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 정당했던 남도 빨치산 정관호 주필

[기고]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 권오헌 
  •  
  •  입력 2023.12.18 11:43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기관지 ‘전남 로동신문’ 주필을 역임한 정관호 선생이 타계한지 49재를 맞고 있다. 이 원고는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그동안 폐암이 척추로 전이되어 척추 수술을 받고 입원하는가 하면 새로 인후암이 발견되어 30회에 걸친 방사선 치료를 받는 등 투병 생활 중에, 세상을 뜬 고인의 영결식에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고인의 49재를 맞아 올리는 기고이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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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인천 청기와장례식장 빈소에서 열린 ‘남도 빨치산 고 정관호 선생 추도식’ 장면. [통일뉴스 자료사진]

 


언제나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정의롭고 의연하게 한 생을 사셨던 남도 빨치산 정관호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몸이 불편하여 영결·추모의 밤에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 일부 전통 의례이기도 한 49재를 맞아 행사와는 관계없이 선생님과 20년을 함께 했던 영결의 슬픔과 추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남도 빨치산 작가 정관호 선생님이 시대의 부름을 받고 떠나왔던 고향 땅을 끝내 다시 밟지 못하고 또 다른 조국 남녘땅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외세와 분단시대 젊은 애국 열정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조국해방전쟁’의 전선을 지켰던, 그 치열하고 처절했던 빨치산의 생성, 투쟁, 산화 과정을 기록한 우리 시대의 증언자가 98살을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언제나 겸손하셨고 다정다감하셨지만 그리고 상대의 뜻을 귀담아듣고 존중하셨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역사 앞에 정당하고 객관 사실에 근거하며 진실추구와 정의 편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 공동체에 헌신하는 사람들, 침략외세에 맞서 조국과 인민을 지키는 사람들, 정의를 위해 싸우다 핍박받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지지·연대감을 갖고 자애로우셨지만 남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람들, 사적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들, 사대매국하는 사람들, 억압과 공안기구, 독재자에겐 한치의 틈도 없이 엄격했습니다.

선생님은 지난 시기 어떤 인터뷰에서 “만약 다시 태어나도 조국이 외세에 신음하고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면 빨치산이 되었을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역사가 묻거든 조국이 위태로울 때 너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더냐? 그 변혁기에 너는 어디에 었었더냐? 그 물음에 떳떳이 답할 수 있다는 자랑과 긍지가 제겐 남아 있습니다.”고

선생님은 “전쟁은 다시 일어나선 안 됩니다. 우리들 같이 핍박당하는 일들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평화의 기본은 자주 자결입니다. 그것이 짓밟힌다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반전평화가 목적이지만 자주가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는 논리였습니다. ‘조국해방전쟁’ 참가자로서의 역사적 명제를 던지셨다 하겠습니다.

정관호 선생님은 1925년 10월 14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아버님 정기엽과 어머님 이갑순 님 사이에서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셨습니다.(형님 승호, 남동생 용호, 진호, 명호, 여동생 금절, 금자, 금숙, 금옥) 1942년 북청농업고등학교 재학 시기 ‘독서회 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 넘게 함흥형무소에 수감당하셨습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전기고문·물고문 등 잔혹한 폭행을 당하여 그 후유증이 평생 몸에 남아 고통을 당했고, 석방은 되었지만 요시찰 대상자가 되어 감시가 뒤따랐다고 하셨습니다.

1945년 마침내 조국광복을 맞게 되었고 해방된 땅에서 독서회 사건 따위가 없는, 우리말과 우리글로 마음껏 공부하고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문학서적을 원전으로 읽을 정도의 실력으로 평양 노어대학(뒤에 평양외국어대학)에 들어가 1949년에 졸업하셨습니다. 이후 원산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같은 해 원산교원대학 교수로 발령, 러시아어와 러시아문학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시대상황은 정관호 교수를 대학의 교육자로만 놔두진 않았습니다. 1950년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 각 대학 교수들이 평양에서 세미나를 열고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정관호 교수 등 지식인 200여 명은 해방된 남반부 교육사업을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미군 폭격을 피해 밤에만 도보로 해주에서 개성-서울-광주 도당을 거쳐 최종 이른 곳은 전남 강진이었습니다. 강진군 초·중교사를 모아놓고 교육을 시키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전공인 러시아어와 러시아문학 등을, 그리고 전쟁의 성격에 대한 교양교육도 시켰습니다. 여기까지는 교육자의 임무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9월 29일 선생님은 후퇴명령을 받게 됩니다. 강원도 춘천으로의 집결 지시였습니다. 일시적 후퇴명령이었지만 이를 그대로 따르기에는 당시 현지 상황으로서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할 부대나 집단이 분명치 않았고 어떠한 교통수단도 없어 결국 이곳(전남지역)에 남아 최선을 다하려고 장흥 유치산에 입산, 1950년 말 강진군당과 합류 마침내 빨치산이 되었습니다. 초기엔 월출산 강진유격대에 합류하여 이른바 ‘산사람’이 되셨습니다. 당시 전남지역의 최고 지휘부는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이었고, 도당은 후퇴하지 않고 남아서 싸우기로 결정했으며 광주, 목포 등 2개 시와 21개 군을 관할했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시점에 정관호 선생님은 전남도당 선전부로부터 호출을 당했습니다. 교수 출신에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것을 알고 호출당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전남도당 선전부 소속으로 전남노동신문 편집인, 바로 전남노동신문 주필 역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시 남반부 노동신문 중에는 제일 장수했고요. 최다발행을 했어요. 신문은 조선중앙통신을 무전으로 수신한 내용과 각 유격부대 통신원들의 소식을 기반으로 해서 제작했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1000부를 찍었지만 500부로 줄였고 도당 소속 부대들과 주민들에게 배포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노동신문 영인본을 선생님이 직접 가지고 계셨고 “신문을 찍었던 등사판은 백운산 어디엔가 묻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빨치산, 바로 유격대는 어떤 고유역할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정관호 선생님도 처음엔 주필 일만 했지만 “나중엔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보급투쟁에도 나서고 하룻밤 사이에 100리를 뛰어다녔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빨치산 투쟁은 4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제대로 된 주둔지 막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가 전방이고 후방인 것도 없는, 눈 덮인 계곡과 살을 태우는 뙤약볕 능선을 수없이 넘나들며, 혹은 해방구를 이뤄내고 혹은 처참하게 쫓기는, 하루하루가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빨치산은 각기 다른 계급 계층의 출신들이었지만 일제식민지 지배를 겪었고 또 다른 점령세력의 탄압을 피해 입산한, 아주 높은 도덕성·연대성·동지애로 뭉친 고결한 공동체였다고 선생님은 증언하셨습니다. 하지만 미군까지 가세한 정규군의 막강한 화력과 대공세로 무너져갔습니다.(1,2차 대공세 등)

“1953년 가을에서 1954년 봄까지의 2차 대침공(대공세) 때 박영발 전남도당 위원장이 2월 21일 전사했고 김선우 전남도당 유격대장도 4월 5일 전사했지요. 그렇게 저도 쫓기다가 1954년 4월 8일 백운산에서 총상을 입고 굴속에 있다가 검거되었지요. 그 4년이 제 전반 생의 집약이면서 후반 생을 지배하게 되었지요. 검거되는 순간 나는 꼭 살아남아서 이 빨치산들의 숭고했던 삶과 투쟁, 죽음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선생님은 국방경비법 32조 위반혐의로 10년 선고를 받고 전주, 대전, 마산, 마포, 대구형무소 등으로 옮겨가며 옥고를 치르고 1961년 출소하셨습니다. 빨치산은 정규군과 다름없이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협정에 따라 전쟁이 끝나고는 자기 조국이나 소속 부대로 송환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국방경비법을 적용 장기형을 선고받아야 했습니다.

선생님의 빨치산 투쟁은 검거되고 재판받고 옥고를 치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검거될 때의 다짐, 바로 ‘빨치산기록’을 실천하셨습니다. 출소 초기 요시찰을 비롯 사회안전법·보안관찰법 대상자로 통제와 감시를 당하고 있었지만 1993년 인민군 종군기자 리인모 선생의 송환 이후 옛 산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투쟁현장 답사와 각종 자료수집을 하면서 마침내 빨치산 정사 ‘전남 유격투쟁사’(선인, 2008년)를, 소설 ‘남도 빨치산’(전6권, 매직하우스, 2008)을 저술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집 ‘한재’ ‘꽃피고 바람되어’ 등 수많은 시집과 식물도감, 소설 등을 창작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2003년 4월 6일 전남 광양 백운산 한재에서 전쟁 시기 산화해간 영령들의 원혼을 기리는 ‘제1차 남도열사추모제’ 때였습니다. 옛 빨치산 동지들과 비전향장기수, 시민사회단체 등 전국에서 150여 명이 함께한 행사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선생님 말고도 백운산에서 활동했던 구례 정운창 선생(추도문 낭독), 지리산 등에서 활동한 김교영 선생님 등 많은 옛 빨치산 전사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김교영 선생님 소개로 선생님을 처음 뵈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여러 매체를 통해 저의 활동을 익히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몇 년 뒤 날짜를 기억할 수 없는 어느 때 선생님께서 큰 수술을 받고 입원 치료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여의도 성모병원인지 역시 기억이 모호합니다) 문병을 했습니다. 다행히 병환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곧 퇴원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 퇴원하실 주소 등을 확인하고 그때부터 ‘후원회소식’을 보내드리고 선생님께선 양심수후원회 회원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금천구 시흥2동 자택을 찾아 인사를 드렸습니다.

2008년 6월 20일 서울 남산 '문학의집'에서 열린 『전남유격투쟁사』와 『남도 빨치산』 출판 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정관호 선생. [통일뉴스 자료사진]
2008년 6월 20일 서울 남산 '문학의집'에서 열린 『전남유격투쟁사』와 『남도 빨치산』 출판 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정관호 선생. [통일뉴스 자료사진]

 


선생님께서 빨치산 증언자로, 작가로서 옛 빨치산 동지들과 사회단체 그리고 문학계 인사들 앞에 공개적으로 처음 나선 것은 2008년 6월 30일 남산 자락 ‘(사)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에서 있었던 ‘전 전남 노동신문 주필 정관호 선생 출판기념회’ 때였습니다. 앞서 밝힌, 선생님께서 최선을 다해 집필하신 역사서 ‘전남 유격투쟁사’와 장편소설 ‘남도 빨치산-山사람들’에 대한 출판 기념식이었습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데는 인터넷신문 <통일뉴스>의 남모를 노력이 많았습니다.

기념식은 추모연대 박중기 의장,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 김영승 전 전남 유격대원, 김지영 내과 원장, 노원문고 탁무권 대표,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 등이 초청인으로 치러졌습니다. 모성용 양심수후원회 운영위원 사회로 박중기 추모연대 의장, 현기영 ‘순이삼촌’ 작가의 축사가 있었고, 김영승 옛 빨치산 동지의 저자 소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의 저서 소개, 소설 ‘빨치산의 딸’ 작가인 정지아의 저서 헌정과 헌정사, 양희철 비전향장기수의 진혼시 낭송, 탁무권 노원문고 대표의 발간사, 이명한 소설가의 작가서평 등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작가의 변’에서 “이 책들은 패잔의 기록이지만 위대한 패잔의 기록으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어려움 속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참 인간들의 참상”이라며 학자는 학자대로 영상예술인은 예술인대로 이 땅에 빨치산 역사가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조명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 양심수후원회에서는 새해를 맞거나 추석명절 때 선생님을 찾아뵙고 때로는 밖에 모시고 나와 외식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김호현, 김혜순, 모성용, 김재선, 김래곤, 권오헌 외)

저희들은 선생님께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에 함께 하실 것을 권했습니다만 선생님께선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직 ‘남도 빨치산’ 기록 등 할일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찾아뵌 때는 2020년 1월 1일, 새해를 맞아 인사드렸을 때였습니다. 그 뒤로는 코로나 감염병 때문에 그리고 선생님의 투병과 입·퇴원이 이어지는 동안 찾아뵙지를 못하다가 지난 10월 29일 소천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폐암이 척추로 전이되어 척추 수술을 받고 입원하는가 하면 새로 인후암이 발견되어 30회에 걸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매우 죄송스럽게도 선생님 마지막 가시는 영결·추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홀연 가시게 되니 지난 2009년 3월 30일, 백운산 한재에서 열렸던 여성 빨치산 손영심 동지 수목장에 함께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선 추도시 ‘손영심을 묻는 날’에서 ”진달래 꽃동산으로/ 님이 가신다/ 굽이굽이 수만리/ 살아왔던 길로/ 님이 돌아가신다/ 고운님들 먼저 간/ 백운산 품에/ 함께 끼이려고/ 여기 혼백으로 왔노라/ (이하 생략) 절절히 읊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선 옛 해방전사들이 잠들어 있는 백운산에 선생님 자신도 묻히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을 뵌 지 20년 동안 귀한 가르침 많이 받고 수많은 선생님 저작물 받고 언제나 진정어린 격려 말씀 받아 왔는데 아무것도 돌려드리지 못한 채 선생님을 보내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됐던 ‘남도 빨치산’ 역사 내려놓으시고 침략외세도 동족대결도 사대매국도 없는 세상에서 편히 잠드시길 빌겠습니다.

2023년 12월 16일

사)양심수후원회 권오헌 올림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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