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님, “적대를 청산하는 큰 뜻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 민병래 작가 승인 2021.01.04 12:39

21년 수형생활 장기수 오기태의 망향곡

▲ 오기태 선생

오기태는 잠을 설치다가 몸을 일으켰다. 새벽 2시, 사방이 깜깜하다. 동생 조상이는 어제 일이 고되었는지 이불을 저만치 밀어내고 곤하게 잔다. 오기태는 이불을 덮어주고 그의 손을 잡아보았다. 거칠고 팍팍하다.
 
오기태가 1930년생이고 조상이가 50년생이니 올해 90세와 70세, 두 사람은 북에서 남파되었다가 전주교도소에서 처음 만났다. 1989년 12월 24일 같이 출소했고 2000년부터는 전주 평화동 주공아파트에서 20년을 함께 살고 있으니 특별한 인연이다.
 
오기태는 오른쪽으로 굽은 허리를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쓰겠다고 마음 먹은 지 벌써 한 달. 눈은 컴컴하고 손마디는 힘이 없어 글씨는 엉망이었다. 컴퓨터를 들여 자판 연습을 해보다가 하루 만에 포기했다. 그리고 다시 볼펜을 잡고 여러 날 동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오늘은 어떻게든 마무리 지을 참이다. 갑자기 새된 기침이 나온다. 그는 조상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소리를 낮추고 휴지를 입에 갔다 댔다. 그리고 첫 줄을 적었다.

 대통령님께 부탁드립니다. 제 나이 올해 구십입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죽기 전에 북녘땅,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오기태는 노동당 문화부의 소환을 받고 남파되었다. 1969년 7월 황해도 해주에서 달빛을 안고 내려와 전남 장흥의 수문리 해안가에 닿았다. 그날 밤은 야산에서 남해 바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몸을 뉘였다. 다음 날 일찍, 전남대 출신의 조장 이봉로와 함께 기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달간 노동자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임무였다.
 
오기태는 광주 대인동 근처 여인숙에 숙소를 잡고 일당 잡부로 건설 현장에 나갔다. 노동자들과 담배를 나눠 피며 "내 고향은 신안군 임자도요"라고 통성명을 했고 국밥집에서 대포 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요일에는 이봉로 조장과 전남대 앞 서점에 들러 책도 사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금세 다가온 9월 하순의 귀환 날, 오기태는 해가 졌을 때 장흥군 월암리 바닷가에서 땅굴을 팠다. 무전기를 켜고 접선을 시도하려는 참에 "동무, 마을에 가서 담배 한 갑 싸게 사 오겠소"하며 조장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검은 바닷가에는 달빛을 실은 파도가 밀려왔다가 잔 물방울을 뿌려댔다. 사위는 물소리와 간혹 꾸룩대는 기러기 소리뿐이었다. 무전을 쳐야 할 시간이 넘었는데 조장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기태가 마을 쪽 어둠을 근심스레 바라볼 때 정적을 깨는 총성이 한 발, 곧이어 대여섯 발이 '드드드' 울렸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바닷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오기태는 무전기를 집어 들고 땅굴에서 솟구쳐 나왔다. 지금 가까운 보성역으로 서둘러 가면 경전선 새벽 첫차를 탈 수 있다. 만일에 대비했던 계획이 현실이 될 줄이야...
 
오기태가 가까스로 순천행 기차에 올랐을 때에서야 역전 마당에 호루라기가 울리고 경찰이 경계망을 펼쳤다. 그는 순천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2차 접선지인 부산 형제 바위로 갔다. 여기서도 접선에 실패한 그는 3차 장소인 광주로 되돌아왔다.
 
예전 여인숙에 행장을 풀었을 때, 그는 월암리 바닷가에서부터 일주일이나 옷을 갈아입지 못해 상거지 꼴이었다. 몇 시간 뒤 나타난 경찰 서너 명이 그를 에워쌌고 그날로 그는 서울 대방동 미군첩보부대로 이송되었다. 총상을 입고 치료받던 이봉로 조장도 거기서 다시 만났다. 그때는 몰랐다. 이 날이 길고 긴 징역생활의 첫째 날이 될 줄은...

▲ 오기태 선생
▲ 오기태 선생

오기태는 눈을 비비며 다음 문장을 썼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89년 12월 24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21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일본놈 앞잡이처럼 민족을 팔아먹지 않았습니다. 살인을 한 흉악범도 아닙니다. 나는 분단된 땅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내려왔을 뿐입니다. 남쪽에 와서 노동자와 학생들을 만나 조직사업을 했으나 불과 2개월, 그저 이름 석자 주고 받고 친분을 나눈 정도입니다. 과연 20년 넘게 징역을 살아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건가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충분한 댓가를 치루지 않았나요? 

어렵게 한 자 한 자 써가던 오기태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는 2005년 급성폐렴에 걸려 중환자실에서 두 달이나 있었다. 가까스로 회복이 되었지만 그 후 목소리는 새되졌고 마른 기침을 달고 살았다. 창문에는 한밤중의 한기가 달라붙어 성에를 수놓았고 그 위로 달빛이 실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오기태는 기침을 억누르고 다시 펜을 들었다.

 2000년 9월 장기수들이 송환될 때, 이 사람은 ‘전향’을 했다고 제외되었습니다. 정녕 그 실상을 모르는 겁니까? 전주교도소에서 있을 때 간수들은 한 겨울에 열두 명을 한 평도 안 되는 방에 몰아넣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얼음칼이 옆구리를 찌르고 등 뒤로는 무수한 바늘이 파고드는 듯했습니다. 입이 쩍쩍 벌어지고 우리는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돌아온 건 비웃음과 찬물세례, 구두발자국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내 허벅지에 전선줄이 감겼고 땅바닥에 내평개쳐진 물고기 마냥 살점이 퍼덕거렸습니다. 전주교도소의 전향은 이런 고문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미 수없이 증언한 이야기들이고 나는 2001년 내 양심에 따라 ‘강제전향무효’ 선언을 한 바 있습니다.

오기태는 다시 옆구리를 쥐었다. 급성폐렴으로 사경을 헤맨 지 얼마 안되어 2008년 대장암이 발견되었다. 나이 팔순이 가까워 얻은 큰 병이었다. 가까스로 치료는 되었지만 그 후로 설사와 변비가 되풀이 되었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동네 학산을 오르내렸건만, 올해는 설사기가 심해져 이마저 그만두었다. 새벽이면 통증이 찾아오는 횟수가 늘었다. 오기태는 배를 어루만지며 잠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창가에는 여전히 어둠이 웅크리고 새벽 햇살을 가로막았다.  

오기태의 집은 9평 임대주택, 방·거실·부엌이 모두 하나다. 부엌 옆에는 손마디 같은 복도와 손뼘 같은 화장실이 전부다. 그나마 요런 임대주택이라도 있었기에 오기태와 조상이는 숨 쉬고 살았다.

89년 출소 후 오기태는 신원보증을 섰던 전주 남문화방 사장 밑에서 먹고 자며 일을 했다. 교도소 목공반에 있었던 그는 표구와 액자 일을 잘했다. 주변에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들어왔냐”“할 정도로 성실하게 일을 했고 상점과 창고 등 열쇠 다섯 개를 도맡아서 관리했다.

하지만 IMF로 남문화방은 문을 닫았고 오기태는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 ‘나눔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살면서 그는 영세민들과 노숙자를 위해서 밥 짓는 일을 하고 상담 일을 맡았다. 어떤 신용불량자는 오기태에게 ”회장님 저 100만 원만 빌려주세요”라고 손을 벌렸다. 주방 아주머니도 “삼촌 30만 원만 꿔주세요”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오기태는 쉼터에서 받은 월급으로 이런 부탁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당시 전주에는 열 명 정도의 출소장기수들이 있었다. 오기태가 있는 쉼터는 이들에게 사랑방이었다. 와서 점심도 먹고, 안부도 물을 수 있는...그 무렵, 다행히 임대아파트가 배정되었고 쉼터를 나와 평화동으로 오게 된 것이다. 출소 후 두 번이나 결혼사기를 당했던 조상이도 오기태의 임대아파트로 들어왔고 그때부터 두 장기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조상이가 교도소에서 건축 1급 메달을 딸 정도로 실력이 있어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임대아파트 관리비래야 한 달 5만 원 안쪽이었고 두 노인네 쓰임새는 담배 한 갑 정도였다. 

▲ 오기태 선생
▲ 오기태 선생

오기태는 책상에 묻었던 얼굴을 들고 다시 볼펜을 잡았다. 

 저는 89년 12월 24일 출소해서 제일 먼저 고향 임자도엘 갔습니다. 아버지는 총살당하고 형님은 조계산 어느 골짜기에선가 숨졌다고 누이 동생이 일러주더군요. 고맙게도 임자도 초등학교 동창들이 아버지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저는 선산에 가서 아버님께 술잔을 올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총 맞아 돌아가신 그 한이 눈을 감으시고서라도 풀렸을까요? 
아버님 눈에 임자도 푸른 물이 핏빛으로 일렁거렸을 것이고 바다 갈매기는 시체 위를 떠도는 독수리 떼처럼 보였을 겁니다. 분단은 우리 가족에게 큰 한과 아픔을 주었습니다. 상처를 삭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오기태는 1950년 전쟁이 일어나면서 빨치산이었던 형의 권유로 인민군에 입대했다. 목포에서 남해여단에 편입되어 낙동간 전선으로 가려던 차에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했다. 그는 여단을 따라 목포, 장흥, 지리산, 오대산을 거쳐 강원도 양양으로 후퇴했다. 여기서 인민군 2군단 9사단 32연대로 소속이 바뀌었다. 이때가 10월 말이었다. 당시 32연대는 국군 대대장 출신으로 대대병력 전체를 데리고 월북한 강태무였다. 32연대의 주요임무는 금강산 일대에서 미군의 남쪽 퇴로를 막는 것이었다. 

50년 10월 27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이 개마고원의 장진호까지 전진했다. 10월 25일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 제 9병단의 3개 군단이 장진호 일대에 집결해서 이들에 대한 포위 공격에 들어가자 미군은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전황은 압록강 방면도 마찬가지여서 11월 30일 맥아더는 모든 전선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오기태가 속한 32연대는 이들의 퇴각 길목을 막으며 원산으로 진공했다. 원산항이 막히자 미군은 흥남항을 택해 12월 15일부터 ‘흥남 철수’를 시작했다. 

오기태는 참전 후 이곳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치렀다. 51년 여름에는 장티푸스에 걸려 큰 고생을 했다. 고열에 시달리며 6개월간 생사를 넘나들었다. 어렵게 회복한 그는 전방에 있을 때 노동당에 화선입당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그는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에서 정전협정을 맞았다. 이후 4년간 복무를 더하고 1957년 중사로 제대해 함경북도 온성에 있는 탄광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북은 1차 5개년계획(1957~1961)에 따라 중공업 부문에 청년들을 집중배치했었다. 

그는 온성 탄광에서 근무한 지 얼마 안 되어 탄광지도원으로 승진했다. 1959년 초에는 청진 공산대학에 입학해 당의 정강 정책, 항일유격투쟁사들을 배웠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온성군 인민위원회 상업 검열국으로 배치받아 상점들의 부정행위들을 단속했다. 그 후 국토청 토지관리지도위원이 되어 온성군 내 토지, 산림 실태를 조사했다. 

이래저래 온성에서 일을 하던 오기태는 1959년, 군수방직공장에 다니던 김외식을 만나 혼례를 치렀다. 3남매를 낳고 막내가 아내 뱃속에 있을 때 문화부의 소환을 받았다. 그 후 6개월간 야간행군, 태권도, 무전기 사용법을 훈련받고 이봉로 조장과 함께 내려 왔다 귀환 길에 체포된 것이다.

▲ 오기태 선생
▲ 오기태 선생

새벽 4시에 예약 취사를 한 전기밥솥에서 쉬쉬 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새벽일 나가는 조상이의 아침상을 차려줘야 한다. 오기태는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일어났다. 청국장을 끓이고 겨울 시금치를 무쳤다. 후라이팬을 달궈 꽁치도 올렸다. 맛나게 먹이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선가 간을 맞추는 게 힘들어져 속상할 때가 많다. 요즘 들어 그를 보면 안쓰럽다. 칠십이 넘은 나인데 공사장 일을 나가고 전주에서 대전 유성까지 그 먼 길을 다니니... 오기태는 그를 깨우려다 조금 더 자게 놔뒀다. 밥상 준비를 얼추 마친 그는 책상에 앉아 다시 펜을 잡았다.

 대통령님, 2018년 평양 능라동 경기장에서 하셨던 감동적인 연설을 기억합니다. 온 겨레가 가슴 벅차게 들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더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사무치게 와 닿았습니다. 

오기태는 ‘닿았습니다’에 구두점을 찍고 다시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사실 오기태는 1차 송환이 좌절되자 혼자 온성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다. 2004년부터 여러 번 연변 조선족 자치구로 넘어가서 온성군이 마주 보이는 도문(圖們)시 쪽으로 이동했다. 어찌어찌 중국 공안과도 선을 연결해 가족들의 생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신통한 결과가 없자 그는 두만강을 그냥 건너가려 했다. 강만 건너면 바로 온성이고 그는 10여 년 이상 그곳에 근무했기에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너갈 수 있는 길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기태는 발걸음을 거두었다. 그는 판문점을 통해서 동료 장기수들과 함께 당당히 돌아가고 싶었다. 그게 올바른 길이고 다른 장기수들에 대한 도리라고 여겨졌다. 포기하고 연변에서 전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이 안개비처럼 고이고 가슴에는 검은 비가 흘렀다. 그러면서 늙은 몸은 오른 쪽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오기태의 기침이 더욱 심해지더니 오장육부를 게워낼 듯 소리마저 커졌다. 휴지를 급히 뜯어 입을 막았는데도 피가 한 움큼 쏟아진다. 기침을 할 때마다 오줌이 조금씩 새어 나와 속옷 마저 축축하다. 오기태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제 몇 줄만 더 쓰면 된다. 얼른 마무리하고 새벽밥 먹여서 조상이를 출근시켜야 한다. 

쿡 쿡 찌르는 배를 움켜잡고 기침을 억누르며 다시 볼펜을 꽉 쥐었다. 

 저는 부탁드립니다. 적대를 청산하는 큰 뜻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2차 송환을 간절히 바라는 어느덧 구순을 넘나드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둘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에도 강담선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두화 선생을 비롯 여러 동지들이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올해 구십 살인 나도 오늘,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2차 송환을 바라는 우리들을 보내주는 일은 평화를 위한 중요한 걸음입니다. 615선언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미국놈들 눈치 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할 수 있는 일, 대통령님이 결심하면 할 수 있는 일조차 늦추면 안됩니다. 우리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창문으로 슬그머니 어둠을 뚫고 달빛이 들어왔다. 조각같은 그 빛은 오기태가 벽에 붙여놓은 두 장의 사진을 비췄다. 한 장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이 평양순안공항에서 악수하는 장면이고 나머지 한 장은 2018년 백두산 천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두 손을 잡고 하늘로 치켜올린 장면이다. 

오기태는 두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침이 계속되었다. 고개가 자꾸 떨궈지고 눈마저  감긴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쓰러질 듯 다시 책상에 앉았다.  감기는 눈을 치뜨고 떨궈지는 고개를 가누며 마지막 줄을 써내려갔다. 

 죽기 전에 아내 김외숙과 춘자, 정자, 성일 그리고 이름조차 모르는 막내를 죽기 전에. 죽기 전에...

마지막 구절을 남겨두고 그의 손에서 볼펜이 툭 떨어졌다. 동시에 고개가 푹 책상으로 떨궈졌다. 기침과 숨이 가느다랗게 몇 번 이어지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오기태의 눈은 어느새 감겨버렸다. 시계는 3시 5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오기태 선생 추도식 [사진 : 통일뉴스]
▲ 오기태 선생 추도식 [사진 : 통일뉴스]

<못다한 이야기> 

⓵ 오기태선생은 2020년 12월 4일 필자에게 생애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날 힘주어 문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올릴 것이고 그 요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청원서를 올렸는데도 2021년까지 송환이 안 되면 연변을 통해 온성으로 가서,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나겠다고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는 생애 구술 삼일 후인 새벽 4시에 숨졌습니다. 

⓶ 이 글에서 흥남철수 부분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현실문화 간)을 참고했습니다. 

③ 아래 추모시는 정충식_전농 전북도연맹 정책위원장이 오기태 선생을 추모하며 남긴 시다. 

오기태 선생님을 추모하며

새벽 4시에
당신은 
북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농사짓던 땅
아이들의 살 내음
부인이 초가 살 밖에서 부르던 소리 담아오면
잠 못 이루고 일어났지
간수가 휘두르면 살덩이 떨어져 나오던 매질
의지를 꺾으려 육신을 가두었던 
독방의 쇠창살도 막지 못했지

버스 타면 한나절
기차 타면 반나절
갈 수만 있다면 기어서라도 갔을 
그러나 기어이 당신의 걸음으로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고 
의연히 걸어가고자 했던
해가 갈수록 사무치게 잠을 깨우던 그 시간

당신의 몸이 
북녘에 있을 때도 
그리움은 남녘의 바다 고향
회귀하는 민어를 품은 임자도 너른 물결따라 
뜨겁게 심장이 뛰었으니 
처자식을 뒤로 하고 내려왔었을 당신
당신이 사랑했던 조국은
당신에게 얼마나 무거운 짐을 안겼는지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고 대답하지 못해도 돌아보리다

남아있는 자들이
슬픔을 머금고 
모여
오늘 이제야 북녘으로 
마지막 통일의 배 띄우네

철새의 날갯짓이 부러워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을
당신의 숨결을 싣고
얼어붙은 통일광장의 매운 먼지마저 삭삭 털어 담아
미련하도록 깊고 컸던 조국 사랑의 의지까지 
남김없이

영원히 안기고 싶었던
새벽 한기마저 따습게 데우는 아궁이 연기 피어오르는
꿈에 그리던 당신의 땅으로 훨훨
세상에 나온 것은 천명이었지만
기꺼이 고난의 운명을 선택하여
깃발처럼 펄럭이며
살았던 시대마저 태우고

님이여

당신이 떠났던 자리 뒤로
한겨울 추위를 물리며 꽃이 필 것이외다
통일의 꽃
해방의 꽃

눈물 대신에
뜨거운 심장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마다
다시는 마르거나 시들지 않을 꽃이 되어
남녘의 한라부터 북녘 백두산 골짜기까지
해마다 계절 구분 없이 
되살아나 필 것이외다
당신의 걸음마다 뿌린
씨앗이 
뿌리를 뻗고 땅의 숨통을 틔웠으니 
본디 
하나였던 반도
하나의 하늘 아래서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민중의 땅에서 영영 필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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