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고향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2)

  • 민병래 작가
  •  
  •  승인 2020.08.21 11:09

 

88세 폐암말기의 비전향 장기수 강담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있을까요?”

어느새 서쪽 해가 금강 너머로 완전히 지고 강변에는 어둠이 내렸다. 강담은 겉옷을 하나 더 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강변 주위로 등불이 하나둘 켜진다. 함께 노을을 보던 정원장이 ”북녘 자제분들 얼굴은 기억나세요”하고 물었다. 교도소에서 복역할 때까지만 해도 또렷했던 얼굴들인데 이제는 희미하다. 떠나올 때 북녘 아내 박원옥은 28살, 애들은 첫째 딸 선자가 네 살, 길모가 두 살이었다. 아내에게 그저 "다녀올게" 동네 나가듯 인사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를 줄 몰랐다. 죽기 전에 한번 보는 게 소원이다.

사실 강담은 북으로 간다는 건 꿈도 못 꿨다. '강제전향'의 아픈 상처 때문이다.

▲ 2011년 11월 ‘고난 함께 하는 사람들’ 기행, 고성전망대에서 고향을 지켜보며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강제전향은 원천무효다라는 판결이 나면서 강담 선생은 장기수들과 조금씩 교류를 해나갔다. 맨 오른쪽이 강담 [사진 : 강담제공]
▲ 2011년 11월 ‘고난 함께 하는 사람들’ 기행, 고성전망대에서 고향을 지켜보며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강제전향은 원천무효다라는 판결이 나면서 강담 선생은 장기수들과 조금씩 교류를 해나갔다. 맨 오른쪽이 강담 [사진 : 강담제공]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선언으로 2000년 9월 2일 63명의 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되었다. 이때 '전향했다'는 이유로 정순택 등 33명이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면서 '강제전향' 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전향공작은 1973년 8월 2일 법무부가 '좌익수형자 전향공작전담반 운영지침'을 내려보내면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 세력의 저항에 직면했던 터라 형기가 다 된 장기수들이 출소하는 게 불안했다. 그래서 전국 교도소에서 일제히 전향공작을 전개했다.

중앙정보부 주도로 이뤄진 전향작업은 1973년 9월부터 시작되었고 초기에는 주로 교화사를 통한 설득이 주된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게 통하지 않자 전향공작은 폭력이 사용되었다. 강담이 있던 광주교도소에서는 73년 11월 14일, 관구부장이 장기수들이 있는 특별사동에서 "모두 방을 옮길 준비를 하라"고 갑자기 외쳐댔다. 또 운동, 편지, 목욕, 약처방, 면회, 독서 등 모든 게 금지된다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0.75평 되는 방에 장기수들을 열다섯 명씩 집어넣었다. 눕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어설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다음 날 민방위 훈련이 끝나자 마자 깡패들은 '떡봉'(떡을 치는 방망이)이란 완장을 차고 "전향하라"고 악악대며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광주교도소 교무과장이 직접 선발한 원00, 정00 등은 수갑과 포승은 뿐이 아니라 감방 열쇠까지 지닌 채 설쳐댔다.

폭력은 갈수록 잔인해졌다. 12월 추위에 세면장으로 끌고 가 옷을 벗겨 찬물을 끼얹기까지 했다. "전향하라"고 악을 쓰며 물 적신 포승줄로 언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장기수들은 살갗이 찢어지고 온 몸에서 피가 흐르는 고통을 겪었다. 강담도 예외는 아니었다. 힘겹게 강제전향에 버티던 어느 날 그는 모르스 부호로 옆방과 통방 중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크다고 교도관들이 들이닥쳐 "너 왜 아직도 전향서 안 썼어?"하면서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그때 강담은 고막이 터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이런 만행으로 1973년 11월부터 1974년 4월까지 특사에 있던 장기수 68명 중 40명이 강제전향 처리되었고 강담도 이 부류에 끼고 말았다.

그래서 강담은 출소 후에도 전향 '당했다'는 죄책감에 출소 장기수들과 교류하지 못했다. 또 광주교도소에 있을 때 "당이 울릉도 작전에 대해 비판한다"는 얘기를 바람소리처럼 들었다. 그것도 마음의 짐이 되어 그저 아내와 함께 웅크리고 살았다.

그런데 '전향했다'는 이유로 1차 송환에서 제외된 정순택 등 33명이 2001년 6월 3일 '장기구금양심수 전향무효선언과 북녘고향으로의 송환 촉구 기자회견'을 했다. 이에 발맞춰 비전향장기수 송환위원회가 통일부에 제2차 송환명단을 제출했다.

한편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강제전향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며 "강제전향에 저항하다 숨진 장기수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런 국가기관의 결정에 힘입어 강제전향은 원천 무효가 되었다. 마침 통일부 장관에 정동영이 취임하면서 2005년을 전후해 2차 송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래서 강담도 용기를 내어 신청서를 냈다.

▲ 탑골공원 앞에서 민가협 777차 목요집회에서. 왼쪽 세번째가 강담 선생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선생은 집회를 거르지 않았다. ⓒ 강담제공
▲ 탑골공원 앞에서 민가협 777차 목요집회에서. 왼쪽 세번째가 강담 선생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선생은 집회를 거르지 않았다 [사진 : 강담제공]

그리고 남아있는 장기수들을 만나 ‘노전사’로서 기개를 잃지 말자고 다짐하며 ‘한미연합 군사훈련중지’를 외치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을 촉구했다. 또 국가보안법철폐 집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며 송환의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보수단체의 반발, 국군포로와 맞교환 등이 제기되면서 2차 송환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후 강담은 10여 년을 속으로 삭히면서 세월만 보내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2018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자 큰 기대를 걸었다.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속만 태우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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