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시롱 감시롱

서산총회를 다녀와서

2010.02.11 22:04

악마 조회 수:2958

     서산에서 총회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참석하기로 마음먹는 일은 , 서울 어디라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쉬웠다. 더군다나  전주에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걸쭉한 막걸리같은 옴시롱감시롱 식구들과  하룻밤을 마음껏 얘기하고 웃을수 있다는 것은 서울 특별시민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벅찬 일이었다. 게다가 박근직 선생님과   봉례 언니가 진짜 농군이 다 되어 터 잡아 뿌리내리고 있는 서산이 아닌가!   2년전 서산에서 열린 때에는 아들이  진돗개 녹수의 머리를 쓰다듬다 물려 병원으로 달려갔던  추억(?)도  있던 곳이다 . 그때와 만찬가지로 이번  총회에도 기껍게 마음을 내주는 남편의 외조 덕분에 가족동반의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봉황이 내려앉았다는  봉락리에 사는  봉례언니는  사과 보다 더 붉은 얼굴을 하고 우리를 맞아  주었고 박근직 선생님은 사람맞을 채비를 하느라 분주하셨다 .새단장을 한 집안에서는  주인처럼 부엌을 차지하고 있는 길자씨와  새얼굴의 노총각 신현익씨, 길자씨의 상사였다는 얼굴 좋게 생긴 정훈철씨가 이미 도착하여 일잔을 하고 걸치고 있었다 .  손 크고 부지런한 길자씨는 김치부침개 반죽을 한대야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걸 다 어떻게 할 요량인지 ... 진도가 고향인 남도의 인심이 그런걸 보고 배웠으니 그녀인들 어쩌겠는가?
     두런두런 ,  지나간 시간을 두루 살피고 있자니 앳된 중학생이던 두리가 목 하나는 더 자라   셋째 세미를 데리고 나정옥씨와 나란히 들어섰다.   바깥에서는 모성룡씨와 신현부씨의  특유의 웃음소리가  봉락리 마당을 우렁우렁  채우고 데굴데굴 구르며  사람대신 인사를  해왔다.  지희씨가 자기보다 큰 아들딸을 ,박윤경씨는 애인 같은 아들을, 헐리우드 영화배우 머리를 한 여혜정씨는  우리딸과 동갑내기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서른 다섯에 늦 결혼을 하고 허겁지겁 키운 내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보니 세월의 흐름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뿌듯함과 함깨 우리들의 젊음.열정에 대한 아쉬움이 잠깐 야릇하게 교차하였다.  아이들 자라는건 어른들 늙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봉례언니의 우스개 소리에서 그간 우리들의 수고로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이들끼리 이방 저방으로 오감시롱  떠들어대고,  어른들도  새해인사와 묵은 해 못다한 안부들이 옴시롱감시롱,  오감시롱의 잔치 도  슬슬 시작되었다. . 식전에 출출한 식구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굴을  섞어 만든 김치부침개가 그만이었다.  그렇게 두꺼운 부침개는 안먹겠다던 현부씨 내외의 투정에도 아랑곳없이 김치부침개는 불티나게 팔렸다.
     어둠이 짙어질 무렵 , 안마당의 장작불로  한사람씩 모여 들었고 바야흐로 잔치는 무르익었다.   기와 지붕 위로 허리 잘린 감나무가 고즈넉한 정취를  더해 주었고 ,  마침 대문 밖 동쪽 하늘에서는  보름 달이 떠 올랐 다.  까치집을 얹은 감나무와  보름달은 잠깐이나마  내  고향 빈 집을 떠올리게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각각 저마다의 향수에 젖었으리라. 그러나 향수에 젖기에는 이십 년의 세월을 엮어온 많은 벗들이 함께 있고, 밤새 마실 막걸리와 장작불 위에서 끓고 있는 안주가 너무 푸짐했다.  입을 쩌억 벌린 굴과 조개의 짭짜름한 바다맛, 그것이 아무리 맛나도 오감시롱 식구들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행복한 맛이었을까? 
     부른 배를 주체하지 못할 때 쯤 되어서야 권오헌선생님,  김호현 회장님,  늦기는 해도 모임에  빠지지는 않는다는 이용준씨,  앉아 있기만 해도 실내를 꽉 채워주는 김호철씨 오랫동안 석사 논문으로 두문  불출했던  이정규씨까지 모두 참석하게 되었다 . 오랫만에 뵈었는데도 권선생님은 세월도 비켜가는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다.   아무말씀 하시지 않는데도 선생님을 뵐 때면 항상 전주에서 혼자 나태해지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물심양면으로 항상 주변을 챙기는, 주고지비 김호현 회장님은 이번에도 회원들에게 나눠줄CD 와 책 한 보따리,  새단장한 실내 분위기에 딱 맞는 벽시계까지  들고 온 터였다.  늦은 저녁 식사가 끝나갈 쯤,  혜순 씨 내외는 아들 딸과 제사를 지내고 피곤할 텐데도  불구하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식사가 끝나고 드디어 총회가 시작되었다.  모성룡회원의 사회로 1년을 정리해보는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불거져 끝내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것은 회비문제였다.  김길자 회장님은 행사나 모임이 있을 때  마다  뒷바라지  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무수리' 역활을 하는 자신이라는 말로 소감을 대신하였다.  지난 한 해의 활동을 돌아보건대  과거의 열정만큼 열심히 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겸손의 변을 하였다. 짖궂은 원로들은 그럼 잘 할  때까지 한번 더  하면 되겠다며 다시 회장으로 슬슬 밀고 가는 분위기였다.  일년 만 더 오감시롱을 맡아 고생 해 달라는 애원을  이런식으로 들이대며 압박했고 또 그런식이 길짜씨에게 먹히고 있었다.  한편  부북스 출판사를 부부가  함께 차렸던 모지회 총무의  회계결산 보고에서는 푼수작전이 통했다.   회비가 내  돈인지, 내돈이 회비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며   혹시 펑크난 곳이 있다면 재산압류나 차압 (?)하라고  협박하면서   총무직을 마무리했다 
     다음은 총회 전 준비모임에서 정리된 운영위  의견이었다.  옴시롱감시롱이 엄연히 독자적인  모임인데도 전현직 회장님을 비롯한 여러 열성 회원들이 양심수후웡회 일을 겸하다보니 자연  후원회의 활동에 치중하게 되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월모임도  경조사로  대신하는 경우가 있고 오감시롱의 가을기행도 후원회 기행으로 대체하는 등   정기모임에 소홀하게  되었다는 자평과 함께 상반기에 비해 하반기의 활동이 너무 저조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회원들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에는 오감시롱을 아끼고 사랑하는 권선생님의 모두 발언이 있었다.  2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임을 이끌어 오는 것이 쉽지 않는 일이며 오감시롱에 대한 자부심을 회원들 스스로 충분히 가져도 좋을 것이라고 격려해주셨다.  전회원이 돌아가면서 밝힌  소감과 다짐은 운영위가 걱정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이었다. 이십년 전통의 오감시롱 뿌리가 그리 만만치 않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나에게도 오감시롱이라는 모임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의미와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비록 일년에 한번 총회밖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오감시롱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항상 나에게 충분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  전주에 살면서  힘들고 외로울때, 오감시롱은 나의 '애틋한 친정' 이었고 마음이 흔들릴때는 '든든한 뿌리'였다. 
    20여년이 흘러 어언 우리 모임의 주축은 사오십대다.  자식도 있고 직장에서도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다.  폭이 넓어진 우리들 역활에 조금은 더 너그러워져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경조사를  포함시켜 월 모임을 계속해 나가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이제는 모임의 개념도 우리들 자녀까지 확대시켜 나가야 되지  않을까?  어른들의 들러리로서가 아니라  모임에서 우리 자녀들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아이들 나름의 문화를 만들어 갈 수있도록 고민해 봐야하는 시기이다.  
     참석이 힘들어 일상 모임에서 늘 힘이 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서산에서 일곱개의 모임을 하고있는 박조직, 박근직 선생님도, 알콜 중독과 그 치료를 연구하고 있는  이정규 회원도 ,오병철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오게된 김호철회원도 , 자기 주도적  학습방법으로 아이들과 치열하게 부대끼고 있는 나,  서은숙이도 분명 오감시롱의 동행꾼이다 . 
   12시가 되어갔다.  총회에서 회원들의 어떤 다짐 보다도 단연 빛났던 것은 신입회원 등극이었다.그동안 참석을 하면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기준이 모호하였다던 신현익씨와 정훈철씨가 정식으로 정규직 회원으로 승급(?)했다. 끝내 제자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한 서운함도 제쳐두고 이현근 선생님의 제자,  김부일씨도  스승의 반열에 올랐다.  전민련일로 고초를  겪다 막 출소한 남편 이경원씨도 신입회원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이만한 신입회원을 확보할 경쟁자는  없었다. 원로들은  길자씨가 회장을 맡은  덕분이라며 회장 직을 거세게  밀어 부쳤다.  호현이 형  사주로  이용준씨가 김길자를 연호했고  회원들도 동참하여 끝내  길자씨에게 회장직을 받아냈다.  총무는 박윤경씨가 되었다.  앞으로 총무는 얼굴도 받쳐 주어야 할수 있다는데 앞으로 박윤경씨가 쭈-욱 오감시롱 총무를 맡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말수가 없다가도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몇 사람에게만 하중이 간다'는 문제점을 지적할 때는 김호현 회장님도 목소리를 내릴 정도로 단호하게 했다. 
    잠깐의 휴식을 가지고, 뜨거운 감자  회비문제로 거의 30분을 토론했다.  월 모임이 활성화되지 않아 돈을 낼 기회조차 박탈 당한 억울한 회원이 있었지만, 회원의 기본 임무인 회비 납부의 의무를 게을리한 파장은 꽤 길었다.
설왕설래 끝에 한 가정당 연 회비는 10만원으로 결정되었고, 밀린 회비는 자신이 회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내기로 결정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회장단이 탄력성 있게 운영하기로 결정함으로서,  회비미납자의 단죄가 끝났다. 이 모든 사안을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드디어 뒷풀이가 시작 되었다.  겨울밭에서 잘라낸 배추 속과 해산물을 안주로 막걸리가 몇 순배 돌아도 취하는 사람은 없었다.  혜순이의 혀꼬부라진 귀여운 주정 말고는, 요즘 됫풀이는 예전에 비해 너무 점잖아졌다.  밤새 사람들을 잠 못들게하던 걸판진 노래판도 막상 없어지고 보니 그 성가신 젊음이 그리워졌다.  잠이 들면서 권선생님께 부석사로, 개심사로 가자고 이른아침부터 깨우시면 안된다는 호현이 형의 으름장(?)을  끝으로  총회는 막을 내렸다.
    가로 세로 잠든 아이들은 아이티의 난민촌을 연상케 할 정도였지만 나름 오감시롱의 질서 속에서 잘도  적응했다.
어른들도  이젠 긴 밤이  버거운지 서둘러 얼기설기 잠이 들었다. 이렇게 오감시롱은 20년 나이를 먹은 것이다.
      2년만에 그리운 이들을 만나 그들을 추억하느라 며칠 밤을 보내며 이글을 쓴다.  이 글로 그 동안 모임을  이끌어 가느라  노고를 아끼지 않은 회원들과 수고를 나누지 못한  미안함을 대신하려 한다.   총회에서 함께 정을 나누지 못한 동료들에게도  건강하시라는 안부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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