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부고, 비전향장기수 박종린 선생 타계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비전향 장기수 박종린 선생이 26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2차 송환 희망자였던 선생은 2017년부터 대장암으로 힘겨운 투병을 해왔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북측에 두고온 딸과의 재회를 꿈꾸며 송환을 기다려 왔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선생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에서 4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의 아버지는 1930년대 김일성 주석이 이끈 조국광복회 소속 유격대원이었다. 아버지는 해방 직전 일본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1946년에 숨을 거뒀다. 평양으로 옮겨온 선생은 1948년 항일혁명가 유자녀들이 다니는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선생은 김일성 주석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학원에도 자주 찾아오시고 바로 옆에서 볼 수도 있었어요. 한마디로 인자하고 호탕한 분이었습니다.” 선생은 기숙사 생활을 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입대했다. 대구팔공산 전투와 고지방어전 등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살아남아 소좌(소령)까지 진급했다.

선생은 1959년 6월에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내려올 당시 아내와 태어난 지 100일도 채 안된 딸이 있었다. 오래 머무르는 임무는 아니었다. 먼저 남파된 지하조직원에게 지령을 전달하고 곧바로 북으로 돌아가기로 돼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위에서 올라오라는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체류가 길어졌고, 남파 6개월 만인 그해 12월 체포되었다.

선생은 이승만 정권 말기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무기징역을 두 차례나 받았다. 대구와 광주, 전주, 대전교도소를 옮겨 다녔다. 선생은 2018년 7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인간 이하 취급을 받을 때는 수치스럽고 반발심도 생겼습니다. 국가 법률로 수용시켰으면 규칙에 맞게 대해야 되는데 일반 재소자들보다 차별받고, 조금만 뭘 해도 수백 배 이상의 보복을 당해야 했습니다. 또 배고픔의 고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문을 통한 강제전향 공작은 다시 상기하고 싶지도 않은 악몽과 같은 기억입니다. 폭력으로 억압한다고 해서 생각이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선생은 4·19와 5·16을 거치며 35년간 감옥에서 현대사의 격동기를 보냈다. 1993년 12월 병보석으로 형집행정지를 받았다. 다 죽게 된 몸으로 출소한 선생은 문익환 목사의 도움으로 전남 무안의 교회에서 건강을 추스르며 6년을 생활했다. 전향서를 쓴 적 없는 선생은 2000년 1차 송환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전향자로 분류돼 송환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교회에 나와 있는 사람을 비전향장기수라 인정할 수 없다는 일방적인 규정 때문이었다. 선생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2차 송환 희망자들과 함께 송환을 촉구하는 투쟁을 펼쳐왔다. 선생은 2007년 평양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행사로 방북 길에 올라 딸을 만났다. “당시 평양 태권도전당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복도 쪽에서 한 중년여성이 자꾸 쳐다봐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에 북측 관계자에게 물어봤더니 딸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날 버스에 앉아 있는데 딸과 사위, 손자, 손녀가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뛰어내려갔는데 주위에서 막는 바람에 손도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겨우 얼굴만 보고 와야 했습니다.” 선생은 중국에 있는 조카를 통해서 딸이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있다는 것과 아내가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중국 훈춘에서 14년. 북의 평양에서 13년. 그리고 남한에서 62년을 살다간 선생은 끝내 딸 옥희씨와의 재회를 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애틋한 일생은 자우녕 감독이 2019년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옥희에게’에서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다.

선생의 빈소는 인천사랑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되었다. 추도식은 27일 오후 6시에 빈소에서 진행된다. 발인은 28일 오전 6시다. 유해는 화장된 후 서울 종로구 금선사에 안치될 예정이다. 문의:(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회장 김혜순) 02) 874-4063.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2018년 7월 17일, 인천 부평 자택에서 만난 박종린 선생/정지윤 기자

박종린 선생 별세로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는 이제 11명만 생존해 있다. 이광근, 문일승, 김교영, 이두화, 양원진, 최일헌, 박정덕, 박희성, 박순자, 김영식, 양희철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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