 아무런 희망과 기대가 보이질 않으니 절망이지만 대안 세력 또한 없지 않은가 등 을 이야기하면서 차악을 선택하기보단 새로운 정치세력이 우리의 희망을 대변할 수 있 다면 선거에 못이기더라도 그들을 지원해야 되지 않겠나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레고리 레이크는 사방이 아 

름드리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 

찬 산들에 둘러싸여 있고 가끔 

씩 보이는 단풍나무 잎들이 빨 

갛게 또 노랗게 물들어 있어 가 

을의 정취를 깊이 느낄 수 있습 

니다. 

쾌적한 날씨에 미국 대통령 선 

거도 이야기하면서 트럼프에 대 

 

한 언론의 파상적 공격이 미국 평범한 사람들의 지지도가 트럼프 쪽으로 기울은 영향 은 아니겠는가, 이 거대한 나라의 서산낙일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정책은 실종된 채  상호비방이 난무하니 우리나라 정치판하고 만만치 않게 되었다 등 이바구를 하며 둘레 길을 걸으니 많은 낚시꾼들이 호숫가에서 송어를 낚고 있습니다. 

하늘은 높고 송어는 살찐다..... 이곳의 가을은 송어의 계절입니다. 

이곳의 호수는 물이 차고 맑아서 송어의 힘도 좋고 손맛을 즐기기엔 아주 좋은 낚시터 입니다. 

낚시를 즐기는 저도 평소엔 바다로 나갔다 10월엔 송어를 찾아 산으로 들어갑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이 국유림 안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 Arrowhead(호수의 모양이 화살촉 과 비슷하다하여 지어진 이름)를 방문하여 가슴이 탁 트이도록 넓고 파아란 호수와 아름다 운 알프스풍의 작은 마을에서 열리고 있는 수제맥주 축제도 보며 입맛도 다시고 호숫 가 주변의 값비싼 별장들과 다양한 요트도 보며 눈요기도 즐긴 하루였습니다.

 

56 양심수 현황 57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선생이  

정직과 신용으로 운영하는 양지탕제원에서 정성껏 만든 보약을 판매합니다. 

● 감옥에서 온 편지 ●

이재식 님의 편지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동지님들께 

(* 나라 안팎 어디나 배달해 드립니다.) 

 

 십전대보탕 130g 36봉 ✽10만원 전신강장 보혈작용, 건위 소화작용, 골다공증예방  가미쌍화탕 130g 36봉 ✽10만원 감기, 기침, 몸살, 천식, 보음, 보양, 보혈, 보기  녹용대보탕 135g 60봉 ✽40만원 성장촉진, 기혈강장, 청소년 성장, 수험생  고진대보탕 135g 60봉 ✽40만원 여성갱년기 장애, 강장, 보혈, 보기  가미쌍금탕 140g 60봉 ✽45만원 장년남자 보기 강장, 술 드시는 남성 보약 

네이버에서 ‘양지탕제원’을 검색하세요. 

문의 및 주문 : 02-888-6231, 010-8715-7398 

안녕하십니까. 인사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서울구치소에 있는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구미지회장 이재식입니다. 

매달 보내주신 영치금, 소식지 정말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염치없이 받을 줄만 알고 이렇게 감 사의 글 한 번 쓰지를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후원회 회장님 이하 여러 동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요즘 날씨가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상당히 큽니다. 후원회 동지님들 언제나 건강 조심하시고  항상 행복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동지님들 덕분에 몸 건강히 잘 있다가 다음 주 22일 토요일 출소를 합니다. 그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또 열심히 이 땅의 민주주의가 바로 설 수 있도록 투쟁하 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드리며 다시 한 번 건강 기원합니다. 후원회 회장님 동지님들 감사합니다. 언 제나 건강하시길.. 

2016년 10월 12일 

서울구치소에서 이재식 드림 

58 감옥에서 온 편지 59 

수고가 많으십니다. 

● 감옥에서 온 편지 ● 송 훈 님의 편지 

존경하는 안병길 회장님께 

● 감옥에서 온 편지 ● 이병진 님의 편지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음에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광주교도소 송훈 5084, 69년생입니다.  

경제사범이지만 지금은 계란으로 바위를 수년 째 <검사, 경찰, 감사원 등을 상대로> 치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강영수 회장과 같은 사동에 있고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저라는 인간이 본디 나약하고  모순이 많으며, 죽는 날까지도 밥값조차도 못하고 세상을 뜰까 봐서 두려웠는데, 징역을 오고 나서 이와 같은 점들을 하나씩이라고 스스로 일깨워 보려고 노력 중에 있습니다. 지금은 한양 그룹 이기승 회장을 상대로 싸우고 있으며 몇몇 검사 분들을 상당히 귀찮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럼. 

손승주나 제 명의로 조금 송금을 했습니다.  

2016. 10. 12 

송 훈 드림. 

※ 송 훈 선생님 보내주신 편지와 입회비 그리고 후원금 잘 받았습니다. 송금의뢰서 와 확인요청의 두 번째 편지도 잘 받았습니다. 양심수후원회에 관심 가져주시고 귀 한 후원금을 보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후원금은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위한 활동 그리고 통일운동에 쓰입니다. 같은 사동에 계시는 양심수 강영수 님께도 연대의 마음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양심수후원회 사무국) 

안녕하세요? 

지난 추석 전에 잠시 뵙고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9월호 ‘후원회소식’에 실린 “전국양심수 면회 공동행동 참여기”를 읽으면서 국가보안법 철폐 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해 애쓰시는 회장님과 후원회에 고마운 마음 가득 담아 보냅니다. 

그런데, 올해 전국 양심수면회 공동행동에 이병진 석방모임 간사인 최상철님(노동사회과학연구 소 운영위원)이 배제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병길 선생님을 통해서 후원회에 확인해 보니 순 회접견이 여러 단체가 공동주관한 사정상, 모 단체의 거부로 참가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오늘 (10월15일자) 전자서신으로 받았습니다. 

최상철 간사님은 저를 지지하는 모임의 간사로 7년 넘게 활동하셨고 매년 면회 공동행동에도  참석하셨었는데 올해에 갑자기 행사에 배제되었다고 하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공동행동의 명분과 의미는 ‘단결’과 ‘연대’인데 특정단체 한 곳에서 반대한다고 참여를 배제시 킨 일이 올바른 결정이었는지요? 

또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에게 미리 알려주시거나 행사 이후라도 알려주셨다면 제가 실망하 지 않았을 텐데 한참 지나서 그런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하고 있습니다. 

양심수에게 힘을 주려는 공동면회 행사가 분열의 계기가 되고 양심수들에게 상처와 불신을 주 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이 사안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왜 이런 황당한 일 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수감된 수인들은 투쟁의 최전선에 서있는 이들이고, 그런 양심수들을 가장 앞장서서 옹호하고  보호하는 양심수후원회는 가장 순결한 조직입니다. 

이런 저의 믿음과 신뢰가 깨지지 않게끔, 이번 일에 대해서 명백하게 정리하고 가야겠습니다. 회장님을 직접 찾아뵙고 말씀 나누면 좋은데 갇혀있다는 것이 무척 속상하네요. 편지로라도 회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일교차가 큽니다. 회장님 건강 조심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이병진 올림 

2016년 10월 17일. 

60 감옥에서 온 편지 61 

후원회 여러분 안녕하세요? 

● 감옥에서 온 편지 ● 김덕용 님의 편지 

● 감옥에서 온 편지 ●

10월 7일 저의 ‘경비처우급 상향 조정 불허취소’소송이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렸습니다.  

김병길 선생님께서 와주셔서 마음 든든하게 재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김병길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l 

재판 시작과 동시에 재판부는 저의 소장을 화면에 띄운 후 소송취지를 삭제 변경하였습니다. 

저의 소송취지는 1. 경비 처우급 상향조정불허를 취소하라. 2. 경비 처우급을 샹향 조정하라.  였습니다. 이 중‘경비처우급 상향조정’요구는 행정소송상 소송 각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삭 제한 후 소송을 진행하였습니다. 

재판부는 대구교도소에 ‘전국의 국가보안법 수용자의 작업, 교육, 실태’의 제출을 명령하였 습니다. 

대구교도소는 그런 내용은 없다고 하였으나 재판부는 ‘유의미’하니 제출하라고 명령하였습니 다. 그리고 재판부는 경비처우급 차이에 따른 처우의 변경에 대하여 자세하게 제출하라고 대 구교도소에 지시하였습니다. 

또한 대구교도소에서 제출한 저의 ‘소득 점수 평가 통지서’에 기재된 ‘작업, 교육’항목에 점수 가 기재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작업, 교육’에 전혀 종사하지 않았는데 왜 ‘작업, 교육’항목에 점수가 기재되어 있는가?라고  대구교도소에 재판부는 질문하였고 대구교도소는 ‘규정상’ 기재하였다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재판부는 쟁점중의 하나로 판단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수용자에 대한 작업, 교육 여부에 대하여 대구교도소는 제가 작업, 교육을 신청한  적이 없고, 대구교도소 수용자 사정상 제가 작업, 교육 대상자로 선정되지 않은 것뿐이지 국가 보안법 수용자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답변하였고 저는 대구교도소로부터 작업, 교육에 대하여  고지받은 적이 없으며 전국의 국가보안법 수용자중 작업, 교육에 종사하는 수용자는 이전에 도, 현재에도 없다고 발언하였습니다. 

이에 재판부는 ‘전국의 국가보안법 수용자에 대한 작업, 교육’실태 제출을 지시한 것입니다. 

 

법리에 대하여 잘 모르면서 변호사 없이 재 판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 하나 차근차근 짚어나가니 최소한 실태규명 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행정심판을 기각당한 후 6월 27일 행정 소송을 제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 12월까지의 소득평점을 기준으 로 하여 2017년 1월 10일, 5/6기간의 경비처 우급조정을 받으시는 대구교도소의 이상호 님에 대한 소득점수가 7월, 8월, 모두 5점으 로 산정되었다고 합니다. 

7점이 넘으면 2급에서 1급으로의 경비처우 

62 감옥에서 온 편지 63 

● 감옥에서 온 편지 ● 

급 변경이 가능한데 경비처우급 승급이 불가능하게 되신 것입니다.  

● 감옥에서 온 편지 ● 

김덕용 님의 편지

후원회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도 계속 7점을 유지하다가 9월부터는 6점으로 산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5/6경비처우급 변경은 2017년 6월입니다. 대구교도소는 국가보안법 수용자의 경비처우 급 승급을 전면 불허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른 분들도 본인의 소득점수를 확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조처가 대구교도소만의 상황인지 전국적으로 동일한 상황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모든 분들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부당한 차별에 대하여 투쟁하시기 바랍니다. 

2016. 10. 17  

대구교도소에서 김덕용 드림 

급한 전갈을 드립니다. 2016년 12월까지가 형기의 5/6이신 대구교도소 이상호님의 소득점수 가 7,8월에 7점에서 5점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에 저도 확인하여 보니 9월부터 6점으로 매겨지 기 시작했습니다. 10월 18일 분류심사과와 면담을 하였습니다. 

밝혀진 사실은 2016년 7월 하순경 법무부는 ‘분류처우 업무지침’을 새로 내렸습니다. 변경된  내용을 국보법과 같이 원천적으로 작업, 교육을 받지 않은 수용자의 작업, 교육 점수는 기존 3 점까지 줄 수 있던 것을 1점으로 낮추었습니다. 

앞으로 국보법 수용자는 형기 2/3, 5/6기간 어느 중에도 경비처우의 승급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국보법 수용자의 경비처우급 승급은 앞으로 없습니다. 모든 분들은 본인의 소득점수와  승급여부를 확인하시고 문제가 된 ‘분류처우 업무지침’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상호님은 바뀐 지침으로 6점을 올 12월까지 계속 부여할 경우 6.5점으로 반올림하면 7점이  됩니다. 그래서 5점이 부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호님도 공식적으로 승급 불허를 확인 하셨다고 합니다.  

문제가 되는 교도소 수용자에 대한 작업은 한국에서는 ‘강제노동’‘노예노동’의 여지가 큽니 다. 작업에 종사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는 것은 ‘강제노동’에 해당합니다. 

노동의 시간에 비하여 터무니없는 대가는 ‘노예노동’에 해당합니다. 이는 유엔에서 금지하고  헌법에도 위배되는 일입니다. 

모든 분들 대책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2016. 10.19 대구교도소에서 

김덕용 올림 

64 감옥에서 온 편지 65 

1일  

이런 일이 있었어요 

 2016년 9월 활동 

성, 이종윤, 류제춘) (소식지299호 실림) 

심리로 김성윤목사에 대한 국가보안법 용 공안탄 압사건, 증거조사 디지털저장매체등(권오헌 류제춘,  김련희 외) 

7일 

●사당역인근 보리밥집에서 ‘양원진선생님 미수생 일축하(양원진, 강담, 김영식, 박희성, 유치자, 권오헌, 김 호현, 노혁, 김길자, 류경완, 류제춘, 이규재, 노수희, 이경원,  김련희, 이정태, 김영승, 정국철 외) (소식지 299호 실림) 

문 발표 기자회견’을 열다. 원진욱 사무처장 사회로  김승호, 전태일 사이버노동대학대표, 권오헌 양심 수후원회명예회장, 정해열 사월혁명회 공동대표, 이 규재 범민련남측본부의장 등 결의발언, 노수희 범 

남본 노수희 부의장이 남·북·해외 공동결의문을  낭독하다(박희성, 권오헌, 류제춘, 김련희 외) 사진1 ●종로탑골공원 앞,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전원 석방을 위한 민가협 1089회 목요집회, 권오헌 여는 말, 홍순석 내란음모조작사건 피해자, 홍순석 출소  발언 등이 있었음(권오헌 외) 사진2 

●광화문 미대사관 앞, 환수복지당 주최로 ‘환수복 지당 대변인구속, 정치탄압규탄 기자회견’ 송무호,  이적, 권오헌, 한명희,(환수복지당 대표)등 규탄발언 

과 부대변인의 성명서 낭독이 있었음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미주본부 장민호·김은경 님 화촉 축화꽃을 보냄 

●탑골공원 앞 ‘국보법철폐와 양심수전원석방을 위 한 민가협1088회 목요집회’ 권오헌 명 

예회장 여는말, 한영수 대선무효투쟁대표 등 결의 발언이 있었음 (김영식 박희성 권오헌 외) 

●면회공동행동 전체일정참가자(박희성 안병길 이정 태)는 부산구치소에서 기자회견 및 양심수를 면회.  부분일정참가자(권오헌 김영식 김련희 류제춘)는 대구 로 합류, 숙소에서 지역선생님인사, 교회숙소와 박 창숙님 집 나누어서 숙박.  

2일 

●대구교도소 앞 ‘2016추석맞이 양심수면회공동행 동 기자회견’ 마치고 대구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덕 용, 이상호, 김성훈 등 양심수 면회하다. 

●대구교도소 앞 2016추석맞이 양심수면회공동행 동 전일정 마치고 해단식. 안동교도소에 갇혀있는  전식렬, 윤경석 양심수 면회하다(김영식, 권오헌, 박희 

3일 

●서울청계광장 ‘사드한국배치 저지 수도권 집중집 회’(권오헌) 

5일 

●노사과연 최상철 공동행동 문제제기‘부분참가 거 부건’ 질의서를 공동행동에 보내다. 

●낙성대 ‘만남의집’, 9차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운영 위원회가 열리다. 안병길회장 김혜순부회장 류경완 부회장, 이정태위원 도상록위원 유영호위원 류제춘 사무국장 참석. 김길자 김재선위원은 위임하다. 8월  

재정보고와 활동보고와 ‘만남의집 거주 통일애국열 사 합동추도식’ 등에 대한 사업계획을 논의하다. 

6일 

●여의도국회 앞 사드한국배치 저지 전국행동주최 로 ‘국회 사드특위구성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 는 사드배치철회에 나서라’고 촉구하다. 한주희 민 변변호사, 이준혁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백성민  

민주노총 통일위원장 등 결의발언. 김은주, 김 애 기 자회견문 낭독하다.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제3형사부(재판장 윤광섭) 

8일 

●명동향린교회에서 범민련 남측본부주최로 ‘미군 강점 71년에 즈음한 범민련 남·북·해외 공동결의 

●광화문 북측광장, 뮤지컬 ‘화순’ 관람 (김재선 홍휘 은 류경완 김익 리정애 류제춘 외) 

사진 1

사진 2 

66 이런 일이 있었어요 67 

9일 

●영등포 민중연합당 당사 ‘2016 제4차 고문, 자문 위원 간담회(권오헌) 

●‘구금시설 교정관련 법규집’ 일반수에게 우편발 송하다(도상록위원) 

10일 

●광화문 미대사관 앞 환수복지당 주최 ‘양고은 대 변인 cctv감시 인권유린, 서울구치소 소장, 보안과 장, 파면촉구 기자회견, 송무호, 이적, 권오헌, 한명 희대표 등 규탄발언과 기자회견문 낭독이 있었음 (권오헌 외) 

11일 

●연세대병원 장례예식장, 통일원로 박상순 선생 빈 소 문상(권오헌) 

12일 

●연세대병원 장례예식장 양원진선생님 누님 빈소  문상(김영식, 박희성, 권오헌 김영승, 김현수, 유영호, 류경 완 외)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 ‘2017민주평화포럼  창립총회 (권오헌) 

●전국 양심수 49명에게 영치금을 보내다. 

13일 

●낙성대 ‘만남의집’에서 원불교 재비 전달식, 양측  관계자와 장기수 선생님들 함께 식사 함께하다. (소 식지299호 실림) 

15일 

●민족명절 추석,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선생님들  모시고 회원들 식사 함께하다.(양원진, 김영식, 박희성,  

류경완, 홍휘은, 김련희, 이창기, 소수영, 권오헌 외) 

16일 

●망우회 공원 묘역, 고 최백근선생 묘소 참배하다 (황남수, 김영옥, 김익흥, 박윤철, 권오헌) 

●강북 번3동으로 박정숙 선생님 찾아뵙다.(김영옥,  김익흥, 박윤경, 모성용, 강경태) 

17일 

●경기도 파주시 청아추모공원에서 ‘고 김병원선 생 11주기 추도식’이 진행되다. 추도의례에 이어  곽정은 남민선 동지의 약력소개, 김영승(범민련),  권영근(남민련), 노세극(안산지역단체대표)등 추도말 씀, 고인의 아드님 유족인사말 등이 있었음(김영옥,  권오헌, 김부섭, 김경중, 권영호, 곽선숙, 박미옥, 이단아,  김난영 외) 

18일 

●고 류종인선생 49재 서울시립공원묘지 추모원에 서 있었음 

20일 

●권오헌 명예회장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사회배 출 북종업원들’ <통일뉴스>에 기고  

22일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 수전원석방을 위한 민가협 1090회 목요집회’ 여는 말 권오헌, 환수복지당 부대변인 등 결의 발언이 있 었음 

24일 

●‘만남의집 거주 통일애국열사 합동추모제’-안회 

 

장인사말, 권오헌 명예회장, 이규재 범민련의장, 한 충목 진보연대대표, 김교영 장기수선생님께서 추도 사를 하다. 자평통 민가협 회원등 40여명 참석(소식 지 299호 실림) 

25일 

●6.15통일산악회, 서울서대문 안산을 등반하다.  

사진3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행진 중 경찰의 고 압살수직사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져 317일 깨어나 지 못하고 있던 백남기농민이 끝내 숨을 거두다(13 시 58분)  

26일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우리겨레 하나되기 운동 본부’ 등 시민단체 공동 기자회견을 열다(권오헌 외) ●서울대병원 장례예식장에서 ‘생명과 평화의 일군  백남기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규탄 범국민대책위 원회’는 대표자회의를 갖고 대책위 명칭을 이날부 

사진 3 

터 ‘백남기농민 국가폭력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및  살인정권규탄 투쟁본부’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이 어 장례예식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검·경의 부 검영장 재청구를 규탄하고 고인을 두 번 죽이며 사 인을 은폐조작하려는 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다.(권오헌) 

28일 

●권오헌 명예회장, 주권방송(6.15TV)의 ‘통일콘서 트 황선의 살아있는 통일이야기‘에 출연, ‘북 큰물피 해지원 모금활동’과 관련된 의견 나누다.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조선반도 평화와 자주통 일을 위한 남·북·해외 정부, 정당, 단체, 개별인사  연석회의와 관련한 ‘연석회의 추진기획단 워크샵이  진행되다.(권오헌) 

29일 

●경기도 안양교도소 앞에서 ‘이석기의원 내란음모  사건 피해자 구명위원회’ 주최로 김근래동지의 출

68 이런 일이 있었어요 69 

소 인사말 등이 있었음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백남기농민  사망 국가폭력규탄 시국선언’발표 기자회견이 진행 되다. ‘시국선언’에서는 ▷고 백남기농민 사망에 대 한 정부의 사죄 ▷특검 등을 통한 철저한 수사와 책 임자 처벌 ▷유가족이 반대하는 부검시도 즉각 중 단 ▷국가폭력 종식과 물대포 추방 등 대정부 요구 

사항을 발표하다.(권오헌, 강담, 류제춘) 사진4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민가협 1091회 목요집회를 열다.  권오헌 여는말, 정현찬 카톨릭농민회장과 이경실 (이석기의원누님) 격려 발언 등 있었음. 

●서울대병원 장례예식장으로 고 백남기농민 빈소  문상하다.(양원진, 박희성, 안병길, 유영호, 이경진, 류제 춘, 권오헌 외) 

●공과금 재산세 등 납부하다. 

30일 

●미주와 양심수 그리고 전국 회원에게 소식지 299 호 발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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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02) 874-4063 ■전송 (02) 888-4470, 010-5219-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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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회비 약정액 ŧ 매월 1만원 ŧ 매월 2만원 ŧ 매월 3만원 

ŧ 매월 5만원 ŧ 기타 ( )원 

계좌 번호: 은행: 예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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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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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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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신상정보의 비밀은 철저히 지킵니다. 

* 후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70 71 

● 재정보고 — 2016년 9월 

단위 : (원) 

 수입 내역 수입 총액 17,237,083  현 금 780,000 

 CMS 2,210,000 

 미주지부 1,351,500 

 SC지로 110,000 

 농 협 1,490,000 

 하 나 30,000 

 국 민 10,460,000 

 차입금  

회비수입계 16,431,500 

전월이월 805,583 

 지출 내역 지출 총액 13,045,370 양심수 관련 양심수 영치금, 소식지 발송, 면회사업 등 1,853,200 

출소장기수 관련 만남의집 운영비, 출소 장기수 관련 지원 1,754,160 

소식지 관련 소식지 제작 및 발송 

사무국 활동 상근일꾼 활동비(활동비, 상여금, 보험) 1,550,000 

연대사업 기자회견, 집회, 연대단체 분담금 등 520,000 

교통・통신 인터넷, 전화 및 통신 요금 등 124,640 

회원사업 및 운영 회원 경조사비, 회원사업, 이체 수수료 등 1,243,370 

차입금 반환 6,000,000 

16,431,500(수입) - 13,045,370(지출) + 805,583(전월이월금) 차기 이월액  4,191,713

열심히 회비를 내주시는 회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로로 회비를 내주시는 회원님들께 부탁드립니다.  

은행납부 시 지로용지에 성명을 정확하게 기재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명을 확인할 수 없어 소식지에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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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소식지 298호(2016년 8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6.09.07 2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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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소식지 295호(2016년 5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6.06.22 1990
62 소식지 294호(2016년 4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6.05.16 697
61 소식지 293호(2016년 3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6.04.08 2681
60 소식지 292호(2016년 2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6.03.14 819
59 소식지 291호(2016년 1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6.02.05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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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소식지 286호(2015년 8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5.09.11 734
53 소식지 285호(2015년 7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5.07.30 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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