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생, 89세 양희철은 이제 북으로 가고 싶다

37년 복역 장기수의 새해 소망... 2차 송환을 기다리는 10명의 비전향장기수들

 

 

1934년생, 89세의 양희철은 새해에는 꼭 북녘땅을 밟으려 한다. 2차 송환을 바라는 이제는 딱 열 명뿐인 장기수들의 손을 잡고서 휴전선을 넘어가려 한다. 가서 106세이실 순길 형님을, 돌아가셨다면 조카들이라도 만나고 싶다.

2000년 9월 1차 송환 때 북으로 먼저 갔던 63명의 동지들을 만나 부둥켜 안고 싶다. 또 남녘 동포들의 따뜻한 인사를 북녘 땅 여기저기에 전하고 싶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인도적 차원에서 인민군이나 공작원 출신의 장기수들을 북으로 돌려보내기로 합의했다. 통일부는 후속조치로 비전향자이어야 하고 본인에 한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양희철은 전주교도소와 광주교도소에서 거듭된 강제 전향 공작을 이겨냈기에 신청이 가능했지만 포기했다. 당시 그는 1999년 출소해서 막 가정을 꾸린 상태, 아내와 헤어질 수는 없었다.

지금은 딸 아이가 성인이 되었고 아내는 북으로 가겠다는 양희철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제 홀가분하게 2차 송환을 요구한다. 2022년 양희철과 미송환 장기수들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양희철 간첩단 사건'으로 1965년 무기징역 선고

 

▲ 올해 89세의 양희철선생 그는 37년을 복역한 장기수다. 북으로의 송환을 희망하고 있다. ⓒ 민병래

 
양희철이 평양을 방문하게 된 건 1961년 3월, 헌병대에서 제대해 막 단국대에 편입했을 때였다. 당시 대학가에는 4.19 이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처럼 통일의 열기가 넘쳐났었다.

양희철도 새 학기 초 그 세례를 흠씬 받고 있을 때 돌연 열여덟살이나 많은 큰 형님 양순길, 1950년 맥아더의 인천상륙 이후 헤어졌던 형이 나타났다. 와세대 대학을 다니며 항일운동에 가담했던 형은 어린 동생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지만 해방 후 남로당에 들어가 서울시당에서 활동했었다.

그런 형이 10년 만에 찾아와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그간의 세월을 얼버무리고 몇몇 연락을 부탁했다. 양희철은 형이 북에서 내려온 것을 직감하고 "나를 평양으로 데려가달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남쪽 대학생들의 얘기를 전하고 싶다"며 형의 말을 무지르고 들어갔다.

형은 계속 일본 얘기를 했지만 양희철은 "내 뜻대로 안 되면 차라리 신고하렵니다" 하면서 고집을 부렸다. 결국 형은 양희철의 뜻을 받아들였고 형제는 충남 서산 바닷가에서 공작선을 타고 해주 용남포로 향했다.

해주를 거쳐 평양으로 들어간 양희철은 평양순안통일대학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유물변증법과 정치경제학, 특수과목으로서 정세분석을 배웠다. 주말에는 노동당의 지도원과 신의주와 회령 등 전국을 돌며 전후복구현장을 둘러보았다. 기업소나 협동조합에 마련된 잠자리에서 북녘의 청년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새나라 건설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흠씬 느꼈다.
   
그런데 그해 5월 17일 아침 당의 과장과 지도원이 양희철의 기숙사 방으로 들어와 5.16 쿠테타 소식을 전했다. 양희철은 "내려가서 친구들의 안전도 확인하고 여기서 만난 북쪽 청년들과 대학생들의 모습을 전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7월 그는 난수표책을 챙겨서 서천 바닷가로 내려왔다. 양희철은 서울로 올라와 고려대와 단국대를 찾았다. 반공을 앞세운 5.16에 공기는 확실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평양 방문 이야기를 꺼내며 '남북대학생들이 힘을 합하자, 청년들이 다시 일어서야 한다'며 서울대와 단국대, 신촌을 부지런히 오갔다.

계획했던 3개월을 훌쩍 넘겨 2년이 가까워질 무렵 믿었던 동료 학생이 방첩대(적국의 간첩이나 첩보 활동을 막는 임무를 맡던 부대)에 양희철을 신고했다. 그는 1963년 4월 12일 체포되었고 1심에서 '고려대 지하당사건'이란 이름으로 기소되어 7년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는 그가 평양에 다녀온 사실이 부각된 '양희철 간첩 사건'으로 공소가 변경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쥐 잡아 먹으며 버틴 징역 37년

1965년 3월 16일 대법원에서 무기 징역을 최종 확정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대전교도소로 옮겨왔을 때 양희철의 나이는 서른. 쇠도 씹어먹을 나인데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가다밥(징역밥, 1홉으로 약 180ml 수준)을 줘 그의 몸은 나날이 오그라들었다.

하루 20분간 주어지는 운동시간, 양희철은 교도소운동장의 크로바와 쑥은 물론 독성이 있다는 역귀풀까지 모아 손바닥이 퍼렇토록 짓이겨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풀이 동나면 양희철은 하늘을 바라봤다. 깨끔발로 안되면 제자리뜀으로 솔잎과 고엽나무,감나무의 잎을 땄다. 징역 1년 만에 양희철은 교도소 내 모든 나뭇잎과 풀잎을 맛봤다.

광주교도소로 옮겨간 1975년도부터 양희철은 식물을 넘어 육고기 사냥에 나섰다. 당시 그는 전향공작반에게 당한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상태였다. 영양부족까지 겹쳐 손발톱은 누렇게 변했고 장딴지는 푸르댕댕 부어올랐으며 어지럼증까지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던 어는 날, 양희철은 밥풀 몇 알로 쥐 한 마리를 방으로 유인했다. 몇 번을 망설이던 쥐가 마침내 사방 문짝 밑에 달린 배식구멍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녀석을 구석으로 몰았다. 쥐는 찍찍거리며 빠져나갈 틈새를 엿봤지만 양희철은 앞발로 쿵 디디면서 빗자루로 내리쳤고 쥐는 널부러졌다. 아, 얼마 만에 먹어보는 고기덩어리인가? 광주교도소 5029번 양희철은 그날부터 쥐 사냥 선수가 되었다.

장기수들에게 징역의 고통은 배고픔만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장기수들의 내면까지 탄압했다. 73년 11월에 이어 74년 8월에 행해진 광주교도소의 전향공작은 잔인했다.

"이 새끼 묶어, 그냥 손도장만 찍으면 된다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네."

전향공작반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달려든 세 명은 양희철의 몸통을 포승줄로 감고 의자에 묶었다. 백열전구만 밝힌 지하방엔 곰팡이가 덕지덕지 앉았고 바닥에 고인 물구덩이에서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반장은 양동이 물에 적신 밧줄로 양희철을 내리쳤다. 손가락 굵기의 동아줄은 얼굴을 찢고 허벅지와 장딴지의 살을 파고들었다.

네가 끝까지 버티나 보자 하는 악다구니, 촤아악 밧줄 감기는 소리, 차라리 죽여라하는 양희철의 비명이 지하실의 축축함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1시간이나 지났을까 "이 새끼 똥 싼 것 같은데요" 뒤에서 쪼그려 앉아 의자를 잡고 있던 공작반원이 코를 움켜쥐었다. 반장은 동아줄을 물구덩이에 던지며 "방에 쳐 넣어"라고 소리쳤다.

이런 고문 끝에 많은 장기수들이 강제 전향을 당했다. 전향을 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도장을 찍더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가? 북한과 김일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수시로 답해야 하고 사상전향 성명서를 작성해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고백과 참회를 낭독해야 한다.

전향수는 분류심사에서 C급에 속하게 되는데 C급은 전과 4범 이상이 포함되어 있는 구간이다. 결국 전향은 전과 4범의 잡범으로 전락하는 것이며 그 후부터 교도관들에게 일반수와 똑같은 모욕과 체벌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장기수들이 이에 도장을 찍은 것은 자살까지 할 정도로 그 고문이 가혹했기 때문이다.

양희철은 버텨냈다. 그는 전향공작이 마지막으로 극성을 부리던 74년 8월 광주교도소에서 여덟 번이나 생똥을 싸면서 '사상의 자유'를 지켜냈다고 기억한다. 이 전향공작은 그가 99년 3.1절 특사로 가석방이 확정되었을 때도 고개를 내밀었다. 담당 공안검사는 석방되기 한 달 전쯤부터 찾아와 '전향서'를 내밀었고 거부하자 '생활계획서'를 쓰라고 했다.

이 또한 외면하자 '준법서약서'에 사인만이라도 하라고 했다. 그는 단호하게 물리쳤다. 어떤 경우에도 내 양심을 묶을 수 없다며 차라리 가석방을 취소하라고 외쳤다. 결국 그는 뜻을 관철했고 99년 2월 24일 37년의 징역생활을 마치고 장용주 신부와 강신석 목사의 신원보증으로 광주교도소 감옥문을 열어제쳤다.

비전향장기수의 교도소 바깥 생활

 

▲ 양희철선생과 장기수들의 쉼터 '만남의 집'에서 뒤로 보이는 이는 그와 함께 징역을 살았던 김영식선생이다. ⓒ 민병래

     
양희철은 출소해 '탕제원'을 열었다. 그는 광주교도소의 이름난 침구사였다. 양희철이 침구에 관심을 가졌던 건 집안 내력이었다.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에서 큰 아버지가 한약방을 했고 그의 아버지는 한의사 밑에서 침을 놨다. 양희철은 그때 눈여겨보고 서울 휘문중으로 유학 와서도 한의학 서적을 틈틈이 펼쳐봤다.

광주교도소에서 전향공작의 파고가 지나가자 양희철은 한의학 공부로 마음을 달랬다. 교도소 도서관에서 황제내경과 침구경혈해설을 구해 공부했다. 침은 얇은 스프링을 구해 시멘트벽에 갈아서 만들었다. 때론 바늘을 구했고 소독은 머리칼 사이에 슥슥 문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까지 그의 침을 청해 맞았다.

이를 눈여겨본 사람이 바로 광주교도소의 김병준 소장, 그는 광주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는 춘곡 강동원 선생과 양희철을 교류하게 하면서 1990년에는 아예 양희철에게 재소자를 치료하는 두 평짜리 진료실을 만들어주었다.

재소자들은 아프면 감옥의에게 가지 않고 양희철에게 달려왔다. 그의 생일날에는 그의 진료실에 재소자들이 보낸 건빵, 사과, 담요, 내복이 수북했다. 양희철은 출소할 무렵인 1999년에는 이미 수많은 임상경험을 가진 노련한 침구사였다.

천주교사목위원회에서는 양희철의 특별한 이력에 주목 1억 2천만 원을 지원 그가 탕제원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동료 장기수 조창손·안학섭·유한욱·신인영을 불러들여 약재를 다듬고 탕을 끓였다. 천주교에서는 수녀 한 분을 파견해 도왔고 시민운동단체나 전교조 관련 인사들이 환자로 찾아오고 수시로 탕약을 단체 주문했다. 

생활 터전을 마련한 양희철과 무리들은 기쁜 나날을 보냈다. 탕제원을 운영한 지 1년 만에 천주교사목위원회에서 지원해준 돈을 모두 갚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2014년 탕제원은 장기수들의 쉼터 낙성대 '만남의 집' 1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사 후에도 '탕제원'은 양희철과 동료 장기수들에게 삶의 활력이 되었다.

전국에 흩어진 묘소 답사... 2022년엔 고향에 가고 싶다

 

▲ 전국 묘지순례를 하는 양희철 2020년 9월 박창수 동지의 공원묘역에서 ⓒ 민병래

 
양희철은 2018년 팔십 후반이 되면서 힘에 부쳐 탕제원 운영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전국 묘지 순례를 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부터 시작한 발길은 충청남도까지 올라왔다. 장기수로 복역중에 감옥에서 사망했거나 출소해서 힘겹게 살다 죽어간 동지들의 묘를 돌아보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꼭 가고 싶었던 곳이 황필구의 묘소였다. 마을 이장이 가리킨 벌판 위에 봉긋 솟은 둔덕은 자그마한 대나무숲이었다. 그가 대전교도소에서 목 매달아 목숨을 끊은 때가 85년이었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황필구는 익산농고를 나와 일본 릿쿄대학을 졸업했다. 해방 후 북쪽으로 넘어가 상업성에서 근무하다가 공작원으로 내려와 잡힌 후 대전교도소에서 무기수로 복역 중이었다. 그는 양희철이 대전교도소로 갔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양희철보다 열여덟인가 많았던 그는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다 견뎌낼 수 있다고 힘을 불어 넣어줬다.

그 말을 듣고 양희철은 안기듯 황필구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68년 양희철이 전주교도소로 이감 가며 헤어질 때도 "살아서 만나자"며 어깨를 두드려줬었는데... 살아서 못 만나고 52년 만에 묘소에서 만나니 술잔을 올리는 양희철의 팔은 마구 떨렸다.

찾아봐야 할 곳 둘러봐야 할 곳은 참으로 많지만 양희철은 묘지가 온전히 있는 동지들만이라도 2차 송환 전에 모두 찾아가 술 한 잔 올리고 동지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 지금까지 30~40기를 둘러봤다. 
 

 

▲ 37년을 복역한 양희철선생 앞에 보이는 이는 그와 함께 징역을 산 김영식선생이다. ⓒ 민병래

 
양희철과 함께 1차 송환에서 배제되거나 신청을 못 했던 43명은 1차 송환 직후 2차 송환을 신청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숨을 거둬 이제 딱 열 명만 남았다. 1926년생 문일승·1928년생 이두화·1929년생 양원진·1929년생 최일헌·1930년생 박정덕·1930년생 박수분·1934년생 김영식 ·1935년생 박희성·1945년생 이광근. 적게는 77세부터 많게는 97세에 이르는 노인들이다.

양희철은 새해에는 이들과 함께 북으로 가는 길에 올라 끊어진 교류의 길에 다시 오솔길을 내려한다. 아내와 딸은 양희철의 뜻을 받아들여 생이별을 이겨내기로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통합을 위해 박근혜를 사면했고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고 국민에게 '혜량'을 요구했다. 늙고 병든 이들의 요구는 그리 많은 고뇌가 필요하지도 않을 터인데 끊어진 교류의 길에 다시 '오솔길'을 내겠다는 이들의 마음을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내 몰랐던 것일까? 외면했던 것일까?

<못다한 이야기>

① 1934년생 양희철은 한국전쟁으로 휘문중을 중퇴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1956년 고려대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헌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그는 사범대학이 아니어도 교과과목만 마치면 교원 자격이 부여되는 과정이 단국대에 개설되었기에 편입을 했다.

② 72년 유신체제가 만들어지고 반공을 국시로 이데올로기 전쟁에 나선 박정희정권은 감옥 안의 장기수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더더욱 한국전쟁 이후 20년 정도 유기징역 선고를 받은 비전향수들의 출소 시점이 임박했던 터라 박정권은 체계적인 전향공작 계획을 세웠다. 당시 장기수들이 있는 감옥에는 중정은 물론 보안사, 치안본부 대공국의 담당관이 배정되어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중앙정보부법의 '조정권'을 갖고 대공심리전국이 주도하여 광주, 전주, 대전, 대구 등 교도소별로 전향공작반을 만들었다.

전향공작은 초기에는 금지였던 가족면회와 편지를 허용하고 운동시간을 늘려준달지 빵이나 일용품을 나눠주는 회유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게 효과가 없자 끔찍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공작반 밑에 교도소내 폭력 전과자들을 '떡봉이'라는 이름으로 동원,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장기수들이 수감되어 있던 네 군데 교도소의 고문 방법은 실로 다양했다. 웃통을 벗겨 바닥에 누인 다음 바늘로 등짝을 마구 찌르거나 방안 벽에 성에가 끼는 추운 날씨에 물을 끼얹어 몸을 얼어붙게 했다. 30도가 넘는 더위에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을 0.75평의 방에 몰아넣었다. 눕는 것은 물론 앉지도 못하게 했고 날씨가 더우니 서로가 내쉬는 숨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까무러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방 안의 스피커를 가장 높게 틀어 귀청이 찢어지게끔 하고 심한 고혈압 환자나 당뇨환자에게 약 지급마저 거부했다.

 

③ 이 기사의 전문은 A4 8매입니다. 지면의 제약이 있어 A4, 4매로 줄인 기사입니다. 이 글의 전문은 1월 7일 이후 현장언론 민플러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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