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은 “통일애국의 100년 대장정 이제는 고이 잠드소서”라는 제목으로 추도사를 하였다.
권오헌 회장은 “조국 사랑, 오직 한길만을 살아오셨던 통일할머니께서 한 세기가 넘게 자주통일로 가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마감하셨다”면서 “60년 가까이 자주통일전선에서 일심동체의 동지적 관계로 친자매 이상으로 동거동락하셨던 옥중동지 김선분 선생님을 먼저 보내시고 오직 조국사랑과 통일염원으로 견디어 오시더니 세월의 무게를 끝내 이기지 못하셨다”고 추도했다.
그리고 “불의와 모순에는 한치의 틈도 없이 엄격하셨지만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핍박받는 민중들, 특히 청년 학생들의 애국 열정에는 더없이 자애로우시던 통일할머니의 분별적 모습”으로 고인을 추억했다.
이어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던 통일할머니를 오늘 우리는 슬픔만이 아닌, 걸어오신 빛난 자욱들을 영광의 자리로 보내 드리려”한다면서 고 박정숙 선생의 생애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했다.
▲ 통일애국열사 박정숙 선생 추도식
“선생님께서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6월 18일 강원도 양양 물치리 어촌에서 가난하게 살던 세자매의 막내로 태어나셨습니다. 물레방앗간을 꾸려 어렵게 지내는 환경이었지만 대포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되셨고 항일 지하활동을 하시던 큰언니따라 서울에 올라와 6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항일민족의식과 진보적 사회의식이 남달랐던 큰언니의 정신적, 실천적 영향은 그 뒤 선생님의 조국사랑의 한길을 걷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1945년 조국광복을 맞아 당시 의식 있는 누구나가 그러했듯이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이란 과제를 현실로 받아 안아 민주여성동맹 활동을 하셨고 특히 1948년 이승만과 미군정의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홍보활동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큰언니는 1948년 4월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여성단체 대표로 북행을 하였으며 공안기구의 감시를 받아오던 선생님께선 1949년 여맹활동과 관련 체포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요시찰 대상으로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이어가셨습니다.
1950년 전쟁시기 선생님께서는 여성동맹원으로 활동하시다가 1차 교육대상자로 선발되어 북으로 가시어 교육을 받으셨고, 1951년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시다가 어머님을 극적으로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으로부터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아버님은 가혹한 고문 끝에 거리에 내던져 숨을 거두셨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이때 딸 둘을 찾아 북행길에 오르시던 어머님하고 마지막 이별이 되셨습니다.
1951년 10월 선생님은 남행길 김포에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형확정 판결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60년 4.19혁명 덕에 10년 옥고를 마치고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감옥생활 10년은 말 그대로 죽음과의 싸움이었다고 회상하셨습니다. 행형당국의 학대는 말할 것도 없고, 단 한 번 그 누구도 면회 한 번 온 일이 없었으며, 내복 한 벌 없이 얼음장 같은 겨울 감방을 사셨습니다.
▲ 김선분 선생과 함께
선생님께서는 수소문하여 함께 옥고를 치렀던 선생님보다 1년 뒤 감옥을 나오신 김선분 선생님을 찾으셨고, 이때부터 두 분 선생님께서는 2015년 김선분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60년 가까이를 한지붕, 한이불 속에 동거동락을 하셨습니다.
두 분께서는 우선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궂은일들을 다 하셨습니다. 다행히 1963년 만화가게를 하면서 그런대로 같은 일터와 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판잣집가게는 추위와 더위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겨울이면 발이 시려워 연탄난로에 돌을 올려 놓았다가 밤이면 발밑에 달궈진 돌을 깔고 추위를 이겨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고된 삶과 공안당국의 빈틈없는 감시속에서도 선생님들의 자주통일염원은 식을 수가 없었습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은 큰 감동과 함께 민족자주와 대단결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부풀게 했습니다. 그리고 유신파쇼를 반대하는 뜻있는 동지들과의 의기투합과정에서 1975년 다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옥고를 치르시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다시 민주화운동과 통일투쟁현장에 나오신 것은 신군부독재에 맞섰던 광중민중항쟁 이후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6월민중항쟁과 함께 자주통일투쟁이 본격화된 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민주인사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특히 수십년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조국통일에 대한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오고 있던 비전향장기수들의 석방과 후원을 목표로 했던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발족과 활동에 선생님께서 참여하시게 된 것입니다.
옥중동지였다는 연대감과 무엇보다 자주통일에 대한 한결같은 염원으로 양심수후원회 활동을 하시면서 어려운 살림에 아껴놓았던 귀한 생활비를 거침없이 후원회에 내놓으셨습니다. 1992년 무렵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7.4남북공동성명 정신에 따라 조직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에 함께 하시고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대탄압 때는 하루에도 수없이 압수수색을 해대는 범민련을 지키는데 거의 독보적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한 1999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모두 풀려나고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의 신념의 고향, 조국과 가족품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 성원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서는 민주화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 무엇보다 자주통일 현장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치열했던 범민족대회, 민가협 목요집회, 96년 연대항쟁, 효순·미선이 학살의 분노의 현장, 평택미군기지건설반대를 위해 90노구를 이끌고 황새울 들판을 휘젓는 분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노하고 치열했던 활동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투쟁성과 헌신성으로 2001년 불교인권상을 받으셨고, 2001년 금강산 ‘남북해외 통일대토론회’에 함께하셨으며, 2005년 광복60돌기념 평양문화유산답사차 평양, 묘향산 등을 다녀오셨습니다. 2011년 양심수후원회, 갈현동모임 주최로 박정숙, 김선분 선생 동거동락 60년 기념 후원모임도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2011년 이후 노약하심에 따른 낙상과 기억장애를 겪으시면서 요양원과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지만 통일염원만은 식을 줄 모르셨고 방문객들에게 오히려 힘과 용기를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사회의 정의, 평화와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에 대한 신념은 더욱 철저하셨습니다.”
▲ 추도사를 하고 있는 이규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은 “통일의 붉은 꽃, 박정숙 선생을 추도하며”라는 제목의 추도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그 누가 말했습니까?
우리는 한 세기 어느 한 때도 빛바랜 적 없었던 통일의 붉은 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가슴 가슴마다 새겨졌습니다.”
이규재 의장은 “자주통일운동의 제일 큰 어른, 박정숙 선생은 저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른 삶을 사셨다”면서, “박정숙 선생은 민족분열과 식민지 강점을 막기 위해 전사와 같은 삶을 사셨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참고 참았던 인내의 세월을 견디고 이겨내신 후 새롭게 터진 조국통일의 함성속에 범민련 결성에 앞장서고”, “범민련에 대한 대탄압속에서도 평생 동지 김선분 선생과 범민련 사무실을 굳건히 지키며, 범민련 사수에 가장 앞장서 싸우셨다”고 뜨겁게 회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바라던 조국통일, 반미자주의 시대를 활짝 열었을 때, 선생의 영전에 선생이 늘 좋아하셨던 아름다운 꽃다발을 올리겠다.”고 전했다.
▲ 추도사를 하고 있는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권낙기 선생은 추도사에서 “박정숙 선생은 착한 분으로 기억하기 보다는 전형적인 조직가로 기억해야 한다”면서, 조직의 결정에 이견을 제기하는 분에게 “대표의 결심은 곧 조직의 결심이므로 따라야 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면 안된다”고 했던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최고의 추모는 살아있는 자들이 이어갈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 추도사를 하고 있는 조성우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공동대표
추도사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조성우 공동대표의 발언으로 이어졌다. 6.15남측위는 “참으로 자그마한 체구이셨으나 그 뜻과 의지는 참으로 거대한 분, 큰 어르신 이셨습니다. 한 언론의 보도처럼 ‘아름답고 고결한 한 세기의 삶’을 후대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라고 고인을 추도했다.
▲ 추도사를 하고 있는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한국진보연대 한충목 상임대표는 “박정숙 선생은 6.15시절 남측 여성대표로 금강산 교류에 참석하셨는데 정신을 잃으셔서 회담에는 참석하지 못했다”면서 “얼마나 그리던 조국땅을 밟았는데 얼마나 그리웠으면 쓰러졌겠냐”면서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 “선생은 진정한 신념의 강자”였다면서, 90의 나이에 광우병 촛불을 비롯해서 몸이 아파 쓰러질 때까지 모든 투쟁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제일선에 서 계셨다“고 뜨겁게 회고하였다.
▲ 범민련 공동사무국 조사를 낭독하고 있는 모성용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이어서 모성용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은 범민련 공동사무국 조사를 낭독하였다.
조사
우리는 또 한분의 범민련 할머니를 이별하는 슬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한평생을 오직 조국통일의 한 가지 욕심만 가지고 살아오신 박정숙 선생님! 한평생을 통일운동가로 살아오신 선생님의 겸손한 미소! 동지애의 귀감으로 조직을 돌보신 통일 할머니 박정숙 선생님!
우리는 이제 자주통일의 역사를 수놓으신 선생님의 순결한 삶을 이어 반드시 자주통일의 그날을 앞당겨 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