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집에 간다는 생각도 흐릿..'인도주의' 진정성 보여야

 

 

[인터뷰] 2차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 3인, 박희성·김영식·양희철 선생

  • 이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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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21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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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성 선생을 비롯한  2차 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은 80 중·후반을 넘는 고령으로 인해 갈수록 송환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을 잃고 있어 조속한 송환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박희성 선생을 비롯한  2차 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은 80 중·후반을 넘는 고령으로 인해 갈수록 송환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을 잃고 있어 조속한 송환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조마 조마한 심정이었는데, 기어이 추석 명절이 시작된 연휴에 또 한번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추석 명절을 맞아 안부를 확인하고 인사를 전하는 과정에서 2차 송환을 기다려 온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김교영 선생이 지난 8월 2일 노환으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뒤늦게 확인된 것이다.

올해 초 34년간 옥살이를 한 박종린 선생이 88세의 연세로 별세하면서 11명 남은 2차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관심이 잠깐 일었으나 금세 또 잊혀졌다. 

또 한분이 유명을 달리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실 날을 기다리는 분은 10명만 남았다.

같은 처지의 박희성 선생은 "코로나때문에 조용히 넘어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도 돌아가신 줄 모르고 있었거든요. 전화해도 전화도 안받으신다고..우린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어요"라고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집에 가는 게 언제냐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으로 가는 다음 차례가 내 차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드는 처지에 놓여있어요"라고 한다.

한분 한분 돌아가실 때마다 그 허울뿐인 '인도주의'를 보도하는 잔인한 위선의 세상, 잔혹한 인심이 새삼 쓸쓸하다.

집 나선 가족들이 부모형제와 만나기 위해 천리 먼길 마다하지 않고 부모님께 달려가는 명절이면, 갈 수 없는 고향을 둔 이들에겐 어쩔 수 없는 고독과 공허함이 밀려든다.

그래도 이곳 낙성대 만남의 집엔 아무 연고도 없는 땅이지만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반가운 손님들도 있다. 

2차 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들인 양원진(93세, 29년 6개월 수감), 김영식(89세, 27년 수감), 양희철(88세, 37년 수감), 박희성(87세, 27년 수감) 선생이 일상을 꾸려가는 낙성대 만남의집을 지난 18일 찾았다.

최고령인 양원진 선생은 담석 제거를 위해 1차 복강경 시술을 했다가 수술로 전환하여 전신마취에 개복 수술까지 한 뒤 지금 병원에 입원중이다. 의사들이 놀랄 정도로 빨리 회복되고 있어 추석을 지내고 돌아올 예정이다.

추석 명절을 맞아 18일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양희철, 김영식, 박희성 선생 등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 선생을 찾았다. 왼쪽부터 양희철, 김영식, 박희성 선생.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추석 명절을 맞아 18일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양희철, 김영식, 박희성 선생 등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 선생을 찾았다. 왼쪽부터 양희철, 김영식, 박희성 선생.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각자 개성도 분명하지만 서로 배려하고 단합하는 조직력이 최고인 삼총사처럼 낙성대 만남의 집을 든든히 버티고 있는 김영식, 양희철, 박희성 선생은 이날도 6.15합창단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눈듯 조화를 보여주었다.

작년 말 이후 빠짐없이 하던 등반을 중지한 박희성 선생은 귀가 어두어져서 정상적인 소통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는 늘 엑스트라야'라며 배려하는 양희철 선생의 도움으로 큰 불편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양 선생은 가족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 김영식 선생이 격정을 토로할 때는 부연설명을 곁들이거나 슬쩍 대화의 방향을 바꾸고, 재밌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꿔나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 문제에 대해 이미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를 송환한 것으로 모든 문제가 마무리된 것으로 인식한다며 진정성없는 태도를 보이는데 대해서는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인도주의 협력'을 남북관계의 만병통치약처럼 입에 올리는 문재인 정부가 정작 핵심적인 '인도주의' 사안에 대해 보이는 '비인도주의적 태도'에 실망한 탓이다. 

양 선생은 "지금까지 사실상 우리는 여기 현실법에 저촉돼서 징역(27~37년)을 살았다고 치더라도,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자기 원적지로 보내줘야 하는 게 원칙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통일부장관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면한 2차송환 희망자들의 절박한 사정을 이해한다면 설령 직접 오지 못하더라도 자기들 사정이 이렇다는 설명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27년의 수형생활과 20년의 막노동 생활을 거친 끝에 2007년 만남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박 선생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 같애요. 너무나도 보고 싶고 하게 되면 사람이 머리가 돌라 그래요. 돌라그런다구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고 혼자 남은 사람으로서 겪은 오랜 아픔에 대해 이야기했다.

면회 올 연고자가 없어 교도소 면회실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여관에서 지내던 20년동안 "명절 전날이면 명절음식을 조금 사다 놓고서는 밖에 나가질 않았다"는 아픈 기억도 털어놓았다. 

"남들이 그렇게 행복하게시리 명절지내는 것을 시기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걸 보게 되면 더 가슴이 아프고 집생각이 나기 때문에 아예 딱 방에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그냥 나가질 않고 지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고향에 가면 그곳을 떠날 때 손 흔드는 모습만 기억나는 아들 동철과 동철엄마의 손을 잡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말했다. 또 지금까지 사회생활이라곤 영화기사로 1년 반 해본 게 전부인데 "어떻게 하든 들어가서 다만 하루라도 사회생활을 해 보고 죽었으면 하는 그 생각"이라고 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11살에 해방을 맞은 한 소년이 16살에 군대에 들어갔다. 18살되던 1952년에 전쟁터에서 화선입당하고 7년만에 제대한 뒤 대남사업에 복무하던 중 1962년 경기도 화성 앞바다에서 총격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렇게 28살의 청년으로 살아남았다. 그 뒤 27년은 감옥에서, 또 20년은 낯선 땅 막노동 판에서, 그리고 겹치는 21년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다 어느새 귀도 멀어버린 87살 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분단이 관통하는 우리 민족의 이야기이고 그의 소망이 나의 일상인 우리의 이야기이다. 혼자서만 떠안기에는 너무 가혹한 역사의 짐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생각해야만 하는 '인도주의'에 관한 이야기이다.  

박 선생의 이야기를 따라 크게 다르지 않은 김영식 선생의 이야기를 싣는다. 양 선생은 죄송한데 이번에도 엑스트라다.

박희성 선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아래는 인터뷰 전문.

 
나이들어가니 자꾸 자신도 없어지고...

□ 통일뉴스 : 오늘은 선생님들 깊은 말씀을 듣고 싶다. 특히 김영식 선생님은 가족 이야기를 잘 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젊을 때도 약주를 전혀 하지 않으셨나.

■ 박희성 : 젊어서 대남사업할 때도 술이 나오곤 하면 안먹고 다 옆 사람들 주고 그랬어요. 술 안먹고 담배 안 피고 그러니까 그래도 지금 건강할꺼요.

■ 양희철 : 담배는 영향이 있지만 술은 영향이 없어.

6.15합창단원이 "그래요 저 술마시고 담배 안 피워서 건강해요"라고 우스개소리를 하자
■ 박 : 그걸 내가 알지. 산행가게 되면 지나가는 걸 옆에서 다 아니까. 처음보다는 지금 많이 나아졌어.(웃음) 계속 와야지. 그때 불암산 갔을 때 딸 데리고 왔는데, 딸이 엄마보다 산행을 더 잘했어.(웃음)

 
□ 산에 오랫동안 못가셨다고 했는데, 지금은 다니시나.

■ 박 : (말을 잘 못알아듣고) 빨리 해야 되겠어요. 지금 전화기같은 건 잘 들리는데 여럿이서 이야기하게 되면 잘 분간이 안돼요. 지금 3번가서 검사했는데 11월이나 되어야 (보청기가) 된다네요. 옛날에는 3개월 걸렸대요. 근데 요즘에는 3개월도 부정이 많다고 해서 6개월로 연장이 된 거에요.

■ 양 : 앞으로도 3번 더 가야돼요. 먼저는 뇌파검사도 했어요. 

 
□ 어떤 시술이길래 뇌파검사까지 하나.

■ 양 : 장애인 등급을 받아야 국가에서 무료료 보청기를 해줄 수 있기 때문에 검사를 받는 거에요. 제일 아래 등급인 장애인 5급만 받게 되면 보청기는 무료로 나오고 한달에 5만원씩 보조비가 나온데요.

■ 박 : 처음 만난 곳에서 전화가 왔어요. 3번 검사를 다 받았다고 했더니, 이제 끝나게 되면 요즘 제일 비싼 보청기가 200만원짜리라고 하는데, 그걸 무료로 준다고 하더라구요.

 
□ 지금 산에는 가시나.

■ 박 : (또 못알아 듣고) 원래는 6.25때 폭탄이 옆에서 터졌기 때문에 약간 지장이 있었어요. 왼쪽은 괜찮았는데. 그래서 전화를 받아도 왼쪽으로 받지 오른쪽으로 받으면 못알아들어요.

 
□ 빨리 보청기를 하셔야겠다. 어른들이 귀가 안좋으면 생활이 몹시 불편하고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되니까 힘들어 하시더라.

■ 양 : 지금도 잘 안들리니까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산에 가시냐니까 귀 안들리는 이야기를 하시잖아.(속상한 표정)

동석한 6.15합창단은 "산행은 작년 11월에 은퇴하고 올해는 도봉산 둘레길 같은 곳은 한두번 참가했다"며 앞으로 산행은 둘레길로만 하자고 입을 모았다.

 
□ 추석에 선생님들 찾아오는 손님들 맞이하시는 것 말고 특별한 일정이 있나.

■ 박 : 내가 2007년에 여기 왔거든요. 계속 강북에 있었으면 저 세상 사람된지 오래됐을 거에요. 여관에 있고 그럴 때는 명절 전날 명절음식을 조금 사다 놓고서는 밖에 나가질 않았어요. 왜그러냐하면 남들이 그렇게 행복하게시리 명절지내는 것을 시기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걸 보게 되면 더 가슴이 아프고 집생각이 나기 때문에 아예 딱 방에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그냥 나가질 않고 지냈거든요. 

그랬는데 내가 2007년도에 여기 와서는 명절다운 명절을 지내잖아요. 혼자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 같에요. 너무나도 보고싶고 하게 되면 사람이 머리가 돌라 그래요. 돌라 그런다구요. 여기와서는 명절되기 전에 이렇게 와서 같이 지내기도 하고 전화도 오고 하니까 그렇지, 그러지 않았으면 저 세상 사람된 지 오랬을 거에요.

지금 권오헌 선생님도 꼭 추석하고 구정때는 고향에 갔다가 여기에 3시께 되면 도착하곤 하잖아요. 저나 김영식 선생은 마찬가지로 여기 연고자가 전혀 없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도소 생활하면서 면회라는 건 일체 없었어요. 

교도소에 접견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도 전혀 몰랐는데, 여기 나와서 이제 국가보안법 위반자들 면회다니고 했으니까 지금은 나만큼 전국의 교도소 면회장소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도 쉽지 않을꺼요. 다 돌아다녀봤으니까.

 
□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에는 선생님이 오히려 면회를 다니신건가.

■ 박 : 그래서 지금은 내가 면회를 가잖아요. 그러면 내가 그분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요. 그전에 못했던 것을, 나를 위로해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영치금을 넣어 올리면서도 그걸 내가 하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넣어준다고 생각하고서 생활하기 때문에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런 생활 안한 사람은 전혀 몰라요.

그래놔서 나는 이제 오늘에야 또 알았구만. 김교영 선생님이 8월 2일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2차 송환 희망 비전향장기수)가 11명이 아니라 이제 10명이 남았다구요. 코로나때문에 조용히 넘어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전화해도 전화도 안받으신다고..우린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또 더군다나 가슴아픈 것이 그렇게 간다고해도 보내지도 않고 자꾸 이렇게 한분씩 한분씩 19명 남은 중에서 지금 11명인줄 알았는데, 10명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집에 가는 것이 언제냐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으로 가는 다음 차례가 내 차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드는 처지에 놓여 있어요.

나는 내년 6월이면 여기(북에서 남으로)로 나온지 꼭 60년이에요. 조금 좋아지려는 것 같아서 금년 추석은 평양에 가서 지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더랬는데, 그것이 안되니까 집에 간다는 생각이 자꾸 흐릿해지고 그런 거에요.

나이 자꾸 들어가니까. 뭐야. 자신이 없어지고.

만남의집 2층 박희성 선생이 지내는 방. 한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지만 '호텔 부럽지 않은 곳'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만남의집 2층 박희성 선생이 지내는 방. 한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지만 '호텔 부럽지 않은 곳'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꿈속에서도 아들은 이모 등에 업혀 손흔들던 애기

□ 아들, 동철이. 예전 1인시위할때 가족들은 다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고 지내는게 내맘도 편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 박 : 나올때 1년 4개월된 걸 보고 나왔으니까 금년에 60살 아니에요. 지금도 그래요. 가족에 대해서 지금 궁금하지 않느냐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물어봐야 그건 돌아가신 분들이 많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62년도 여기 나올때 살아계시던 분들은 지금도 다 살아계실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도 걱정안한다, 당에서 보호해주고 하기 때문에 다 잘살고 있다, 나만 건강하면 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지 않으면...

  
□ 명절이 되면 굉장히 보고 싶으실 것 아닌가.

■ 박 : 글쎄 명절때 집 생각하고 이렇게 되면...오늘 저녁때는 내가 잠을 못자요. 이렇게 가족하고 만났드랬으면 마주 앉아서 그랬겠는데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제 수원에서 하는 개성공단사진 전시회에 갔다 왔거든요. 그거 보고 와서도 잠 못잤어요. 이것이 빨리 잘 됐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왔다갔다하고 그러겠는데. 너무나도 잘 알죠. 송악산을 북에서는 어머니산이라고 그런다는데, 박연폭포도 나오고...너무 안타까워요. 꼭 한번 들어가 봐야되는데.

 
□ 사모님을 꼭 애기엄마라고 하시던데.

■ 박 : 동철이 생각하면 나올 때 그때 생각이 자꾸 나요. 왜냐면 그날이 연평 앞바다에서 조기가 제일 전성기일 때에요. 조기가 흑산도에서 연평으로 왔다가 평안북도 철산으로 간 후 대만쪽으로 옮기는 거거든요. 연평치가 산란할 때까 되어서 제일 알이 커요. 

애기하고 셋이서 있는데, 이 조기가 엄청나게 나왔어요. 우리 애기를 부방향장(세포위원장) 부인이 안고는 그걸 염장을 하느라고 다들 경황없는 중에 나를 보지도 못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애기가 나한테 손흔들던 모습. 꿈에 나타나도 그것 밖에 안나타나요. 왜 그러냐면 그 이상은 본 것이 없으니까. 나한테 손흔들던거. 그 애가 육십이 됐으니 지금 뭐 이게 너무 가슴아파요.

나는 교도소있으면서도 면회한번 오지 않고 그랬지만 나만 건강하면 된다, 집에 있는 가족들은 당에서 보호해주기 때문에 내가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 계시는 분들은 가족들이 면회오고 걱정하는 뭐 그런 것이 있잖아요. 난 그런 것을 전혀 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엄청나게 가벼웠더랬어요.

 
양희철 선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양희철 선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사모님은 조금 섭섭하실 것 같다. 오실 때도 살뜰하게 한 말씀 안하셨을 것 같은데.

■ 박 : 나는 성질이 그래서 그런지, 대남사업하면서 3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생활하는 동안에 말다툼 한번 해본적도 없고 그러면서도 지금 제일 생각나는 것이 왜 그때 더 잘해주지 못했나 하는 거에요. 지금 누우면 그게 생각나요. 특히 왜그러냐 하면 가족은 언제 내가 나갔다가 이렇게 사고날 지 계속 걱정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 위로해주지 못한 것 그게 상당히 미안해요. 

그래서 다른 분들한테는 결혼생활하면서 앞으로 후회할만한 행동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한번도 말다툼하지 않았지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으로 후회하는 생각이 드는데, 싸우고 그랬다면 지난 후에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 양 : 그러니까 봐봐. 평소에 비록 속으로는 정말 사랑한다고 하지만 표현으로 못했으니까 당신 내가 사랑해라고 해 보시라니까.
 
■ 박 : 나는 그렇게, 그런 것 까지는 없었어요. 동철이 엄마는 다섯살 차이니까 지금 82살이구만요. 하여튼 동철이 엄마도 편안한 생활은 못했으니까. 언제 나갔다 언제 잘못될지...62년도 되면서 사고가 엄청 많았거든요. 나갔다가 들어오지 못하고 희생돼서 들어오는 분들로 계속...그런 것만 보기 때문에. 그러고 어떤 분들은 그런 걸 못하겠다고 가는 사람도 있고. 내가 있는 동안에도 두 사람이 가버렸어요. 

애기 한번만 딱 봤으면 좋겠는데, 이것이 제대로 되겠는지..

 
송환, 진심이 있다면 이래서는 안된다

□ 통일부나 정부 당국자들이 선생님들을 찾아와서 송환을 위한 의논을 한 적이 있나.

■ 양 : 이인영 장관이 여길 한번 온다고 했어요. 간접적이더라도 자기들 상황이 이렇다는 설명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일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실상 우리는 여기 현실법에 저촉돼서 징역을 살았다고 치더라도, 27년 살았죠. 난 37년을 살았어요. 그렇다면 나오게 되면 자기 원적지로 보내줘야 하는 게 원칙 아니에요.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사회를 표방하면서 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당면한 우리들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 자기가 직접 오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서면상으로라도 할 수 있었을 거에요. 이것이 하나의 국가를 움직이는 정체냐 하는 걸 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난 처음엔 문재인 이분에게 기대가 있었는데, 완전히 없어져 버렸어요.

민주당과 청와대에서 2차 송환 희망자 명단을 보내달라고 해서 한번씩 보낸 적은 있는데, 통일부는 우리가 직접 접촉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이 없습니다. 진심이 있다면 여기 와서, 개인적으로라도 그래서는 안되죠.

그저께 목요일에 우리 김영식 선생님이 통일대교에 가셨습니다. 피켓 앞쪽에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계시고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쓰고 또 다른 면에는 '6.15공동선언 합의사항을 이행하라'고 썼습니다. 파주경찰서 보안과장이 나와 있었어요. 김 선생님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으면 나 여기서 죽는다고 넘어지고 했는데, 곁에 있던, 한때 진보적이었던 인사가 '왜 이런 시기에 그런 주장을 하느냐'면서 '정세가 좋을 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해요. 남북이 포를 서로 쏘는 격화된 시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이야기같애요.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당사자 입장에서 역지사지해보라.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었으면 이러시겠느냐'고 했어요.

■ 박 : 내가 하루라도 가서 살고 싶은 것은, 인민학교 3학년때 해방이 되어서 공화국에서 살게 되었는데 2년 더해서 5학년 졸업했어요. 다른 해에는 다 6년이었는데, 우리 졸업할 때는 5년이었어요. 그리고는 중학교 3학년때가 16살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난거에요. 50년에 군대 나가서 꼭 7년 있었어요. 군관학교에 들어갔다가 고혈압때문에 제대되었어요. 지금도 후회되는 것이 노농적위대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거에요. 

병으로 제대된 사람은 노농적위대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군사동원부에 가서 그냥 제대되어 왔다는 것만 확인하지 등록이 안된단 말이에요. 그래가지고서 내가 전쟁 3년 다 겪고나서 군관학교 제대되고 사회 나와서 꼭 1년반 사회 생활을 했어요. 영화관에서 영화기사를 한거에요. 소련영화, 동독영화 상영해주고 하다가 당에서 소환해가지고 1년 반만에 대남사업에 동원된거에요.

그러니까 사회생활이란 건 1년반 해본 것이 그게 다에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들어가서 다만 하루라도 사회생활을 해보고 죽었으면 하는 그 생각이에요.

 
□ 영화기사일은 재미있으셨나.

■ 박 : 학교에 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연극영화대학에 재직반이죠. 어린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과정이에요. 거기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에서 딱 소환해서 오니까. 그것도 안됐죠.

 
□ 아쉬우셨나보네.

■ 박 : 아 그렇지 않고 내가 영화기사가 되었더라면 어떤 영화가 나왔을지 알아요.(웃음) 그래서 내가 자꾸만 가서 다만 몇일이라도 사회생활을 했다면 1년반에서 더 추가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거에요.

■ 양 : 그것은 2차적인 거고, 1차적인 것은 동철이 손잡고 동철이 엄마하고 만나야 하는 거지.

■ 박 : 한번 노력해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세요. 우리만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니까.

 
□ 이렇게 매번 명절마다 자식같은 후배들이 찾아와서 인사드리고 하니까 좋으신가.

■ 박 : 아이구 그걸 말해서 뭐해요.

김영식 선생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김영식 선생 [사진-통일뉴스 김래곤 통신원]


누군가 힘들어 다른 결심했더라도 그 책임은 내게 있다.


■ 양 : 김 선생님은 속이 아주 깊으세요. 왠만하면 가족이야길 안합니다. 박 선생님과 달리 김 선생님은 속에 꾹 담고서 참다가 때로 폭발할 때는 고함을 내지르고 그래요. 그때 조금씩 이야기합니다. 강원도가 고향이신데, 그렇게 다정다감할 수가 없어요. 속에는 포근함이 항시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런 이야기하자고 하면 귀찮다고 말도 안하려고 하십니다. 돌아가신줄도 모르고 그런다고..

 
□ 지난번 1인시위하실 때 따님 이야기를 하면서 카메라를 보내셨다고 했는데, 그 따님이 카메라를 좋아하셨나.

■ 김 : 김련희씨 딸 연금씨 이야기에요. 나는 집안이 있어도 소식을 모르는데, 김련희씨는 자기 남편한테 시계를 사준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연금이에게 카메라를 보내면서 대중사업에 잘 쓰길 바란다고 했죠. 내가 62년도에 딸 김경자를 놔두고 나왔는데 소식을 모르니 연금이가 찾아서 같이 한 가족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했어요. 그래서 카메라를 보낸 거에요.

■ 양 : 유감스럽지만 김 선생은 가족은 다 죽었을 것이다, 마누라는 다른 데 개가하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당신 딸한테 편지도 썼어요. 불쌍한 너희 어머니에게 잘해드리라고.

 
□ 박 선생님이 생각하는 신념과는 또 다르네요.

■ 양 : 그것과는 또 달라요. 분화가 많이 되어서 그런지. 젊은 청춘이 그냥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 카메라를 보낸 특별한 이유가 있나.

■ 김 : 그거 뭐 여기 나와서 교도소에서 체육운동할 때 보면 교무과장 같은 이들이 막 사진찍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연금이도 자기가 뭐 남기고픈게 있으면 사진도 찍고 뭐 그렇게 재밌게 살라고 보낸거요. 

■ 양 : 김경자 언니 만나서 사진찍어 보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지요. 그렇게 한 가족처럼 살아라는 편지를 했으니까.

 
□ 첫 따님인가.

■ 김 : 경자는 첫딸인데 1960년 8월 15일에 낳았어. 그전에 현일이라고 큰 아들은 59년에 봤고. 세번째 자식은 태중에 있었고.

 
□ 연세로 볼때 지금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많은데. 사모님도 그렇고.

■ 김 : 그런데 난 이거 뭐. 박 선생은 다 살아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는데, 나는 그런 자신감이 없어.(쓴웃음)

 
□ 한집에 살면서 박 선생님하고 의논도 좀 하지 않나.

■ 양 : 아주 회의적이에요.

 
□ 회의적인 이유가 있나.

■ 김 : 이유는 없는데. 아들놈은 내가 나올때 몸이 건강하질 못했어.

■ 양 : 부인은 젊은데, 그렇게 오래 혼자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거죠. 딸한테도 그렇게 편지를 했다니까. 니 엄마가 그렇게 했더라도 엄마한테 잘해라고. 그런데 김 선생, 살아계시면 그냥 김선생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그냥 계신다고. 리인모 선생님도 그러셨잖아요.

 
□ 두 분 생각이 다르지만 다 이해가 된다. 사모님이 계속 살아계시다고 생각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텐데.

■ 김 : 나는 북에 있을 때 아내를 두고 군대나갔다 들어왔어요. 들어와서 아내가 딴데로 갔다나 어떻다나 하는 소리도 듣고 그랬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젊은 처가 사는게 어려워서 딴데 시집갔다 그래도 나는 박수치고 칭찬을 해요. 그 책임은 나에게 있거든. 내가 돌봐주지 못했으니까. 젊은 여자가 어려워서 딴데로 갔는데 그걸 가지고 탓할게 없어요.

■ 양 : 김 선생님은 국가일에 동원되지 않았어요. 그 가족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당에서 보호해준다는 걸 믿으셔야죠.

■ 김 : 그렇죠. 그것도 믿죠.(웃음) 나는 당원이었고, 아내는 당원은 아니었지. 조선노동당원이 되기는 참으로 힘이 들어요. 정말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열성적으로 실천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데, 열심히 해야 되요.

 
□ 연세도 여든을 훌쩍 넘겼는데, 가족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 않나. 왜 내가 보고 싶은 가족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있는지, 참 답답하실 것 같다.

■ 김 : 그걸 어떻게 말할까. 난 누굴 탓하는게 아니야. 가족을 못 보게 되었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역사를 탓 하는 거죠. 만나고 싶지만 역사가 그렇게 흘러가는데 안되는 걸 어떻게 하겠냐는 거죠. 

그래서 나는 다른 이야기는 다 걷어치우고 내 조국 내 민족을 스스로 잘 다스려야지 외국놈들에게 이렇게 비참하게 당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 또 생산수단을 개인소유로 해서는 안되고 우리민족끼리 화목하게 살자는 것도 잊지 말고.

;나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고향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김영식 선생은 지난 16일 임진각 통일대교앞에 나갔다가 경찰들로부터 사진도 압수당했다. '[사진-양심수후원회 제공]

나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고향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김영식 선생은 지난 16일 임진각 통일대교앞에 나갔다가 경찰들로부터 사진도 압수당했다. '[사진-양심수후원회 제공]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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