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311호(2017년 9월)입니다

2018.04.23 10:10

양심수후원회 조회 수:322

후원회311호_전체 웹 (1).pdf

 

 

 

 

 

 

 

 

 

통권 311호 발행일 2017. 9. 25 | 발행인 김혜순 | 발행처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이 8월 21일 광화문 광장에 긴급히 나섰습니다.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을 비롯해 참가자  모두가 “한미합동 전쟁연습을 당장 중단하라!”고 외쳤습니다. 

단상•소금은 폭양 속에서 고요히 온다_김혜순·1 | 만평·3 | 기쁜일•89세 생신 맞은 양원진 선생님_류경완·4 | 슬 픈일•박재원·임재복 선생님 별세·5 | 소식1_평양시민 김련희 출판기념회와 송환촉구모임·8 | 소식2_양심수 이병 진 교수 8년 만기출옥_이창기/안병길·10 | 소식3_이상호 동지의 인사·14 | 미주소식•평화협정 체결 촉구 집회·15 

| 투쟁1_평양시민 김련희와 북 해외식당 종업원12명을 당장 송환하라!·16 | 투쟁2_보안관찰법 폐지하라·19 | 투쟁 목차 

3-1_적당한 때란 도대체 언제입니까_정지영·22 | 3-2_국정원 적폐 청산, ‘내란음모사건’을 피해가선 안된다·24 | 산행 기•충청남도의 금강산, 용봉산을 오르며_손일순·26 | 월례강좌 후기•실현되지 않은 정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 하여_나정옥·28 | 연재•김련희 수기(11) 따뜻한 내나라_남녘생활의 적응·30 | 광고•양지탕제원·43 | 양심수 현 황·44 | 감옥에서 온 편지•신언택 이영수 김덕용 김경용·46 | 이런 일이 있었어요·55 | 7·8월 재정보고·60 

민가협양심수후원회 | (우) 08802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247길 14-3(행운동 1690-141) 만남의 집 전화 (02) 874-4063 | 전송 (02) 888-4470 | 홈페이지 www.yangsimsu.or.kr | E-mail : yangsimsu0@gmail.com 

행사 안내 

만남의 집 거주 통일애국열사 합동 추도식 

일시 930일(토) 오후 4 

장소 낙성대 만남의집(낙성대역 8번 출구) 

문의 010-4259-2790 | 02-874-4063 

권오헌 명예회장  

출판기념회 

20171029일(일) 

오후 3시 

대방동 서울여성프라자

소금은 폭양 속에서 고요히 온다  

-권오헌 선생 책 출판을 준비하며 

김훈 선생의 <밥벌이의 지겨움>에는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다가 옥구염전에 머물며  쓴 ‘좋은 소금은 폭양 속에서 고요히 온다’라는 제목 글이 있습니다. 작가의 관찰에 따르 면 햇볕이 가장 뜨거운 여름 한낮, 오후 서너시면 ‘소금이 온다’고 합니다. 늙은 염부들은  소금이 염전 바닥에 엉기는 현상을 소금이 온다라고 말한다지요. 어디 소금뿐이겠습니 까. 

초록 옷을 입고 터널 속으로 들어간 여름이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집 문턱까지 왔습니 다. 아침저녁으로 창밖에 손을 내밀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한낮의 가을볕은 여름  볕보다 뜨겁습니다. 가을볕이 뜨거워야 벼가 익는다고 어른들은 금세 ‘변심’한 날씨를 걱 정하셨지요. 뜨거운 볕을 받은 것들이 선물처럼 쏟아지는 때 양심수후원회도 결실을 맺 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권오헌 선생님 책 출판 소식인데요. 우리 사회에 가장 시급한, 인권과 평화통일 관련 된 이슈가 생길 때마다 직필로 꾸짖고 대안을 모색하며 쓴 글들을 모아 책을 준비하고 있 습니다. 2002년부터 투쟁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가장 뜨거운 뉴스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책. 후원회소식지에 쓴 우리의 주장, 통일뉴스에 실었던 기고문, 자주시보나 한겨레신문  

 단상

김혜순_회장 

양심수후원회 소식 |

 단상 

등 언론에 썼던 글들을 통일/평화와 인권/국가보안법이라는 주제로 두 권으로 묶고 활동 사진집 한 권을 더해 문집으로 만드는 중입니다. 자주적인 입장에서 평화와 통일을 주창 하고,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피해를 입은 개인과 단체의 구명과 석방을 촉구하고 정부의  인권정책을 규탄하는 등 통일과 인권 분야를 넘나드는 내용들입니다.권오헌 선생님은 국 가보안법의 희생자인 양심수들의 석방을 위해 온 생을 바쳤지만 이런 책이 나오기까지는  꼼꼼한 기록정신이 한몫을 했습니다. 자료를 찾아 확인하고 사실에 근접해서 글을 쓰고,  그것도 한평생 연필로만 글을 써온 김훈 작가처럼 손으로 직접 씁니다. 선생님의 원고를  받아든 후배들은 ‘이 많은 양을 타 

자로 치라는 거야?’ 하며 화들짝 놀 

랐지만 이내 그 글의 정교함과 수 

고로움에 할 말을 잃을 때가 많았 

습니다. 문집 두 권은 1600쪽이 넘 

는데 이렇게나 많은 양을 손 글씨 

로 쓰셨다니 정말 여름 소금밭의  

염부만큼이나 땀을 흘렸을 겁니다.  

게다가 낮에는 주로 집회나 연대회 

의, 재판방청, 면회. 회원활동 참가  

등으로 글을 쓸 여유가 없었으니  

고즈넉한 밤에 쓴 글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입니다.  

선생님은 아마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두었던 듯싶습니다. 기록을 남기고 싶은 건 인간 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명감이 아닐까합니다. 번듯한 일간지나 잡지에 기고해서  원고료를 받는 것도 아닌 것을 이렇게 열심히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써두었으니까요. 이 번 책에 실린 글뿐만 아니라 후원회소식지에 실린 활동일지도 보면 정말 꼼꼼하고 행사  참석자 이름까지 확인을 하며 쓰셨지요. 그것도 그냥 책상머리에서 쓴 것이 아니라 발로  뛰면서 쓴 글이니 현장성을 담보했다는 측면에서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 니다.  

뜨거운 투쟁의 현장에서 여름날의 소금처럼 소리 없이 온 글, 빛나는 곳이 아닌 가장 낮 은 곳에서 위치한 글. 이 글들은 우리 민중민주 운동의 현대사를 담고 있지만 양심수후원 회의 활동상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이에 양심수후원회는 선생님의 문 집이 출판되는 것을 기념하여 오는 10월 29일 3시 대방동 서울여성프라자에서 조촐한 기 념식을 가질 예정입니다. 회원 여러분과 사회단체 여러 어르신들의 관심을 부탁드립니 다. 고맙습니다.

2 | 311호•20179월  

▲ 경향만평_8월 31일 

▲ 한겨레만평_9월 8

만평 

▲ 한겨레만평_9월 6일 

▲ 한겨레만평_9월 11일 

‘구금시설 교정 관련 법규집’ PDF파일로 제공 ● 

2012년 5.18기념재단의 2012 국내 시민사회연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구금시설  교정 관련 법규집’ 책자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양심수후원회의 어려운 재정 상황으로 다시 제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조만간 개정된  법규들을 수정보완하여 양심수후원회 홈페이지(www.yangsimsu.or.kr)에서 PDF파일 로 제공할 예정입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PDF파일을 출력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양심수후원회 소식 |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89세 생신 맞은 양원진 선생님 

류경완 회원

지난 9월 9일 장기수 양원진 선생님의 89세 생신 축하 모임이 사당역 근 

처 명동보리밥집에서 있었습니다.  

후원회 옴시롱감시롱(회장 김길자) 팀이 마련한 조촐한 축하연에는 평생의  

동지인 강담, 박희성, 김영식 선생님과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 김 

혜순 회장과 김호현, 안병길 전 회장 등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셨습니다. 

작년 미수연의 추억을 떠올리며 축하 케익을 자르고 선물도 드리고, 선생님들 한 분 한 분 서로에게 전하 는 축하와 인사 말씀 들으며 흥겨운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북의 연이은 핵과 미사일 시험으로 북미 대결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정세에서 선생님들이 꿈에 그리던 2차 송환의 그 날까지 건강하시기를 모두가 한마음 으로 기원 드렸습니다. 

한편, 이 날 모임에 참석한 정용선 회원은 지난 9개월 동안 이석기 전 의원을 포함한 40여 명의 갇힌 양 심수들에게 800여 통의 손편지를 직접 써서 보냈다고 밝혀 따스한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갑상선 수술을 받 은 정 회원도 빨리 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노래방까지 함께 하신 주인공 양원진 선생님, 존재 자체만으로도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는 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4 | 311호•20179월  

두고 온 그리운 가족과 신념의 고향땅  끝내 못 보고 가신 박재원 선생님 

슬픈일이 있었습니다 1권오헌 명예회장 

새 정부 들어서고 신념의 고향길이 열리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으로 오히려 남북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이를 안타까워하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바로 두고 온 그리운 가족과 신념의 고향길을 찾으려던 2차 송환 비전향장기수들이었 습니다.  

지난 8월 대구에 사시던 이준원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난 뒤 대구 경북지역에 유일하 게 남아계셨던 박재원 선생님께서 평생 염원 보지 못한 채 지난 9월 1일 눈을 감으셨습 니다.  

박재원 선행님은 1930년 1월 20일 경북 영천 괴연동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4남매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영천 남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서울로 올라와 낮에 회사 를 다니며 덕수상고 야간부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1950년 전쟁 시기 친구의 고향 개성으로 갔다가 인민군의 일시적 후퇴 때 함께 평양 강계를 거쳐 중국 심양에 도착, 인민군기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1952년 인민군  기계화부대에 편입 뒤 귀국하여 금강산 방어전에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1956년 인민군 에서 제대하여 송림에 있는 황해제철소에 배속되어 근무하였고 1958년 김명숙님과 결 혼하여 경자·경애·경여 세 자매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이뤄 행복한 시절을 지내셨습 니다.  

이후 황해북도 도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1964년에는 중당당에 소환되어 활동하였 습니다. 1969년 5월 조국통일 임무를 안고 남쪽으로 오셨다가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등  

양심수후원회 소식 |

슬픈일이 있었습니다 1 

위반혐의로 1심 사형, 2·3심 무기형을 확정 받고 대구-대전-대구 형무소로 옮기며 험 한 옥고를 겪으셨습니다. 0.75평 독방에 갇혀 일체의 독서가 금지되었고 2년 동안 다리 와 발에 족쇄, 손과 팔에 수정을 채우는 야만적 행패를 당했습니다. 또한 악명 높은 전 향공작에서 잔혹한 고문으로 정신을 잃었을 때는 전향서에 강제 무인하는 반인권 범행 도 자행되었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병원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1989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20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창살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보안관찰법에 걸려 형사들이 언제나 미행·감시했 고 그래서 수없이 일터를 옮기셔야 했습니다. 형제·조카님들도 계셨지만 월북자 가족,  빨갱이 가족으로 시달려야 했고 조카님 한분은 끝내 경찰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 기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모진 분단시대를 살아오셨습니다. 분명히 북녘에  살아있을 부인과 따님들을 보지 못하고 통일된 조국, 그 평생 염원을 보지 못하여 안타 깝기 그지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 대·경 진보연대의 고문으로 계시면서 양심수  석방운동과 자주통일 운동을 하셨고 서울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각종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시는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빈소는 대구 수정요양병원 장례식장 201호에 모셨고, 9월 2일 오후 대· 경 지역 통일원로와 사회단체, 회원들 30여 명이 함께 한 가운데 대구경북 양심수후원 회 주관으로 ‘민족통일열사 박재원 선생 추도식’을 가졌습니다. 원영민 사무국장 사회로  대표 헌작,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 등 추도의례에 이어 한기명 대경양심수후원회 회장,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추도사와 고경하 문예활동가의 추모의 노래 그리 고 참가자들의 헌화로 모두 마쳤습니다.  

그리고 9월 3일 발인, 화장을 하여 대구시립공원 납골당에 모셨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6 | 311호•20179월  

슬픈일이 있었습니다 2 

민족민주운동에 헌신하신  

임재복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자주시보 2017.8.30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사에 있어 큰 일을 많이 해왔으며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과 노동해방을  

위해 열과 성을 다 바쳐온 임재복 선생이 간암 투병 끝에 29일  

새벽 3시, 81세를 일기로 끝내 영면의 길에 들어 많은 사람들 

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임재복 의장 약력] 

1937년 음력 10월 23일 부 임경술, 모 이온옆님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 838번지에서 출생. 1976년 8월   울산현대건설 근무 중 노동운동 시작. 근로조건 개선 투쟁으로 작업 중단 주도. 

1977년~1987년   광주 대창시내버스 운전원으로 입사. 어용노조 축출 운동 등 강경노선투쟁으로 87년 1월 해고. 이 기간 동안 삼청교육대 예비 검속 상으로 7일간 구속 후 석방. 

1987년 5월   전남해고노동자 복직투쟁위원회 회장 

1987년 6월   민주쟁취노동자공동위원회 전남지역 의장, 노동문제상담소 소장,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광주전남 공동의장(노동자대표) 

1987년 8월 광주시내버스 노동자권익운동회 조직, 총동맹파업 주도, 어용조합장들 대거 축출하고 대폭 임금인상과 기본급 부활, 안기부에 납치 감금당함. 

1987년 12월   13대 대선과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 전남지역 공정선거 감시 부단장 

1989년 광주 노동문제연구원 상임의장, 광주전남 민주연합 공동의장, 

 1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중앙위원, 삼양시내버스노조 총무부장으로 활동 중 투옥. 

1990년 폭력정권 폭력경찰 탄압 저지 최루탄부상자회 전국연합회 회장. 

1991년 분신정국 대책위 광주지역 공동대표(2개월 투옥) 

1995년 11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광주전남연합 감사 임무수행중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통일운동 사건으로 투옥(29명) 2000년 1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광주전남연합 상임의장 

2000년 8월~2012년 남북공동선언광주전남실천연대 상임의장, 한국진보연대 광주전남 공동대표, 통일애국열사김양무정신계승사업회 회장. 2007년~   연방제통일추진회의 광주전남 의장(현) 

2009년~   통일세대를 위한 교육기관 6.15학교 공동대표(현) 

2012년~   시민주권행동 상임고문(현)

양심수후원회 소식 |

소식 1 

평양시민 김련희 수기 대담집  

출판기념회와 송환촉구모임  

사무국

 

● 김련희 출판기념회를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 재차 감사드립니다. 

김련희 송환촉구모임은 도서출판 6.15의 적극적인 협력과 수많은 인사들의 응원 속에 8월 31일 기독교회관 에서 ‘평양시민 김련희 수기 대담집 출판기념회’를 잘 치러졌습니다. 

모든 분들이 공히 덕담해 주신 부분은 ‘김련희 수기 대담집’이 인권교과서, 6.15실천교과서가 될 것이라는 점 입니다. 특히 ‘김련희 수기 대담집’은 이명박 박근혜 통치 9년 동안 우리 인권, 민권이 얼마나 후퇴했으며 권력 이 추악해졌는가를 새삼 상기 시켜 주었습니다. 독자들에게, 더욱 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겠 다는 깊은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예견됩니다. 

 

김련희 송환촉구모임은 ‘김련희 수기 대담집’이 누구보다도 우리 노동자, 청년학생들의 필독서가 되도록 힘 쓸 것입니다. 분단과 민족대결의 적폐가 무지막지하게 작동하는 이 나라에서 새 시대, 새 사회, 새 정치를 개 척해 나가는 우리 노동자, 청년학생들이 자주적인 인권의식으로 우뚝 서는 것은 초미의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8 | 311호•20179월  

9월 5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사월혁명 

회,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모임, 민가협양심수후 

원회 등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하 

였습니다. 

1. <평양주민 김련희 송환촉구모임(이하 송환촉 

구모임)>은 김련희 및 12명 북녘 종업원 송환 문 

제가 당면한 중대한 인권, 인도주의, 동포애 문 

제임을 재확인함과 아울러 경색된 남북관계를  

결정적으로 풀어 나갈 수 있는 현안 중의 현안임 

을 재확인함.  

2. <송환촉구모임>은 <북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 

탈북 의혹사건 해결을 위한 대책회의> 와 모든  

활동을 함께 했으면 하는 의견을 모으고 향후 단 

일의제로 정중히 제안드릴 것을 결정함.  

3. <송환촉구모임>은 8월 31일 주최한 『김련희 수기 대담집 출판기념회』를 계기로 김련희 강연회, 송환촉 구 사업 등을 통하여 자주적인 인권, 인도주의, 6.15 실천을 적극 활성화하기로 함. 

4. <송환촉구모임>은 제 단체와 함께 9월 11일(월) 11시, 통일부(민원실쪽) 앞에서 “김련희 및 12명 송환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유관기관 장관 면담요구, 1인시위(목) 등의 활동을 표명하기로 함. 

5. <송환촉구모임>은 2015년 이래 수많은 단체들의 협동 속에서 사업해 온 과정과 성과를 더욱 새롭게 다 지고 하루빨리 북녘주민 김련희 및 12명의 송환을 이루어내고자 조직을 재정비하기로 함.

양심수후원회 소식 |

소식 2 

양심수 이병진 교수 8년 만기출옥,  

어머니와 뜨거운 포옹 

이창기 기자 

 

▲ 2017년 9월 8일 새벽 5시 전주교도소에서 8년 만기출옥하여 어머니와 포옹하는 이병진 교수

2017년 9월 8일 새벽 5시 전주교도소에서 8년  만기출옥한 이병진 교수가 눈물로 옥바라지를 해 온 어머니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이를 지켜본 100여명의 친지, 친우와 동지들이  열렬한 박수와 함성으로 상봉을 축하해주었다. 

이병진 교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인도로  유학을 가서 인도와 제3세계 진영의 역사와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해 깊이 연구한 자타공인 국내 1호  인도전문가로서 귀국 후 교수로 활동하면서 국내  대기업들의 인도진출에 귀중한 조언을 해 주는  등 우리 기업들의 인도시장 개척과 한-인도 교류 

협력사업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정치학자이다.  하지만 인도 유학 당시 제3세계 진영의 정치 경 

제 문화 등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비공개 북을 방 문했던 점이 공안기관에 포착되어 8년 실형을 선 고받고 만기 출소한 것이다.  

그는 옥중에서 자주시보에 기고한 여러 글을 통 해 포스코가 인도에 건설하려고 하는 일관제철소 부지는 원주민과 정부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적절한 장소가 아니라는 우려를 여러차례  표명한 바 있는데 실제 원주민의 격렬한 반대로  포스코는 10년 넘게 투자만 해 놓고 공장 기초공 사도 못하면서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다. 

이병진 교수를 기소한 검찰이나 판사 모두 극악 한 반북반공관념에 쩔어 이런 애국자에게 너무도  가혹한 8년이란 중형을 선고한 것이다. 특히 순수 

10 | 311호•20179월  

한 정치학자였던 이병진 교수도 재판에 어찌 대처 해야할 지를 몰라 민변이 아닌 공안관련 비전문  변호사에게 변론을 맡기는 바람에 거의 도움을 받 지 못해 이런 극한 형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극형도 모자라 수구 반북 보수세력들은 그  아내가 운영하는 약국 앞에 연이어 나타나 빨갱이  약국이라며 소란을 피우고 아내를 압박하여 결국  아내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혼까지 하게 만 

드는 천인공노한 만행을 저질렀으며 결국 어린 딸 과 아들마저 아버지의 품에서 떼어내갔다. 

이병진 교수는 그간 관심을 가져주고 옥바라지 를 해준 가족들과 벗들 덕에 무사히 출옥하게 되 었다고 물기어린 눈빛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 다. 

그러면서 8년의 감옥 생활이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이 있었기에 분단의 아픔을 절절히 체현 할 수 있었다면서 만약 이런 고통이 없었다면 분 단의 아픔을 피상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이제 부터 이 분단을 하루 빨리 극복하고 한반도의 평 화적 통일을 위해 모든 열정을 다 바쳐가겠다는  뜨거운 결의를 밝혔다.

양심수후원회 소식 | 11 

소식 2 

이병진 교수 출소 환영 

안병길 목사

 

오산대학교에서 강사교수로 계시던 이병진 교수께서 명박이 때, 인도에서 유학공부 중이 던 중 북에 다녀온 이유로 국가보안법 간첩혐의로 구속되어 8년을 독방에서 지내다 지난 9 월 8일(금)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하게 되었다.  

지방 교도소 면회는 하루에 1명만 가능해(이런 이유가 이해가 안 된다) 전날 전주를 향했 다. 오후에 환수복지당 이동근을 면회하고, 전주 시인 이종화 님 댁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이종화 님은 제주 강정에서 한 방을 쓰다가 맺어진 인연인데 그는 강정해군기지 투쟁에 2 년을 머물렀었다.  

몸이 마른 편인 그가 2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아직도 몸의 반은 쓰지 못하고 지팡이에 의 지하고 있는데 굳이 이동근 면회에 함께 했다. 장애인증 보이며 면회실까지 가는데 택시기 사 분에게 정문 통과하자 했더니 그래도 되냐기에 노인이나 장애인은 가능하다고 했다. 

차에서 내리는데 중년 남자가 급히와 “대구”를 불렀다. 이 시인의 쌓은 복에 기사 분 횡재 했다.  

12 | 311호•20179월  

 

이튿날 새벽 5시 전주교도소 앞, 서울에서 민가협 어머니들, 국피모임, 양심수후원회 박 희성, 양원진 선생, 안중 강태희 님이 대절 버스로 오셨고, 대구 원영민, 한기명, 김병길 선 생 등 전국 각지에서 100여 명이 오셨다.  

축하 행사위 전주 고백교회 이강실, 한상렬 목사님의 교회로 이동하면서 전주하면 콩나 물 해장국이라고 목사님들 안내로 왱이 해장국 집에서 아침 먹는데, 세상에 주인 아주머니 (사장)께서 60~70명 분을 그냥 주신다는게 아닌가? 참 감동이다. 아침 식사 인원이 60명 을 넘었다. 식사 뒤 교회로 이동, 둥그렇게 둘러앉아 돌아가며 인사 한마디씩. 평생 경찰관 으로 대공분야에 근무하셨던 이병진 교수의 아버지께서 인사 나누었다.  

이 교수께서는 대절해간 버스를 보고 눈이 휘둥그래 하며 이렇게 큰 버스는 처음이라고.  말이 독방에서 8년이지 종일토록 누구와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는 공간, 언어를 잊지 않으려  일부러 책을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니...이런 감옥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일정 마치고 9시 30분경 서울로 오려했으나 몇몇 분의 긴 장설에 10시 40분경 서울로 향 할 수 있었다. 버스에 올라 자신은 대전으로 간다며 아직도 자기가 입은 옷이 수의인지 아 닌지 실감이 안 난다고 어리둥절해 한다.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 본받아 늘 정권유지를 위해 휘둘렀던 칼이다. 인간 은 본디 양심의 자유가 있는 법. 이걸 천부적이라 한다. 그 양심은 하느님도 간섭 못하거늘  이 나라에서는 가능하니 어처구니 없다. 촛불정부라 말하면서 그네가 잡아가둔 양심수는  8.15에도 못 나오고 아직 차가운 감옥에 갇혀있으니 어찌 이해하면 좋을까. 광화문 대통령 이라는 문재인은 속히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그네의 적폐인 양심수를 풀어내라. 그들이 있 을 곳은 감옥이 아닌 가족의 품이다.  

감옥문을 열어라! 냉큼.

양심수후원회 소식 | 13 

소식 3 

안녕하세요. 

이상호 동지의 인사

예상 못한 질문이었지만 바로 감동과 감사라는 답 

8월 27일 4년 만기로 출소한 이상호입니다. 

감옥 문을 나서는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철문 하나로 세상 안과 밖이 구분되는 비현실감을 느 끼기도 전에 400명이 넘는 많은 분들의 뜨거운 함성 은 잠시 이성을 마비시켰고 감동의 맥박은 온몸을 진 동시켰습니다. 

현대사의 질곡을 관통해온 연세 높으신 선생님들과  선후배 동지들에게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환영식에 참석한 많은 동지들의 식사를 밤새 워 준비해주신 대구지역의 동지들에게 깊이 머리 숙 여 감사드립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이제 3주 정도 되어갑니다. 물결처럼 흐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바쁜 걸음들에  아직까지 살짝 멀미를 느끼면서 독방 4년의 시간이 결 코 짧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세상 속에 빠르게  섞이기 위한 마음의 끈을 조금씩 조이고 있습니다. 

내란음모조작사건과 양심수 석방에 많은 도움을 주 셨던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4년 옥살이를 한마디로 요약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느냐는 질문을 받았었습니다. 

변을 하였습니다. 출소를 앞두고 지난 4년을 정리하 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생각이었기에 즉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4년은 제 인생에 가장 무겁고 긴 고통의 시간 이었지만 과분한 동지애를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이  되었고, 더 혹독한 감옥 환경에서도 수십 년을 오직  사상과 신념으로 모든 걸 이겨낸 장기수선생님들의  정신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깨닫고 체득하는 과정 과정에서 전해지는  감동과 감사는 매순간 마음의 기둥이 되었고 승리의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온기 있는 손길과 감동의 연대에 대한 보답은 양심 수 없는 세상, 자주, 민주, 통일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보폭을 함께 하는 것이라 믿으며 열심히 살아가겠 습니다. 

출소 후에도 불러주셔서 많은 격려를 해주신 양심 수후원회를 비롯 4월 혁명회, 민가협. 구속노동자회  등등의 단체 및 선생님들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권오 헌 선생님의 건강이 지켜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7년 9월 15일, 이상호 드림 

14 | 311호•20179월  

미주소식 

[ 평화협정 체결 촉구 집회 ] 

일시:9월 20일(수) 오후 6시 

장소: wilshire federal building  

(11000 Wilshire Blvd LA CA 90024) 

 사드배치 철회! 

대북제재 중단! 

평화협정 체결! 

9월 20일 수요일 LA 연방청사 앞에서 한반도의 전쟁 반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북제재 압박중단, 사드배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합니다.  

Peace treaty now rally on Wednesday September 20th 6-7 PM at the Wiltshire  federal building(11000 Wilshire Blvd LA CA 90024) 

STOP THAAD! 

No war in Korea!! 

Give peace a chance!!

양심수후원회 소식 | 15 

투쟁 1 

평양시민 김련희와 북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을 당장 송환하라! 

사무국

 

다시 시작합니다.  

평양시민 김련희와 북 해외식당 종업원 12명 송환 촉구투쟁 말입니다.  

평양시민 김련희 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15년 7월 4일자 한겨레신문을 통해서였습니다.  김련희 씨가 중국여행 중에 탈북브로커의 사기행 각 속에 여권을 강탈당하고 본의 아니게 2011년 9 월 26일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정이 폭로되 었습니다. 또한 김련희 씨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강 력히 요구했으나 국정원의 온갖 협박과 폭력 속에서  주저앉게 된 기막힌 사연이 알려졌습니다.  그 과정에 자포자기하여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 니다. 그리운 조국의 집으로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간첩이 되면 북으로 송환될 수도 있겠다’ 

는 엉뚱한 생각 속에 자신을 간첩으로 신고하고 감 옥까지 들어갔다 왔습니다.  

그로부터 2015년 10월 1일 이래, 민가협양심수후 원회는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민주화실천가족운 동협의, 사월혁명회, 민변통일위원회, 민들레(국가 폭력피해자와함께하는사람모임), 자주시보, 전국여 성연대, 민권연대, 한국진보연대, 범민련 남측본부  

등과 함께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추진모임을 가졌습 니다. ‘김련희 씨를 가족의 품으로’ 보낼 것을 촉구하 는 언론 기고활동을 벌이고 기자회견, 1인 시위를 이 어갔습니다.  

하다못해 김련희 씨는 2016년 3월 7일, 베트남 대 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베트남 대사관의 박근혜 눈치보기와 반인권 적 태도로, 김련희 씨와 동행한 종교인들은 대사관 

16 | 311호•20179월  

▲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촉구모임은 매주 목요일 1인시위를 이어  가기로 하였다.

측이 끌어들인 한국 경찰들에 의해 끌려 나왔습니 다. 설상가상으로 박근혜 정권의 통일부는 4월 8일,  북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이 집단 탈북하였다고 발표 

하였습니다. 박근혜 정권 국정원의 총선용 조작품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1년여의 지난한 투쟁이 있었습니다.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촉구모임은 이제 촛불을 들 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제는 한 사람의 송환문제가 아니라 국가폭력을  단죄하고 만인의 인권과 민권을 제대로 세우자고 합 니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고 형 

형색색의 정책과 조치들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반인 권, 반민주 직격탄을 맞고 있는 평양시민 김련희 씨 와 북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은 아예 외면하고 있습 니다.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촉구모임은 매주 목요일 1인 시위를 이어 가기로 하였다.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촉구모임은 이 기만극을 절 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실상, 이 땅에서 만인의 인권을 세우자면 무엇보 다 먼저 자주적인 인권 의지가 살아나야 합니다. 외 세의 지배와 간섭을 허용하고서는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 행복을 기하는 모든 노력들은 미봉책에 불과 하고 기만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주권을 외세에 맡긴 이명박근혜의 반북논리-안 보논리 속에 이 땅의 인권, 민권이 어떻게 초토화되 었는지 우리는 지금 똑똑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지체 없이 평양시민 김련희 씨와 북 해외식당 종 업원 12명에 대한 국가폭력 진상이 규명되어야 합니 다. 그 가해자는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북녘 동포들 을 당장 송환해야 합니다. 

평양시민 김련희 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가족 그 리움에 눈물짓습니다. 북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은  지금도 국정원에 의해 꼭꼭 숨겨져 그 여성들의 자 유의사는 어디서도 볼 수 없고 그 여성들의 접견과  권리에 대해 북녘 가족들의 위임을 받은 변호사는  12명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박근혜의 분단적폐를 철저히 분쇄하기는커녕 박 근혜식 안보논리로 민족대결의 운전대를 계속 잡고  있는 문재인 정부는 하루 속히 방향을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양심수후원회 소식 | 17 

투쟁 1 

기/자/회/견/문 

평양시민 김련희와 북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을 당장 송환하라! 

오늘 우리는 아직도 이행되지 않고 있는 평양시민  김련희씨의 조건 없는 송환과 북 해외식당 종업원의  원상회복을 촉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이제 5일 후면 김련희 씨가 여기 남쪽에 온지 만 6 년이 된다.  

세월은 빠르다지만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김련 희 씨에게 있어서 6년은 참으로 긴 세월이라 하지 않 을 수 없다.  

얼마 전 김련희 씨가 펴낸 수기 대담집에는 그 세 월이 얼마나 길었겠고 그 세월이 얼마나 악몽 같은  세월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과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때나 있었 을 법한 국가폭력이 21세기 대명천지에 어떻게 재연 되었는지 우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자 살방지라는 구실로 대구구치소 기동타격대 무리들 이 김련희 여성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데 이어 머리 에 형틀을 씌우고 손발을 묶어둔 날이 근 일주일에  

이르기까지 했다는 피눈물의 기록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김련희 씨는 지난 6년 여 세월 속에서 뒤늦 게 양심적인 지인들을 만나 겨우 심신의 고통을 위 로 받고는 있지만 어찌 가족만 하다 할 것인가. 이  땅에서 당한 심신의 고통은 부모형제, 가족들을 그 리워하는 상실감에 엉켜 나날이 배가되고 있다. 그  그리움은 가족상봉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고 만회될 수 없는 천륜이다.  

문재인 정부가 제 정신이라면 당장 김련희 씨를 북 으로 송환해야만 한다. 

한편 우리는 박근혜 공작에 의해 납치되어 지금 생 사조차 알 수 없는 북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의 처지 

도 어떻게 되었는지 계속 다그쳐 묻지 않을 수 없다. 김련희 씨가 당한 경우에 비춰 보면 세상과 격리시 켜 놨다고밖에 볼 수 없는 12명이 온전하리라고 누 가 믿을 수 있는가. 오죽하면 그들 부모가 들으면 기 절초풍할 사태까지 회자되고 있겠는가. 

우리는 문재인 정부에게 강력히 경고한다. 누차 천명한 것처럼 김련희 씨와 북 해외식당 종 업원 12명 송환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가짜촛불이냐  진짜촛불이냐를 가르는 시금석이다. 문제가 해결되 지 않는 한 문재인 정부는 민족의 규탄과 심판을 절 대로 면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지금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적폐청산을 한 다고 하면서도 유독 분단적폐에 관해서는 오히려 박 근혜를 능가하고 있다.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 다. 전쟁을 부르는 반북대결, 한미동맹에 혈안이 되 어 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반민족적 행태라 하지 않 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거짓이 없다면 당 장 사대매국적인 외세공조, 동족대결정책을 그만두 어야 한다. 따라서 인도주의와 동포애의 정신으로  평양시민 김련희 씨를 조건 없이 송환하고 북 해외 식당 종업원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원상 회복 조치를 당장 실천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평양시민 김련희와 북 해외식당 종 업원 12명을 당장 송환하라! 

2017년 9월 11일 

평양시민 김련희 송환촉구모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사월혁명회,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통일위원회,  도서출판 6.15, 평화재향군인회, 통일광장,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전국여성연대,  한국진보연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18 | 311호•20179월  

보안관찰법 폐지하라 

투쟁 2 사무국

 

분단조국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도 분단에 따른 불 이익과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 리가 지금 겪는 분단은 단지 불이익과 불편함에 한 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극단적으로 파괴하 고 생명마저 빼앗는 분단입니다.  

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의 현대사에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형극의 길을 걸었습니다.  강용주 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장기수 선생들 모두가 그렇듯이 그도 지금 까지 악법 보안관찰법에 의해 계속 이중처벌의 협박 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양심수후원회가 8월 23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이중처벌 중단!”, “보안관찰법 폐지”를 외치는 강용 주 씨의 투쟁 현장에 함께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 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갈 데 대한 연대정신을  서로 굳게 확인하며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양심수후원회 소식 | 19 

투쟁 2 

강용주는 고등학교 시절인 1980년 5·18민주 

화운동에 시민군으로 참여했다가 5월 27일 전남 

도청이 계엄군에 함락되기 직전에 빠져 나와 총살 

성명서 

강용주에 대한 18년  ‘보안관찰 즉각 중단’을  판결하라 

을 면했다. 이후 그는 도청의 마지막 항전에서 살 아남은 죄책감으로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가 의료 인의 길을 걷고자 1982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광주를 왜곡하고 민주화를 유린하는 군 사독재정권의 폭압을 두고 볼 수 없어 전남대 학생 운동에 참여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투쟁하였다. 그 러던 중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이 터졌고,  

폭력적인 정권은 그에게 고문과 조작으로 간첩이 라는 누명을 씌웠다.  

강용주는 60여 일에 이르는 전기고문 등 참혹한  고초를 겪은 끝에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감옥 에 투옥된 그는 나중에 ‘준법서약서’로 바뀐 ‘사상 전향서’에 서명하면 교도소에서 풀려날 수 있다는  유혹과 회유도 수차례 받았다.  

하지만 고문으로 조작된 허위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자 서약서에 서명하 지 않고 싸웠고, 그 대가로 청춘의 대부분인 14년 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렇게 세계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던 강 용주는 1985년 투옥되어 1999년에야 석방되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었다. 「보 안관찰법」에 따른 보안관찰 처분이 또다시 그의 자 유를 옭아매었다. 보안관찰은 3개월 마다 무슨 일 을 했는지, 누굴 만났는지 등을 경찰에 신고하도 록 요구했다. 재범의 위험을 예방하고 건전한 사회 복귀를 촉진한다는 허울 좋은 미명이었다. 한마디 로 모든 일상은 감시 하에 놓여졌다. 몸만 풀려났 

20 | 311호•20179월  

지 여전히 늘 처벌의 위협이 도사리는 죄수 취급을 받았다. 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 상을 성실하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법무부에 설치된 심의위원회 위원들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면 평생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조차 없다. 법에 정해진 2년이라는 기간은  끝도 없이 연장되었고, 벌써 그 세월만 해도 18년에 이르렀다.  

강용주는 사회로 돌아온 후 의사로, 광주트라우마센터장 등을 맡으며 자신과 같은  고문 피해자들의 치유와 우리 사회의 화해·통합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럼에 도 국가는 여전히 강용주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의 권위에 굴복하는  준법서약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할 뿐이다. 

결국, 강용주는 사회로 돌아와서도 또 다른 감옥에 갇혀 살아가며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불복종 투쟁을 오늘도 이어가고 있다.  

이에 우리는 ‘내가 강용주’임을 선언하고 보안관찰법 폐기에 나서고자 한다. 「보안 관찰법」은 인간의 삶, 구체적인 행위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이유’라는 추상적인 기준을 내세워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고 언론·출 판·집회·결사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보다 국가의 권위를 절대시하는 구시대적이고 비인간적인 독 소를 담고 있는 제도다. 이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것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으로부터 이어진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32년째 몸부림 치고 있는 강용주의 삶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당한 보답이자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 워야할 우리의 책무이기도 하다.  

따라서 재판부는 헌법재판소에 「보안관찰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라. 더 불어 14년이라는 감옥 생활도 모자라 18년을 또다시 죄수 아닌 죄수로 살아가는 강 용주에 대한 ‘보안관찰을 중단한다’는 현명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국가는  인간의 양심과 인격을 짓밟는 보안관찰제도를 즉각 폐기하라. 헌법재판소는 위헌법 률심판제청이 이루어지면 보안관찰처분의 근거조항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다고 한 이전의 결정례를 재검토할 것을 촉구한다.  

2017년 8월 23일 수요일 

보안관찰 중단과 보안관찰법 폐기를 촉구하는  

전국민주동문협의회  

광주전남시민사회단체 일동

양심수후원회 소식 | 21 

투쟁 3-1 

적당한 때란 도대체 언제입니까 

정지영(양심수 김홍열씨의 아내) 

※ 2017년 8월 1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주권회복과 한반도 평화실현 8·15 범국민대회’ 본대회 발언 전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근혜 정권에 의해 강제 해 산된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위원장 김홍열씨의 아 내 정지영입니다. 

남편은 국정원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5년형을  받아 광주교도소에서 네 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습 니다. 2013년 8월 28일, 구둣발로 안방문을 부수 고 들어온 국정원 직원들이 속옷차림의 남편을 거 실로 끌어내 무릎 꿇린 그날부터 억울한 내란범의  아내로 살고 있습니다.  

석방하라

석방하라

석방하라

이석기, 한상균과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라.

지난 6월항쟁 30주년 기념식에 참가했다가 인 혁당 피해자 가족분들을 만났습니다. 민주화를 위 한 싸움 속에서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인혁당 가 족들’이라 겪은 소외당하고 배제 당했던 고통스 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간첩의 꼬리표를 억울 하게 달고 살아야했던 인혁당 가족이 겪은 그 아 픔이 오늘 저를 비롯한 내란사건 가족들이 겪고있 는‘종북의 주홍글씨’, ‘통진당의 꼬리표’와 겹쳐졌 습니다. 

정권교체가 된 순간부터 오늘, 8월 15일만 바라 보며 살았습니다. 촛불로 당선된 대통령, 촛불로  출범한 정부이기 때문입니다. 원로 선생님들과 각 계각층 인사들이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를 만들 어서 양심수 전원 석방을 대통령에게 요구하였습 니다. 국제앰네스티는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쓰 고 UN에 보고서도 제출하였습니다. 남편을 비롯 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 구속자들, 한상균  위원장을 비롯한 양심수들 전원 석방하라고 촉구 했습니다.  

22 | 311호•20179월  

 

※ 2017년 8월 1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주권회복과 한반도 평화실현 8·15 범국민대회’ 본대회 발언 전문입니다. 

하지만 양심수 출신 문재인 대통령은 8.15 양심 수 특사를 포기했습니다. 대통령의 양심에 이것 하 나만은 묻고 싶습니다.“문재인 대통령님, 지금 대 한민국에는 양심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양심수 석방’은 정치적 유불리의 문제 가 아닙니다. 무너진 인권과 빼앗겼던 민주주의를  

다시 살리는 문제입니다. 저희들은 이미 넘치게 기 다렸고 넘치게 고통 받았습니다. 아직도 때가 아니 라면 적당한 때란 도대체 언제입니까? 

지난 주말에는 남편이 있는 광주교도소에 다녀 왔습니다. 남편의 그 두툼한 손을 한번 잡고 싶은 데 남편의 그 따뜻한 품 한번 안고 싶은데 쇠창살  너머 인사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한상균  위원장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팔순이 넘은 몸으로  광주교도소 앞에서 열린 양심수 석방 집회에 나와 주셨습니다. 뙤약볕 밭일에 새카맣게 그을린 그 손 으로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내 아들 상균이가 도 둑질을 했냐, 남을 때렸냐. 서민과 노동자 돕기 위 해 앞장선 착한 아들이다.”  

여러분, 제 남편과 내란구속자 가족들이 도둑질 

을 했습니까, 남을 때렸습니까. 자주와 평화를 위 해 용기 있게 나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착한 사람 들, 용기있는 사람들이 이젠 감옥문 열고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자주와 통일을 위해 노 력한 사람들,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위해 앞장선  이 땅의 모든 양심수가 하루라도 빨리 감옥문을 열 고 당당히 걸어 나올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십시오.  진정 평화와 인권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부디  함께 만들어주십시오. 긴 말씀 들어주셔서 정말 고 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음모아 함께 구호를 외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석방하라’를 세 번씩 외쳐주십시오. “이석기, 한상균과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라.”

양심수후원회 소식 | 23 

투쟁 3-2 

국정원 적폐 청산,  

'내란음모사건'을 피해가선 안 된다  

-‘내란음모사건' 4주년, 공작정치 국정원 적폐 청산 촉구 기자회견 전문 

국가정보원이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을 터뜨린 지 오늘로 4년을 맞는다 

4년 전 여름, 국정원 댓글 공작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실로 하늘을 찌르고 있 었다. '국정원 해체'의 목소리 또한 드높았다. 하지만 '내란'이란 두 글자가 쓰나미처럼 모두 쓸고 가버렸다. 김 기춘 신임 비서실장이 취임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다. 이어서 현역 국회의원이 구속되었고  원내 3당은 강제 해산당했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지만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석기 전 의 원을 비롯한 구속자들은 아직 감옥에 있다. 관련자와 그 가족들에 들씌워진 낙인은 여전하다. 그에 반해 국정 원과 검찰, 청와대 단 한 사람도 이 사건 정치공작과 관련하여 처벌받은 사람이 없다. 기획과 실행의 전모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국정원 공작정치의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친다 

재판에서 밝혀진 것은 '내란음모'도 없었고 '지하혁명조직'도 없다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재판 과정은 국정 원 정치공작의 구체적 실상을 드러냈다. 녹음파일을 들어보니 그 무시무시한 내란음모 녹취록은 무려 450군 데 왜곡되어 있었다. 국가보안법으로 사찰하는 사건을 불과 한 달 만에 '내란음모 사건'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재판기록도 공개되었다. 국정원 협조자 역시 '내란음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법정 진술을 하였다.  특히 '북과 연계되었다'는 국정원발 대대적인 언론보도는 체포동의안 통과 직후 순식간에 사라졌고 재판에서 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이는 모든 언론을 동원하였다는 점에서 온라인 댓글공작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 각한 여론공작이다.  

•청와대가 그 배후에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국정원이 독자적으로 정치공작, 여론조작을 저질렀을 리는 만무하다.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는 사실은 삼 척동자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지난 촛불시민혁명과정에서 그 증거들이 마침내 드러났다. 청와대 박준우  당시 민정수석의 9월 9일자 업무수첩에는 "이석기 사건이 스타트"라는 김기춘 전 실장의 발언이 적혀있다. 고  김영한 후임 민정수석의 업무수첩 내용은 보다 충격적이다. 청와대는 종교계 탄원서 제출 상황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대응할 정도로 꼼꼼히 챙겼다. 항소심에서 내란음모가 무죄로 되자 사법부 겨냥 관제데모 지시도  밝혀졌다. 이 모두의 배후에 박근혜 김기춘 청와대가 있었다.  

24 | 311호•20179월  

•‘내란음모사건’을 배제한 채로 '적폐 청산'은 불가능하다 

과거 국정원이 자행한 공작정치의 범죄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애초에 발표한 과제에 국한하지 않고  새로운 과제들도 속속 추가되고 있다. 하지만 국정원 ‘적폐 청산 TF’는 ‘내란음모사건’에 대해서만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내란음모사건’은 정권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기획사건임과 동시에 정당 해산을 노린 정치 공작이다. 그런 점에서 국정원 적폐 중의 적폐는 '내란음모사건'이다. 이 사건을 덮고 가서는 '적폐 청산'이 불 가능하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사건 4주년을 맞아 '내란음모사건'을 국정원 적폐 청산 과제로 공식 촉구하고자 한다.  나아가 각계의 뜻을 모아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정치공작 범죄집단 국정원을 해체하라. 

• 국정원 적폐TF는 ‘내란음모사건’ 정치공작을 즉각 조사하라. 

•국정원은 ‘내란음모사건’ 피해자에게 사죄하라. 

• 국정원 정치공작 피해자 이석기 의원과 구속자를 석방하라. 

 2017년 8월 28일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한국구명위원회

양심수후원회 소식 | 25 

6.15산악회 산행기

충청남도의 금강산, 용봉산을 오르며 

- 6.15산악회 창립 10주년 기념 산행 

손일순 회원 

산행 전날 ‘하루 종일 비 100%’라는 일기예보 검색에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던 이번 산행 참여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새벽부터 쏟아지는 비와 남편의 유혹에 

도 불구하고 신갈정류소에서 마지막 참가자로 전세버 

스에 올라탔다. 이미 자기 소개 시간이 다 지나서 산행  

참석자 구성을 눈치로 파악한 후 예정보다 일찍 용봉산  

입구에 도착했다. 

산행은 A팀과 B팀으로 나눠 진행됐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용봉산은 한 눈에 다 들어오는 낮고 작은 바위  

산처럼 보였다. 보기에도 기암절벽이 즐비했다. 용봉산 

이 왜 ‘충청남도의 금강산’이라는지 대번에 느낄 수 있 

었다. 

다행히도 비가 잦아들어 우산과 비옷으로 비에 대한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기상청 일기 

예보시스템에 의하면 많은 비를 품은 구름 떼가 우리가  

산행을 시작한 이후로 이곳을 통과할 거란다. 

B팀에 속한 권오헌 선생님은 용봉산이 바위산이라 비가 많이 오면 미끄럽기에 위험하 여 아쉬움을 뒤로 하신 채 용봉사까지만 가시는 걸로 정해지고 A팀은 본격적으로 산을 오 르기 시작했다. 

내포신도시를 품은 용봉산은 등산로 출입로부터 정비가 잘 되어있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후 다들 비옷 때문에 땀 범벅이 되었는데, 잠시 비가 주춤하여 짐을 정리하고 다 시 산을 올랐다. 용봉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내포신도시가 예쁘게 내려다보 였다. 왼쪽으로는 주택단지와 충남도청이 자리잡고 있고 이어서 산업단지 분양 예정지가  

황토색을 드러내며 눈 앞에 펼쳐졌다. 옆으로는 용봉산이 ‘작은 금강산’이라 불린다는 말 처럼 바위로 이뤄진 작은 봉우리들이 펼쳐졌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예쁘다, 멋지다” 고들 하셨다. 그렇게 용봉산은 오르는 곳마다 바로 밑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허 

26 | 311호•20179월  

락해준 산이었다. 

최영 장군이 자신의 활 솜씨를 가늠하기 위해 자신 

의 활과 애마 중 누가 더 빠른 지를 시험해 봤다는 활 

터에 올랐다. 잘 지어진 정자가 있어 그 곳에서 준비 

해온 막걸리와 수육, 그리고 목이버섯 장아찌로 휴 

식을 즐겼다. 이곳에 오르는 동안 우리는 이번 산행 

은 하늘이 허락한 ‘6.15 산악회 10주년 기념 산행’임 

을 알았다.  

비는 그치고 구름은 적당히 끼어 햇빛을 막아주고  

바람은 어쩜 이리도 시원한지…! 거기에 이렇게 멋진  

풍광까지 합쳐지니 기막힌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이규재 선생님의 한발 한발 내딛으시는 발걸음은 함 

께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권오헌 선생님의 고향인 이곳 홍성은 이미 오래전  

친환경 농업의 초석을 마련한 곳이다. 그곳에서 나 

신 권 선생님은 통일운동과 양심수 석방과 후원에  

관한 기틀을 마련하셨으니 이 또한 우연은 아니다. 산행 후 우리를 찾아와 주신 사월혁명 회 회원이신 김동식 선생님의 아드님도 그 쪽 일을 하고 계셨다. 

381m에 이르는 정상에 올라 단체사진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노적봉과 어릴 적 정상인  줄 아셨던 악귀봉을 지나 B팀과 용봉사에서 합류했다. B팀도 날씨가 좋아서 A팀과 반대  방향에 위치한 병풍바위와 전망대까지 산행을 하였다 한다. 

산행 후 용봉사 어귀에서 권오헌 선생님의 산상강연이 있었다. 우리 땅 한반도에 필요 한 것은 첫째도 평화이고 둘째도 평화여야 한다면서 우리 민족이 살 길을 천명하셨다. 전 쟁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고. 지금 진행 중인 한-미 연합 을지 프리덤 가디언 연습 축소와  이후엔 중단이 이루어져 현 정세인 긴장과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우리 민족이 외 세로부터 독립하여 자주통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 산행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역사적인 진실의 장소가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과 인민군이 번갈아 지나가면서 선량한 국민이 학살된 현장이었다. ‘국민보도연맹’ 희생 자 넋을 기리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권 선생님의 고향 방문을 계기로 권 선생 님의 친척분들이 홍성과 대전 등에서 나이 어린 조카분들까지 찾아와 주셔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셨다. 홍성 지역의 농산물로 차려진 뒷풀이 식당은 시골 외할머니  집밥의 진수를 맛보기에 손색이 없었다. 

6.15 산악회 참가는 초창기에 한 번 참가했고 이번이 두 번째인데 여러 선생님들과 여 러 단체에 속한 분들과 지방에 위치한 산에 전세버스를 타고 오니 감회가 남달랐다. 오랜 만의 외출이라 설레었고 기대 이상으로 정말 좋았습니다. 6.15 산악회 파이팅!

양심수후원회 소식 | 27 

8월 월례강좌 

실현되지 않은 정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 

 나정옥 회원

 

 8월 월례강좌에 참석하려고 서울나들이를 했습니다. 강좌는 오후 4시부터 예정되어  있었지만 좀 일찍 나섰습니다. 식사준비를 거들기로 했거든요. 두시반쯤 낙성대 만남의  집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잎 푸른 호두나무는 올해도 튼실하게 열매를 매달고 있네요. 작 년에도 결실이 좋았다고 들었는데 해거리를 하지 않나 봅니다. 나무는 올여름 찌는 무더 위에도 참 부지런했구나 생각합니다. 여름식탁을 풍성히 해주었을 한켠의 상추밭은 가을  작물을 위해 이미 갈아엎어져 있었습니다. 배추랑 무가 아마도 저 자리에서 또 자랄 것입 니다.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거의 마쳐갈 때쯤 강좌시간이 다 되어서 거실에 모여들었습니다.  큰방 문 앞쪽에 연단이 마련되고 반대편 벽면에 영상화면이 쏘아지므로 좌중들은 연단을  향해서가 아니라 등을 돌려서 앉아있게 되지요. 서로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배려하고 신 경 써야 합니다. 강사님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시작했습니다. 정대협 대표 활동가인 윤미 향 님이 “실현되지 않은 정의,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서”란 주제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윤 대표님은 정대협이 결성된 이후 지금까지 줄기차게 활동해오신  분이랍니다. 힘 있는 음성으로 강연하시는 동안에 이 분야 전문가로서의 면모가 묻어나 오는 것 같았어요. 속으로 멋진 ‘여성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28 | 311호•20179월  

 

정대협은 7080 여성운동에서 태동되어 37개 여성단체가 연합해서 90년에 결성했고,  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 공개증언을 기점으로 피해자들이 정대협  운동에 주체로 나서게 되었는데, 여성활동가들과 함께 다방면에 걸친 지원사업과 국제  연대사업, 국제사회를 향한 호소 등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사실 우리 정부가  나서서 벌써 잘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잖아요. 정치인들은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지요.  정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본분인 것 같은데요. 나라 잃은 힘없는 백성 

이라 일제에 강제로 끌려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지켜주지 못한 건 안팎으로 수모이 니까 명예를 회복시키고 치유하는 건 이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만행을 저지른 일제보다도 그간 우리 정부들의 작태가 더 밉습니다. 영상화면을 보고  강사님 설명을 들으면서 분노의 감정으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남은 자료집을 모아 서 집으로 가져왔어요. 그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너무나도 얕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료집이 18쪽 가득 적지 않은 분량이었는데 강좌 이후 생각이 그치지 를 않으니까 계속 들여다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더 각성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먼저  저 자신에게 우선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전시작전권도 찾으려 안 하고 외국군대에 의지 해서 나라 지킨다 말하는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민족적 자존심도, 여성의 인권도  제대로 존중받는 사회가 아직은 아니란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말해줘야 하는데, 얼굴이  뜨거워지네요. 8월 월례강좌는 지나갔지만 생각거리들을 많이 남겼고 그 숙제를 지금껏  계속하고 있는 중입니다. 강좌를 마치고 밥상을 차려서 회원들이 함께 밥을 먹고, 출소환 영식 참가차 대구로 선생님들이 가신다기에 더 머물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설거 지하고 엎어둔 그릇들이 산더미였는데 박희성 쌤, 힘들지 않으셨나요?

양심수후원회 소식 | 29 

연재 | 김련희 수기(11) 

따뜻한 내나라 

- 남녘생활의 적응  

김련희_평양주민 

이 글은 자주시보에 실린 글을 김련희 씨와 자주시보의 동의하에 싣게 되었다. 병 치료를 위해 중국 친척집에  나왔다가 탈북이 뭔지조차 모르고 한국에 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탈북 브로커(국정원으로부터 돈을 받 음) 말을 듣고 ‘탈북자’ 대열에 들어선 김련희씨 이야기이다. 김련희 씨는 한국에 들어온 날 바로 북으로 보내 달라고 국정원에 요구했지만 묵살된 채 강제 억류되어 있으며 현재 송환투쟁을 벌이고 있다. 본 소식지에서 는 김련희씨 장문의 수기를 나누어 싣기로 한다. 우리는 김련희 씨의 글을 통해 북도 남과 같이 사람냄새 나 는 곳이며 통일의 반쪽이라는 민족동질성과 함께 통일의 절박성 당위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글은  남측 표현에 맞게 다듬었으나 전달 의미를 살리기 위해 북의 어법을 지킨 점을 밝혀둔다.

(전호에 이어) 

6개월만 기다리면 여권이 나온다는 말이 나에게 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 실오라기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 무나 다행한 일이었다. 

이 6개월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나는 여기  남쪽에서 패션디자인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결심 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어 민족전통 옷의 근본은 같지만 70년을 헤어져 살면서 너무나  많은 문화적 차이를 가지게 되어버렸다. 나는 북과  남 사이의 그 벌어진 패션문화적 차이에서 서로 공 유할 수 있는 좋은 의류기술을 찾고 싶었다. 

교차로신문 모집광고를 보고 바로 신청하여  2012년 4월부터 대구 중앙로에 있는 패션디자인 직 업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학급은 30명 정도였고  나이층도 다양하고 성격과 취미도 각각이었다.  

한국사회에 나온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때라  처음으로 남쪽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아직 낯 설고 경계심도 있어 처음에는 많이 불편했지만 하 루하루 모르는 것은 서로 배워가고 나누어가며 생 

활하다나니 어느새 친근해지고 다정한 벗이 되었 다, 점심식사 때는 집에서 도시락을 가져와 모여앉 아서 나누어 먹군 하였는데 내가 얼마나 음식을 맛 이 없게 하는지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이 내  

찬그릇이어서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어느새 나의 양장기능이 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짬 시간만 있으면 나에게 모여와 서로 묻고 배워달라 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만 되면  친구들에게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체 득한 의류가공기술들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여러 가지 옷설계기술과 다리미로 천에 기계잔주 름을 잡는 방법, 넓은 판고무줄을 정확한 간격으로  일정하게 잡아주는 방법, 봉제과정에 요구되는 기 술적 요령들 등..... 그들은 내가 북에서 왔다는 것 을 알고 매일 맛난 음식도 가져다주고 옷을 선물로  주는 친구도 있었다. 

졸업을 앞둔 9월 선생님은 양장기능사 국가기술 자격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하여 3명이 이 시험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선생님은 문화도 다르고 표현 어휘도 많이 달라 이론시험은 힘들 테니 큰 욕심 내 

30 | 311호•20179월  

지 말고 이번은 연습 삼아 한번 해보라고 나의 마음 을 안정시켜 주신다. 

그런 것 같다. 생소한 외래어가 나를 긴장시켰고  모르는 말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2명의 친구 들은 나에게 모르는 외래어를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전공부분의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시험날짜를 하루 앞둔 날 아침에 학교에 도착하 니 우리 학급의 친구들이 힘을 내서 꼭 시험에 합격 하라며 어떤 친구는 엿을, 또 다른 친구는 찰떡을  해 가지고 와서 시험에 응시하는 우리 3명을 응원하 는 파티를 마련해 주었다.  

며칠 후 이론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 는 모두가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 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고 소중한 추억으 로 긴 여운을 남긴다. 

5개월간의 학교생활은 나에게 한국사회에 대한  거부감을 해소하고 남녘동포들의 따스한 정을 느끼 게 하여준 첫 걸음이었다.  

졸업한 후에도 친구들은 시간 있으면 나에게 전 화해 밥도 함께 먹자고 청했고 시내구경도 시켜주 군 하였다. 9월에 학교를 졸업하고 10월에 실기 시 험이 있었는데 나는 94점으로 양장기능사 국가기술 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북과 남 의 공동 의류양장사가 된 셈인가!  

여권을 기다리는 동안 남녘에서의 나날들은 놀랍 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후회 없이 소 중한 추억을 간직하는 못 잊을 나날들이었다.  

제일 놀라웠던 상황은 지하철역 안에 여러 명의  남자들이 쭈그리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 다. 처음 보는 상황이라 그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집에 못가고 지하철역에 쓰러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노숙자“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나는 신문 한 장을 담요삼아 밖에서 잠을 잔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집이 없지? 저 분들은 가족이 없을까? 직장에  출근 안하고 저렇게 밖에 누워있으면 어떻게 먹고  살지?) 나는 집 없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 W오늘은 어디서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아랫목 삼아 잠을 청해야 하 는지? 5월 가정의달 서울역앞 가정잃은 노숙자는 한보따리 개나리 봊 짐을 내려 놓고 근심중이다.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더구나 “평생내집마련“이라는 말을 자주 들으면 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왜 집이 없으며, 집을 왜  내가 마련해야 하며, 그것도 평생 동안 모아 내집마 련한다는 말이 너무 이상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이 모두 우리처럼 태어나면 집이 있고, 시집, 장가가 면 돈 한 푼 안내고 국가가 배정해 주는 집에서 사는  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여기 남쪽분이 나에게 “우리는 아무 곳이 나 가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북쪽은 거주이전 의 자유가 없지 않은가!”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진정한 거주이전의 자유라는 말이 무엇인가? 당 신은 서울 강남의 제일 좋은 빌딩에서 살고 싶다 면 살 수 있는가? 또 내가 알기로는 돈이 없어서 단 칸 고시원에서 살다가도 돈이 허락되지 않으면 그 나마도 거리에 나와야 하는 형편 아닌가, 아무리 좋 은 것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어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돈이 결정하는 것이지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돈에 

양심수후원회 소식 | 31 

연재 | 김련희 수기(11) 

의한 예속이다. 하지만 북에서는 돈 한 푼 내지 않 고 국가로부터 집을 배정받으며 직장을 옮기게 되 면 그 지역으로 집을 교환해준다. 전세, 월세, 계약 이라는 말을 모르고 살며 죽을 때까지 그 집의 소유 권은 자기 본인이다. 당신이라면 어느 선택을 할 것  

같은가?”라고 말해주었다. 

또 놀랐던 것은 아는 분과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가는데 도중에 잠간 서더니 한 아줌마에게 돈을 주 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왜 돈을 주냐고 물 었더니 이 분이 하는 말이 누구나 도로를 지나가려 면 돈을 내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순간 웃음이 나왔 다. ‘아니 이 길도 주인이 따로 있냐고, 국가길이 아 니냐고, 어떻게 길 지나다니는 값을 받는다는 게 말 이 되냐고’  

한번은 인터넷에 피부과에서 녀성들의 기미와 잡 티를 없애준다는 광고를 보았다. 북에서는 피부과 라고 하면 상처나 습진, 피부병을 치료하는 곳인데  여기 피부과에 대한 소개를 들으니 나도 여자인지 라 무척이나 호기심이 갔다. 나는 집주변에 있는 피 부과에 가서 접수를 하고 과장선생님을 만났다. 과 장선생님에게 얼굴에 기미가 많은데 여기서 없애준 다고 해서 찾아왔다고 하자 250만원을 내라는 것이 었다. 남쪽에 온지 몇 달 안 되었던 나는 깜짝 놀라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와 가려고 하자 복 도에 있던 간호사가 돈을 내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 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저 지금 약도  안 먹고 주사도 안 맞았어요. 치료받지 않았는데 무 슨 돈을 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간호사 는 과장선생님과 상담비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병원은 치료만이 아니라 말을 나눈 값도  내야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여기 남쪽에서도 여러 번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의사선생님들도 정성을 다했고 간호사들도  친절했다. 다만 퇴원할 때 쯤 되면 ‘병원비가 얼마  나왔을까!’ 하는 걱정만 없다면 다른 것은 모두 편하 고 좋았다.  

나는 하나원을 나온 지 8개월 후인 9월 경산시청 에 여권을 신청하였다. 며칠 후에 시청에서 여권을  발급할 수 없다는 전화 연락을 받고 ‘아직은 아닌 가?’라는 생각으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11 월 쯤 되어 다시 시청에 가서 여권을 신청하려 왔 다며 내 주민등록증을 보이니 두말없이 당신은 여 권이 발급되지 않는다며 신청서조차도 받지 않았 다...나는 어이가 없어 직원에게 당신은 여권을 신 청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여권이 발급되지 않는다 고 단언할 수 있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 직원 은 자신들은 잘 모르고 국정원에서 하는 일이라며  난처해하였다. 

그토록 간절하게 여권이 나오기만을 기다려 왔는 데 이제 와서 여권이 안 된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경산 경찰서 보안계 담당 형사를 불러 앞에 앉혀 놓고 국정원 111에 전화하 였다. 내 이름을 밝히자 내가 여권 내용을 말하기도  전에 국정원 여직원은 여권 때문에 그러냐고 하면서  여권발급을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나 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여권 이야기는 꺼 내지도 않았는데 당신은 내 이름만 듣고 어떻게 내 가 여권 때문에 전화했다고 생각하냐고 물었으나  직원은 다른 말없이 그냥 여권이 안 된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현재 한국에서 중 국에 있는 북쪽사람들을 데려오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탈북브로커를 만나 국정원에서 여권을 발급 해주지 않는데 어떤 이유인지 좀 알아봐달라고 부 탁하였다. 그 브로커는 내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 연 락처에서 국정원이라고 쓴 여러 개의 전화번호들을 

32 | 311호•20179월  

한참 돌리더니 어느 한 번호를 찾아 전화하였다. “김련희라고 2011년 9월에 한국에 입국한 여자 인데 1년이 되도록 여권이 나오지 않는다는데 좀 알 아봐 주세요” 잠시 차를 마시며 기다리는데 5분정 도 되었을까, 국정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그쪽에서  하는 말이 김련희는 처음부터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사람이라 나중에라도 북으로 도망갈 우려가 있 어 “신원특이자”로 분류되여 여권을 발급할 수 없다 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국정원 독방에  감금하고 강압적으로 서약서를 받아 국적을 주고  고향으로 도망갈까 봐 여권을 해줄 수 없다니...  여행의 자유는 인간의 초보적인 보편적 권리이 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단지 가족이 기다리 는 집으로 도망갈까 봐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여행의  권리를 짓밟는다는 것은 엄연한 인권유린이다. 그 때에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 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실오리같은 희망이  끊어지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며칠 동안을 애태우며 어떻게 하면 중국까지  갈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 저 생각해낸 것이 밀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누구와 함께 의논할만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 어 혼자서 모대기던 나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 는 한탈북자 ㅊ씨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ㅊ씨는 나보다 한 달 늦게 남쪽에 온 사람인데 나 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라 외롭게 혼자 있는 것이 안 쓰러워 때때고 밥도 사주고 자주 이야기 친구도 하 면서 가깝게 지내던 사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다년 간 살 때 밀수를 여러 번 하면서 그쪽부분에 깊은 연 관이 있어 아는 것이 많았다. 나는 가족이 있는 고 향으로 꼭 돌아가야 하니 좀 도와달라고 ㅊ씨에게  

부탁하였다.  

그는 나의 사연을 다 듣더니 자신이 도와주겠다 

면서 밀항선을 알아봐주었고 며칠 후에는 연락이  왔다면서 밀항비를 2000만원 준비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금액은 남쪽에 온지 1년밖에 안된 나 에게는 감히 넘볼 수조차 없는 터무니없이 높은 거 금이여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 나 가족에게 돌아가는 길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던 나는 간절히 원하면 꼭 길이 열린다는 희망 을 가지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매일을 년로하신 부모님과 남편 사랑하 는 딸을 그리며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에  2013년 7월 2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 되는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 북측녀자축구선수들 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 2014년 인천에서 열렸던 아시아경기대회 여자 축구에서 우승한 북  여자축구선수들이 시상대 위에서 환호하는 남녁동포들에게 손을 들어  흔들면서 답례하고 있다.  

 2년 만에 공화국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감 격으로 며칠 밤을 지새다가 21일 기차를 타고 서울  상암월드컵 경기장을 찾았다. 보안계 담당형사에게  함께 가자고 했지만 주말이라 함께 가기 어려워 혼 자서 가게 되었다. 정말 꿈만 같았다. 나는 입장표 를 사고 경기장의 북측응원석에 가서 앉았다. 

맞은편에는 태극기가 크게 붙어있었고 주석단 맞 은편엔 파아란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통일조국기가  힘차게 나붙기고 있었다. 경기시작을 알리자 북측 녀자축구팀과 남측녀자축구팀이 경기장에 입장하

양심수후원회 소식 | 33 

연재 | 김련희 수기(11) 

였고 남측애국가에 이어 북측애국가가 장중하게 울 려퍼졌다. 

2년 만에, 그것도 조국멀리 타향에서 애국가를 들 으니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 러내렸다. 

아/ 내 조국의 애국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력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나는 목청껏 따라 불렀다. 2대1로 경기에서 이긴  북측선수들이 공화국기를 날리며 운동장을 한 바퀴  돌다가 내가 앉아있는 응원석 앞에 와서 인사를 할  때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만세를 힘차게 웨쳤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내 조국의 선수들 

이 있었고 그들의 손을 잡고 당장 평양에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한스러웠다.  

내일이면 선수들은 내 고향 평양으로 가는데 나 는 왜 내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갈수 없을까! 가슴을 치고 울분을 토하며 고통 속에 몸부림쳤 지만 나의 앞에는 분단의 장벽이라는 괴물이 막아 서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고향으로  가고야 말겠다는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결심으로  또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인터넷을 여기저기 들어가보는데 위조문 서사이트를 보게 되는데 거기에 위조여권조항이 있 는 것을 보고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저것이면 내가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갈  수 있을 거잖아” 

나는 바로 사이트에 있는 연락처에 전화하여 중 국에 갈수 있는 위조여권을 부탁하였다. 250만원  합의로 시작된 위조여권이 2일 만에 완성이 되어 이 메일로 위조여권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금방 중국으로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쁨 으로 그 사람에게 현금 250만을 입금하력고하자 그 쪽에서 하는 말이 비자 받는데 돈이 더 필요하다며  500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처음과는 약속이 다르 지 않냐고 상대와 말다툼이 벌어지자 그쪽에서 하는  말이 당장 경찰서로 신고하겠다고 하여 그만 위조여 권도 성공하지 못하고 2014년 12월 경찰조사를 받 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끝내 연락처도 있는  그 사기를 쳤던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간첩이 되고 싶어요  

유일한 희망이었던 여권도 발급되지 않고 밀항과  위조여권도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나에게 차례진  것은 결국 경찰조사 뿐이었다. 경찰은 항시 우리집 을 밀착감시하기 시작하였고 나를 오도가도 못하게  따라다녔다.  

한번은 저녁 10쯤 되어 혼자 너무 힘들어 아는 친 구의 집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아파트단지 정문을  나서기도 전에 형사가 달려와 어디 가느냐며 앞을  막는 것이었다. 나는 깜깜한 한 밤중에 갑작스러운  일이라 너무도 놀라 짜증을 내며 내가 가고 싶은 곳 에 가는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쏘아 붙이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차를 타고 내 가 가는 길을 뒤에서 계속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숨막히는 밀착감시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 쳐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가 족에게 돌아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행방불명된 나를 찾느라 하루하루 눈물 속에 안타 까운 나날을 보낼 텐데 나는 여기서 살아서 숨쉬는  것 자체가 너무 죄송스러웠다.  

나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 어버리는 것이 덜 아프고 힘들 것 같아 모든 것을 포 기하고 강한 수면제 50알을 삼키고 그만 정신을 잃 었다. 하루가 지나서 다음날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

34 | 311호•20179월  

었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옆에는 경 찰들 4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이 저녁에 집에 정신 을 잃고 쓰러져있기에 119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다 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입원실로 이동하였는데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걸을 수가 없었다.  약물증독으로 일시적 하반신마비가 왔으며 중증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진단도 받게 되어 정 신과 입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나 혼자 힘으로는 한 발작도 걸을 수 없어 간병인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도 다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원망스럽고 한스러웠다.  나는 가족이 없는 나의 삶을 생각할 수가 없어 퇴 원한 다음날 칼로 손목동맥을 끊어 또다시 쓰러졌 지만 이번에도 나는 죽지 않고 경찰차를 타고 병원 에 입원하여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2주만에  완쾌되어 다시 퇴원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생각했다. 

“아/ 나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닌가 부다.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을가... 그렇다면 부 모남과 가족앞에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가...그럼 돌아갈 수 있 는 방법도 혹시 있지 않을까...” 

그런 과정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내 가 북의 간첩이라고 한다면 감옥살이 몇 년하고 북 으로 강제 추방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었 다. 이전에 내가 경찰들에게 “북의 공작금을 받았 다, 서울에 공작원을 만나려 간다,”고 말한 것들은  

내 말뿐이고 증거가 없어 기소하지 못했으니 진짜  간첩이 되려면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간첩이 될 수 있 는지 인터넷을 보니 유우성, 원정화 간첩조작사건 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거기에 탈북자명단을 북에  넘겼다는 조항을 보면서 그래도 이것이 내가 해낼  수 있는 조건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17명 탈북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나의 휴대폰에 입력하고 2014년 6월 2일 경찰청보 안수사대에 전화하였다. 

“제가 지금 북에 전달할 정보를 수집했어요. 빨리  와서 저를 막아주세요” 

내가 간첩이라고 신고를 했는데도 10일이 지나도  경찰이 잡으러 오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10일이 지나 다시 보안수사대에 전화를 하 여 이번에는 좀 만나자고 하였다. 대구의 어느 식당 에서 만난 형사2명에게 나는 휴대폰을 펼쳐보이면 서, “자, 보세요 이게 바로 내가 북에 보내려고 수집 한 탈북자들의 명단이에요. 진짜로 정보를 수집했 어요.” 라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되어 내가 준비한 휴대폰자료가 간첩증거 가 되어 2014년 7월 19일부터 대구구치소에 구속,  국가보안법위반(간첩)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세 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상상해 본적도 없는 남녘땅 에서의 감옥생활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구치소 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이름이 아닌 51번이라는 수 번으로 불렸으며 무더운 여름날 한 평짜리 숨막히 는 독감방에서 더위와 고독과, 세상의 가장 낮은 바 닥에 쭈그리고 앉아있다는 자존심과의 싸움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독감방의 작은 철창은 밖에 해가 떴는지, 비가 오 는지, 바람이 부는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오 직 주루룩, 주루룩, 들려오는 소리만이 밖의 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TV에서나 보았던 연  하늘색의 죄수복을 걸쳐 입고 양쪽 가슴에는 402ㅡ 11과 51 을 새긴 흰 천 조각을 달고 두 팔을 다 펼  수도 없을 만큼 좁은 독감방에서 사람과 철저히 차 단되어 나는 하루 종일 누구와 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감옥은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수많은 규칙들과  아주 사소한 기쁨과 요구도 허용되지 않으며 매 순

양심수후원회 소식 | 35 

연재 | 김련희 수기(11) 

간순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실오리 같은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아버리고 철저한 반성의 강요가 이루어 진다.  

나는 내가 강제추방을 당하기 위해 간첩이 되고  싶었지만 설마 진짜 간첩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은근히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쉽게 간첩이 되고  보니 이 법이라는 것이 너무 허무해보여 수사관에게  이 나라는 내가 살인자요 하면 살인자가 되어 법정 

에 설수 있는가, 살인자가 되려면 죽은 피해자와 살 인동기, 과정, 증거가 있어야 살인자로 될 수 있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사회에 나온 2012년부터 2년 동안을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오던 경찰들이나 수사관들도 아무 런 증거도 없는데 북에 보낼 정보라며 17명의 탈북 자명단을 자랑하며 간첩행세를 하는 내가 언제 자 백을 번복할지 믿음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대구  

구치소에 수감된 지 45일 만에 수사관 5명이 와서  조사를 시작하였다. 

수사관은 수감 중인 대구 구치소에서 나를 조사 하기에 앞서 먼저 하는 말이 “당신이 제대로 진술하 면 공소보류를 받게 해줄 것이며 제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십년을 넘게 징역살이를 해야 한다”고 압박 을 하였다. 그리고 국정원과도 의논이 있었는데 이 제 여기 감옥에서 나가면 새집도 주고 잘 살 수 있도 록 도와준다며 회유하였다.  

수사관은 처음부터 나에게 우리 정부는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 칼기폭파범 김현희도 다 용서해주고  잘 먹고 잘살게 해주지 않았냐, 당신은 희생자다.  진정으로 당신을 도와줄 사람들은 다름 아닌 수사 

관들이라며 자신들만 믿으라고 얼렀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관심이 없 었고 오직 북의 간첩으로 인정받아 강제추방되어서 라도 가족이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 아갈 생각뿐이었다. 나는 조사과정에 내가 북의 지 령을 받은 간첩이며 북에 보낼 정보를 수집한 것이  

맞다고 무조건 자백했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하루종일 5명의 수사관 들 앞에서 조사를 받고 독방으로 돌아온 나는 내 가 족에게 가고 싶다는 나 하나의 욕심으로 국가의 이 름을 팔아 간첩행세를 하는 치졸하고 배은망덕한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원망으로 생기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자제할 수가  없어 벽에 머리를 연방 짓찧고 또 짓찧어 피가 터지 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보안과 남자교도관 6명이 달려와 나에게 수갑을  채우려하자 나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분출로 완강 하게 저항하였다. 그 좁은 독방에서 6명의 남교도 관들은 나 하나를 가운데 놓고 구두발로 다리를 차 고 내리박고 주먹으로 머리를 내려치고 머리채를 잡 아 흔들면서 나의 몸을 방바닥에 엎어놓고 한사람 은 구두발로 내 머리를 내리밟아 누르고, 또 두 사 람은 구두발로 뒤 잔등과 허리골반을 내리밟고 양 손을 잡고 있고, 또 두 사람은 나의 양다리를 밟고,  온몸을 비틀어 양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그 수갑 채 운 손을 허리에 붙혀 쇠사슬로 허리와 손을 꽁꽁 묶 고 발목에도 쇠고랑을 채웠고 머리에는 눈과 코만  내놓은 헬멧을 강제로 씌워놓았다. 마지막에는 뼈 를 부시는 것 같은 힘센 장정들의 압력에 아찔해져  내가 방바닥에 쓰러지자 밖으로 나가던 한 사람이  나의 코에 손을 대보더니 “숨은 붙어 있네” 라고 말 하고는 나가버렸다.  

때는 삼복더위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너무 무더 운데 심한 타박으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데 다 무거운 모자까지 머리를 압박하니 땀이 비오듯  흘러내려 물을 뿌려놓은 듯 머리카락을 흠뻑 적셔 놓았다. 손 하나 움직일 힘도 없이 꼼짝 못하고 쓰 러져있는데 여교도관 두 명이 들어오더니 나를 질질  끌고 가 넘어지지 않게 벽모서리에 앉혀 기대놓는  것이다.  

내가 있는 독감방에는 24시 CCTV가 지켜보고 있

36 | 311호•20179월  

는데 손과 발, 허리가 한데 꽁꽁 묶여 내 힘으로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벽모서리에 기대 여 앉아 있다가 지쳐서 쓰러지면 어느새 여교도관 들이 달려들어와 나를 다시 일으켜 앉혀 놓았다. 쇠 사슬에 꽁꽁 묶인 손이 퉁퉁 붓고 온몸이 성한 곳  없이 시퍼렇게 피멍이 들고 부어올라 쑤시고 그토록  아파도 잠시 누워 쓰러져있을 자유조차도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한번은 허리에 꽁꽁 묶은 쇠사슬과 손목수갑을  풀어주고 아래층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어느 방에 들어서니 나를 위로하려 왔다는 기독교  여자목사가 앉아있었는데 그 목사는 나를 보자마자  입을 딱 벌리며 혹시 거울을 보았냐고, 당신의 지금  모습은 미친 괴물의 모습이라며 나를 꼭 안고 한참 을 우셨다.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내방으로 올라와  교도관에게 거울이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부탁하였 다. 오랜만에 거울 속에 비낀 내 모습을 보며 나 자 신도 깜짝 놀라 교도관에게 이게 내가 맞냐고 되묻 고 말았다.  

독방에 들어와 나는 남자 교도관들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또다시 쇠사슬에 묶여야 했다. 나는 묶이 지 않겠다고 발버둥치고 4~5명의 남자들은 내 머 리채를 다시 잡아흔들고 구두발로 나의 다리 관절 을 꺾으며 바닥에 엎어놓고 구두발로 머리를 내리 밟고 잔등을 짓밟으며 온몸을 쇠사슬로 묶고는 다 시 일으켜 벽에다 기대 앉혀놓았다, 

일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방을 나가던 한 교도관 은 꽁꽁 묶여 꼼짝 못하고 앉아있는 나에게로 다시  오더니 남자의 그 체격으로 힘껏 뛰어올라 나의 다 리위에 구두를 신은 두발로 내리꽂는 것이었다. 순 간 아픔보다도 그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야만인 으로 보였다.  

나는 종교가 뭔지도 모르고 한 번도 생각해 본적 도 없지만 갑자기 손바닥만한 철창으로 보이는 밤 

하늘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말했다. 

“하늘에 진정 하나님이 있다면 나는 당신을 원망 할 것입니다. 당신은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아픔을 준다고 했는데 한 인간에게 너무나도 지독 한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정녕 당신을 믿으라고 말 한다면 부디 나를 가족의 품으로 갈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매 맞은 어혈로 제대로 운신하기 어려워 재소자 봉 사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목욕을 하다가 한번은 옆방 에 있는 죄수들과 함께 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  피부색을 찾아볼 수 없이 온몸이 시퍼렇게 피멍 들어  있는 나를 쳐다보며 감히 입을 열지를 못했다.  

그 분들은 다음날 내가 너무 불쌍했는지 교도관 에게 자신들에게 있는 사탕과 먹을 것들을 나에게  좀 전달해달라고 부탁하자 교도관은 안 된다며 거 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운동시간에 혹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가지고 왔다며 주머니에 몰래  숨겨가지고 온 사탕을 한줌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한줌의 사탕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맛 있게 느껴졌던 것 같다. 

구치소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 견디기 힘든 아픔 이었고 지독한 고독의 압박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사람들”에 대한 추억 이었다. 나를 딸이라고 부르며 운동시간마다 주머 니에 사탕도 넣어주고 그 짧은 30분이란 시간동안  나의 손을 꼭 잡아주고 안아주며 어머니의 사랑을  주시던 10년형을 받은 80세의 한 어머니가 계셨다.  

추운 겨울에는 친인척 한명 없는 나에게 자신의  돈으로 내의를 구매하여 교도관에게 간절히 부탁을  하여 몰래 나의 방에 넣어주기도 하셨고 내가 남교 도관들에게 묶이며 실갱이를 할 때면 어머니는 밤새 껏 내 걱정으로 잠을 못자고 다음날 운동시간에 나 를 꼭 안아 위로해주며 멍이든 내 몸에 연고를 발라 주군 하셨다. 그때 그 어머니의 손은 틀림없는 나의 

양심수후원회 소식 | 37 

연재 | 김련희 수기(11)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었다.  

독감방에서 맞는 생일은 참으로 서글프다. 11월  21일 아침식사시간에 밥을 앞에 놓고 보니 “이 아 침 부모님은 돌아오지 못하는 딸을 생각하며 얼마 나 눈물을 흘리시며 가슴아파 하실까, 그리고 딸자 식은 오늘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을까, 어른인 나도  딸이 너무 보고 싶어 이토록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 이 고통스러운데 어린 딸은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 각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 도저히 밥술을  뜰 수가 없었다. 가슴이 꽉 막히고 주먹으로 아무리  탕탕 쳐도 도무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흔히 가슴 이 미여진다는 말을 책에서 여러 번 보아왔다. 하지 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몰랐던 것 같다. 이 순 간 비로소 나는 “아 이럴 때 가슴이 미여진다고 하 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교도관들이 출근하여 들어왔 는데 구치소에서의 몇 개월 동안 복도를 순시할 때 마다 한마디라도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어 하며 관심을 가져주던 한 교도관이 나의 방 앞에 오 더니 “51번, 오늘 생일이죠? 밖의 신선한 공기를 담 은 꽃이에요.”하며 철창사이로 꽃 한송이를 넣어주 었다. 아감동이었다. 한참 동안 꽃의 향기를 맡 아보았다. 일상생활 속에서 거리를 다니면서도 무 심히 지나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꺾어버리던 그 한  

송이의 꽃이 이토록 아름답고 향기로운 줄 나는 미 처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이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래, 사소한 하나하나들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 로구나.”  

물컵에 담아놓은 꽃은 사그러지는 마지막 순간까 지 자신을 깡그리 바쳐 일주일 동안 내방에 향기를  뿜어주었다.  

7월 19일에 구속되어 시작된 경찰조사 3차, 검찰 

조사 6차, 재판심리 4차에 걸친 1심 재판이 12월 5 일 드디어 징역 2년이라는 선고로 끝을 보고 만 5개 월만에 대구구치소를 떠나 대구교도소로 이감되는  날이었다. 

12월 17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가 넘었는데 갑 자기 교도관이 이감소식을 알려주며 당장 준비하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교도소로 간다는 마음의 준비 가 없이 갑자기 닥친 일이라 갑자기 가슴이 떨리고  이 험난하고 힘든 구치소의 5개월에 이어 또다시 겪 어야할 교도소의 철창이 기다리는 나의 앞길에 눈 물이 와락 나왔다. 복도에 나와 그 어머니가 계시는  감방을 지나는데 어머니가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 고 사과를 한 알 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다. 

혈육 한 점 없는 이 낮선 타향에서, 그것도 고독 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차가운 감 방 안에서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추위를 막아주며  친어머니의 사랑으로 포근하게 나를 감싸주었던 이  어머니와의 이별의 순간이 너무나 큰 아픔으로 나 의 가슴을 찢었다. 

어머니가 주시는 사과 한 알을 받아들고 함께 손 을 잡고 눈물을 흘린 그 짧은 2분간의 순간은 아마  일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호송차를 타고 손에 수갑을 차고 징역보따리를  안고 대구 교도소로 가는 동안 구치소의 5개월간의  기억 속에 내가 얻은 것은 세상에는 남의 행복 앞에 서 자신의 불행을 느끼는가 하면 남의 불행 앞에서  자신을 위로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10년형을 받은 80세의 장기수 그 어머니의 너무 나 밝고 당당하고 열정적인 모습에서 나의 아픔이  세상의 큰 아픔인양 쉽게 무너져 내리던 나 자신의  마음을 다잡게 되었고 그 어머니의 높은 정신력에 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었으며 나의 슬픔 이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밖에 되지 않 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8 | 311호•20179월  

호송차를 타고 가면서 어느 한교도관은 나의 모 습이 너무 안쓰러웠는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이었다. 

“조국이라는 것이 대체 뭐냐, 난 지금이라도 미국 에서 누가 한국에서 보다 더 잘살게 해주겠으니 오 라고 한다면 당장 이 나라 국적을 버리고 미국으로  가겠다. 조국이 뭔데 이런 고생을 사서 하냐” 나는  그 말을 들고 한참 머리가 뻥 해졌다. 

“그처럼 소중하고 귀중한 조국이라는 말이 과연  먹다 버리는 빵부스러기 같이 그렇게 쉬운 말이었 나... 이 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다는 조국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애국자들과 청년들이 자신의 청 춘과 목숨을 바쳐 싸워왔던기..” 

너무나 충격적이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나에게 조 국이란 참으로 성스럽고 위대하며 가장 소중한 존 재이다. 

대구 교도소에 도착하여 또다시 24시간 CCTV가  나를 째려보는 독감방에 들어와 보니 화장실에 내  키만큼의 높이에 자그마한 철창문이 있어 다행히도  바깥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가슴을 설 

레게 하였다. 발뒤꿈치를 들고 목을 뽑아 창밖을 내 다보니 반 년만에 눈앞에 펼쳐진 겨울풍경이 황홀 하게 느껴졌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바깥세상의 상쾌 한 아침공기가 나의 폐부를 정화시키듯 마음의 안 정을 가져다주었다. 제일 기대되는 것은 올해 들어 와 아직 한 번도 본적 없는 눈 내리는 모습을 직접  

바라볼 수 있다는 설레임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감옥에서 새해 첫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어 느 한순간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새해를  하루 앞둔 나의 마음은 너무도 쓰리고 아파 몇 자  적어보았다. 

어머니. 잠시 후면 2015년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 

다. 고향을 떠나 여기 남녘땅에서 4번째로 맞는 새해 입니다. 지금 이 순간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은 간절 함에 가슴이 꽉 미어져 많이 아픕니다. 예로부터 사랑 은 내리사랑이라 하는데 제가 이토록 가슴이 갈기갈 기 찢어지는데 못난 이 딸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 루 까만 재만 채우고 계실 부모님은 지금 얼마나 힘드 실지, 그 모습을 생각하니 면목이 없습니다. 

어머니란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왠지 모를 멍멍함,  가슴이 꽉 메이고 숨을 쉴 수 없을 벅찬 감정으로 저 도 모르게 눈물이 먼저 흐르군 합니다. 엄마라는 말은  너무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어머니, 정말 죄 송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아버지, 정말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립습니다. 정말  미치도록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너무나 존경스러운 아버지였고  훌륭하신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저는 잠시라도 나약해지던  마음을 다잡게 되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언제나 떳떳 하게, 당당하게, 부끄럼 없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 게 되며 마음이 정화되어 안정을 찾게 됩니다. 부모,  자식 사이의 연은 하늘이 주는 천륜이라 선택의 여지 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에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열두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부모 님의 그 따스하고 인자하고, 너그럽고, 웅심깊은 그 세 계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참으로 못난 자식이 여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좋은 토양에서 좋은 자양분 으로 높은 정신세계를 이어 받은 제가 달리는 살 수 없 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시리라 믿 기에 저도 타향멀리 여기 철창 속에서도 언제나 나를  키워주고 내세워 준 고마운 조국과 사랑하는 가족을  잊지 않고 굳은 마음을 다잡아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언제면 만날 수 있을까요?

양심수후원회 소식 | 39 

연재 | 김련희 수기(11) 

수감되어 재판받던 10개월간의 감옥 생활에서,  또 지금까지의 남쪽에서 제일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아마 국선변호사인 것 같다. “51번, 변호사접견” 교 도관의 소리가 들리더니 육중한 철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교도관을 따라 변호사 면접실에 들어가니  50대 중반의 한 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겨 맞 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김련희씨를 담당한  국선변호인 성명호입니다.” 이것이 나의 사건을 맞 은 변호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국선변호인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고 그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간첩이면 그만이었 다. 하지만 국선변호인은 매주 월요일마다 어김없 이 구치소에 찾아와 나를 만나주군 하였다. 한번은  추운 겨울이었는데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면서 변호 인이 접견을 와주었다. 내가 특별히 할 말도 없는데  왜 건강도 나쁜데 추운 날에 찾아왔냐고 묻자 변호 사는 “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련희씨는 일주일동안  바깥구경을 한 번도 하지 못하지 않냐, 아는 사람도  한명 없는데 내가 안 오면 얼마나 외롭겠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찡해왔다. 수개월 간의 감옥 생활에서 다른 수감자들이 면회실로 가 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부럽지 않고 외로움을 견 딜 수 있었던 것은 변호사가 면회 오는 월요일을 기 다리는 희망 때문이었다. 

변호사는 수감되어 있는 10개월 동안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월요일마다 꼭꼭 나를 찾아주었 다. 다른 수감자들의 말을 들어보니 국선변호인들 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한두번 밖에 만나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매주 변호인 접견을 나가는 나를 보며  교도관들도 그 국선변호인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자신들은 십년 넘게 교도소에서 근무하면서 저렇게  국선변호인이 매주 마다 접견 오는 일은 처음이라 고 하였다.  

6개월간에 걸친 1심 재판이 징역 4년 구형에서 징 

역 2년 선고로 끝나자 검사측은 항소를 포기했지만  성변호사와 나는 항소했다. 2심 재판에는 다른 국 선변호인이 지정되었으나 성명호 변호사님은 여기 서 자신이 돌아선다면 평생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자진하여 돈 한푼 받지 않고 사선변호사로 2 심재판 변호를 맡아주셨다. 나는 이 변호사를 10개 월간을 지켜보며 ‘아/ 이런 변호사들이 있어서 양육 강식의 이 차디찬 세상에서 나처럼 힘없는 사람, 억 울한 사람도 함께 어울러 살아갈 수 있는 것이로구 나’는 생각으로 더더욱 따뜻하게 안겨왔다.  

2015년 4월 21일. 나는 징역 2년, 집행유해 3년 을 선고를 받고 만 9개월 만에 감옥문을 나설 수 있 었다. 7월에 짧은 소매 옷을 입고 들어갔다가 아직  추위가 남아있는 4월에 세상 밖으로 나오자니 입고  나설 옷이 없었다. 교도소에서는 난감하여 남자 옷 을 한 벌 가져다 주었는데 얼마나 큰지 소매를 여러  번 걷어 올리고 바지 가랑이를 몇 번 접어 올리고서 야 나의 몸에 겨우 맞출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  감옥문을 나설 때 가족이나 친구들이 마중하고 두 부를 입에 넣어주는 장면을 본 것 같은데 나는 석방 되어 세상밖에 나선다는 소식을 알려줄 그 누구도  없어 오직 혼자서 그 암흑의 골방, 압박과 두려움의  15척 담장을 나서게 되었다.  

감방 안에서 가족을 그리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분단상처 이산의 아픔 

독감방 철창속에 밤낮을 고독하게 홀로 누워 지 샌 밤이 얼마이더냐 지친밤 하염없이 철창을 바라 보며 눈물속에 고향하늘 그리워하네. 무더운 여름 을 힘겹게 보내고 단풍이 붉게피는 가을을 맞았건 만 계절의 풍요로움보다 궁핍이 다가오고 단풍경치 의 아름다움보다 피눈물의 아픔이 사무쳐 온다. 철

40 | 311호•20179월  

조망 너머 수백리 고향을 뒤에 두고 날개 부러진 새 가 되어 감옥에 갇혔구나! 담이 높아서인가 벽이 두 꺼워서인가 고향의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꿈속에조 차 나를 찾아오지 못하는구나. 오갈 수 없는 이 마 음 간절한 소원안고 깊은 밤 스치는 바람에게 속삭 인다 바람아 너는 내 고향에 갈 수 있겠지 너는 우 리 아빠. 엄마 만날 수 있겠지 나의 귀여운 딸을 안 아볼 수 있겠지. 바람아. 바람아. 부디 너 혼자 가지  

말고 나를 데려가 주렴 우리 부모님 너무 오래 기다 리지 않게 우리 아가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게 내가  지쳐 쓰러지기 전에. 아~~~세상이 너무 야속하구 나 하늘도 너무 무심하구나 가슴이 찢어지고 피눈 물이 고인다 괴로운 이 마음 위로해 주련 듯 철창밖 엔 힘없이 우는 풀벌레소리가 처량도 하구나. 

고운 꿈 꾸렴 

사랑하는 나의 딸 소중한 딸아 

어둠이 짙다고 무서워 마라 

저 하늘의 별들이 밝은 빛뿌려 

너를 지켜준단다 나의 아가야.  

빈집에서 외로이 창문가에 홀로앉아 

엄마를 부르는 애절한 울음소리 

바람타고 여기 철창 속에 날아와 

이 어미의 가슴을 아프게 찢는구나.  

지쳐서 쓰러진 너의 잠든 모습 

꿈속에서도 엄마를 만나지 못했는지 

눈가엔 아직도 눈물이 흐르는데 

언제면 우리 아가 고운 꿈 꾸려나.  

잘 자거라 나의 소중한 딸아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단다. 

네 얼굴 스치며 다독이는 바람이 되어 

너의 잠 지켜주는 밝은 별빛이 되어.  

어머니의 사랑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가장 위대한 어머니가  

내 곁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고향떠나 타항에서 간절한 그리움 안고 북녘하늘 바라보며 외롭게 홀로 서있지만 어머니의 숨결은  

언제나 저의 곁에 있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당신은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십니다 저의 체온에, 피부에 

모진 아픔과 고통의 갈피마다에 어머니는 언제나  

저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온기 한 점 없는 차디찬 독감방속에서 나약해질까봐, 쓰러질까봐, 

너무 많이 아파할까봐 

언제나 저를 다독이고 있습니다. 힘과 용기를 주고 계십니다.  

아, 사랑하는 어머니시여 

당신이 있기에 힘을 내여 봅니다, 당신의 사랑있기에  

모진 아픔 이겨낼 수 있는 겁니다

양심수후원회 소식 | 41 

연재 | 김련희 수기(11) 

당신의 간절한 기다림있기에 

언젠가는 기어이 돌아가렵니다 

죽어서라도 당신 품에 안기렵니다 

당신의 크나큰 믿음있기에  

아름다운 내일을 힘있게 내딛습니다.  강제추방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간첩이 되 

고 싶었던 나의 욕망과 간첩잡이에서 성과를 올리 고 싶었던 보안수사대 형사들의 욕심이 낳은 결과 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한 녀성의 감옥생활 로 망가진 모습>과 <경위, 경감으로 특별승진한 형 사들의 모습>으로 나누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지금 서점에 가서  

찾아 주세요!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저자 김련희

42 | 311호•20179월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선생이  

정직과 신용으로 운영하는 양지탕제원에서 정성껏 만든 보약을 판매합니다. 

(* 나라 안팎 어디나 배달해 드립니다.)

 

십전대보탕 130g 36봉 ✽10만원 전신강장 보혈작용, 건위 소화작용, 골다공증예방 가미쌍화탕 130g 36봉 ✽10만원 감기, 기침, 몸살, 천식, 보음, 보양, 보혈, 보기 녹용대보탕 135g 60봉 ✽40만원 성장촉진, 기혈강장, 청소년 성장, 수험생 고진대보탕 135g 60봉 ✽40만원 여성갱년기 장애, 강장, 보혈, 보기 가미쌍금탕 140g 60봉 ✽45만원 장년남자 보기 강장, 술 드시는 남성 보약 

네이버에서 ‘양지탕제원’을 검색하세요. 

문의 및 주문 : 02-888-6231 | 010-8715-7398 

양심수후원회 소식 | 43 

명 9

총 

현 

5

71

02

결 

미/

량 형

지 

감수

규 법

용적

결 기

년 5

20

5교

주광

법 안

보1 

결 기

월 4

년3

5 1

8교

산군

결 기

년 2

9 1

구대

법 안

보0 

결 기

년 7

7 2

구대

법 안

보4 

결 기

년 

21

0 3

03

구대

결 미

2

71

전대

결 

월 

6

1

0

1

법 

2

.

1

.

7

결 

월 

6

1

0

0

4

법 

2

.

1

.

7

결 미

8 6

울서

법 안

보9 

결 기

년 9

63

구원

법 안

보5 

결 기

기 무

1 0

03

동안

법 안

보1 

결 기

년 5

20

3교

동안

법 안

보6 

결 기

년 2

6

03

동안

법 안

보3 

결 기

월 6

년2

6 6

02

양안

법 안

보3 

결 미

8 06

산울

결 미

47

산울

결 미

8 5

8구

산울

결 기

년 3

3 1

6교

주원

결 기

년 3

052

주전

법 안

보9 

결 기

년 1

4 1

52

주전

법 안

보3 

결 기

월 6

년1

9 1

52

주전

법 안

보8 

결기

년 2

2 7

6교

읍정

짜 

날속

0.

0

1.

31

02

건 사

작조

2.

1

0.

51

02

쟁 

투의

항거

철점

노 

2.

0

1.

51

02

0.

7

0.

1

1

02

) 산

0.

3

0

.

.

51

02

습 

0.

8

0.

71

02

쟁 투

1

0

2(

0

1

.

1

0.

61

02

) 속

구재

1

0

2(

0

2.

2

1

.

51

02

) 속

구재

2.

3

0.

71

02

0.

9

0.

31

02

건 사

작조

0.

2

0.

50

02

2.

1

1.

31

02

0.

5

0.

61

02

1

.

5

0.

51

02

2(

건사

 

2.

4

0.

71

02

쟁 

쟁 

복직

2.

4

0.

71

02

쟁 

쟁 

복직

2.

4

0.

71

02

쟁 

쟁 

복직

1.

0

1.

61

02

쟁 투

계신

정 

열형

2.

4

0.

51

02

0.

7

0.

71

02

2.

4

0.

61

02

0.

1

1.

61

02

쟁 

투의

항 

검 

황 

현 

수심

명 건

책 직

및속

류 분

름 이

호 번

내원

정국

장 

원위

기경

당보

합통

인 치

렬 홍

김1 

리거

데로

천인

장 

역지

인 

합연

상점

주민

상 점

호 영

박2 

반 

위 

법안

가국

표 

대동

공 

대연

아리

 

가 동

철 

영지

왕(

법안

가국

무 

업기

소중

자 동

용 

덕김

피 

사대

국미

한주

표 

대 

마리

가 동

종 

기김

쟁 

노 

시8

장 국

전 

회지

세 

계기

설건

종세

대 

설건

자 동

기 

만홍

반 

위 

법안

가국

원 

회 

대연

아리

 

가 동

혜 준

한7 

반 

위 

법안

가국

원 

회 

대연

아리

 

가 동

민  

최8 

반 

위 

법안

가국

자 

기 

보시

주자

자 기

섭 

용이

내원

정국

원 

의회

국 

당보

합통

인 치

기 석

0 1

반 

위 

법안

가국

가 업

자 동

석 경

1 1

반 위

법안

가국

장 

위예

문 

전 

대연

보진국

가 동

렬 식

2 1

반 

위 

법안

가국

기 지

넷터

자 동

일 영

3 1

내 

원정

장 

지 

부지

 

총노

주민

자 동

춘 

영이

4 1

원 

회철

당부

장 회

지 

회지

동 

부지

울 

속금

자 동

일 

상이

5 1

원 

회철

당부

장 회

지 

회지

동 

부지

울 

속금

자 동

라 송

6 1

원 

회철

당부

장 회

지 

회지

동 

부지

울 

속금

자 동

일 

상김

7 1

배 

8

2.

5.

51

02

장 

전선

 

기경

총노

주민

자 동

상 정

8 1

반 

위 

법안

가국

업 

인개

자 동

정  

9 1

반 위

법안

가국

객 

넷터

자 동

택 언

0 2

반 

위 

법안

가국

원 

회 

대연

아리

 

가 동

근 

동이

1 2

게실

최혜

근박

자 동

노비

장중

자 동

만 석

2 2

44 | 311호•20179월  

결 

미/

량 형

지 

감수

규 법

용적

짜 

날속

명 건

결 기

월 6

1 7

02

원창

0.

5

0.

71

02

쟁 

투회

철 

부 

21

02

원 

 

부지

울 

노설

결 기

월 6

년2

4 1

자여

주청

법 안

1

.

5

0.

51

02

2(

건사

 

내 

원정

인 

변대

결 기

년 3

8 1

자여

주청

법 안

1

.

5

0.

51

02

2(

건사

 

내 

원정

장 

원위

년청

결 미

5(

중고

0 1

02

천춘

법 안

2.

5

0.

61

02

반 

위 

법안

가국

결 미

3(

중고

7 1

02

천춘

법 안

1

.

1

1

.

51

02

반 

위 

법안

가국

단 자

목동

결 미

4

(중

30

2교

천춘

법 안

2.

5

0.

61

02

반 

위 

법안

가국

결 기

년 3

0 30

4

성화

1.

2

1.

51

02

회 집

추기

주1

8

1.

4

장 

맹연

총 

합조

항 

사 

동변

소  

1

1

1

 

 

영유

 

감이

호 

7

8

함서

사 

 

2

2

2

 

 

 

호 

9

6

 

 

 

호 

7

8

 

 

 

)

5

8

4

6

2

(

 

3

1

6

 

 

호 

0

2

 

 

 

 

  

3

 

 

 

 

)

8

5

2

8

1

(

 

0

3

0

4

 

 

호 

7

1

 

 

 

 

호 

10

함서

사 

국체우

안 

시양

안 

기경

  

96

사 

국체우

춘 

시천

춘 

 

)5

334

2(

 

0

30

2교

천춘

 

영이

 

감이

호 

함서

사 

국체우양남

경 

시성

화 

기경

  

9

6

 

 

 

 

)

5

3

3

4

2

(

 

0

1

0

2

 

 

호 

7

 

 

 

 

  

1

 

 

 

)

3

6

1

6

5

(

 

2

7

6

 

 

호 

1

7

1

 

 

 

 

) 기

8

8

0

9

0

 

이 

호 

3

6

 

서사국

체우

 

 

시역

)

4

(

 

7

2

8

0

 

 

호 

7

 

 

 

호 6

3

함서

사 

국체

우성

유 

전대

호 

함서

사 

국체

우양

온 

산울

호 0

함서

사 

국체

우산

군 

군 

북전

호 2

함서

사 

우 

전 

북전

길동

저 

면성

소 

정 

북전

) 9

1

동남

산(

 

87

번7

88

1

청 

구원

서 

청 

북충

책 직및

속소

류 분

름 이

호 번

랜플

국전

자 동

주 

광이

3 2

당보

합통

인 치

영 위

4 2

당보

합통

인 치

정 민

5 2

가 업

자 동

용 

경김

6 2

화평

독기

인 교

윤 

성김

7 2

인 개

자 동

수 

영이

8 2

호 

 

5

8

4

6

2

 

5

3

3

4

2

 

9

2

8

5

1

 

7

8

4

6

1

 

7

4

0

4

1

 

8

5

2

8

1

 

4

0

3

1

5

 

4

7

6

6

3

 

4

4

2

1

6

 

1

3

7

2

4

 

6

8

1

4

3

 

4

7

9

4

4

 

5

2

0

4

5

 

6

6

9

4

5

 

3

1

2

6

5

 

4

3

6

8

2

지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소 


 

자 

균 

수감지주소록 

2

양심수후원회 소식 | 45 

안녕하십니까! 

감옥에서 온 편지 신언택 님의 편지

잘 지내셨나요. 

무더운 폭염이 끝나고 벌써 9월 가을이 됐습니다. 

운동장에 고추잠자리가 나타나 자기는 자유가 있다며 약(?)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무국장님! 

무더운 여름에 면회와 주셔서 고맙고, 행정일 하시느라 참 고생이 많습니다.  이제 미제는 1973년 월남전 가을 때처럼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고, 파리평화조약을  위해 북베트남군이 최대의 뗏( ) 공격했듯이, 조선도 평화조약을 위해 핵ICBM으 로 미제를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드디어 미 국방장관은 “우리의 책상 위에 모 든 카드가 놓여있다”고 실토했습니다. 외교용어로 모든(everything)은 아무것도 없다 (nothing)를 말합니다.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은 최근 “차라리 그 때(1993년 영변 핵  위기 때) 평화조약에 싸인하러 평양에 갈 것을 그랬다. 미국은 오히려 더 큰 양보를  해 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정일 시대에 이미 실전 배치된 핵ICBM으로 미국과의 협상에 넌더리 난 조선은  앞으로 더욱 세차게, 더욱 거칠게, 미국을 몰아붙일 것입니다. 조선의 핵미사일은 이 제 괌이 아니라 하와이 근처로 발사될 것입니다.  

핵무장국(보유국과 개념이 다름. 핵보유국은 방어용이고 핵무장국은 선제공격과 방 어가 동시에 가능한 개념임)끼리의 핵 전쟁은 없습니다. 지금 조-미 간의 시끄러운  전쟁놀이는 단지, 평화협상의 문구 때문에 다투는 것 뿐입니다. 글자 한 자라도 자국 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하여...ㅋㅋ 

최근 김정은 위원장이 비밀리에 판문점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효자인 김정 은 위원장이 아버지의 꿈(조-미 평화협정의 판문점에서의 체결)을 이루려는 염원 때 문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4년 전 최고 지도자 동지에 취임하자마자, 판문점을 방문 했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휴전협정 받은 책상을 어루만졌습니다.  

독일 대통령 말대로 “통일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통일독일연방제와 중국식 통 

46 | 311호•20179월  

일이 혼합된)  사무국장님! 

감옥에서 온 편지 ● 

양심수들을 위해 고생하신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9월 8일 출소하는 이병 진 님에게 “고생 많이 하셨다. 조국은 기억할 것이다”라고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2017. 9. 1. 

전주에서 신언택 드림 

(신언택 님이, 낯선 언어를 사용하셔서 조금 애먹었습니다.^^ 그 보상 받는 셈치고 내친 김에 직위, 명칭,  수식 관련 세 단어를 수정했습니다. 신언택 님의 양해가 있으시리라 믿습니다.-사무국)

이영수 님의 편지 

안녕하세요. 

춘천교도소 이영수입니다. 

이 곳으로 이감되어 온지 두 달이 다 되어 갑니다. 푹푹찌는 듯한 무더위가  엊그제인데, 벌써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냉기가 감옥 안을 휘감아 몸을 움츠 러들게 합니다. 계절의 순리는 피해갈 수 없는 듯 합니다. 

지난 해 5월 구속 수감 이후, 면회도 와 주시고 재판을 방청하시며 ‘힘내라’ 고 사기를 북돋아 주고 응원을 해 주셨던 류제춘 전 사무국장님께 감사 인사 도 전하지 못하였는데 그만 두셨다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늦었지만 감사의 인 사를 전합니다. 

또한, 권오헌 회장님의 병환으로 어려운 환경임에도 새롭게 양심수후원회  살림을 맡으신 최동진 사묵구장님께도 응원의 인사를 보냅니다. 

지난 8월 26일, 힘든 노구를 이끄시고 어렵게 이 곳으로 면회를 와주신 양 원진 선생님과 민병수, 윤기하, 정용선 선생들께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 를 전합니다. 또한, 16일, 25일 면회를 와준 김삼문 동지에게도 감사의 인사 를 전하며, 양심수의 소리를 전한 민통선 평화방송 여러분께도 감사인사를 드 립니다.  

이제 정세는 바야흐로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 는 듯합니다. 이의 결과에 따라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겠지요. 정세가 이 러함에도 촛불민심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보수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근 본문제 해결을 회피하고 자기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정권의 한 

양심수후원회 소식 | 47 

감옥에서 온 편지 ● 

계를 너무 쉽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난날 개혁정책의 실패로 민심이반을 초 래하였던 이른바 ‘민주정권’ 시기의 교훈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8월의 잦은 궂은 날씰르 뒤로하고, 이곳의 날씨는 청명한 가을 하늘입니다. 이제 양심수석방을 외면하는 정권의 선의가 아닌, 민중의 힘으로 자유의 공 기를 다시 숨 쉬는 그 날을 기다려 봅니다. 

2017. 9. 3 춘천에서  

이영수 

신언택 님의 편지 

권오헌 명예회장님, 김혜순 회장님, 최동진 사무국장님 그리고 어둔 암흑 속에서 피 눈물 흘리고 있는 양심수 동지들! 안녕하십니까! 

폭염이 끝나고 쌀쌀해지며, 반갑지 않은 긴 추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조선민족의 평화통일은 멀지 않습니다. 독일 대통령 말대로 <갑자기> 옵니다. 천안 함 사기사건이 터진 2010년, 화가 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해 10월 10일 핵잠수 함용 화성10호(무수단-X)를 전격공개하자, 당시 독일 대통령은 남한에게 “잠자다 도 둑만나듯이, 갑작스러운 통일(ein plötzliche Unifikation)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 고, 이것을 박근혜는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하여 <통일은 대박>이라고, 외국원수 앞에 서 발표하여, 유럽 정상들에게 “Dummkoft (돌대가리)”라고 비아냥 당했습니다. 2010년 오바마 때, CIA FBI 등 미국의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미정보위원회  NIC-세계의 정보를 취합, 미국의 중장기 전략을 예측하여 백악관에 보고하는 정부  조직-는 세계 전망 보고서인 <2025 세계적 추세 Global Trend 2025>에서 “2025년 에는 미국의 패권주의는 붕괴되고, 중국-러시아-미국의 3극체제가 되며, 개발도상 국(베트남, 인도 등)의 중공업화로 유럽, 한국, 일본의 전통 제조 산업(자동차, 조선  등)이 붕괴되고, 조선의 핵군사력으로 미국-일본의 패권이 무너져, 한반도는 세계 최 초의 이상한 형태의 연방국가(Bundesrepublik)가 탄생할 것이며, 핵보유국 중국, 조 선, 러시아 동맹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 서해에서 남중국해 싱가포르 앞 바다까지의 아 시아 패권을 중국에 빼앗길 것이다”라고 보고하였고,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한반도 에서 독일식도 중국식도 아닌, 세계 최초 이상한(느슨한) 형태의 연방공화국이 탄생한 다”고 예측된 점입니다.

48 | 311호•20179월  

감옥에서 온 편지 ● 

지금 조-미는 1:1 비밀협상 중, 치고 받는 치킨 핵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 때부터의 지루한 비밀협상의 문구(文句)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남한의 머저 리들이 생각하는 평화협상보다 더 중차대한 비밀협상입니다. 오바마 정권 말기 때 미 국무장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선의 요구가 너무 엄청나서, 서류를 읽다가 다리 가 후들거렸다> 

조선이 핵미사일을 최근 미국 본토를 향하여 태평양으로 발사하자, 트럼프는 <모든  카드가 책상 위에 올라와 있다>고 말합니다. 의역하면 <미국은 핵ICBM 무장국인 조 선을 이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이미 늦었다>는 뜻입니다. 

트럼프의 허풍 발표 후, 클린턴에 이어 당시 국무장관으로 평양 방문한 울브라이트  여사는 <클린턴에게 더욱 강력하게 평양방문을 권유 안 한 것이 지금은 너무 후회스 럽다>고 말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때도, 평화조약이 체결된 1973년 그 해에는 미국과 북베트남은 더욱  치열하게 전쟁을 하였습니다. 지금처럼 평화조약 문구 가지고 치킨게임을 하였고,  평화조약이 체결되자, 1974년의 뗏(Têt Nguyên Ðan 설날) 이후, 미군은 동호이 (Dong-Hôi) 전투부터 의도적으로 패전을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사드(THAAD)는 일본 방어용입니다. 지구본을 보면 알겠지만 조선의 핵ICBM은 태 평양 건너는게 아니고, 북극의 Z기류를 타고 알라스카 거쳐 하와이, 시카고, 시애틀,  LA, 콜로라도, 뉴욕으로 날아갑니다. 

사드는 일본을 향하는 중국 핵미사일 요격용입니다. 그래서 중국이 롯데, 현대 등  한국을 혼내는 것입니다. 이제 성주에 3개가 추가로 배치됐으니 더 큰 보복을 당할 것 입니다. 중국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국이 직접 손 봐줘야 해>  

핵미사일은 발사 2분 후 마하 15~25의 초고속으로 대기권을 벗어 납니다. 발사 2 분 내에는 해미사일이 조선 영공에 있습니다. 이것을 공격하면 국제법상 선제공격 선전포고입니다. 괌 공격 시에도 발사 2분 후 미군이 사드요격준비도 하기 전에, 1분 에 1,000Km 이상 날아가는 핵ICBM은 벌써 제주도 지나서 오끼나와 영공을 날고 있 습니다.  

사드는 마하2.0의 핵ICBM을 요격 못합니다. 그래서 미의회는 “사드의 요격율이 너 무 낮아서, 전쟁용으로 무의미하다”며 추가 생산예산을 전액 삭감한 것입니다. 미국 은 쓰레기 무기 사드를 조선을 이용하여 남한에 재고 털이한 것입니다. 

핵무기는 돈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고농축 우라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미  FOBS급 다탄두 ICBM이 실전 배치됐는데 미국의 UN을 통한 경제제재는 아무 의미 가 없고 단지 미국의 책임 면피용 외교 제스처일 뿐입니다. 미국이 UN 안보리를 자꾸  소집하자, UN 안보리 의장은 미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제재안이 만들어져 

양심수후원회 소식 | 49 

감옥에서 온 편지 ● 

시행되기도 전에 또 핵미사일이 발사되는데, 북 경제 제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미 사일 발사 때마다 새로운 경제제재안 만들거냐?>  

조선은 세계1위의 우라늄 자원(2위는 남아프리카공화국, 3위는 인도)을 가지고 있 습니다. 우라늄 원료구입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조-미간의 치킨게임이 막바지에 왔고, 더욱 심해지면 화성15, 목성1호도 공개될  것입니다. 최근 주한일본대사관은 군산항을 둘러보고 군산시청을 방문하여 유사시 남 한의 일본인을 군산항에서 일본 본토로 피난할 수 있게 군산항을 이용할 수 있게 협조 를 부탁하였으며 주한미군은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유사시에 대비한 피난훈련을 하고  있으며 서울주재 각국 대사관들은 한국어를 번역한 <긴급피난장소>를 인쇄한 프린트 물을 배부하고 있다는 MBC 9월 9일 8시 뉴스입니다. 일본은 유사시 일본해군 수송 선으로 남한의 일본인을 수송할 계획이라고 발표합니다.  

1953년 7월,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지 64년이 되도록 휴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바꾸지 않았던 미국이었고 세계 역사상 가장 길었던 휴전기간이었습니다. 

양심수 여러분! 쌀쌀해지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최후의 승리를 향 하여~ 앞으로!  

2017. 9. 9 

전주에서 신언택 드림 

김덕용님의 편지 

양심수후원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권오헌 명예회장님은 어떠하신지 궁금합니다. 소식지에라도 자주 근황을 올려주시 기 바랍니다. 

올해 반드시 통일대회합의 대표단으로 평양에 가실 것이라는 편지를 쓴 적이 얼마 전인데 명예회장님의 건강 안부가 걱정인 지금 상황이 매우 안타깝기만 합니다. 꼭 회 복되시길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9월 13일 대구지법 본원에서 열릴 저의 5/6 승급결정 취소소송이 10월 18일 오전  10시 30분 본원 별관 303호로 연기되었습니다. 

대구교도소가 재판기일 일주일 전에 갑자기 9월 13~15일 사이 대구교도소의 순회

50 | 311호•20179월  

감옥에서 온 편지 ● 

점검이 있다는 이유로 기일 연기신청을 했고 재판부는 원고의 동의 과정도 없이 연기 를 통보하였습니다. 법무법인 향법의 오현정 변호사님은 피고의 연기 사유신청에 증빙 서류도 없는 상태에서 연기를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 

2/3 승급 소송에서 중요한 확정판결을 이미 받았고 패소의 원인인 작업신청유무를  5/6 소송에서는 쟁점이 되지 않습니다. 5/6 승급 심사기간 동안 2/3 승급 소송 중이 었고 소송 중 저의 작업의지와 요청을 대구교도소가 거부하였다는 다툼 중이었으니  5/6 소송에서는 저의 작업신청 여부가 큰 문제가 안될 것입니다. 더구나 소송 중인 올 해 초에 저는 직업훈련 신청서까지 제출을 하였습니다. 2/3 소송의 확정 판결로 인하 여 5/6 소송은 소송이 오래 끌지도 않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출소하신 이상호 님은 지난 중에 경비처우급 승급 거부 관련 민사소송을 서 울에서 처음으로 진행하시었다고 합니다. 이상호 님은 저의 소송에 증인으로 서시겠 다는 뜻을 전달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막 출소하셔서 바쁘실텐데 편지로나마 감사인 사 드립니다.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트럼프의 가랑이 밑을 기고 짖기까지 하 고 있으니 대통령을 이해해야 한다는 글을 퍼 나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전제하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사고입니다. 한국은 소위 진보라고  자처하는 부류들도 식민지 근성이 이미 뼈 속까지 박혀있는 나라이구나 하는 것을 절 실히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사드배치, 비정규직 정규직화 약속파기 등의 기만을 보며 이명박근혜 정권과 한 치 도 다를 바 없는 정권이라는 민주노총의 탄식을 한겨레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이제 출범 5개월 만에 봇정권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다는 평갈르 받는 것을 보니 기 대를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수위 과정이 없어서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더니 이제는 양심수 석방을 하 면 재벌도 풀어달라고 한다는 이유를 대며 청와대는 미리 연막을 핀다고 합니다. 어쩌 면 문재인 정권에서 양심수 석방은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남은 9개월 동안 느긋하게 지내기로 했습니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약속을  믿고 희망고문을 당한 수많은 분들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가족들에게도 기대하지 말고 원래대로 지내라는 당부의 편지를 쓸 계획입니다. 그래도 이제 곧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날이 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모두 힘 내시고 건강하십시오. 

2017.9.13. 

대구교도소에서 김덕용 올림

양심수후원회 소식 | 51 

1. 만사사통(萬事舍通),  모든 일은 사소(舍掃)로 통한다. 

감옥에서 온 편지 ● 

김경용 님의 편지

내놓으라 하고, 주말에는 이불도 달라하고, 반바지 며 수납함이며 필요한 것들 구해다 주고... 사람이  워낙 부지런하고 깔끔하기도 했지만 두 분 동지의  

징역형이 확정된 기결수는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봉제, 목공, 식품 등 공장 출역을 나가기도 하고  관용부라고 교도소 운영을 우한 취사, 영선, 원예,  이발 등 일을 하기도 합니다. 

사소(舍掃)도 이 관용부 가운데 하나인데 사동(舍洞) 청소부(淸掃夫)를 줄여서 그렇게 부르지 싶습니다.  각 사동마다 1~2명 사소가 배치되어 수용자의 일상 을 도와주지요. 삼시세끼 배식하고, 하루 세 번 뜨거 운 물 넣어주고, 구매물 나눠주고, 신문 배달하고 아 침마다 쓰레기 걷고온갖 허드렛일을 다하는 사동 의 집사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다보니 ‘사소’ ‘사소님’ ‘사소형’ ‘사소 이 방이 요’ 찾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아마 한 날 한 시에 전국의 사소가 일손을 내려놓으면 모든 교도소 가 엉망이 될 겁니다. 그는 때로는 수용자 사이에 연 락을 전해주는 비둘기가 되기도 하고, 또는 옆방으 로 책, 신문, 간식을 건네주는 택배기사가 되기도 하 고, 한 번씩은 교도소 내의 이런저런 소식을 알려주 는 통신원이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사소를 잘 만나야 생활하기가 수월하지요. 무엇보다 그의 손에는 밥주걱이 쥐어져 있고 그의  두 발은 교도소 안을 자유롭게 오가니까요. 

“해 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줘라” 

제가 이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사동에 먼저  와 있던 한상균 위원장님과 김성윤 목사님이 사소에 게 단단히 부탁하였습니다. 

사소는 저에게 “김동지”라고 살갑게 부르며 이것  저것 돌보아 주었습니다. 세탁기 돌리겠으니 빨래  

특별 당부가 있어서 더 마음 써준 것이겠지요.  사소 덕분으로 낯선 곳에 새롭게 적응하는 수고로 움을 많이 덜었습니다. ‘한가할 때는 처자이지만 어 려울 때는 동지’라고 바깥세상과 단절돼 홀로 사방  벽하고만 마주하고 있는 이 곳에서는 동지의 정이  더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맘 편히 이야기도 나눌 수  없고 마주 앉아 따뜻한 밥 한끼 먹을 수 없지만 곁방 에 동지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 지고 뱃심이 든든해집니다. 

2. 지난 달 올린 김남주 시를 읽고 자신의 젊은 시 절을 떠올린 분이 꽤 계시리라 짐작해 봅니다. 30여년 전 우리는 김남주 시에 곡을 붙인 ‘노래’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부르며 거리로 나가 돌을  들고 화염병에 불을 붙였고, 교문 앞 막걸리 집에 둘 러앉아 그의 시 ‘전사1’과 ‘학살’을 낭송하며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길에 한 생을 ㄴ바치기로 결의를  다졌습니다. 김남주는 징역을 살면서 많은 외국문 학을 읽고 그 중 적지 않은 작품을 번역하여 감옥 밖 으로 내보냈습니다. 칠레의 시인 네루다(Pablo Neruda) 도 그 가운데 한 명입니다. 『창작과 비평』에 실린 아 홉 편의 네루다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았던 김남주는  네루다의 시를 원어로 읽기 위하여 감옥에서 스페인 어를 공부하고 번역까지 합니다. 그가 번역한 네루 다의 시는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와 『은박지에  새긴 사랑』에 실려 출판되었습니다.  

그 시집을 통하여 네루다를 알게 된 저는 김남주 가 그러했듯 네루다와 네루다의 시 그리고 네루다가  시에서 노래하는 칠레의 역사와 칠레 민중을 사랑하 

52 | 311호•20179월  

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온 편지 ●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장대비 맞으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호송차 밖으로  속세의 풍광들이 스쳐갔습니다.” 

동지 한 분이 이감 가서 보내준 편지 한 구절이 김 남주가 이송가면서 쓴 시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 가을에 나는 

김남주(1946~1994)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전옥일까 아니면 대구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 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 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다리 

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주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을  돈다 

저 건너 마을에서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3. 이태 전 2015년 봄에 대학로의 지하 소극장에 서 오랜만에 연극 한 편을 보았습니다. 

<일 포스티노>라는 제목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진  칠레 작가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와 우편배달 부』를 연극으로 올린 것입니다. 

오래 전 소설에서 읽은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 라 읽는 사람의 것이예요”라는 우체부 마리오 히메네 스가 네루다에 했던 구절은 오래 기억에 남았었지요.  

연극 막바지에 무대 위에서 외치는 “아옌데 만세!!  네루다 만세!!”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아집과 독선, 오만과 후안무치의 검은 구름이 세 상을 뒤덮고 그 어둠이 언제 걷힐지 기약할 수 없던  그 때, 들려오은 젊은 배우들의 외침이 한 줄기 빛으 로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목소리 높여 만세를 부 르는 젊은 그들이 대견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자신들이 외치는 아옌데 정권의 탄생과 전복의 역사 와 교훈을 알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 칠레는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하여 사 회주의 정권을 세웠습니다. 제3세계 어디나 그렇지 만 칠레도 진보적인 좌파정당들이 선거에서 연합전 선을 펼치지 않으면 압도적인 표차로 대패할 것이 틀

양심수후원회 소식 | 53 

감옥에서 온 편지 ● 

림없었고 연합전선을 앞장서 추진한 정당은 공산당 이었습니다. 아옌데가 인민연합의 위력한 후보로 부 상하자 스스로 후보를 사퇴하고 아예데 지지를 호소 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 칠레 공산당 후 보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였습니다. ‘산티아고 외곽의  

빈민촌 주민들, 외딴 지방의 광부들, 사막의 구리광 산 노동자들, 양 팔에 아이들을 안고 몇 시간이나 네 루다를 기다려 준 농촌의 아낙네들 이 모든 사람들을  

향해 네루다는 연설을 하고 시를 낭송했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 소수의 사람들만이 감지하 는 세계에 익숙한 귀를 가진 독특한 이 시인에게 우 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네루다와 함께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절친한 벗 이었던 스페인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네루다에 대 한 평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네루다의 <시>를 소개합니다. 김현 균 번역의 『네루다 시선』(지만지)에 실린 것입니다. 

시 

파블로 네루다(1904~1973) 

그래 그 무렵이었다...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물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흩어지고 

열리는 것을 

행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들쑤셔진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 풀려났다. 

2017. 9월 25일, 춘천교도소에서 김경용

54 | 311호•20179월  

2일 

이런 일이 있었어요 

2017년 8월 활동 

으로 별세하다. 양심수후원회 이름으로 조화를 보 

●권오헌 명예회장 서울대병원 항암통원치료 첫 검 진. 복용약(이레사) 적용이 잘되어 새로 1개월분 약  처방 받음.(김호현, 맹도영, 맹영선) 

3~4일 

●양심수 면회, 이정태 운영위원, 최동진 사무국장 이 전주, 광주, 대구의 신언택, 이병진, 김홍렬, 이 미숙, 김기종 님들을 면회, 장기수 서옥렬 선생님 댁  방문 및 광주전남 송환대책위 일꾼들과 대담. 

5일 

●양심수석방 추진위원회 주최 ‘양심수 없는 나라 로, 동행’ 토요일 행사 참여(김혜순, 김재선, 김래 곤, 유치자, 박희성) 

●양심수 면회,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준 혜님을 정용선 회원님이 면회 

6일 

●유엔안보리, 지난달 북에서 발사한 대륙간탄도미 사일(ICBM) 화성 14형(4일, 28일)과 관련 대북제재  결의 2371호 채택하다. 

7일 

●대구에 살고 계시던 비전향장기수 이준원 선생님 이 이날 오후 2시 30분 오랜 옥고의 후유증과 노환 

냄.(후원회소식 310호) 

8일 

●통일부(정부청사 후문) 앞에서 민가협, 양심수후 원회, 통일광장, 범민련 남측본부, 사월혁명회, 한 국진보연대, 전국여성연대, 민자통, 환수복지당 등  사회단체 공동으로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촉구기 자회견’을 열다.(후원회소식 310호) 

●대구광역시 드림병원 장례식장에서 ‘민족통일열 사 이준원 선생 영결추도식’이 열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후원회소식 310호) 

9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양심수석방 추진위원회 주 최 ‘적폐청산 양심수석방 국민청원 보라색 엽서 청와 대 전달식 기자회견’을 열다. 정진우 공동추진위원장 (NCCK인권센터 소장)의 경과보고, 공동추진위원장 

양심수후원회 소식 | 55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정혜경 민주노총 부 위원장 등 양심수석방 촉구발언. 공동추진위원장인  조순덕 민가협 상임대표와 최진미 전국여성연대 상 임대표가 기자회견문을 낭독했음. 이에 앞서서 양심 수 가족인 정지영님(전 통합진보당 경기도당위원장  김홍렬 부인)의 석방촉구 편지 낭독이 있었음. 마치 고 보라색 엽서 등 국내외인사 15,000명의 청원서 

를 청와대에 전달했음.(김혜순, 이정태, 권오헌) ●박정숙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께서  

101세 생신을 맞으시어 김영옥, 권낙기 선생님과 박 윤경 회원님 등이 중랑구 시립노인전문요양원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생신을 축하해 드림. 선생님 만 수무강하시고 통일세상 꼭 보시길 바람.(후원회소식  310호) 

10일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민가협 1033회 목요집회’를 열다.  권오헌 명예회장의 여는 말(광복절 사면 촉구,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 채택 규탄,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망언과 맥매스터의 ‘예방전쟁론’ 규탄 발언 등),  조영건 구노회 회장의 광복절 사면 촉구 발언에 이어  최근 출소한 전 코리아연대 이미숙 활동가의 출소 인 사말이 있었음. 

●인천 사랑병원으로 비전향장기수 박종린 선생님 을 문병했다. 선생님께서는 혈변 등으로 며칠 전에  

입원하셨는데 진단 결과 대장암 초기로 나타나 투 병 중었다. 안색이나 다른 이상 증세는 보이지 않으 셨고 수술을 하지 않고 통원치료를 하시기로 했다고  하심. 선생님은 11일 퇴원하셨다. 빠른 쾌유를 빈다.  (권오헌) 

12일 

●양심수 면회,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최민  님을 정용선 회원님이 면회 

●양심수 석방, 수원구치소에서 인덕원 사거리까지 의 촉구 행진에 이미선 님, 사무국 동행 

14일 

●양심수석방 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지난 7월 13 일부터 시작된 ‘양심수 없는 나라로, 동행’이 오늘 26 일차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100여 명이 광화문 7번  출구 앞에서 행진에 앞서 6.15남측위 여성본부 권오 희 상임대표의 결의 말씀을 듣고 청와대 쪽으로 행진 하다. 각기 양심수 이름이 적힌 피켓과 구호 등이 적 힌 피켓을 들고 청와대 분수대 못 미친 곳까지 행진,  정리집회를 하다. 권오헌 동행 명예단장의 여는 말,  조양원 부단장의 경과보고, 조순덕·조영건 공동단 장의 결의 발언, 일본에서 온 ‘한국양심수를 지원하 는 전국회의’ 이시이히로시 사무국장의 연대 발언,  ‘열자 0.75평 서포터즈’의 문예공연 등으로 모두 마 치다. 김호현 전 후원회회장의 주선으로 민가협, 유 가협, 구노회, 후원회 여러분 식사 함께 하다. (김호 현 김재선 류제춘 권오헌) 

15일 

●서울시청 8층 다목적실에서 6.15 남측위 주최로  ‘광복 72주년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8.15 민족통일대회’가 열리다.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 의장의 기념사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 김

56 | 311호•20179월  

종훈 새 민중정당 창당준비위 대표, 김창한 민중연 합당 대표 등이 축사를 하다. 이어 신필영 6.15미국 위원회 대표위원장의 연대사, 김주열 6.15노동본부,  한국노총위원장, 김삼열 독립유공자 유족회 회장.  김성원 6.15청년본부 대표 등 연설. 뮤지컬 1946화 순 공연, 기타영상 상영,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낭독 등으로 모두 마치다. (권오헌 외) 

●서울광장에서 각 부문·지역·단체 대회를 마친  양노총과 청년·학생·단체 통일선봉대를 비롯한  16개 지역단체 참가자들이 함께 한 가운데 ‘주권회 복과 한반도 평화실현 8.15범국민대회’가 열리다.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의 개회사,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 의장의 격려사, 앙심수석방추 진위원회의 ‘한상균·이석기 석방’ 영상과 공연, 재 일한국청년동맹 대표의 연대발언, 노래패 우리나라  

공연 등이 이어지다.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 대행 등 각계대표들이 공동으로 결의문 낭독하는 것 으로 대회를 마치다.  

이어 2만여 참가자들은 빗속에 1000여 개의 북과 빨 간색 우산을 받쳐 들고 ‘주권회복 한반도 평화실현을  위한 인간띠잇기 평화행동’에 나서 광화문광장 쪽으 로 행진을 하다. 참가자들은 미대사관 앞으로 행진 하면서 ‘No War, No Trump'라고 쓴 현판글씨의 자 동차를 선두로 ’전쟁무기 필요 없다 다 싸들고 나가 라!‘ 등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다. 코리아 국제평화의 날 국제참가단, 광복 72주년 재일한청고국방문단,  김천·성주 주민들도 함께 했다. 1만여 시위자들은  전쟁반대, 사드반대, 미국반대를 외치며 인간띠잇기  평화행동을 마치다. (김영식, 박희성, 양원진, 강태 희, 홍위은, 소수영, 나순석, 노혁, 도은주, 김현수,  김래곤, 이경원, 유영호, 전환식, 류경완, 이정태, 이 

재훈, 김삼석, 정현주, 최동진, 권오헌 외) ●마포 합정동 음식점에서 통혁당 사건으로 20년  옥고를 치르신 오병철 선생님 82세 생신 축하모임 

이런 일이 있었어요•2017년 8월

이 옴시롱감시롱(으뜸일꾼 김길자) 주관으로 있었 다. (김호현, 양호철, 김길자. 정훈철, 신현부, 노혁,  도은주, 권오헌 외 함께) 

17일 

●태평로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한반 도 전쟁도발음모 분쇄를 위한 재야사람들 기자회 견’이 열리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고은 시 인, 김종철 녹색평론 대표, 김영호 전농의장 등 전 쟁반대 결의 발언 등이 었었음.(권오헌, 박희성)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민가협 1034회 목요집회‘를 열다.  권오헌 명예회장의 여는 말(문재인대통령 취임 100 일 기자회견에서의 ’레드라인‘ 규정 등 규탄. 21일 부터 감행될 을지프리덤가디언 전쟁연습 중단 촉구  등), 불교인권위 진관스님의 양심수석방 촉구발언,  김련희 평양주민이 나와 사회주의 조국과 가족 품으 로 돌려 보내줄 것을 촉구하는 발언 등이 있었음. 

18일 

●양심수후원회 지로 결재통장(SC제일은행에서  국민은행으로 바꿈) 교체를 금융결재원에 신청하 다.(김혜순, 권오헌) 

19일 

●박윤경 회원, 중랑구 시립노인전문요양원으로 박 정숙 선생님 면회. 화상전화로 권오헌과 박정숙 선 생님 통화. 선생님 밝고 건강하신 모습이었다. 언제 나 건강하십시오. 

20일  

●6.15 통일산악회, 충남 홍성 소재 용봉산(381m)  등반하다. (후원회소식 311호/통일뉴스_손일순) 

양심수후원회 소식 | 57 

21일 

●광화문광장 세종 

대왕상 앞에서 한국 

진보연대, 민주노총,  

범민련 남측본부, 양 

심수후원회 등 40여  

단체로 구성된 전쟁 

반대 평화실현 국민 

행동과 민중총궐기투 

쟁본부 공동으로, ‘한 

미 전쟁연습 중단촉구 100인 기자회견 및 평화행 동’이 진행되다.(김래곤, 최동진, 박희성, 권오헌) ●조계사 옆 우정국 앞에서 불교적폐산을 위해 단식 투쟁하고 있는 ‘명진스님 무기한 단식정진’ 현 장을 방문 격려하다. (권오헌) 

23일 

●서초동 법원 앞에서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 와 광주 시민사회단체 공동으로 ‘강용주에 대한 18 년 보안관찰 중단 판결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열 다. 이강 광주시민사회단체 대표,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등 보안관찰 법 폐지와 강용주 보안관찰중단 촉구 발언 등을 하 다. (최동진, 권오헌, 이창희) 

●서울중앙지법 형사 4단독 조광국 판사 심리로 

‘위헌법률 심판제청’ 심판기일(재판)이 진행되다.  (권오헌, 이창희) 

24일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민가협 1035회 목요집회’가 열리 다. 권오헌 명예회장 여는 말, 신학림 전 언론노조  간부의 결의 발언 등 

25일 

●민족해방애국전선(민애전-이른바 남한조선 노동 당 조작사건) 사건으로 오랜 옥고를 치른 최호경 씨 가 이틀 전 변사체로 발견돼 오늘 부검을 마치고 송 파 경찰병원 장례예식장에 빈소를 마련하여 양심수 후원회에서 조화를 보냈고, 권오헌 명예회장이 문상 을 다녀왔다. 빈소에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 열심히  

옥바라지를 했던 부인과 아들(민혁)이 손님을 맞았 다. 민혁은 어려운 조건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고시 에 합격하고 현재 군법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다한다.  최호경 씨의 죽음은 바로 외세와 분단이란 사회적 조 

건의 비극일 수 있겠다. 양심수후원회 회원이기도  한 변의숙, 이승미 회원 등 민애전 사건 관련 동지들 이 빈소를 지켰다. 삼가 명복을 빈다. 

26일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월례 강좌 ‘실현되지 않은 정의, 일본군 위안부 해결을 위 하여’ 라는 주제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 향 상임대표의 2시간에 걸친 열변을 토하는 강좌가  

있었음. (소식지311호) 

27일 

●대구 교도소 이상호 양심수 출소 (소식지311호)

58 | 311호•20179월  

29일 

●보도들에 따르면 이북은 29일 5시 57분께(한국 시간) 일본 상공을 통과하는 탄도미사일을 발사.  2700km 날아가 태평양 해상에 떨어졌다고 한다. 고 도 550km이니 일본 영공도 아니었다. 또한 8월 29 일은 107년전 강도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날이 다. 일본에겐 그 죄를 묻은 격이기도 하고 태평양상 의 미군의 침략기지 타격 의미도 있다고 하다. 

30일 

●권오헌 명예회장이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처방에  따른 항암치료 점검하는 날이었음. 28일에 있은 가 슴단층 촬영과 30일 혈액검사, X-Ray 검사 등으로  이날까지 복용약물의 적용 여부와 그 효과를 알아보 

는 점검이었음. 대체적으로 나쁘지 않아 앞으로 3개 월 뒤에 병원에 오라했고 3개월분 약 처방을 했음.  (김호현, 맹도영, 맹영선) 

31일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민가협 1036회 목요집회’가 열리 다. 권호헌 명예회장의 여는말(국정원 적폐청산 중  가장 중요한 이석기 내란음모조작사건, 북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사건 진상조사 등 촉구발언. 29일  미사일 발사와 관련 문재인 대통령의 일본 아베와 통 화 대북제재 강화를 규탄). 27일 출소한 이상호 양심 수 출소 인사말 등이 있었음.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 조에홀에서 평 양주민 김련희 송환촉구모임 주최로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출판기념회가 열리다.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통일광장, 민변, 기독교인  등 각계인사 150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이종문 한국 진보연대 집행일꾼 사회로 지난해 3월 김련희 씨가  배트남대사관으로 망명요청을 할 때 함께 했던 한국 

이런 일이 있었어요•2017년 8월

기독교평화연구소 문대골 목사님. 권오헌 민가협양 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김련희 씨 문제를 처음으로 전 면 보도했던 <한겨레신문> 허재현 기자. 김련희 씨를  법적으로 보호하고 송환을 촉구해온 장경욱 변호사.  대구 송환대책위 대표로서 김련희 씨 정착과 활동을  실질적으로 도왔던 최봉태 변호사 등이 각기 다른 위 치에서 김련희 씨가 왜 송환되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 들의 임무인지를 말해주었다. 이어 김련희 씨가 감옥 에서 가족을 그리며 쓴 시에 곡을 붙여 노래패 ‘우리 나라’가 노래를 불러 주었다.  

참았던 설움에 눈물을 보인 김련희 씨는 마지막 인사 말을 통해 이렇게 따뜻한 남쪽 동포들이 많이 있어  견디어 내고 이제는 힘을 얻고 사회주의 조국과 그리 운 가족 품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최선을 다하 고 있다며 감사를 표했다. 중간에 <도서출판 6.15>  김영란 편집장의 서평이 있었고, 맨 마지막에 김혜 순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이 꽃다발을 안기며 오 늘 행사 주관자로서의 인사말을 하는 것으로 출판기 념회를 마치었다. (김호현, 김혜순, 소수영, 홍휘은,  유영호, 유치자, 김래곤, 최동진, 권오헌, 류제춘, 김 순영, 김창수, 김광태, 양원진, 강태희, 김영식, 박희 성, 전환식) 

양심수후원회 소식 | 59 

재정 보고 | 7월(재보고) 

※ 수입란 : 7월 오류입금 250만원(권오헌 선생 개인통장으로 입금되었어야 할 금액)이 7월 이내  반환(지출)처리 되지 않았음에도 수입으로 잡지 않았음. 결과, 통장 시제가 잘못됨.

단위 : (원) 

수입 내역 수입 총액 13,080,318 현금 50,000 

CMS 2,085,000 

미주지부 1,807,031 

SC지로 90,000 

농 협 870,000 

하 나 30,000 

국 민 560,000 

오류입금 2,500,000 

회비수입 계 7,992,031 

전월이월 5,088,287 

지출 내역 지출 총액 6,566,818 양심수 관련 양심수영치금, 소식지발송, 면회사업 등 754,000 출소장기수 관련 만남의집 운영비, 출소장기수관련 지원 1,181,170 소식지 관련 소식지제작 및 발송(309호) 1,176,788 

사무국장 활동비 1,200,000 

사무국 활동 

전 사무국 퇴직금, 적립금, 보험 1,368,330 

연대사업 기자회견, 집회, 연대단체분담금 등 330,000 교통 통신 인터넷 전화 및 통신요금 등 109,090 회원사업 및 운영 회원경조사비, 회원사업, 이체수수료 등 447,440 김련희 특별사업

7,992,031(수입) - 6,566,818(지출) + 5,088,287(전월이월금) 차기 이월액 6,513,500 

열심히 회비를 내주시는 회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로로 회비를 내주시는 회원님들께 부탁드립니다.  

•‌은행납부 시 지로용지에 성명을 정확하게 기재해주시기 바랍니다.  

•‌보내신 분 성함을 확인할 수 없어 소식지에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60 | 311호•20179월  

재정 보고 | 2017년 8월 

단위 : (원) 

수입 내역 수입 총액 12,631,277 현금 200,000 

CMS 2,225,000 

미주지부 1,276,547 

SC지로 230,000 

농 협 455,000 

하 나 30,000 

국 민 30,000 

대구양심수 40,000 

회비수입 계 6,117,777 

전월이월 6,513,500 

지출 내역 지출 총액 8,150,830 양심수 관련 양심수영치금, 소식지발송, 면회사업 등 883,990 

출소장기수 관련 만남의집 운영비, 출소장기수관련 지원 876,560 

소식지 관련 소식지 제작 및 발송

사무국 활동 상근일꾼 활동비(활동비, 상여금, 보험) 1,300,000 

퇴직적립금, 보험(과오납 상태) 187,750 

연대사업 기자회견, 집회, 연대단체분담금 등 487,000 

교통 통신 인터넷 전화 및 통신요금 등 98,800 

회원사업 및 운영 회원경조사비, 회원사업, 이체수수료 등 3,779,730 

김련희 특별사업 537,000

6,117,777(수입) - 8,150,830(지출) + 6,513,500(전월이월금) 차기 이월액 4,480,447 

• 수입란 : 대구양심수 (40,000)은 입금 대여공간. 8월 송금 못하여 통장시재상 수입 잡음. • 지출란 : 소식지 8월분 인쇄비, 발송비 8월에 지출 못해 공란, 9월에 두 번 정산 예정. • 지출란 : 오류입금(250만원)은 7월 수입 잡힌 바 있어 회원사업 지출로 처리함.  • 지출란 : 3대보험료(8, 7월)분 단체로의 명의변경 과정 거쳐 반환신청 예정.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 점, 회원 여러분들께 사과드립니다. -사무국) 

양심수후원회 소식 | 61 

후원회원 가입 및 후원금 자동이체(CMS) 신청해 주세요 

노조나 단체이름으로도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 (02)874-4063 ■전송 (02)888-4470 010-4828-7957 

E-mail : yangsimsu0@gmail.com 

서명 

생년월일

 

전자우편

 

휴대폰


 

성 명 

소 속 

전화번호 

주 소 

회비약정액 매월 1만원 매월 2만원 매월 3만원  매월 5만원 기타 ( )원 

계좌번호 |  

이 체 

은행 | 


 

예금주 |  

출금일자 매월 10일 매월 20일 

위 기재하신 주소로 매달 양심수후원회 소식지를 받아보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위 기재하신 전화번호로 강좌나 행사안내를 받아보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후원을 하시면 기획재정부 소득공제 규정에 의거하여 연말 소득공제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개인신상정보의 비밀은 철저히 지킵니다. 

•후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민가협양심수후원회 http://www.yangsimsu.or.kr 

 ● 회비를 내주신 분들 | 2017년 8월 

강대준 10,000 강순례 10,000 강순영 10,000 강순희 50,000 강응길 10,000 강태희 10,000 강호민 10,000 건설타워분과 100,000 고대립 10,000 고재형 10,000 고제헌 20,000 공진하 20,000 곽영신 5,000 구본승 5,000 권기순 10,000 권미경 20,000 권오헌 50,000 김 창 수 10,000 김경구 5,000 김경중 10,000 김광선 20,000 김광태 10,000 김교영이해옥(지로) 

30,000 

김기수지명순 20,000 김길자 30,000 김길자 41,230 김난영 10,000 김난영 1,000,000 김대봉 5,000 김덕진 10,000 김동만 10,000 김동식 10,000 김래곤(지로) 10,000 김력균 5,000 김명묵 10,000 김미령 10,000 김민제 30,000 김박 20,000 김병관 10,000 김병철 10,000 

김선영 5,000 김성영 10,000 김성철 10,000 김수진 5,000 김수희 10,000 김순영 10,000 김애숙 10,000 김영규 20,000 김영호 10,000 김용심 30,000 김은정 20,000 김인순 10,000 김재선 20,000 김재홍고현희 50,000 김정라 20,000 김정현 5,000 김제영 10,000 김진양 10,000 김충례 30,000 김태상 5,000 김현식 10,000 김형룡 20,000 김혜식 10,000 김혜정 5,000 김홍모 5,000 김효숙 30,000 김희찬 5,000 나명주 10,000 노혁 30,000 류경완안현숙 30,000 류동수 10,000 류예선 20,000 류제춘 10,000 모두리 10,000 모세미 30,000 모아라 10,000 모지희 10,000 무명(지로) 10,000 문일승 10,000 민기채 10,000 박강혁 10,000 

박귀선 5,000 박귀영 10,000 박금란 10,000 박기동 50,000 박병훈 100,000 박상은 20,000 박선후 10,000 박세용 5,000 박숙현 20,000 박재현 10,000 박중기 10,000 박진도 10,000 박태동 20,000 박형성 5,000 박희성 10,000 배춘실 20,000 백설애 10,000 백승호 10,000 서승종 10,000 서영만 20,000 서은성 10,000 설동인 10,000 설혜경 10,000 성영미 10,000 소미영 10,000 손영주 10,000 손혜련 10,000 송록희 10,000 송무호 10,000 송우엽 10,000 송창학주경임 30,000 신귀영 10,000 신동숙 20,000 신동현신재웅 20,000 신미순 20,000 신용승 10,000 신준호 10,000 신현익 100,000 심주이 10,000 안관혁 10,000 안샘 10,000 

안은숙 10,000 양인철 10,000 양해용 10,000 양현주 10,000 여인경 10,000 여인경(지로) 10,000 여혜정 10,000 오경희 10,000 오윤석 10,000 오은결 10,000 우성근 10,000 유기수 10,000 유상영 30,000 유성경 20,000 유승옥 30,000 유영호 10,000 유치자 10,000 윤규승 10,000 윤미향 100,000 윤주미 10,000 윤진실 10,000 윤현숙 65,000 윤형근 5,000 은종복(풀무질서점) 

10,000 

이경도 10,000 이경미 20,000 이경원 10,000 이경자 20,000 이남현 30,000 이내관 10,000 이덕우 10,000 이두화 10,000 이명래 10,000 이미선 10,000 이미숙 10,000 이범주 10,000 이병민이지은 30,000 이봉재 10,000 이봉주윤노숙 20,000 이상길 10,000 

이상준 10,000 이상희 10,000 이상희 10,000 이선아 5,000 이선애 10,000 이성우 10,000 이성형 50,000 이수호 10,000 이승헌 5,000 이영림 정선용 20,000 이영재 5,000 이우인 50,000 이윤 10,000 이윤섭이정희 30,000 이윤성 20,000 이재성 30,000 이재호 10,000 이정규 10,000 이정섭 10,000 이정숙 50,000 이지아 10,000 이창규 10,000 이창희 10,000 이현근 김혜순 30,000 이현희(지로) 10,000 이호승 10,000 이호중 10,000 인미화 10,000 임소희 5,000 임일 10,000 장경욱 100,000 장희자 10,000 전미라 10,000 전양배 10,000 전형범 20,000 전환식 10,000 정관호 10,000 정동익 10,000 정동희 10,000 정만기 5,000 정명숙 20,000 

정봉주 30,000 정종만 10,000 정향숙 10,000 정훈철 10,000 조규응(지로) 10,000 조봉기 10,000 조숙희 10,000 조순덕 10,000 조진숙 10,000 조철호 20,000 주칠규 10,000 진영배 10,000 진태준 10,000 최광운 10,000 최대식 10,000 최사묵 50,000 최선희 10,000 최영은 30,000 최옥순 10,000 최진수 20,000 최화섭 10,000 편상범 20,000 한상권 20,000 한영선 30,000 한준혜 10,000 허행란 10,000 홍명자 10,000 홍세희 5,000 황규은 30,000 황철우 20,000 황해평 5,000 황현승 20,000 

미주지부 1,276,547 LA $780 와싱톤수도장로교회 $300 켄터키(김재순) $100 

자동이체 하실 분은 아래 은행을 이용해주세요 

국민은행 006-01-0601-098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농협 053-01-112692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통권 311호

민가협양심수후원회 | (우) 08802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247길 14-3(행운동 1690-141) 만남의 집 전화 (02) 874-4063 | 전송 (02) 888-4470 | 홈페이지 www.yangsimsu.or.kr | E-mail : yangsimsu0@gmail.com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9 후원회소식 341호(2020년 3월) file 양심수후원회 2020.04.08 211
108 후원회소식 340호(2020년 2월) file 양심수후원회 2020.03.06 348
107 후원회소식 339호(2020년 1월) file 양심수후원회 2020.02.04 291
106 후원회소식 338호(2019년 12월) file 양심수후원회 2020.01.02 233
105 후원회소식 337호(2019년 11월) file 양심수후원회 2019.12.05 228
104 후원회소식 336호(2019년 10월) file 양심수후원회 2019.10.31 392
103 소식지 335호(2019년 9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10.02 265
102 소식지 334호(2019년 8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9.03 265
101 소식지 333호(2019년 7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8.01 263
100 소식지 332호(2019년 6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6.30 196
99 소식지 331호(2019년 5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6.14 179
98 소식지 330호(2019년 4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6.14 153
97 소식지 329호(2019년 3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6.14 161
96 소식지 328호(2019년 2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6.14 171
95 소식지 327호(2019년 1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6.14 166
94 소식지 326호(2018년 12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6.14 163
93 소식지 325호(2018년 11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6.14 136
92 소식지 324호(2018년 10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9.06.14 141
91 소식지 323호(2018년 9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8.10.01 214
90 소식지 322호(2018년 8월)입니다 file 양심수후원회 2018.10.01 160

CLOSE

회원가입 ID/PW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