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 판결이 두 개라고?

2012.09.13 02:53

anonymous 조회 수:3533

인혁당 사건 판결이 두 개라고?
<기고> 점입가경인 박근혜 대선후보의 퇴행적인 역사인식
2012년 09월 12일 (수) 21:19:17 한상권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수구·냉전 세력의 여망을 안고 대권주자로서의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이 광폭(廣幅) 행보만큼이나 광폭(狂暴)하다. 지난 10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라며, "앞으로의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인혁당 사건이란 소위 ‘인혁당 재건위’가 1974년 4월, 당시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한 민청학련을 북한의 지원을 받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씌워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몰아 구속 처형했던 사건을 말한다.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상규명위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과장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였을 때도 박 전 위원장은 “한마디로 가치 없는 것이고 모함”이라 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2007년 1월 23일 서울지방법원 합의 23부가 인혁당 사건 재건위 사건 재심판결에서 8인의 사형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33년 만에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고 명예가 다소나마 회복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도예종 등 23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혁당 재건위를 구성하여 학생들을 배후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지만, 조사결과 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범죄혐의는 모두 피의자 신문조서와 진술조서 등을 위조하여 조작하였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혁당 사건은 대통령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유신정권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사법살인이었음이 명명백백히 드러난 것이다.

뒤늦게나마 사법부에서 무죄 판결이 난 이상, 박근혜 후보는 역사와 국민 앞에 아버지의 죄과를 사과하고, 죽은 영령들과 그 가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법원 판결 이후에도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거나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급기야 지난 10일 ‘두 가지 판결’ 운운하면서, 법원의 판결마저도 수긍할 수 없다는 발언을 하였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사법부의 권위마저 능멸하면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 후보의 이번 발언은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는 올 3월 13일 지역민방 초청토론회에서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께 저는 항상 죄송한 마을을 가져왔다"며, 그분들께 제가 사과를 드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 정책이 옳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대선주자 초청토론회에서도 "5·16이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초석을 만들었다고 본다.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2007년 대권 도전 때에도 5·16군사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며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일련의 발언을 종합해 볼 때, 박근혜 대선후보는 ‘산업화→민주화’의 발전론에 입각하여, 역사를 ‘선 산업화, 후 민주주의’ 도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러한 도식적인 역사관은 일본극우세력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뉴라이트가 정립하였으며, 조중동 등 수구·냉전 언론과 어용관변 단체가 확산시켰다. 그들은 산업화세력이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산업화가 되었기에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1987년 6월민주항쟁에 대거 참여하면서 민주주의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노동자나 농민 등 민주화운동세력이 아닌 독재자나 재벌이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단계적 발전론은 허구에 불과하다. 민주화와 산업화는 선후관계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선 성장, 후 민주화’ 담론은 비현실적 논리이며 비상식적 도식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사실상 민주화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성장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분리해서 보는 뉴라이트 입장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산업화가 되어야 민주화가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면, 산업화를 일구었다고 주장하는 박정희 독재정치 하에서 자행된 각종 불법적인 압수, 수색, 구금, 연금, 고문 등의 인권탄압과 초법적인 납치, 테러, 암살, 사법살인 등 야만적인 폭력들이 모두 민주화를 위해 불가피했던 것으로 합리화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시기에 자신들의 생존권 확보, 또는 경제민주화나 사회변혁을 위해 희생한 노동자 농민들 투쟁의 역사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뉴라이트는 산업화 시기 이른바 민주화운동으로 자처한 좌익 세력들의 발호가 산업화의 걸림돌이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은 경제상 비용손실만 초래하여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시기 항일독립운동이 근대문명화의 길로 발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2008년 5월 26일 박근혜 의원은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출판기념회 참석해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걱정을 덜었다”며 축사하였다. 그가 극찬한 대안교과서는 ‘일제식민 지배는 축복이며, 친일도 독재도 불가피한 선택’ 이라며, 친일·분단세력과 반공·독재세력을 한국 근·현대사의 주인공으로 등극시켰다. 민주주의를 축소·왜곡하고 친일·독재를 찬양함으로써, 기억의 공공화와 역사정의의 정식화를 파괴하려는 사명을 띠고 발간된 책이다. 이처럼 광폭(狂暴)한 뉴라이트 역사관을 체화한 사람이 유력한 대선후보자라는 현실에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참으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민중의 소리>와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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