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시절부터 길음동 대우여관까지

  • 민병래 작가
  •  
  •  승인 2020.10.14 11:00

 

빨치산 시절부터 길음동 대우여관까지 내 인생이야기를 남깁니다.

나는 올해 구십 사세의 김교영!

▲거실에서, 김교영 선생의 거실은 마치 화원과 같다 [사진 :  민병래]
▲거실에서, 김교영 선생의 거실은 마치 화원과 같다 [사진 : 민병래]

1952년 1월 9일 이른 아침부터 세석평전 아래 거림골에선 경남도당 긴급회의가 열렸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당과 사회단체는 소조로 나누어 산개하고 알아서 피신하고 알아서 살아 온다”는 간명한 결정이 내려졌다.

그날 저녁, 경남도민청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나는 조장이 되어 지리산 천왕봉의 동쪽에 있는 써리봉을 떠나야 했다. 내가 맡은 조에는 식사담당을 했던 여성 동지들과 통신 일꾼, 이제 막 환자트에서 돌아와 겨우 걸을 수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이고 무장을 한 대원은 불과 세 명뿐이었다. 도당은 주요 문서를 챙겼고 식량과 무기를 비장했다. 소조로 나뉜 모든 조들은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와 포위망 바깥의 인근 산을 목표로 출발했다. 도당에선 소조마다 비상미로 쌀 한 되와 생콩 한 되를 주고 비상선 1,2,3,4 네 개를 알려주었다.

나는 써리봉을 출발하면서 산청과 하동 두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토벌군이 지펴놓은 장작불은 온 산을 에워쌀 듯 불타고 불길은 구불구불 동아줄처럼 이어졌다. 그 뒤로는 트럭과 지프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벌판 가득해 금세라도 지리산을 덮칠 것 같았다.

52년 1월 10일로 예정된 국군의 ‘빨치산토벌’ 2차 공세는 규모가 대단했다. 동부전선에 있던 수도사단과 8사단 그리고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산하 5개 경찰연대와 국군 2개 예비연대가 동원되었다. 뿐 아니라 사천비행장의 제1전투 비행단도 출격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 외 의용경찰대나 사찰유격대까지 합하면 무려 4만 명이 넘는 대 병력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광양의 백운산까지 물 샐 틈 없이 에워쌌다. 51년 7월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이 열리면서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이승만정부는 전방 병력을 동원해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수립한 것이다.

조원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눈은 무릎까지 올라 차 있고 바람은 웅웅거리며 울부짖어댔다. 갖고 있는 무기래야 아카보노 소총 세 자루에 탄약 몇십 알이 전부. 나는 무장정치공작대장, 척후대장을 해 본 터라 자신이 있었지만 주로 후방에 있던 조원들을 데리고 사선을 뚫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무엇보다 발들이 성치 않았다. 고무신을 전선 줄로 동여매었거나 짚신들을 신고 있어 동상이 심한 대원이 여럿 있었다. 나는 궁리 끝에 뻗치기를 택하고 거림골에서 대성골로 넘어가는 음지를 향해 갔다.

음지 쪽은 눈이 한길이나 쌓여있어 수색하기 쉽지 않고 폭격이 주로 양지쪽을 향했던 지난 작전을 되짚어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기울기가 얌전한 비탈에 눈을 치우고 나뭇가지와 낙엽으로 바닥을 다져 열다섯 명이 웅크리고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그 위로는 이불 홑청으로 쓰던 하얀 광목을 덮개로 펼쳤다. 눈과 같은 색깔이니 위장도 되고 바람막이도 되었다.

하루에 한 번 생콩 다섯 알과 쌀 서른 톨씩을 나눠줬다. 생콩은 배고픈 가운데 먹으니 비리지 않고 달았다. 51년 12월의 1차 공세에 비춰보면 2차 공세도 보름 정도가 될 것이라 예상하며 아껴아껴 먹었다. 눈을 떠서 물 대신 먹었고 추위는 불을 피울 수 없으니 등을 기대고 앉아 서로의 체온으로 버티며 하루 종일 동상환자들의 발을 주물렀다.

1월 10일 새벽부터 거림골과 피아골 등 모든 계곡과 능선으로 압박이 시작되었다. 헬리콥터가 선무방송을 하며 투항을 권유하는 전단지를 뿌리고 비행기에선 폭탄이 떨어졌다. 대성골 쪽에서는 쉴 틈 없이 총소리와 포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바심이 났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현상선생님이나 도당간부들은 안전할까? 이번 공세를 어찌어찌 넘기더라도 다음 공세는 어찌한단 말인가?” 유격대가 국군사단 1~2개를 묶어둔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지만 정전협정이 시작되며 퍼진 불안감대로 전방의 병력이 동원되어 지리산을 둘러싸니 그저 독 안에 든 쥐였다. 지리산이 넓다고 해도 사방 40km 안팎 거리여서 주요 능선만 장악당하면 대오는 각개 격파될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당분간 공세를 버텨내더라도 언젠가 타결될 정전협정 과정에서 빨치산의 존재가 어떻게 다루어질지에 대한 근심도 컸다. 조선인민군의 낙오병으로 인정되어 안전한 귀환이 열릴 것인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는 무장집단이 되어 끝내 죽음으로 내몰려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월 하순이 다 되어서야 2차 공세는 끝났다. 총성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우리 조는 천막을 걷고 나왔다. 여성 동지들은 손뼉을 치고 서로 얼싸안았다. 나는 뒷일을 부조장에게 부탁하고 대성골로 마구 달려갔다.

54년 1월 9일 함양군 서상면 뒷산에서 체포되었다
“야 새끼야, 일어나! 이 놈 아주 코를 골고 자빠졌네” 

나는 퍼뜩 잠이 깨었다. 착검된 칼 등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파고 들었다. 팔뚝으로 햇살을 가리며 일어서는데 얼핏 보아도 대여섯 명의 국군수색대가 빙 둘러싸고 있었다. 내 몸에 품었던 K2 소총은 이미 수색대 손에 들려 있었다.

내가 덕유산에 가게 된 것은 53년 4월, 지리산에서 경남도당의 송광일부대 정치부 조직부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당시 김삼홍 도당위원장은 나에게 “덕유산부대가 와해직전이다. 지리산에서 인원을 보충해줄 테니 박문학동지와 함께 가서 덕유산 부대를 재건하라”고 임무를 줬다.

부대장에 박문학, 예하에 26명으로 이만춘부대, 28명으로 강동희부대, 본부요원 5명 총 60명으로 덕유산 부대를 새로 꾸렸다. 나는 정치위원을 맡았다. 예전 같으면 부대를 새로 편성할 때 결의도 다지고 훈장도 수여했지만 빛 바랜 진달래 몇 송이와 남덕유산에서 불어오는 안개비만 지켜보는 출범이었다.

53년 봄, 지리산·덕유산 일대의 빨치산 세력은 사실상 소멸상태에 이르렀다. 52년 1월 공세로 남부군 직속 81사단과 경남도당 57사단은 거의 궤멸했다. 당시 나는 조원들과 눈구덩이 음지에 숨어 목숨을 건졌지만 1월 18일에 주력군이 대성골에 포위되어 박격포와 네이팜탄의 집중폭격을 받았다. 결국 남경우 도당위원장을 비롯 수뇌부와 핵심 군사력이 전멸당하다시피 했다. 이때 이후로 빨치산은 ‘조선인민군 유격대’라는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함경남도 영흥군이 고향이었던 나는 덕유산 부대 시절인 53년 7월 휴전협정의 타결소식을 듣고 낙담했다. 고향에 돌아가리라 기대했건만, 협정문에는 유격대의 지위나 안전귀환에 대해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었다. 고약하게도 토벌대가 뿌리는 전단에는 “빨치산은 버림받았다”는 문구를 큼지막하게 인쇄해 대원들을 자극했다. 다들 궁금해하고 의아해했지만 “중앙당이 뜻이 있겠지요”하고 얼버무리는 분위기였다.

9월에는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동지가 피살되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그 후로 야밤에 도주하는 동지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때마다 터를 옮겨야 했고 국군 5사단의 압박은 날로 심해져 보급투쟁 나가는 게 목숨을 건 작전이 되었다. 미래가 없는 단순한 연명, 대원들의 어깨에 내리는 덕유산의 달빛은 파리했고 멀리 향적봉은 묵언수행만 할 뿐이었다.

▲장기수 어르신들과 함께 한 김교영 선생. 맨 오른쪽 중절모를 쓴이다[사진 : 김교영]
▲장기수 어르신들과 함께 한 김교영 선생. 맨 오른쪽 중절모를 쓴이다[사진 : 김교영]

53년 11월 29일 나는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향했다. “경상북도가 속해있던 4지구당에서 5지구당으로 온 중앙단 문건을 조병화 위원장에게 전달하는 임무 때문이었다. 연락원 둘과 예하부대장이었던 강동희를 포함 넷이 출발했다. 중간연락소인 떡깔산에서 하루 자고 지리산 조개골 쪽에 새벽녘에 도착했다. 도당연락부장인 임정택에게 서류를 넘겨주고 야간행군으로 피곤한 몸을 뉘었을 때 총소리와 포성이 울렸다. 12월 1일, 5사단 토벌대가 또다시 공세를 시작한 것이다. 총소리는 불과 몇백 미터 앞이었다.

“김동지, 일어나요. 적정이 코앞입니다” 임정택 부장이 다급하게 나를 깨웠다. 나는 총과 배낭을 둘러메면서 옆에 누웠던 강동희를 일으켜 세웠다. 20명 남짓 되는 연락부성원들은 문서를 챙기느라 바빴다. “촛대봉으로 간다”는 외침에 비탈을 뛰기 시작했다. 지리산의 겨울답게 나뭇잎은 이미 다 떨어져 몸을 감출 수가 없었다. ‘쉬식’ 총알이 귓불을 스치고 매서운 골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뒤에서는 “계곡쪽으로 밀어붙여”라는 고함 소리가 등덜미를 잡아채듯 다가왔다. 황급히 뛰면서도 담요를 말아 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5사단 토벌대는 주요 골짜기 깊숙이 포진하고 야간에도 하산하지 않으면서 작전을 계속해 연락 부대와 나는 한 달 넘게 도망을 다녀야 했다. 비상식량도 거의 바닥난 상태이고 나는 짐이 되는 것 같아 임정택 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강동희와 덕유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수행했던 강동희가 “함양군 장항리에 우리 집이 있는데 조금 돌더라도 들려서 식량을 구해가지요. 지금 가면 한밤중에 닿을 테니 남의 눈도 피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5사단 포위망을 어렵사리 뚫고 강동희 고향마을 뒷산에 도착했다. 잠깐이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를 보내며 나는 어둠 속에 웅크렸다. ‘아차! 시간약속과 비상선을 정하지 않았네’ 내가 탄식했을 때는 이미 그의 뒷모습에 달무리가 가득했고 먼 동네의 개 짖는 소리가 이마저도 삼켜 버렸다.

강동희를 기다리는데 1월의 한기는 온 몸에 파고들었다. 어깨가 떨리고 잇몸이 딱딱 부딪혔다. 동상기가 있었던 오른 쪽 발가락들이 에렸다. 이미 돌아올 만한 시간도 한참 지난 터여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조각 달빛 하나 의지하고 남덕유산을 향해 움직였다(그 시각 강동희는 아버지의 신고로 마을의용대에 잡히고 만다, 나중에 남원포로수용소에서 만났다).

가는 내내 나는 걱정이 앞섰다. 지리산 부대에게 짐이 되기 싫어 돌아섰지만 60명에 불과한 덕유산부대가 온전할지 지금 돌아가면 만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덕유산을 출발할 때 정한 비선은 이미 한 달이 넘은 터라 의미가 없었고...

강동희와 만나기를 포기하고 덕유산을 향하던 나는 밤에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기습당하며 잃어버린 담요가 못내 아쉬웠다. 담요만 덮어도 눈을 붙일 수 있건만... 결국 익숙하지 않은 지형임에도 밤에 이동하고 낮에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은신했다.

체포되던 53년 1월 9일은 함양군 서상면 그러니까 강동희의 집 유림면에서 약 40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덕유산 코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몇 몇 무덤이 있고 그 옆에는 초막이 있었다. 슬그머니 들어가 보니 눈먼 부부가 묘지기를 겸해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청해 밥 한 그릇과 물김치를 얻어먹었다. 53년 12월 1일 이래 근 40일 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밥이었다. 생쌀을 씹고 어느 정미소에선가 겨 껍질에 남은 낟알을 긁어 먹으면서 버틴 시간들이었다. 모처럼 한술 밥을 먹었더니 오랫동안 못 잔 잠이 밀려왔다. 나는 묘지 근처에서 웅크려 햇빛을 쐬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빨치산은 늘 포위와 기습의 위험 속에 있었기에 잠을 잘 때도 항상 신발을 신고 잤다. 또 보초가 졸면 즉결처분한다는 원칙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오 내에 있을 때도 참아내기 어려운 졸음을 낙오병에 불과한 내가 견디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잠깐 동안의 잠속에서 나는 설사로 고생하는 꿈을 꿨다. 지리산 입산 지시를 받은 날, 어차피 산에 들어가면 제대로 못 먹을 터이니 배불리 먹고 들어가자고 몇몇 동지들과 돼지고기 몇 근을 사서 우격다짐으로 먹었다. 과식한데다가 산에 들어간 첫날 한뎃잠을 잔 탓인지 다음 날부터 설사가 심했다. 용변을 보다가 갑자기 공격을 당해 바지춤을 제대로 묶지도 못하고 도망가는 꿈이었다. 수색대의 고함에 깨면서도 장면 장면이 선명했다.

대여섯 명의 수색대에게 전선줄로 포박당하며 뒤를 돌아보니 멀리 덕유산 향적봉은 고개를 돌리며 짐짓 모른 체 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가 외려 무덤 위에 올라앉아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50년 9월 28일부터 시작된 3년 반에 걸친 빨치산 생활은 그 날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내 고향 함경남도 영흥,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낙동간 전선에 투입되다
나는 1927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머슴이었던 아버지 김순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고향에서는 29년 농민동맹과 소비조합이 결성되면서 격렬한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32년 2월 9일에는 면사무소와 지서를 습격하고 3월 29일에는 경찰과 교전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주동자들은 함흥법원에서 징역선고를 받았고 장종철 같은 지도자는 14년 동안이나 복역하다 해방이 되어서야 나왔다. 나의 아버지도 투쟁에 가담해서 몇 번인가 구류를 살았다. 일본 경찰이 “이 마을은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로 항일 분위기와 좌익성향이 강했다. 여성들도 억세서 수수밭으로 피한 마을사람들에게 밤을 도와 음식을 나르고 함경선 철로를 기습할 때도 주저 없이 동참했다. 우리 고향에서 멀지 않은 원산에서는 29년 1월부터 4월까지 총파업이 벌어졌다.

▲오른쪽에서 세번째 김교영 선생 [사진 : 김교영]
▲오른쪽에서 세번째 김교영 선생 [사진 : 김교영]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아홉 살 때 인흥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70명 정도가 한 학년이었고 전교생은 400명가량 되었다. 선생은 6명인데 1~2학년은 조선인이 맡았고 3~6학년 그리고 교장은 일본인이 맡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는 영흥명륜사설학술강습회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정규학교가 아니었는데 학도병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선생이어서 은근히 민족사상을 심어주었다. 나는 농민동맹으로 투옥되었던 사람들이 만든 야학에도 나가서 그들의 감옥살이 얘기를 들으면서 컸다.

영흥군 농민투쟁의 열기가 가라앉자 일본경찰은 농민운동 연루자와 지역청년들을 모아 1943년에 ‘방공단’을 만들었다. ‘좌익’을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항일운동을 아예 눌러버리려는 시도였다. 아버지가 구류를 살아서 열일곱 살인 나도 강제로 가입이 되어 밤마다 야경을 돌아야 했다. 집에서 5리가 넘는 주재소까지 반복해서 순찰을 돌면서 하루 열 번 도장을 받아야 그 날 임무가 끝났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니 그 다음 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1943년 말에는 강제로 보국대에 끌려나가 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었다. 그때 식사는 조밥과 간장물이 전부였다. 그것도 양이 너무나 적어 서로 먼저 타려고 아우성이었다. 이 작업이 끝나자마자 농업용수로 터널 공사에 동원되었다. 야간작업을 하는 중에 조명등 카바이드를 교체하다가 폭발사고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이때가 45년 4~5월경이었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우리 마을은 농민동맹의 전통이 있어 곧바로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친일파 집은 불타버렸고 그의 조상들 묘소는 파헤쳐졌다. 면장, 경찰, 지주는 모두 도망갔다. 조선공산당 영훈군당이 결성되었고 민주청년동맹과 여성동맹 등 사회단체들도 속속 만들어졌다.

해방되었을 때 19살이었던 나는 영흥군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했다 46년 3월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에 당원번호 40832로 입당했고 빨간 당증을 받았다(이후 북조선노동당이 되면서 당증은 파란색으로 바뀐다).

50년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영흥군 민청부위원장이었던 나는 8월 8일 중앙당으로부터 내일까지 평양으로 오라는 소환통지서를 받았다. 나는 난감했다. 아버지가 폐병으로 45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집까지 다녀오기엔 민청업무 인계사항이 너무 많아 결국 나는 “조국통일전쟁에 나갑니다. 어머니...”하고 몇 자 적다가 다른 동지에게 안부 인사만 부탁하고 평양으로 갔다. 일주일간 교육을 받고 150명의 민청대원들과 함께 서울행 기차를 탔다. 수색까지는 기차가 닿았는데 거기서부터는 미군의 폭격으로 교통편이 거의 없었다. 당은 보급도 없이 알아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가라고 했다. 평양에서 고무신을 신고 내려왔는데 하루를 걸으니 고무신은 그만 바닥이 헤지고 말았다. 천안 근처에 가서야 참외밭에서 주린 배를 채웠다. 국도변에는 주민들이 피난 가면서 버려둔 집이 많아 밤에는 거기서 묵으며 보름 만에 하동에 도착했다.

하동에서 나는 군민청위원장이 되어 인민군 초모사업과 물자수송 책임을 맡았다. 전남 광양에서 오는 포탄과 식량을 등에 지고 끊어진 섬진강을 건너는 작전이었다. 폭격을 피해 한 밤중에 작업을 했다. 매일 삼백 명 이상 되는 청년들을 동원했다. 그렇게 한 달여 동안 작업을 했을 때인 9월 28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를 지시받고 지리산으로 입산했다. “작전상 퇴각이니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지침에 따라 평양에서 내려올 때 입었던 반소매 차림의 여름옷으로 들어갔다. 그때 하동군당은 청암면 청학골로, 군민청은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농민동맹은 옥중면으로, 여성동맹은 묵계리로 들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빨치산 생활이었다.

전향공작과 수원형무소 이송
57년 9월 아침부터 전향권유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전남부대 참모장이었던 김영길과 경남도당 노영호부대 정치위원이었던 이창권이 나와서 전향서를 읽었다. 지리산에서 사선을 넘나들던 동지들의 전향선언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산에서 높은 책임을 지고 있던 이들의 ‘전향서’는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54년 함양군에서 체포되어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으로 남원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 징역을 구형받고 10년형을 판결 받아 남원포로수용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56년 3월 당시 법무부장관 홍진기는 전주를 전국에서 으뜸가는 교도소로 만들라며 전향공작을 지시했다. 전주교도소는 강규선, 차규왈 부장의 주도 아래 포섭되어 있던 몇몇 좌익수를 앞세워 단계별로 치밀한 전향공작을 개시했다. 당시 전주교도소가 시행한 방법은 이후 다른 교도소에게도 길잡이가 되었다.

우선, 교도소장 명의로 가족에게 편지를 띄워서 면회를 오게 한 후 부모를 협박하고 회유했다. 일제가 독립군을 탄압하면서 썼던 수법 그대로였다. 그리고 잡범을 통해 담배를 건네줘서 피게 하곤 이를 빌미로 두들겨 팼다. 또 출역을 나가게 해주겠다고 꼬드겼다. 출역하면 식사량이 달라졌다. 당시 교도소의 급식은 1등식에서 5등식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비전향 장기수에겐 5등식, 하루 603g이 책정되어 있어서 한 끼에 서너 숟갈 뜨면 끝나는 양이었다. 이런 처지에서 출역을 나가고 1등식을 먹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큰 유혹이었다.

그래도 전향하지 않으면 운동이나 약품 지급을 금지하고 잡범과 혼숙을 시키면서 압박을 가했다. 나는 산 생활 4년 동안 이빨을 제대로 닦지 못해 어금니들은 썩었고 잇몸이 안 좋았다.

그런데 치료를 받지 못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300명 되는 좌익수 중 남은 30여 명 장기수들과 강제 전향 중지를 내걸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14명이 남았을 때 우리는 모두 뒤로 수갑이 묶인 채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다. 교도소장도 가까이 오지 못할 정도로 대오가 단단하고 투지가 강했다. 그러자 전주교도소는 야비한 꾀를 냈다. 수갑을 끌러주는 척하면서 뒤에서 손가락을 끌어당겨 인주를 찍고 백지에 지장을 찍게 했다. 그리고 내용을 마음대로 작성해서 57년 10월 ”전주교도소 100% 전향“이라고 발표를 했다.

이를 보고받고 홍진기 법무부장관은 직접 전주교도소를 방문하여 “전국에서 첫 번째로 과업을 달성했다”고 치하하고 담당 교도관들에게 1계급 특진 포상을 주었다. 당시 계호과장이었던 최한풍은 이때 공로를 인정받아 진주교도소장이 되었다.

▲2010년 제22차 양심수후원회 정기총회 [사진 : 김교영]
▲2010년 제22차 양심수후원회 정기총회 [사진 : 김교영]

수원 형무소 생활과 출소
“853번, 내일 출소한다”  
“네, 그게 무슨 말?”  

61년 8월 14일 수원 형무소 보안과장은 나를 불러 내일 출소한다고 말했다. 54년 체포되어 10년 징역형을 받았으니 아직 만기가 3년 정도 남았는데 그해 5.16 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광복절 특면 사면조치를 했고 내가 거기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나는 난감했다. 그렇게 일찍 나가리라 예상을 못했다. 수중에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출소할 때 수원교도소에서 보관하고 있던 빨치산 옷을 내줬다. 하지만 옷은 거의 다 삭아버려 입을 수가 없었다. 옷을 겨우 한 벌 얻어 입고 교도소 문을 나서며 빡빡머리를 감추기 위해 밀짚모자를 하나 샀다.

출소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마침 수원형무소에 같이 있었던 일반 재소자 김연녕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화성군 장안면에서 제법 농사를 크게 짓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서 농사일을 도왔다. 말하자면 머슴인 된 셈이니 아버지 대를 이은 것이다.

체격이 건장했던 나는 김 잘 매고 모도 잘 심었다. 아버지 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닌 덕분이었다. 또 고향에서 익힌 방법대로 밭고랑 사이에 토마토와 참외를 심었다. 장안면에서는 못 보던 방법이었다. 마을 공터에는 요즘 김장용 배추인 호배추를 심어 큰 풍작을 이뤘다. 동네에서는 모두 배추 농사를 배우겠다고 난리였다. 정월 대보름 같은 잔치 때는 민청 시절 배웠던 댄스를 선보여 동네 처녀들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곳 흥천리는 학교도 멀어 무학 아동이 많았다. 나는 칠판 하나 가지고 야학을 열어 함경도 도당 간부학교에서 교육받은 역사, 지리, 영어를 가르쳤다.

덕분에 능력 있고 유식한 머슴이라는 평판을 얻어 이곳저곳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새경으로 받은 돈으로 양복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를 맞춘 다음 두 돈짜리 반지를 예물로 주고 면 소재지에서 병풍을 세워놓고 혼례를 치렀다.

결혼을 하니 머슴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처가살이를 할 생각도 없었다. 마침 처가 친척 중에 목수일 하는 사람이 서울에 살고 있었다. 나는 수원형무소에서 목공반으로 출역을 나갔던 터여서 그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결혼반지를 팔아 톱, 대패, 망치 그리고 연장지갑을 사서 서울로 왔다. 그게 63년 6월 14일이었다.

사회안전법과 직장생활의 위험
“여보, 큰일 났어요, 남부 경찰서에서 당신을 찾아 왔어요” 

퇴근 후 금호동 집으로 돌아온 내게 아내는 다급하게 얘기했다. 당시 나는 대농건설의 토목부장 자리에 있었다.

걱정했던 대로 75년 제정된 사회안전법의 그물망이 조여 온 것이다. 사회안전법은 국가안정과 사회 안녕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었지만 사실은 박정희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반인권 악법이었다. 이 법에 따르면 출소 장기수들은 거주지 관할 경찰서에 주소와 직장은 물론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신고를 해야 했다.

아내는 안절부절 못하고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나도 내심 당황했지만 우선 아내를 진정시키고 받아둔 명함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음 날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 앞 다방에서 만났다. 서울 남부서에서 세 명의 형사가 나왔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김교영이! 사회안전법으로 신고 안 하면 징역 사는 거 알지?”하며 협박을 했다. 지리산에서 수많은 총격전을 겪었건만 ‘징역’이라는 단어는 칼날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전주교도소에서 강제전향을 당하며 겪었던 고문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맡고 있는 건설현장이 당시 강화도에 있어서 거기서 숙식을 하느라 사회안전법이 제정된 줄 몰랐다”고 둘러대며 대농건설 부장 명함을 건넸다. 그들은 적이 놀라는 눈치였다.

대농건설 토목부장이 되다
나는 목수일을 하겠다고 63년 서울로 올라와 옥수동 산꼭대기에 보증금 3,000원, 월세 300원 하는 단칸방을 얻었다. 부엌이 딸려 있었지만 애를 업고 돌지도 못할 정도로 좁았다. 종이상자를 접어 쌀뒤주로 삼고 찬장은 사과 궤짝으로 대신했다. 그곳에서 나는 처가 친척의 소개로 영등포에 있는 조흥화학공장으로 목수일을 나갔다. 몇 달 후 아내는 첫애를 배게 되면서 친정으로 갔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 밥을 끓여먹으며 현장을 다녔다. 아침 네 시에 일어나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서 7시까지 출근했다. 저녁에 돌아오면 연탄불에 밥을 올리고 지금 옥수역 근처에 있는 약수터로 갔다. 수돗물 값을 아끼려고 왕복 한 시간을 들여 옥수동 고개로 물을 져 날랐다. 돌아와 보면 연탄불에 올린 밥이 타기 일쑤였다. 그렇게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밤 10시나 11시가 되었다. 당시 일당이 시원찮아 한 달치 쌀을 사면 꼭 30봉지로 나눴다. 하루에 꼭 그 봉지만큼만 밥을 지었다. 먹고 싶은 만큼 지으면 금방 쌀이 떨어져 한 달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대충 마치고 단 칸 방에 누우면 금세 허기가 느껴졌다.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면 헛웃음이 나왔다. 머슴 집에 태어나서 어렸을 때도 배를 곯았다. 보국대에 가서는 한 주먹 밖에 안 되는 조밥을 먹었다. 지리산에 들어가서는 굶는 날이 밥 먹는 날보다 많았다. 수원교도소에서는 5등식을 받아먹으며 늘 허기졌고, 목수 일을 나가는 지금도 배가 고프니... 내 인생은 배고픈 팔자란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양심수 후원회 명예회장 권오헌 선생과 같이 했다[사진 : 민병래]
▲양심수 후원회 명예회장 권오헌 선생과 같이 했다[사진 : 민병래]

그때는 현장에서 쉬는 시간에 담배를 나눠 피는 분위기여서 담배를 사가야 했다. 제일 싼 담배가 6원이었는데 나는 버스 정거장 같은 곳에서 한 갑에 3원 하는 야매 담배를 샀다. 필터가 쑥 쑥 빠지기도 했지만 하루 10개비를 가지고 현장에 나가 그럭저럭 어울리면서 현장소장이나 인부들과 나눠 피웠다.

조흥화학공장일이 끝나고서는 현장 일이 드물어 공치는 날이 많았다. 65년 10월 어느 날 현장이 뚝섬에 있는 공룡콘크리트 공업진흥주식회사를 찾아갔다. 그 회사는 형틀을 가지고 조립식 주택을 짓는 회사였는데 다행히 일을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작업을 해보니 마지막 공정에서 아귀가 안 맞았다.

살펴보니 형틀계산이 잘못되었다. 나는 이를 현장소장에게 알렸다. 현장소장은 본사 전무님이 설계했으니 틀림없을 거라고만 했다. 나는 퇴근 후 계산한 그림을 다음 날 다시 보여주고 잘못을 지적했다. 이 보고를 들은 전무가 직접 현장에 나왔고 나는 설계도면에 삼각자와 티자를 대고 이를 설명했다. 전무도 수긍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정식 기사로 채용되었다. 그날 나는 뚝섬 현장에서 금호동까지 한달음에 내달렸다. 아내가 모아 둔 곗돈을 헐어 돼지목살을 사고 첫째를 무릎에 앉혀 조촐한 잔치를 벌였다.

그 이후 나는 다양한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67년에는 신안건재공업주식회사 기술과장이 되어 서울시 주택 500동을 짓는 남가좌 현장의 소장이 되었다 68년에는 중길산업에 들어가 현대건설이 만들던 소양감댐 이설도로 공사현장에서 제3공구, 제6공구 책임자로 일을 했다. 1970년에는 광진건설에 들어가 공구부장이 되어 대성리에 있는 여학생 수영장 공사를 책임 맡았고 감자 원종장도 설계했다. 76년 10월에는 강화군 합동건업에 들어가 강화도 삼삼면의 양수발전소를 짓는 현장소장이 되었다.

이 무렵, 75년 7월에 만들어진 사회안전법의 압박이 다가왔다. 이 법에 따르면 거주지 및 직장에 관한 신고를 해야 하는데 당시 강화도 현장은 매일 해병대의 승인을 받고 들어가야 하는 지역이어서 내가 ‘빨치산’ 출신임이 드러나면 허가가 나올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냥 버텨나갔다.

그 후 77년 12월에 대성건설에 들어갔는데 이 회사가 대농건설로 흡수되어 나는 78년 1월에 토목부장 겸 경남 진영의 현장소장이 되었다. 바로 이 무렵에 누군가가 나를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남부서에 신고를 했고 남부서 형사는 보름 동안 탐문 끝에 지금은 재개발로 지번이 남아 있지 않지만 금호동 3가 1448번지에 있는 우리 집을 알아낸 것이다.

남부서와 성동서 형사들에게 단물을 빨리다
내 명함을 받아 든 형사는 어떻게 대농건설에 들어갔으며 월급은 얼마나 되는지를 꼬치꼬치 캐묻고 문방구에서 사 온 편지지를 펼쳐 그 자리에서 자술서를 쓰게 했다. 거주지 신고를 안 한 이유와 앞으로 자신들에게 동향보고를 하고 이를 어길 시 어떤 처벌도 감수한다는 내용이었다. 건장한 형사들 셋 앞에서 중년의 내가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으니 다방 안의 호기심이 모두 나를 향했다.

그 후 형사들은 돌아가면서 사흘 단위로 호출을 해서 3일간의 생활에 대해 자술서를 쓰게 했다. 낮이고 밤이고 맘대로 불러댔다.

나는 사흘 간격으로 남부서 형사들에게 소환을 받다보니 회사 업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외부 출장이 많아 늘 시간이 빠듯했고 회사에 복귀하면 업무일지를 써야 하는데 형사를 만났다고 쓸 수는 없었다. 그때 금호동 집은 110만 원을 주고 산 생애 첫 집이었다. 3남매는 이제 중고등학생으로 한창 크고 있었고 정년퇴직인 55세까지는 몇 년이나 남아 있었다. 출소 장기수들이 내가 맡은 현장에 와서 일도 많이 했고 때로는 자재납품도 하는 상황이어서 대농건설 토목부장 자리는 소중했다. 당연히 회사에 내가 ‘빨치산’ 출신임이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할 수 없이 남부서 형사들에게 사정을 봐달라고 호소를 했더니 그들은 그제서야 속내를 비쳤다. “대기업 공무부장으로 돈을 많이 버니 월급의 2/3는 자기네를 주고 1/3로 생활해라. 그러면 회사에 알리지도 않고 사흘 단위로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기가 막혔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부서 형사들은 5년 동안 나를 그렇게 우려 먹더니 거주지 관할 성동경찰서로 넘겨버렸다. 단물이지만 오래되니 뒤탈을 염려한 눈치였다.

새로운 담당 성동서 형사도 마찬가지였다. 상고를 나온 딸이 취직할 때 첨부해야 하는 소견서를 잘 써 줄 테니 거액을 요구했다. 결국 나는 사회안전법으로 경찰에게 포착된 후 1984년 7월 30일에 퇴직할 때까지 (55세가 일반인데 58살까지 했다) 그들에게 빨리면서 생계를 돌보는 처지였다. 그래서 대기업 부장으로 정년퇴임을 했건만 돈을 모을 수 없었다.

아이들도 아직 공부 중이라 86년 8월부터 길음 1동에서 대우여관을 임대해 숙박업을 했다. 나중에는 문화촌에 있는 세원여인숙을 임대해서 두 군데를 운영했다. 다행히 87년 6월 항쟁으로 89년 3월 사회안전법이 폐지되면서 장사는 편한 마음으로 했다. 그러나 숙박업 환경이 많이 변하면서 세원여인숙 같은 경우는 임대료가 50만 원, 기름값이 50만 원인데 매출이 백만 원도 안 됐다. 그래서 내 나이 칠십 두 살이 되는 해인 98년 7월 10일 대우여관과 여인숙을 접으면서 집에 들어앉았다.

남은여생은 지리산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2020년 이제 내 나이 94세, 내 여생 마지막 바람은 그동안 내가 오랜 세월을 모으고 작성한 자료와 메모가 지리산을 기록하는 일에 쓰이는 것이다.

▲올해 94세의 김교영 선생 그의 뒤에 있는 서가에 평생 모은 자료가 있다[사진 : 민병래]
▲올해 94세의 김교영 선생 그의 뒤에 있는 서가에 평생 모은 자료가 있다[사진 : 민병래]

나는 수원교도소에서 출소하여 장안면에서 머슴을 살 때부터 지리산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해 투쟁했던 일을 정리했다. 대학 노트 몇 권의 분량으로 언젠가 세상을 내보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사회안전법’으로 남부서 형사들이 나를 찾아오자 장독대에 숨겼던 것을 장모님이 불안한 나머지 모두 태워버렸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내 몸이 불태워진 느낌이었다. 그 당시는 기억도 선명했었기에 정확한 자료를 남길 수 있었건만...

그 후 나는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여관 일을 하면서 손님을 기다리다 보면 언제나 밤을 새웠다. 그 고요한 시간에 나는 다시 지리산을 기록해나갔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사진 : 김교영]
▲맨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사진 : 김교영]

빗점골과 거림골에서 쫓겨 가며 들이켰던 계곡물
몇날 며칠을 굶은 채 세석평전에 다다라서 만났던 상고대
어느 비탈길에서 주검을 낙엽으로 덮으며 만난 천왕봉의 노을빛

긴 밤을 밝히며 쓰고 또 썼다.

52년 1월 18일, 대성골에서 쓰러져간 동지들의 이름 하나 하나!
환자트를 가린 나뭇가지 옆에 무심히 핀 민들레, 동상 때문에 똑 똑 부러진 발가락들
그날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평양행 기차를 탔던 죄스러움

그렇게 매일 매일 써 내려갔다.
그러노라면 대우여관에는 어김없이 새벽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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