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못하는 아흔살 '비전향 장기수'… "내 고향, 가족이 거기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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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남파돼서 붙잡힌 박희성·김영식씨
고문 받고 쓴 전향서 탓에 북송에서 제외
북쪽 고향 그리며 산 61년... 여전한 비극

20일 서울 관악구 '만남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비전향 장기수 박희성(오른쪽)씨와 김영식씨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남쪽으로 내려올 때 돌잡이(생후 16개월) 아들이 있었어요. 이름이 동철인데. 살았으면 걔가 벌써 62세야. 그래도 내 꿈 속에선 여전히 애기 모습이에요. 우리 애기한테 아빠 소리 한 번 못 들어 봤는데..."
 



박희성(88)씨가 왼손으로 가슴을 쳤다. 오른팔은 총상과 고문 후유증 때문에 제대로 쓸 수 없다. 6·25 정전협정(1953년 7월 27일) 70주년을 맞아 20일 '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가 운영하는 서울 관악구 '만남의 집'에서 만난 박씨는, 여전히 북녘 땅과 거기 사는 가족들을 그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김영식(90)씨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그들을 '비전향 장기수'라고 부른다. 사상 전향을 거부하며 장기간 수감 생활을 한 북한 인민군 또는 남파간첩을 일컫는 말이다. 두 사람은 6·25 때 인민군으로 북한 정권을 위해 싸웠고,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 사이 대남 공작원 신분으로 남파됐다.

1962년 체포돼 26년 간 남쪽 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한 뒤, 1988년 노태우 정부의 '양심수 대사면' 때 석방됐다. 하지만 교도소 복역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작성한 '전향서' 한 장 때문에 여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남한에서 산 시간(61년)이 북에서 보낸 시간의 두 배를 넘어섰지만, 그들은 여전히 남한에 살길 거부하는 '비전향자'다.
 

 

채찍 맞으며 억지로 쓴 전향서

20일 서울 관악구 '만남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비전향 장기수 김영식(왼쪽)씨와 박희성씨가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박씨의 기억은 6·25 정전 후 단 몇 년간 누렸던 평범한 인생에 멈춰 있다. 1956년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지병으로 1년 만에 제대한 뒤 영화관 상영기사로 일했다. 그때 본 소련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과 '햄릿'은 지금도 생생하다. 김씨도 정전이 이뤄진 1953년 결혼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뒀다. 원산수산사업소에 취직해 어부로 일했다. 김씨는 "남들은 데굴데굴 멀미할 때 나만 육지처럼 기운이 넘쳐 천직이었다"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일터로 찾아온 중앙당원에게 소집돼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한 뒤, 운명은 달라졌다. 1962년 무전병으로 활동하던 김씨는 울산에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박 기관장을 맡았던 박씨는 경기 남양만에서 체포돼 27년형을 선고받았다.

1988년 사면되기까지, 군사정권의 고문은 끝이 없었다. 고문을 해서라도 전향을 시켜야 남한의 체제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홧발로 차이는 건 예사였고, 평소에도 '대포 수갑'을 찼다. 한 팔은 등 위에서 내리고 한 팔은 등 아래에서 올려 당겨 수갑을 채우는 고문이다. 피딱진 상처 위에 옷이 눌러 붙어 덧나기 일쑤였다.

김씨는 한겨울에 맨몸으로 채찍질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전향을 거부하자 물에 고춧가루를 섞어 얼굴에 부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교도관이) '교무과장 만날래, 안 만날래' 하더니 교무과장 만난 자리에서 내 손을 끌어다가 (전향서에 억지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억지 전향서 탓에 2000년 북송 제외

2000년 9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남한 측 자유의 집을 나서 중립국 감독 위원회 회의실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그렇게 억지로 쓴 전향서가 두 사람을 가족과 영영 떼어놓게 될 줄은 몰랐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같은 해 9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송환됐지만, 두 사람을 포함한 강제 전향자들은 '이미 전향을 했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강제 전향임을 알리는 기자회견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박씨는 "(억지 전향서 때문에) 집에 못 가게 됐단 걸 알았을 때의 마음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상전향제도와 관련해 유엔인권이사회는 "정치적 견해에 따른 차별적인 기반 위에서 의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국제인권규약상 평등권과 사상·양심의 자유, 표현의 차유를 침해한다"고 확인한 바 있다. 국제사회 지적 이후 사상전향제도는 1998년 준법서약서로 대체됐다가 2003년 공식 폐지됐다. 2004년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강압과 고문에 의한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고 규정한 덕분에 '비전향 장기수'라는 명칭도 되찾았지만, 기다리던 2차 송환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2005년 통일부가 2차 송환을 추진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북한에서만 살다가 남한에선 감옥에만 갇혀 있던 그들에게, 친척 하나 없는 남녘 생활은 사무치게 외로웠다. 어디를 가도 경찰이 따라왔다. 박씨는 "겨우 월세방 하나 구했더니 담당 경찰이 집주인에게 찾아가 '저 사람 간첩 출신'이라 말해버려서 쫓겨났다"며 "그 뒤론 여관 생활만 했다"고 회상했다. 김씨도 여러 공장과 건설 현장을 전전했다. 2000년대 초반에야 만남의 집이란 안정적인 거주지를 얻었다.
 

20일 서울 관악구 '만남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비전향 장기수인 김영식(왼쪽)씨와 박희성 씨가 마당에 피어난 봉선화를 보면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씨는 "이맘때 누이들이 꼭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였다"고 회상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그래도 60년을 남한에서 살았는데, 이 땅에 마음 붙인 적은 없었느냐'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도와준 분들껜 죄송하지만 여전히 고향만 그린다"고 답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고향과 가족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장수현 기자 (jangsue@hankookilbo.com)

포기 못하는 아흔살 '비전향 장기수'…"내 고향, 가족이 거기 있으니까요" (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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