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65돌을 맞는 현재적 과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2013년 04월 17일 (수) 10:40:27

 

‘내가 30년 동안 조국을 그리다가 겨우 이 반쪽에 들어온 지도 만 2개년 반에 가까웠다. 그 동안에 또다시 안타깝게도 그리던 조국의 저 반쪽을 찾아서 이제 38선을 넘게 되었다.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희비교차의 만단정서야 형언인들 하여 무엇하랴.’

1948년 4월 19일 백범 김구 선생이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며 밝힌 ‘북행-성명’의 앞부분이다. 노 항일혁명투사의 북행결행은 애국·애족의 충정 말고도 이른바 신탁통치 찬반론에서 반대입장을 대표했던 (김구 선생 등) 우익진영인사들이 ‘남조선단독정부수립’에는 단호히 반대하여 대거 참가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처럼 미·쏘양군 점령하의 남과 북에서 각 계층 지도자들이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외국군철수와 통일된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란 민족적 과제 앞에 한목소리를 냈던 남북연석회의가 열린지 65돌을 맞게 되었다.

봉건왕조 말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화되고 있을 때 신분사회를 넘어 양반과 평민, 천민이 의병전쟁에 함께 했고 강도 일제에 끝내 나라를 강탈당했을 때 신분·계급과 사상·신앙 차이를 떠나 온 겨레가 항일독립투쟁에 떨쳐나섰듯이 단독정부수립이 불러올 남북분단 그리고 필연적으로 따라올 동족상잔이란 위기 앞에서는 이처럼 각 정파가 추구하는 고유의 목표를 뒤로 하고 온 겨레가 염원하고 지향하는 대의명분에 주저 없이 복속하고 있었다. 바로 남북연석회의는 민족전체의 존망이 걸린 위기 앞에서는 언제라도 한사람같이 떨쳐 일어설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례로 되고 있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역사적 연석회의가 있기까지 미군정의 해방공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짚어보고 특히 연석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서’ 등 내용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남북지도자협의회) 공동성명서 등이 담고 있었던 역사적 의미와 현재적 과제를 알아보기로 한다.

남북에서 주둔양태가 달랐던 미·쏘 양군

1945년 8월 15일. 일제패망과 조국광복은 그 감격과 환희만큼 해방민족으로서의 과제 또한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제의 식민지잔재 청산이었고 외세간섭 없는 자주독립통일정부를 세우는 과제였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경제수탈 유제인 반봉건토지소유제 철폐(토지개혁 등), 노동계급에 대한 민주주의적 권리보장과 남녀평등 등 계급과 신분해방의 과제도 있었다.

그리나 해방의 감격과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조선민중들은 38도선을 경계로 국토분단과 민족분열 조작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로 미 극동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1945.9.2)가 그것이다. 이는 미국이 38도선 이북에서는 쏘련군이 이남에서는 미군이 패전 일본군의 항복을 받게 한다는 남북분할점령계획을 쏘련에 통보하여 동의를 얻어(1945.8.15) 이같이 발표한 것이다. 당시 쏘련은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동북지방과 조선북부지역에서 일본의 관동군과 조선주둔 일본군을 공격하고 12일에는 웅기와 나남, 16일엔 청진, 22일엔 원산에 상륙했으며 24일엔 평양에 입성했었다. 이에 반해 미군은 조선에서 1000km의 오키나와와 1500~2000km 거리의 필리핀 열도에서 작전 중이었다. 바로 일반명령 1호는 조선반도 전체가 쏘련군에게 점령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고 특히 조선의 혁명적 민족해방세력에게 일본군이 항복하는 것을 막으려한 술책이기도 했다.

일제의 식민지지배 피해자이면서 일제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상해임시정부와 광복군활동,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의 항일무장투쟁, 조선광복회와 조선인민해방군의 무장투쟁과 조선진격 등)을 벌인 사실상의 전승국이었던 조선은 강대국의 패권적 세계전략에 밀려 오히려 분할점령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패전국 독일이 4개 연합국에 분할점령 당했듯이 정작 분할점령대상은 일본열도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조선땅에 38선을 그어 분단의 씨앗을 뿌렸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게 했으며 미군강점 68년의 오명을 남기게 했다.

이처럼 미·쏘 양군은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각기 남북으로 들어왔지만 그 주둔양태와 성격은 사뭇 달랐다.

먼저, 미군은 1945년 9월8일 인천에 상륙했다. 이보다 하루 전 태평양미육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조선민중에게 위압적인 포고령을 발표했다. 바로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며 반항하면 ‘엄벌’에 처할 것과, 군정기간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고 했다.(미군정포고령 제1호) 또한 포고령을 어기거나 행정을 방해하는 자에겐 점령군 군율회의를 거쳐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고 했다.(포고령2호-1945.9.7)

또한 아놀드 미군정장관은 “남조선에서 유일합법정부는 미군정”이라며(1945.10.10) 자치정부기구였던 ‘인민공화국’을 불법화시키고 민족자주진영에 호의적이던 <매일신문> 등을 정간시켰다. 이어 ‘정당등록제’ 등을 잇달아 반포하여 좌익진영 정치활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 등 진보언론들을 폐간시키고(1946.9.7) 상해임시정부,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각 지역인민위원회 등 독립운동기구와 자주정부수립을 위한 자치기구 등을 모두 부인·해체시켰다.

이처럼 미군은 그들 스스로 말했듯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우리민족의 자주권을 짓밟고 일제식민지지배를 대신해 군정을 실시하며 일제의 통치기구(경찰·행정 등)를 존속시켰다.(주1) 또한 미군정은 1945년 8월 9일까지 유효했던 모든 현행법과 일제총독부가 공포한 규정·명령·지시 및 각종문서들을 미군정에 의해 폐기될 때까지 계속 발효케 했다. 군정법령21호(1945.11.2)(주2)

이 같은 일제의 식민지지배 파쇼악법 존속시행은 1948년 8.15 정부수립 뒤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 제정 배경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38도선 이북에서의 쏘련군의 역할과 성격은 ‘조선인민에게 주는 붉은군대 포고문’(1945.8.20)에서 나타났듯이 점령군이기보다는 해방군이란 인상을 주었다.(주3) 포고문뿐만 아니라 쏘련군은 지역별로 현지의 일본군 지휘관과 행정책임자를 상대로 무장해제 등 업무처리를 했으며 조선총독부의 개입을 배제했다. 또한 이미 조직되고 있는 각 단위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바로 넘겨주었으며 인민위원회는 쏘련군사령부 산하 민정부와 협력 친일잔재를 청산했다.

또한, 무장해제된 일본군 및 경찰관 고위관리는 억류되었고 전범재판도 단행되었다. 붉은군대는 이어 ‘독립조선의 신정부수립방침’(1945.9.14)에 따라 일본총독부를 배제한 뒤 도별로 행정권을 접수 도인민위원회에 바로 이관했다. 또한 이북의 각 정당·사회단체와 각 도·시·군인민위원회 대표자들이 모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1946.2.8) 이러한 조치들은 앞에서 본 일제의 통치기구와 법령 등을 이용하여 폭압적 점령통치를 감행한 미군정과 대조되고 있었다.

신탁통치안 문제

다음으로, 해방공간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양상을 보였던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신탁통치안) 문제이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는 전후처리를 위한 미·쏘·영 3국외상회의를 열고 이른바 ‘신탁통치’로 왜곡 선전된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그 요지는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조선임시민주주의정부수립 △임시정부수립을 돕기 위해 미·쏘공동위원회 설치 △미·영·쏘·중 4개국에 의한 최장 5개년 신탁통치(또는 후견)를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원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문제는 1943년 3월 27일 이든 영국수상과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의 워싱턴회담에서 비롯됐었다. 그 뒤 테헤란회담(1943.12)에서 미국이 제안하여 쏘련이 동의했고 얄타회담(1945.2)에서 루즈벨트는 구체적으로 20~30년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했으며 스탈린은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하였다.(주4)

이처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서(신탁통치안)는 미국의 조선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 계획된 제안을 쏘련이 원조와 후견에 방점을 둔 기간 단축으로 동의하여 이루어졌다. 찬반론으로 격렬했던 ‘신탁통치’문제는 주권침해의 단순한 통치형태가 아니라는 것은 문제로 되고 있는 ‘결정서’ 3항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독립국가수립을 원조·협력·후견(Trusteeship)할 방책을 작성하는 것도 임시조선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의 민주주의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수행할 과업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개년 동안의 4개국 후견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쏘·중정부가 공동 심의하도록 임시조선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7일자 기사에서 ‘쏘련은 신탁통치주장, 쏘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고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사실과 정반대의 왜곡보도였다. 이처럼 민족감정에 불을 붙힌 기사 등으로 일부 민족자주세력은 물론 친일반민족부역자들까지 반탁에 합세하여 갑자기 반역자에서 애국자로 변신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끝내는 임시 민주주의정부수립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이 같은 신탁통치찬반론이 휘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미·쏘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쏘공동위원회를 결성하고 서울에서 제1차 미·쏘공동위원회를 열었으나(1946.3.20-5.6) 임시정부수립과정에서 협의대상의 정당·사회단체 자격문제로 결렬되고 만다.

그러나 통일된 자주독립국가건설이란 온 겨레의 염원은 좌우합작운동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강력한 요구로 제2차 공동위가 5월 21일 다시 열렸다. 쏘련측은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의 자격문제를 따졌고 미국측은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세력을 포함하여 부풀려진 우익단체들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임시정부수립 협의대상 정당·단체의 자격문제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그들 스스로가 제안하여 결정한 (3상회의 결정) 것을 극력 반대하는 세력을 오히려 옹호함으로써 공동위를 파탄시키는 역할을 했고 끝내 7월 10일 2차공위도 결렬되고 말았다.

미국은 미·쏘공동위 결렬사태를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문제를 당시 미국의 절대적 영향 하에 있던 국제연합(UN)으로 끌고 갔다. 국제적 협약(3상회의 결정)이 이루어진 ‘전후조정문제’는 유엔총회 심의안건으로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쏘련은 3상회의 결정에 반한다며 반대) 미국무장관 마아샬은 1947년 9월 17일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시켰다. 그리고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비롯한 조선총선안을 가결했고, 1948년 2월 26일엔 유엔소총회에서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 바로 남조선만이라도 임무수행할 것을 결의했다. 남조선단독선거 결정이었다. 이상이 김구, 김규식이 남북연석회의에 발 벗고 나서게 된 과정이었다.(이후 직함생략)

남북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개최 과정과 그 내용들

이처럼 남조선 단독선거안이 알려지자 자주통일을 바라는 민중들의 저항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2.7구국투쟁’, ‘4.3항쟁’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미국과 이승만 일당에 의해 단선·단정이 유엔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지켜본 김구는 48년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에서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이 고금의 철학이다.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민족을 죽음의 굴에 몰아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라며 단선중단과 남북협상을 호소했다.

이후 3월 8일 김구·김규식이 북조선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했고 김구·김규식·조소앙·김창숙·조완구·홍명희·조성환 등의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는 7인 성명’이 있었다.(1948.3.11) 그리고 이북의 김일성·김두봉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이름으로 ‘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이란 공개서한과 정당·사회단체 개별대표들에게 ‘조선의 통일과 민주주의 정부수립, 유엔결의반대, 단선반대 투쟁 등을 논의하는 남북지도자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가질 것’을 제안했다.(1948.3.20) 이에 남쪽의 한국민주당 등을 비롯한 극히 일부세력을 제외한 좌·우진영의 대부분 정당·사회단체가 즉각적인 지지와 적극 참여를 천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남북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1948년 4월 14일 평양에서 여는 것으로 양측이 합의했으나 남측에서 김구·김규식 등의 평양도착이 늦어져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당시 참가규모는 남측에서 41개 북측에서 15개 등 모두 56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선출된 695명으로서 극우진영을 제외한 남북의 좌·우정치세력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었다.

회의 첫날은 주석단에 오를 28명 지도자와 자격심사위원회 위원 9명을 선출했으며 20일에는 쉬고 21일에 본격적으로 토의가 진행되었다. 먼저 북측에서 김일성의 ‘북조선정치정세보고’가 있었고 남측의 박헌영과 백남운의 ‘남조선정세보고’가 있었으며 이에 대한 지지토론 등이 있었다. 22일에도 각 대표들의 정세보고에 대한 토론과 특히 유엔조선임시위원단과 단독선거규탄 외국군대철수 등 토론이 이어졌다. 23일에는 이 같은 보고와 토론을 토대로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서 통과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및 전조선동포들에게 보내는 격문’ 등이 채택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결정서
- 외국군대에 의한 38선으로 남북분리
- 미국의 비법적인 조선문제 유엔상정과 유엔의 단선·단정결정 규탄
- 이 같은 민족적 위기에서 남조선에서는 조국을 분할하고 외국에 귀속시키려하며 조국을 팔아먹는 매국노들이 있다
- 이를 막기 위해 남조선 정당 사회단체가 총집하여 단선을 파탄내고 외국군대를 철퇴시키어 조선의 통일적 민주주의 독립국가 수립권리를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해 강력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격문
- 조선민족이 또다시 외국의 노예로 살 수 없다. 우리 민족은 하나이고 우리 조국도 하나이다. 조선인민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사람도 선거에(단선)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통일독립을 요구한다.

미·쏘양국에 보내는 요청서
- 조선에서 외국군대를 동시 철거시키고 외국의 간섭없이 자기 뜻대로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한 통일적 민주주의국가를 세우게 할 것을 요청했다.

이 같은 결정서, 격문, 미·쏘양국에 보내는 요청서를 채택한 남북연석회의는 그 연장선에서 남북지도자 15인으로 하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15인지도자협의회)를 구성했다. 남측에서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김붕준, 이극로, 엄항섭(이상 우익) 허헌, 박헌영, 백남운(이상 좌익) 등 11인이었고 북측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영하 등이었다.

지도자협의회는 4월 30일 다음과 같은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요약)
1. 외국군의 즉시 철군
2. 외국군 철거 후 내전에 발생할 수 없다는 점 확인
3. 전조선정치회의 소집 - 임시정부수립 - 총선으로 입법기관 탄생 조선헌법제정 - 통일적 민주정부수립 등 4단계 통일정부수립안
4. 남조선 단독선거 절대반대 등 4개 항목이다.

남북연석회의에서의 이 같은 결정서와 공동성명서를 통해 천명된 요지는 바로 △외국군철수 △조선문제는 외세간섭 없이 조선사람 자신이 해결 △전조선정치회의 소집과 통일된 민주주의정부 수립 △외세의존세력규탄과 배격 △남조선단독선거 반대 등이 있다. 또한 남북연석회에는 항일민족해방투쟁을 실천해 온 상해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 국내에서의 건국동맹세력, 조국광복회와 항일무장투쟁지도자들이 모두 참여했기에 앞으로 있을 자주독립국가건설에서의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으며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통일된 민주주의 정부를 세울 수 있는 토대를 열어 놓게 되었다 할 것이다. 또한 이미 노골화되고 있던 미·쏘의 냉전체제에 편승 분단국가체제를 이루려는 일부정파의 시도를 단호히 배격하여 민족분열과 그로인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으려한 평화통일노선을 채택한 의미가 있었다 할 것이다.

분단고착화로 이어진 남북에서 두 개 정부의 수립 과정

그러나 이러한 연석회의정신은 강대국의 패권야망과 그에 편승한 정파에 의해 외면당했다. 남조선단독선거는 끝내 남북에 대립정부가 들어서게 되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연석회의 이후 65년이 되는 이 시간 해방당시의 점령군은 아직도 이 땅을 68년이나 강점하고 있으면서 이제는 민족공멸을 불러올 전면적 핵전쟁위기에 놓여 있다. 이처럼 분단고착화로 이어진 남북에 두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짧게 짚고 간다.

먼저, 대한민국의 수립과정이다.

위에서 밝혔듯이 유엔소총회 결의에 따라 1945년 5월 10일 38선 이남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를 반대하는 2.7구국투쟁과 4.3항쟁 등도 밝힌 대로이다. 이처럼 좌익진영은 물론 중간세력과 김구,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우익세력이 불참한 가운데 강행된 총선결과 이루어진 ‘제헌국회’는 무소속 85석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 54석, 한민당 29석, 대동청년단 12석, 민족청년단 6석으로 대부분 반민족 우익세력으로 채워졌다.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고 7월 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7월 17일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다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다.

38선 이남에서의 단독선거가 강행되자 1948년 6월 29일 평양에서는 (남북연석회의) 제2차지도자협의회를 개최하여 남조선의 5.10선거로 이루어진 ‘국회’를 ‘비법적 조직체’로 규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1948.7.5) 그리하여 8월 25일 남북조선 전지역에서의 ‘최고인민회의대의원선거’형식으로 진행되었다. 38이북에서도 212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였고 38이남에서는 전체유권자의 77.32%에 해당하는 673만2,407명이 선거에 참여(지하날인선거) 1080명의 대표를 선출했으며 이들 대표들은 8월 21~25일 사이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남조선의 인구 5만명에 1명 비례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대의원을 뽑았다.(남로당원 132명을 비롯한 조선인민공화당원 68명, 신진당원 31명, 사회민주당원 43명, 민주한독당원 35명, 근민당원 62명, 전평회원 66명, 민주독립당원 53명 등 연석회의 참가 정당사회단체 대표) 그리하여 9월2일 평양에서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제1차회의에는 남북조선에서 선출된 572명의 대의원이 모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을 채택하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하였다.(주5)

이제까지 해방조국이 강대국의 전후패권전략에 따라 부당하게 분할점령되고 이후 3상회의결정과 신탁(후견)찬·반대립, 미쏘공동위원회 결렬을 거쳐 ‘단독정부수립’이란 우리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유엔결의’에 맞서 남북연석회의를 소집 통일된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두 정부가 수립되고 동족상잔으로 이어진 과정을 알아보았다.

이처럼 외세간섭을 배격하고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정부를 세우려한 남북연석회의가 있은 지 65돌을 맞게 되었다. 비록 연석회의정신이 미국의 패권야망과 이에 편승한 반민족반통일세력에 의해 좌절되기는 했지만 민족존망의 위기 앞에서는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한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우리민족의 위기대응능력을 그대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한 민족적 과제를 두고는 언제라도 그 잠재된 민족역량을 발휘할 수 있음을 예시했다할 것이다.

남북연석회의 정신의 현재적 과제 : 주한미군철수와 평화협정 문제

여기에 남북연석회의 정신의 현재적 과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이자 지향인 우리민족끼리 외세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루겠다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과제이다. 구체적으로 현재의 정세와 조건에 대입해 보면 주한미군 철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그리고 연방제로 통일하는 과제이다. 연석회의시대에는 미·쏘양군 철수였지만 오늘은 미군만이 이 땅을 강점하고 있고, 단독선거반대가 분단고착과 그로인한 동족상잔을 막으려 했다면, 오늘은 불안한 정전협정으로 언제라도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기에 평화협정으로 전쟁을 종식시켜야 하며 통일자주정부를 세우기 위한 남북총선거가 당시는 가능했지만 오늘은 68년 동안 서로 다른 사회발전의 길을 걸어왔기에 사회통합은 오히려 민족적 사회적 혼란만 야기하게 되기 때문에 서로의 제도와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토대에서 일정기간을 연합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통일할 수밖에 없다할 것이다. 이미 남북 사이엔 6.15공동선언을 통해 연합·연방제 통일을 합의한 바 있다. 연방제통일문제를 이 같은 원론수준으로 마치며 가장 시급한 주한미군철수와 평화협정 문제를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주한미군철수 과제이다.

주한미군은 이른바 한미상호방위조약(1953.10.1 체결 - 1954.11.18 발효)과 주한미군지위협정(1966.7.9)에 의해 법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이 같은 일방적 존치는 정전협정체결 3개월 안에 정치회담을 소집 Corea로부터 모든 외국군대 철수 및 Corea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규정한 정전협정 4조 60항의 위반이다. 주한미군은 또한 유엔군 모자를 쓰고 있기도 한다. 이 또한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유엔군사 해체를 결의했기 때문에 주둔명분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68년이나 이 땅을 강점하고 있으면서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틀어쥐고 있다. 유엔에서의 유엔사 해체결의가 있자 유엔사 기능을 존속시키려는 술책으로 1978년 한미연합사를 설치해 미군장성이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유엔사와 연합사 기능을 분리하며 두 기구의 사령관을 맡고 있다. 이처럼 주한미군은 한미연합사를 통해 지휘통제를 실질적으로 강화하고 있으며, 이보다 상위기구로 한미국방장관이 공동의장으로 있는 한미안보협의회의(SCM-1968년 1차회의)와 양국 합참의장으로 구성된 한미군사위원회(MCM-1978년)를 통해 한미양국의 중요정책을 협의조정하고 작전지휘와 전략지침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권국가의 국방주권과 군사주권을 온통 틀어쥐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또한 정전협정 2조 12항 c목에 반하여 핵무기를 비롯한 최첨단 대량살상무기를 들여와 핵위협 등 대북군사적 압살정책을 펴오고 있다. 바로 미군주도하의 갖가지(팀스피리트, 키·리졸브/독수리, 을지프리덤가디언 등) 한미연합북침전쟁연습을 수십 년 동안 쉴 새 없이 강행하고 있다. 이 같은 전쟁연습에는 핵선제공격연습이 포함되고 있었다.

이 같은 주한미군은 식민지 지배의 점령군처럼 치외법권적 지위를 가지고 우리 국민에 대한 살인, 강간, 강도 등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 형벌은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상식 이상의 보호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용산, 평택, 오산, 대구, 진해 등 미군기지는 미국영토로 간주해 쓰고 있으며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지라는 임무에서 전략적 유연성이란 미국의 전반적 이익을 위한 침략기지화 되고 있음에도 기지사용료를 내기는커녕 방위비분담금 명목으로 주한미군의 주둔비용 42%에 해당하는 금액을 한국정부에 부담시키고 있다.(2012년-8,361억원, 1991~2012년까지 10조7,553억원)

이처럼 주한미군은 해방된 조국을 분단시킨 장본인이며 재통일을 가로막고 정전협정과 유엔헌장에 반하여 끊임없는 북침전쟁연습으로 이 땅의 평화와 안정을 깨고 주권국가의 군사주권을 가로채고 있다. 우리민족은 이미 7.4남북공동성명(1972.7.4) 남북기본합의서(1991.12.13) 6.15공동선언(2000.6.15) 10.4평화번영선언(2007.10.4)을 통해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평화통일과 민족의 공동번영을 약속했다. 미군이 이 땅에 남아 있어야할 명분은 사라졌다.

그러나 미군의 이 땅 강점은 처음부터 일본군항복과 무장해제라는 주둔명분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전후 세계전략에 따라 이 땅에 들어왔고 제국주의적 패권야망이 68년을 강점하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철거투쟁은 남북연석회의에서 보여주었듯이 우리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이자 지향인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온 겨레가 함께 해서 이루어내야 할 민족적 과제로 되고 있다.

다음으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과제이다.

인류역사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또 다시 평화로 복원되기도 했다. 가공할 살육과 파괴가 있었던 1,2차 세계대전이 있었지만 곧바로 강화조약과 국제연합 같은 평화체제로 구축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두 주역 미국과 일본도 미일안보조약(1951.9.8)으로 오히려 어제의 적이 우방으로 전환되었으며 악명 높은 침략전쟁이었던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도 국교수립을 했다.(1995.7.12)

그러나 이 땅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60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불안한 정전상태로 남아 있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때문이다. 60년을 이어온 봉쇄와 차단 등 대북제재에 쉴 새 없이 감행되고 있는 북침전쟁연습 등 군사적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 서해에서는 북방한계선(NLL)문제(해상경계선에 대한 양측의 주장이 다르다)로 서해해전과 연평도 포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고 했다. 1950년대 동·서냉전시기 남북이 각각 강제편입되어 서로 적으로 싸웠다면 이제는 그 냉전의 주역이 사라졌다. 언제까지 그 비극적 악역을 우리민족이 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이제는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대결과 갈등을 없애야 한다. 무엇보다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끝나야 한다. 불안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실질적인 전쟁종식을 선포해야 한다.

특히 지난해 12월 12일 북측에서 인공위성을 발사한 이후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2084호)와 이에 맞선 자위적 핵억지력으로 3차 핵실험이 단행되었고 또다시 유엔제재(2094호)로 이어지는 동안 오늘 이 땅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핵전쟁의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은 B-52, B-2 등 전략폭격기와 F-22 스텔스전투기, 핵추진잠수함을 잇달아 전개시켜 대북핵공격 위협을 감행하고 있으며 북에서는 대미전면전을 선포하고 있다. 남북사이 모든 소통채널이 막혔고 남북사이 화해협력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마저 가동이 중단되고 있다.

바로 민족존망의 최대위기를 맞고 있다. 전쟁을 막아야 한다. 이 같은 위기를 몰아온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끝나야 한다. 그리하여 주권평등의 원칙과 정의와 평화의 토대에서 대화와 협상으로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 남북연석회의정신으로 우리민족 모두 떨쳐 일어나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지키고 평화와 통일세상을 이루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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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1946년 현재 국립경찰에 재직중인 식민지경찰출신자 비율 - 치안감 11명(100%) 청장 8명중 5명(63%) 국장 10명중 8명(80%) 총경30명중 25명(83%) 경감 139명중 104명(75%) 경위 969명중 806명(83%)였음. 또한 남조선과도정부 고위관리 115명 가운데 총독부관직이 70여명, 식민시대 공동기업, 자본가 등 23명이었으며 군수는 9명중 8명이 일제시대 관료였음 - 한국전쟁의 기원.

(2) 신문지법(1907년 제정)군사법령(1908년) 정치집회금지법(1910년) 치안유지법(1925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1936년) 선동문서통제령(1936년) 조선사상범예비구속령(1941년) 조선전시군사특별령(1944년), 여자정신대근무령(1944년) - 한국근현대100년사. 거름

(3) “조선인민들이여! 붉은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중략) 노예의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 버렸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있다. 붉은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인민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광복30년 중요자료집 월간중앙 부록)

(4) 얄타회담에 참가한 헤리만 주쏘련대사에 따르면 스탈린은 “조선인이 자기의 정부를 만들 수 있다면 어째서 신탁통치가 필요한가”라고 질문했다고 함

(5) 북한총람(공산권문제연구소) 현대조선역사(일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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