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시롱 감시롱

오감시롱은 나의 친정이자 삶의 자양분

2010.05.08 11:08

은숙이(서'씨) 조회 수:2675

93년도 3월, 복사꽃 피는 봄날이었다. 내가 처음 오감시롱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  김용택 시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섬진강을 지나 구담리 마을을 돌아 뒷산에 핀 복사꽃을 보았다. 사람들이 이상세계를 들먹일 때마다 왜 '무릉도원' 운운하는지를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맑은 봄날의 화산함‘같은 것은 도저히 용인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의 아픔에서 비껴나 있지 않는  오감시롱 사람들 속에서 맑은 봄날을 온전하게 다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김용택 시집 ' 맑은날' 을 읽고 그 시들을 베끼며 그런 '맑은날'을 갈망하던 무렵이었다. 오감시롱을 따라 섬진강 기행을 다녀온 후부터 였을거다. 봄날이 맑고 화사한 기억으로 남았던 것이. 구담리 뒷산의 복사꽃처럼...  그래서인지, 섬진강이 가까운 전주에 살면서도 자주 섬진강을 떠올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섬진강은 항상 봄날이다. 서른 다섯에 늦 아줌마가 되고, 둘째 아이가 뛰어다닐 즈음에야 꼭 한번 더 가보겠다던 그 곳을 찾았다. 그 후에도 몇번 더, 어둠보다 산 그늘이 먼저진다던 섬진강 산기슭을 가 보았다.  남편과 아이의 손을 잡고 나에게 아름다운 봄날을 선사해 주었던 그 길을 걸으며 오감시롱의 첫 기행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 추억을, 오늘 다시 추억하면서 새삼 오감시롱과 함께 묻어온 17년 세월이 봄날처럼 따뜻하다. 오감시롱과 인연을 지어오면서 나는 오감시롱 식구들과 부대끼며 지내온 시간보다 변두리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러다보면 좀 서먹하고 소원해질 법도 한데 날이 갈수록 어째 오감시롱이 꼭 친정 같이 여겨진다. 하긴 친정이 어디 자주 못간다고 친정이 아닐 수 없은 노릇이긴 하지만. 친정이랍시고 해 걸러 한 번이나 얼굴 내밀고 마는, 좀 뻔뻔하다 싶지만, 그 뻔뻔한 속내에는 다 믿을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모임 대소사에 내 몰라라 한다고 나무라거나 눈칫밥 주는 사람 하나 없다. 아무리 누치밥 주는 이가 없다고는 하나, 부족한 자식은 저 알아서 캥기는 법, 나도 늘 오감시롱에 미안하다. 비록 성의가 부족하여 자주 참석하지도 못하고, 안부전화도 못하지만 설거지 할 때 같이 작은 틈이 날 때는 문득 문득 이식구 저식구가 떠오른다. 어찌사나 궁금도 하고 만나서 밤새도록 수다를 떨고 싶을 때도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떨어져 있다보니 핑계도 많고 검림돌도 많다. 시간맞혀 가는 모임이 아니더라도 내 여건이 되어 가고 싶을 때에도 친정은 있으나 친정집은 없는 셈이어서 막상 갈 곳이 없다.  살아가다 친정집이 필요할 때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빈집이지만, 살림살이가 그대로인 고향집에 가서 하루 이틀 묵고 온다. 오감시롱처럼 해 걸러 한번이나 가보는 친정집이다. 그래도 틈날 때, 떠올릴 수 있는 빈 고향 집이나마 있고 언제 만나도 편안한 오감시롱 친정식구들이 있어, 나의 친정은 얼마나 든든한지.

총회때 모여 ‘ 오감시롱 모임이 예전같지 않다, 살림살아가 궁색해진다' 걱정하면 '그래, 그렇구나!' 함께 심각하다가도 돌아서면 내게 오감시롱은 그냥 든든한 친정일 뿐이다. 잠시 모임이 힘든 것도 사십대를 축으로  돌아가는 오감시롱의 특징 때문이다. 오감시롱 역량을 여러 곳에서 필요로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므로 오감시롱이 힘들다해도 그닥 많이 염려되지 않는다. 이렇듯, 별로 걱정되지 않는 짱짱한 친정을 가진 것이 나에게는 뿌듯 하다.   사람들이 원가족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메김해 나가듯이 오감시롱도 내게는 원가족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편리함과 욕망과 물질의 세계에만 경직되지 않도록, 나를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정신적 연골역할을 한 것도 다름아닌 내 고향과 오감시롱과 선생님들께서 계시던 낙성대였다.  지금은 뵐 수 없어 안탑깝지만 연로하셔도 정정한 정신으로 우리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선생님들이 있어 더욱 그랬다.  그런 버팀목의 그늘 속에 있으면서도 감히 나는 늘 선생님들이 안타까왔다. 선생님들의 신산한 삶, 끝에 오는 고적함과   팔남매를 키우느라  나무껍질처럼 버석거리는 내 부모님의 건강과 노년의 외로움이  늘 한모양으로 느껴져서였다.  부모님을 옆에서 지켜드리지 못하는 불편함이,  낙성대나 수유리를 찾아 선생님들의 식사를 챙기게 되는 날에는  더욱 아픈 침이 되었다. 마른 밥상을 대할  부모님의 얼굴이  선생님들의 메마른 얼굴 위로 겹쳐질 때는 참으로 마음이 먹먹했었다.  결혼을 하지 않아 더욱 자주  집을 찾지 못했던 불효 탓도 있었지만.  막내딸을 여의지 못해 조상볼 면목이 없어 죽을 수도 없다던 부모님과, 점잖았던 이종선생님,자상했던 이종환 선생님, 따뜻했던 조창손선생님, 채만식을 연상케 하는 김선명선생님, 지각하는 제자가 자신을 보게될까 저만치 숨었다는 오병철 선생님, .....모두 가슴이 아리도록 보고싶다. 이렇게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그동안 오감시롱이 친정같다 여겼던 것이,오랜만에 만나도  항상 느끼게 되는 편안함이나 의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전주에서 늦둥지를 틀고 시작한 ’생활‘이라는 것이 그리 녹녹치는 않았다. 결혼 전에 흔들림 말고 그처럼 치열하게 부딪혀 본 적이 있었을까? 나즈막한 도시, 정답다 여겨지던 전주가 어느새 결혼 후에는 허허벌판이었다.  정둘곳 없는 곳에서  피붙이 하나 없이 견뎌내는 일은 객지 생활에 이골이 난 나에게도 버거웠다. 서른 다섯에 휴지버리는 방법까지 다른 남자랑 같이 사는 것도 모자라 같은 일을 하며 밥 버는 일도, 가르치기만 하다  학원을  직접 꾸리는 일도, 결혼 선물로 받은 빚더미를 갚아나가는 일도, 우리 어른들이 이명박 정부 만큼이나 많은 잘못을 아이들에게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는 일도, 그 숟한 상흔들을 아이들을 통해 보는 일도 턱에 숨이 차오를 만큼 버겁기는 매 한가지였다.   대한민국의 학원가에서 살아 남는 것은 혁명보다 어려웠고, 집보다는 견디기가 나아  학원에 온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 한다는 것은  혁명처럼 어려웠다. 단단한 통념으로 똘똘 뭉친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살아남아야 하며 또 뛰어넘어야 하는 이중적 한계, 그 모순의 양날을 잡고 날마다 곡예를 했다. 10년이나 넘게 작은 시도들을  끊임없이 해 볼 수 있었던 열정은, 주저 앉지 않는 오감시롱  사람들을 흉내내는 일이었으리라. 오감시롱 일꾼들의 질펀한 웃음이, 오감시롱  사람들과 같은 꿋꿋한  이들이 있었기에 일상의 그 가파른 등반길 위에서  마구 두리번 거리지는 않았다. 같은 꿈을 꾸었던, 그래서 힘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이 있었기에....

 자주 참석도 못하던 오감시롱은  원거리에서 이런 식으로 내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해왔다.  타양살이 십여년 만에 ,'시민행동 21'에 소속해  있는 들꽃모임 '꽃다지'에 아이들을 데리고 따라다닐 만큼 여유가 생겼다. 아이들 '독서 지도 방법'을 연구하는 모임에서 삼년 넘게 공부도 하고 책도 읽으며, 주저 앉은 기억력을거의 다 복귀시켜 놓았다. 이젠 이런저런 아픔이 있는 아이들을 접하면서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는 않는다. '무슨 일을 할수 있을까' 오지랍 넓게  들이대긴 해도 마음 아리지 않을 만큼은 단련이 되었다.  교육이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하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임을  확신하면서부터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조금 수월하다. 낯선 곳에서 낯설지 않게 사람들을 만나고 웃을을 수 있는 것도 오감시롱의 질펀한 웃음을 흉내내는 일이었다 이 런 것이 바로 오감시롱의 체취가 아닐까 내게 있어 오감시롱은 친삶의 자양분이다. 스스로 광합성을 할수 있게 해주는 ... 이런 이유로 나는 앞으로도 .              오감시롱을 떠나기 힘들 것 같다.   부디 오감시롱의 이 지난 체취가 쉽게 지워질 수 없도록 오래 오래 베어 들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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