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장기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왜 송환돼야 하는가

 

205943_90433_617.jpg [특별기고]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1. 한국사회에서만 존재했던 장기구금 피해자

비전향장기수란 ‘한국’사회에서만 존재했던 특수한 사법체계 과정의 반인권, 반인륜, 반문명 피해자들이다. 바로 이들은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 반공법, 사회안전법(보안관찰법) 등 반인권·반통일 악법으로 구속되어, 수십 년 감옥을 살면서 잔혹한 고문 등 사상전향 공작에 맞서 통일조국에 대한 신념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낸 불굴의 인간 승리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또한 ‘한국’사회에서만 존재했던 외세와 분단, 냉전과 대결 과정의 산물이다. 우리 민족은 강도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맞서 싸워 연합국 승리와 함께 조국 광복과 민족해방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독립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가 거부당한 채 새로운 점령군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강대국의 패권적 전후 세계전략에 강제 편입되어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겪어야 했다.

동·서 냉전이 강대국 사이의 대결 국면이라면 자주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자주냐 외세공조냐 하는 또 다른 대치국면이 적어도 ‘7·4 남북공동성명’이 있기까지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위에서 말했듯이 가장 엄혹한 조건에서 세상과 격리, 인간이기를 거부당한 채 수십 년 감옥을 살아야 했다.

2. 장기구금 양심수의 실태가 드러난 계기

그러나 영원한 지옥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 같은 반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인 야만행위도 정의·평화·인권을 위한 그칠 줄 모르는 가치추구 앞에서 그 사각지대가 노출되었다. 그들의 실상과 문제점이 민족문제와 인권 차원에서 정치·사회적으로 쟁점이 되고 ‘비전향장기수’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1988년~89년은 그런 계기이기도 했다.

먼저, 1988년 12월 21일. 양심수 대사면이다.

비록 노태우 군부독재정권 시기이지만 김대중 야당 대표의 절대적 영향력으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준)) 관련 양심수를 비롯한 대부분 시국사범 관련자들이 사면·석방되었다. 이때 강제전향 당했던 장기구금 양심수들이 다수 포함됐다.(양원진, 김영식, 박희성 외 다수) 그러나, 청주감호소에 남아 있던 감호처분 양심수와 대전·대구·광주·전주·안동 교도소에 갇혀 있던 260여 명 장기구금 양심수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장기구금 양심수(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감옥 살았던 남민전 관련자들이 석방되면서 오늘 말하는 ‘비전향장기수’ 실상이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은 유일하게 ‘비전향장기수’들과 특별사동에 갇혀 있었다.

다음으로, 1989년 5월 29일 사회안전법 폐기이다.

사회안전법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남북이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 정신을 짓밟으며 반공·반북 동족대결과 남쪽에서의 이른바 좌익척결을 명분으로 1975년 7월 16일 날치기 제정한 반인권·반통일 악법이다.

국가보안법이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면 사회안전법 또한 군국주의 일제의 ‘조선사상전향제도’(1933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1936년),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1941년) 등을 모방하여 제정되었다. 이 법의 핵심 뼈대는 이른바 ‘감호처분’이었다.

공안당국이 말하는 좌익수(사상범 또는 정치수)로 사상전향을 하지 않고 출소한 사람이나 만기출소한 좌익수가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을 때 새로 만들어진 또 다른 감옥에 ‘감호처분’, 바로 가두는 것이다. 이미 혐의에 대한 법관의 판결로 복역을 마친 사람을 법관 판단 없이 재수감시키는 최악의 반인권·반인륜 범죄였다. 이 밖에도 공안 검사의 임의적 판단으로 일정 공간에서만 거주·활동할 수 있는 ‘주거 제한’과 언제나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그 활동을 보고케 하는 ‘보안관찰’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반인권·반인륜 악법이 언제까지 존치될 수는 없었다. 법관의 판단이 아닌 행정부의 명령으로 처벌받는 위법·위헌성이 있었고, 한 번 처벌 받은 죄를 또다시 처벌할 수 없는 ‘일사부재리원칙’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사상·양심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었다.

특히 6월항쟁 이후 민주화 열기와 인권 감수성 변화 등 시민사회의 악법 철폐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1988년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주감호소에 갇혀 있던 서준식, 강종건 등 재일동포 유학생 사건 관련자들이 풀려나와 명동성당에서 ‘사회안전법 폐기’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국 1989년 5월 29일 사회안전법이 폐기되고 대체입법으로, 똑같은 반인권·반통일 악법인 ‘보안관찰법’이 제정되었다.

사회안전법으로 감호처분(청주감호소에 수감)을 받은 사람은 모두 155명이고 1988년 초 청주감호소에 남아있던 사람은 52명이었다. 그리고 서준식 등 17명이 그해 말까지 석방되었고, 1989년 5월 사회안전법 폐기와 함께 남아있던 35명 전원이 감호처분에서 해제, 바로 조건 없이 석방되었다. ‘비전향장기수’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1989년 3월 19일 ‘민가협양심수후원회’(오늘의 (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약칭 양심수후원회)의 발족이다.

양심수후원회는 그 결성 준비과정에서 확인된 청주감호소, 대전·대구·광주·전주·안동교도소에 갇혀 있는 장기구금 양심수(이는 당시 사회적으로 공유된 용어가 아니고 장기구금 양심수 가족들이 억울하게 갇혀 있음을 비유하여 사용한 명칭이었다. 약칭 ‘장기수’라고 했음)들의 실태조사를 토대로, 이들 ‘장기구금 양심수’의 석방과 후원을 목표로 양심수후원회를 결성했다.

양심수후원회는 발족 이전 준비과정에서, 앞서 말한 청주감호소와 대전·대구·광주·전주·안동교도소에 ‘공안사범’이라는 특수신분으로 특별시설에 갇혀 있으면서 외부 접근이 금지되고 있는 이들의 실체를 밝힌 ‘장기복역 양심수 실태보고서’(1989년 2월)를 세상에 내놓았다.

청주감호소에는 앞에서 밝힌 대로 35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감호처분을 받고 있었고, 대전 등 5개 교도소에는 여러 사건으로 분류되는 225명의 장기복역 양심수가 최고 무기형, 최대 복역연수 39년이나 되는, 감옥이 아니라 차라리 지옥이라 할 수 있는 인권의 사각지대가 있음을 밝히게 되었다.

바로 5개 교도소에는 ‘구미유학생 사건’(이 사건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있었던 잘 알려진 사건이지만 ‘간첩죄’를 적용, ‘공안사범’으로 분류돼 있었던 뒤에 재심에서 무죄판결) 김성만 등 6명, ‘재일동포사건’(서승, 이헌치 등 19명), ‘일본관련사건’(장의균, 류종인 등 51명), ‘월북기도사건’(박상은 등 11명), ‘불고지죄’(박동운 등 15명), ‘납북어부사건’(안장연 등 16명), ‘통혁당재건위사건’(진두현, 류락진 등 14명), ‘개별 국보사건’(함주명 등 31명), ‘남파공작원(안내원)사건’(김종호 등 62명), ‘미확인’(4명) 등 225명이다.

이들 대부분이 ‘간첩죄’가 적용됐다. 또한 위 구미유학생 사건 관련자 포함 대부분이 재심에서 무죄판결 받은 조작사건이다. 다만 남파공작원 등 비전향장기수들은 예외였다. 대부분 남파공작원으로 분류되는 사례이지만 무기형을 선고받은 사람만 83명이고 20년 이상 장기형이 47명이었다. 30년 이상 복역한 사람이 21명, 20년에서 30년 사이 복역자는 29명, 10년에서 20년 사이가 74명이나 되었다. 특히 이종환, 김선명 두 분은 39년을 갇혀 있었다(1950년 전쟁시기 이른바 국방경비법 위반). 그리고 남파공작원 또는 안내원 등 82명 중 50명이 대전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이 실태보고서는 군부독재 시기 엄혹한 공안정국의 면회금지라는 특수시설과, 사회적으로 마치 ‘비국민’ 대우 대상인 ‘좌익수’, ‘빨갱이’, ‘간첩’이라는 특수신분이기에 특별감시 당하고 있는 피해자 실태를 조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고, 반인권·반문명 야만 시대를 조명했다는 데서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개선 투쟁의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3. 비전향장기수 석방운동 경과

앞서 밝혔듯이, 양심수후원회는 감옥에 갇혀 있는 모든 양심수(학생·노동자·민주인사 외)의 석방과 후원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 당시 260여 명에 이르는 장기구금 양심수(이 명칭은 비전향장기수 전원석방 뒤 2005년까지 ‘비전향장기수’와 상황에 따라 함께 호칭되었지만 2차 송환운동 이후 2005년 ‘비전향장기수’로 통일되었다. 상세 내역은 다음 송환 운동에서 설명)를 위한 단체로 출범했다.

당시 단체이름을 ‘장기수후원회’로 하느냐, ‘양심수후원회’로 하느냐로 많은 토의 끝에 이분들은 자기의 양심에 따른 활동으로 구속되었다는 점, 당시 양심수라는 용어가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는 점, ‘장기수’라는 일반적 선입견은 공안당국이 말하는 ‘공안수’(빨갱이, 간첩, 용공분자 등)를 연상케 되는 점 등을 들어 민가협의 특수협의체로서 ‘민가협 양심수후원회’로 정했다.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은 1974~5년 민청학련사건(인민혁명당사건 포함) 당시 구속자 가족운동과 1976년 명동성당 3·1 구국선언사건 당시 구속자 가족운동(그 당시만 해도 양심수 가족이란 용어는 쓰지 않았음)의 흐름을 이어 1985년 12월 12일 발기(출범)했다. 장기구금양심수가족협의회(장순향), 노동·농민가족협의회(권처흥), 유가족협의회(이소선), 청년민주인사가족협의회(초대회장 이청자), 재일교포구속자협의회(조민조) 등으로 구성되었다.

양심수후원회가 특수협의체라는 뜻은 다른 협의체는 모두 구속자(양심수) 가족 모임인데 반해 양심수후원회는 가족들의 모임이 아닌 특정 구속자(장기구금 양심수)의 석방과 후원을 위한 사회대중단체였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엄혹한 공안정국에서 민가협이란 단단한 인권단체의 엄호를 받는 수단이기도 했다. 회원들은 양심수 가족, 출소 양심수, 변호사, 의사, 교수, 교사, 학생, 주부, 노동자 등 각계각층이 망라되었다.

양심수후원회는 1990년대 초(1990년 3월 현재) 장기구금 양심수가 164명으로 줄고 있을 때 부터 내부적으로 현재 갇혀 있는 장기구금 양심수 개념을 명확히 했다. 바로 ‘수십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조국통일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존엄해야 할 인간의 양심을 지켜온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양심수 규정은 석방운동에 결정적 탄력을 받게 된다. 불교인권위원회, 기독교인권위원회,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차례로 공명하게 되었고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Amnesty)도 한국 감옥에 갇혀 있는 장기구금양심수를 ‘Prisones of Conscience’(양심수)로 규정, 석방운동에 큰 힘을 받게 했다. 엠네스티는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가 27년 감옥을 살고 있었어도 ‘양심수’로 규정하지 않았다. 폭력을 사용했다는 이유였다.

아무리 군부독재(노태우 정권)라 해도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일반적 인식의 고도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1988년 12.21 대사면(이때도 226여 명은 제외되었다) 이후 3·1절·석탄절·광복절·성탄절 등 계기에 일반 양심수와 함께 장기구금 양심수도 형 집행정지 등으로 석방시켰다. 1989년의 경우 1,700여 명의 양심수가 갇혀 있었다.

그리하여 1990년엔 장기구금 양심수도 164명으로 줄었다. 1991년 124명, 1992년 90명, 1994년 75명, 1995년 75명, 1996년 66명, 1997년 58명, 1998년 43명 등으로 줄었다.

이 기간 양심수후원회는 처음으로 이들 장기구금 양심수들에게 영치금과 영치물, 편지를 보냈고 직접 교도소를 찾아 접견을 했다. 수십 년 만에 외부 사람을 만나는 첫 경험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들로부터 편지가 보내져 왔다. 칠흑 어둠 속에 빛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91년 2월 25일 70세 이상 노·병약자 이름으로 비전향으로 류한욱(당시 74세), 방재순(74), 장호(71), 허영철(71), 김우택(71) 다섯 분이 출소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5월 11일 김종호, 왕영안 두 분, 1991년 12월 24일 김석형, 박봉현, 임병호, 조창손 등 네 분, 그리고 1993년 3월 6일 당시 최장 복역자 중 한 사람인 이종환 노인이 출소했다. 1993년 5월 23일 천광섭 외 3명, 1993년 12월 박동운 외 3명이 출소했고, 1995년 8.15 특별사면으로 최장 복역자 김선명과 안학섭, 한종호 세 분이 석방되었다.

위에 밝힌 비전향장기수들이 석방될 때, 강제전향 당했던 일부, 재일동포 사건, 일본 관련 외 대부분의 장기복역 양심수가 석방되었고, 1999년 초 감옥엔 29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남아 있었다.(서경원 등 방북 사건과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조국통일애국동맹 등 장기형을 받은 분들은 이 통계에 해당되지 않음)

그리고 1999년 2월 25일 우용각(당시 최장기 복역) 등 27명이 석방됐고, 같은 해 12월 31일 마지막 남아 있던 신광수, 손성모 두 분이 석방됨으로써 양심수후원회 발족 10년 만에 260여 명 장기복역 양심수 전원이 0.75평 독방, 그 악명 높은 감옥에서 모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양심수후원회는 장기복역 양심수만을 위한 석방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비록 영치금, 영치품 등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학생, 노동자 등 모든 양심수 석방 운동에도 헌신했다. 강제연행, 강압수사에 항의하고 양심수 재판 방청, 교도소 면회를 민가협 회원들과 함께 했다. 경찰서, 검찰, 법원, 교도소를 찾아 양심수 탄압을 항의하고 석방을 촉구했다.

또한 양심수가 왜 석방되어야 하는지 현장 활동을 중심으로 각 사건의 특수성 등을 고려한 논리를 개발, <한겨레신문> <통일뉴스> <민중의소리> 등 언론사와 각 대학 신문 등에 기고하여 사회 여론화에도 힘썼다.

당연히 양심수후원회는 장기구금 양심수가 모두 풀려나온 뒤에도 위에서 말했듯이 모든 양심수 석방 운동과 함께 영치금을 보내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4. 비전향장기수 송환 운동

1) 리인모 인민군 종군기자 송환

비전향장기수 중 북녘 조국과 가족 품으로의 송환은 리인모 인민군 종군기자가 처음이다.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로서 조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해 온 사람도 리인모 노인이 처음이다. 리인모 노인은 조선인민군 제6사단 종군기자로 참전, 진주전선에 배치되고 이후 일시적 후퇴 당시 퇴로가 차단되어 지리산에 입산했고 경남도당일보를 내고 있었다.

수많은 격전 끝에 1952년 1월 체포된다. 빨치산 투쟁에서 가장 장렬했던 대성골 전투 바로 직후였다. 당시 리인모 종군기자는 거제포로수용소로 보내 달라 했지만 국가보안법으로, 뒤에는 사회안전법으로 수십 년 옥고를 치렀다.

리인모 노인도 1988년 10월 27일 청주감호소에서 풀려나 잠시 수도권에 머물다가 경남 김해 진영에 사는 독지가 김상원님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감옥 후유증을 치료받고 있었다. 그러나 체포 당시의 중상과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또 뇌출혈을 겪기도 하여 늘 불편한 몸이었다.

1993년 2월 14일 갑작스런 의식불명으로 급히 부산대병원으로 옮겨 흉막염증을 진단받는다(2월 15일 – 권오헌, 권낙기 등 현장 방문 확인). 이 소식이 있고부터 사회 각계에서 ‘리인모 송환 요구’가 빗발쳤다. 같은 해 3월 9일 또다시 뇌출혈 등으로 부산대병원에 급송됐다(당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은 겨우 출소 3일 된 문익환 목사 요청으로 문익환, 전창일 두 분을 모시고 부산대병원에 가서 문병한 바 있음, 악성 흉막염과 폐렴).

3월 11일 민가협(양심수후원회), NCC, 한청연, 민변, 고난함께, 불교인권위, 민자통, 여연 등 단체 대표 등이 기독교선교원에 모여 ‘리인모 선생 송환추진 위원회’ 준비모임을 가졌다. 부산대병원의 리인모 병세는 악화와 완화를 거듭했다.

이때쯤 정부(통일원, 장관 한완상)는 리인모 노인의 송환을 기정사실화 한 것 같았다(한완상 장관은 통일원장관 이전에 강남 현대교회에 다녔으며, 양심수후원회를 적극 지원하고 있던 현대교회 초청으로 권오헌 회장은 장기구금, 양심수 문제, 송환 문제 등을 주제로 강연을 했었음. 한 교수와 개인적 친분을 쌓고 있었음).

1993년 3월 16일 밤,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이인모 선생 송환 긴급 간담회’가 있었고, 3월 17일 민가협(안옥희 회장, 임기란 전 회장 외), 양심수후원회(권오헌 외), 출소 비전향장기수들을 비롯한 전국에서 부산대병원에서의 환송 준비를 했으며, 이미 정부 방침은 결정되어 19일 송환하기로 했다.

17일 부산지역 안기부 대표(성명 미상), 통일원에서 파견 나온 정부 대표, 사회단체 대표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이 리인모 노인에게 보내온 선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게 되었다. 밤늦도록 토론했으나 안기부는 ‘국가기밀누설’ 등의 이유로 보내줄 수 없다고 했고 권오헌 대표는 ‘선물’을 본인 의사에 반하여 차단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 도덕·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로 빼놓지 않고 보내야 한다고 맞섰다. 통일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날 밤 결론을 못 내리고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했다.

3월 18일 리인모 노인 병실은 진영에서부터 돌보아주셨던 출소장기복역양심수 한창호 선생이 통제하고 있었다. 일체 안기부와 경찰, 그리고 신원이 명확하지 않으면 면회는 못하게 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대전 등에서 많은 분들이 환송하러 왔다.

필자는 그날 일기에 썼다.

가셔야 한다. /조국이기에/ 그 조국을 사랑했기에/ 그 조국이 안아주기 때문에/ 그 조국이 자랑스럽기 때문에!

안기부, 통일원, 사회단체(양심수후원회) 다시 선물 문제 협의. 결국은 ‘풀고 확인 다음 보낸다’는 데 합의했다. 선물을 제3자가 손대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던 것을, 일단 다 보낸다는 점과 서로 양보했다. 한점 한점 다 점검하고 다시 포장하여 보내준 이들의 소속, 성명을 다시 기록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큰 가방에 넣어 봉인까지 마쳤다. 그런데 뒤늦게 조선옷(한복) 두 벌이 도착했다. 리인모 노인은 이미 누군가 보내준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내일 떠나기로 돼 있었다. 리인모 선생이 말했다. “이 옷 두 벌은 양심수후원회 회장에게 맡기니 장기수 선생 두 분께 드리세요”라고.

긴 하루였다. 긴장과 초조, 환송하는 마음과 아쉬움, 또 우익세력의 돌발 난동도 경계했다. 밖에서는 부경총련 학생들의 환송문화제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새벽이 다가왔다. 3월 19일 아침 5시 10분 리인모 노인은 아침식사를 하고 40분에 다시 건강검진, 그리고 조선옷으로 갈아입었다. 병실부터 복도 양쪽에 전혀 보이지 않던 전투복 경찰이 도열했다. 수많은 보도진들 플래쉬가 반짝인다. 1층으로 내려오는 내내 경비 삼엄, 수백 명 학생들이 단일기를 들고 환호, 리인모 노인 흡족한 미소로 손 흔들어 답례한다. 대기한 구급차에 옮겨 타고 김해 공항으로 마침내 떠나셨다. 많은 사람들 서로서로 손잡고 성공적 송환을 축하한다. 심지어 이틀간 다투었던 안기부 책임자까지 흡족하게 손잡고 서로 격려했다.

병원 한쪽에서 리인모 선생 환송집회가 열리고 있다. 부경총련 부산연합 환송 나온 모든 이들이 함께 했다. 집회 마지막에 한복(조선옷) 두 벌 리인모 선생 뜻에 따라 두 분 선생님께 드린다. 입원하여 오늘까지 병실을 지켜주신 한창호 선생님과 먼 길 마다 않고 수시로 찾아오신 윤희보 선생님께 양심수후원회장 이름으로 드렸다. ‘안녕히 가십시오/그리운 조국 하늘 /반가운 여러분께 안녕히 가십시오.’ 수영비행장에서 판문점으로-개성-평양에 도착했다는 저녁뉴스를 듣다.

좀 길어졌다. 최초의 송환을 주장했고 처음으로 그 주장을 실천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알고 있는 비전향장기수 송환의 정형(定型)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로 송환을 이뤄낸 점. 비록 남북은 외세에 의해 갈라져 있지만 우리 민족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민족 한핏줄이다. 그런 동포애와 인도주의 정신으로 송환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이 정형에 따른 당위성과 논리성을 갖게 된다.

2) 김인서(평남 평원)·함세환(황해도 옹진)·김영태(평북 정주) 노인 송환운동

리인모 노인 송환이 이뤄진 뒤 같은 전쟁포로 출신이었던 김인서(1929년생)·함세환(1932년생) 두 비전향장기수가 자신들도 조국해방전쟁(한국전쟁)에 참전한 전쟁포로임을 주장하며 북녘 조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리인모 노인 송환 추진위를 함께 했던 인권·종교 단체들이 다시 모였다.

1993년 6월 2일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기독교교회협의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천주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 등 6개 단체가 ‘김인서·함세환 노인 송환추진본부(김인서 노인의 당시 이름은 김국홍. 남쪽에서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지은 이름으로 이후 김인서로 통일함)을 발족시키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뒤 같은 전쟁포로 출신 김영태(1930년생) 노인이 1994년 8월 국제적십자 총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전쟁참전 중 적군의 세균무기에 감염돼 소속부대를 잃고 지리산에 입산,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2년 4월 체포된 전쟁포로임을 주장하며 원적지로의 송환을 협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인권·종교단체들은 송환기구 이름을 ’김인서·함세환·김영태 노인 송환추진본부‘로 했다.

이 같은 남쪽에서의 추가송환운동에 화답하여 북쪽에서는 1994년 10월 14일 ‘남조선 비전향장기수구원조선위원회’를 결성 세 분 전쟁포로 출신 비전향장기수의 송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 세 분 송환 운동은 해외에서도 함께 했다. 1995년 독일 거주 한인회(대표 김순환·신옥자)에서도 김인서·함세환·김영태 귀향추진회를 결성, 조국과 가족품으로의 빠른 송환을 촉구했다. 또한 독일 내 프랑크푸르트(1996.10.5), 보쿰지역(1996.10.3) 등에서도 별도 한인회들이 송환 추진 모임을 만들었다.

이처럼 남·북·해외에서 세분 송환을 위한 추진기구가 결성되고 서로 협력하는가 하면 국제적십자 등에 요청, 송환운동을 벌였지만 당시 김영삼 정부는 대북 적대정책으로 일관, 전쟁포로송환의 당위성과 동포애 정신, 인도주의마저 외면하고 있었다.

남측에서는 이러한 정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기자회견이나 성명서를 내오는 등 그외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못했다. 다만 민가협(양심수후원회)은 ‘목요집회’를 통한 송환촉구와 특히 언론인터뷰나 기고문 등으로 송환당위성을 주장했다. 사례들로는 다음과 같다. ‘장기수출신 세 노인을 북녘가족에게’<한겨레신문(1995.5.1.)>, ‘전쟁포로송환은 남북화해실현의 길잡이’<동국대신문(1998.10.7.)>, 또 김인서 노인 김화심 따님과 함세환 노인 함숙녀 누님, 김영태 노인의 김룡제 아드님 편지를 사회적으로 공유하며 동포애와 인도주의 정신으로 송환할 것을 촉구했다.

북측에서는 ‘남조선 비전향장기수구원 조선위원회’ 결성을 전후하여 기자회견, 담화, 성명서를 통해 송환을 촉구했고, 특히 가족들이 남측 세 분 당사자와 단체들에, 그리고 국제적십자사 등을 통해 송환을 촉구했다.

김인서 노인의 큰따님 김화심(평양외국어대학 강좌장)과 둘째따님 정심(유치원 원장)은 1993년 10월 25일, 네 번째 보낸 편지에서 “저와 정심이는 저희들이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고 쓴 아버님의 편지 구절을 읽으면서 옥고를 치르신 기나긴 나날에도 이 딸들을 가슴속에 품고 키워 오신 혈육의 뜨거운 정이 뼛속까지 젖어들어 아버님을 부르며 목놓아 울었습니다...”고 했다.

함세환 노인의 누님 함숙녀님도 80고령의 나이에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를 동생과 단체에 보내왔고(1994, 4,27), 김영태 노인의 아드님 김룡제(평양에서 행정경제지도원)도 양심수후원회에 송환운동에 감사하며 계속 협력을 요청하는 펀지를 보내와(1994.10.31.) 통일원에 알리고 사회단체와 공유했다.

특히 김인서 노인의 큰따님이 1995년 4월 중국 베이징으로 날아와 아버님과 직접 통화를 했었고 둘째 따님도 199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세계법률가 및 인권운동 유관단체 모임의 초청을 받아 아버님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던 극적 장면도 있었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신옥자 대표님 등은 편지, 전화 등 남북을 연결하며 세분들 송환운동에 헌신적 활동을 다했다. 이 세분들은 다 같이 1950년 전쟁시기 인민군 또는 의용군(함세환)으로 입대 참전했고 정규전과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된 전쟁포로였다. 당연히 정전협정 당시 송환됐어야 함에도 이른바 전시특별법, 국가보안법 등으로 오히려 감옥을 가야 했고, 20년 만기출소 당시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다 하여 사회안전법에 의한 감호처분을 받아 모두 34년의 옥고를 치렀다.

3) 1차 송환(2000. 9. 2. 63명)

△ ‘비전향장기수송환’이라함은 분단조국의 하나됨을 염원하여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오며 오랜 구금 끝에 풀려난 비전향장기구금양심수(비전향장기수)가 체포되기 전(포로 되기 전) 소속지역(원적지, 거소지, 또한 가족이 있는 곳)이나 거주지, 국적선택에 대한 당사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북녘 조국으로 돌아감을 말한다.

△ ‘송환’이라 함은 편의상 한국(조선)정전협정 제3조 51항 c목에서 표시된 우리말 ‘송환’(영문"Repatriation", 한문 遣返)에 따른 것이며 단순한 ‘이산가족재결합’ 차원을 넘어서 ‘반드시 실행되어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 할 것이다.

위 인용글은 ‘비전향장기수송환을 위한 토론회(2000. 2.23)에서의 필자의 발제문 앞머리글이다. 이 잠정규정은 오늘에서도 본질적으로 다름없다.

△ 비전향장기수 송환문제는 성격상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로 원적지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노인 등(이밖에도 유윤형, 이송환, 황용갑 등이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4조1항)이 규정한 전쟁포로 범주에 포함된다) 전쟁포로 송환문제이고, 다른 유형은 국가보안법 등 반민주악법으로 장기구금 되었다가 풀려난 이종, 류한욱, 우용각 노인 등(대부분 이 유형에 속한다) 비전향장기수의 구속되기 전 소속지역 거소지 송환 문제이다(같은 글 인용).

△ 이들은 다 같이 부당하게 장기구금 되었다는 점, 잔혹한 고문 등 사상전향공작에서도 통일염원인 정치적 신념을 지켜왔다는 점, 오랜 옥고에서 풀려나 형식상 자유인이 되었지만 다시 ’보안관찰법‘의 규제를 받고 있다는 점, 고향과 가족이 그리고 구속되기 전 거소지가 (특히 신념의 고향이) 북쪽이라는 점, 자유의사로 귀향 의지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같은 글 인용)

다시 말해 이들은 아무 조건 없이 북녘조국과 가족 품으로 송환되어야 했다. ‘9.2 63명 송환운동’은 이러한 기조와 논리적 근거를 갖고 시작된다. 앞서 밝혔듯이 비전향장기수는 청주감호소에서 그리고 1999년 12월 31일까지 대전, 대구, 광주, 전주 등에서 모두 석방되었다. 송환운동이 시작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1999년 11월 29일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천주교장기수후원회, 불교장기수후원회, 전국연합, 푸른영상 등 인권, 종교 시민사회단체 다수는 간담회를 갖고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노인 송환추진기구’를 ‘비전향장기수송환 추진위원회(가칭)’로 확대 개편하고 12월중 정식 결성 기자회견을 갖기로 했다.

이보다 앞서 같은 해 2월 23일 북측 조선적십자회 장재언 위원장은 남측 적십자사 정원식 총재 앞으로 편지를 보내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노인 외에 출소할 17명 비전향장기수와 북으로 오겠다는 이들을 모두 송환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24일 1주년 기자회견에서 북의 주장에 대해 남북 사이 공정한 대화가 필요하고 일방적인 송환에는 회의적이라고 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2월 22일 법무부장관을 통해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 특별사면, 특별감형, 특별복권 조치‘를 발표 – 대전교도소 등에 갇혀 있는 우용각 노인 등 비전향장기수 17명을 준법서약 없이 석방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2월 25일 실행되었다.)

1999년 12월 16일,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등 인권, 종교, 법조 시민사회 단체 대표 150여 명을 청와대로 점심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인권, 종교 등 시민사회 요구사항을 권오헌 민가협 공동의장(양심수후원회 회장)이 대표 발언을 통해 양심수 석방, 수배자 해제, 국가보안법 폐지, 의문사 진상 규명 등 특히 ‘비전향장기수 북녘 송환’을 가장 비중 있게 요청했고, 당시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메모하기도 했었다. (이후 있었던 일을 서술식이 아닌 일정표로 중요 사항만 기록한다.)

- 1999. 12. 27 기독교회관, ‘비전향장기수 송환 추진 위원회 결성 및 기자 회견’. 조건 없는 송환 촉구

- 12. 29 김대중 대통령 ‘20세기 송년 특별 담화’. 신광수(광주) 손성모(대구) 등 양심수 9명과 생계범죄 100만명 구제 발표

- 12. 31 신광수, 손성모 노인 석방 (비전향장기수 범주 – 완전 석방)

- 2000. 01. 18 명동 카톨릭회관, 비전향장기수 송환 추진 위원회(이하 비-송추위) 제1차 대표자 회의. 참가단체 대표를 공동대표(27개 단체), 권오헌(양심수후원회) 김재열(대한성공회) 문규현(천주교) 이명남(개신교)을 상임대표로,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천주교장기수후원회, 전국연합을 간사 단체로 결성하다.

- 01. 26 비-송추위 상임대표단 통일부장관 면담 (조건 없는 송환 촉구)

- 02. 23 비-송추위 주관, 인천TV, 카톨릭신문사 등 후원. 기독교 회관에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위한 토론회(2층 대강당 160여 명). 총괄 발제 권오헌 대표, 노정선(연세대 교수), 이기욱(양심수후원회), 신준영(월간 ’말‘ 기자), 혜조 스님(불교 장기수후원회 운영위원장)

- 03. 27 북측, 남조선 비전향장기수 후원 조선위원회(이하 조선위원회) 제안. (북, 남, 해외 송환 관련 단체 3자 회의) 관련 비-송추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통일부에 ‘북한주민 접촉 신청’ 내기로 하다.

- 03. 31 비-송추위 통일부에 권오헌 대표 등 ‘북한주민 접촉 승인 신청’하다.

- 04. 10 북측, 조선위원회 남측 추진위로 편지. 4.26~28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 남, 해외 단체 합동회의 제의

- 04. 17 비-송추위 대표단 통일부 요청으로 면담. 통일부 정상회담 앞두고 남, 북, 해외 단체 만남 부정적. 송추위 즉각 반박, 그럴수록 만나야 한다. (권오헌 외)

- 04. 18 권오헌 대표 ’4월 혁명상‘ 계기로 생방송 인터뷰. 비전향장기수 관련 기독교방송(4.18) 서울방송(4.19) 문화방송(4.21) 한겨레신문(4.24)

- 05. 19 2000년 광주항쟁 20년 기념 ‘제4회 동아시아 평화 및 인권 국제회의’(일본 오끼나와, 대만, 한국 위원회 공동 주최, 광주 사무국 주관) 17~20일까지 광주와 구례에서 ‘부활 광주, 한반도 통일과 동아시아 평화로’라는 대회 주제로 열림. 셋째 날 ‘장기구금양심수 총괄발제’, 김동기 비전향장기수 발표(광주 통일의집) ‘비전향장기수 송환 문제’, 권오헌 대표 발표

- 06. 06 비-송추위 주최 ’남북정상회담 성공적 개최와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위한 단오맞이 아리수 축제‘ (여의도 한강 둔치)

- 06. 09 비-송추위 송환 희망자 58명 명단 1차 발표 기자 회견(카톨릭 회관 대회의실)

- 06. 15 남북정상 회담 – 6.15 남북(북남)공동선언 발표. 제3항 ’남과 북(북과 남)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하였다‘ 고 천명(※ 이 선언이 있기까지 남, 북, 해외 단체의 송환 운동은 치열했었음).

- 07. 23 비-송추위 권오헌 대표와 노진민 집행위원장, 통일부 홍양호 인도-지원 국장, 이강우 사무관 만나 비전향장기수 송환 관련 형식, 절차 문제 등 집중 협의

- 07. 24 적십자사와 통일부, 비전향장기수 송환 희망자를 찾아 송환 의사 여부 및 방북 신청서 받다.

- 07. 25 비-송추위, 비전향장기수 환송 준비위원회 2차 대표자 회의. 조직 구성 문제 등 집행 단위안 승인하다. / 공동준비위원장 임기란(민가협), 오종렬(전국연합), 단병호(민주노총), 정광훈(전농), 김중배(시민사회), 정관스님(불교), 문규현 신부(천주교), 이명남 목사(기독교), 김재열신부(성공회), 이종린(범민련), 홍근수(자통협), 이희철(한총련), 전빈련, 권낙기(통일광장), 박정기(유가협), 배다지(지역대표). 상임대표 권오헌(양심수후원회), 집행위원장 노진민, 한충목

- 08. 02 비-송추위 법무부와 통일부에 1975년 사회안전법 제정 이전 비전향으로 출소한 사람과 1989년 이 법 폐기된 뒤 청주감호소에서 출소한 이학근 씨 외 7명에 대한 거주지 등 행정자료 공개 요청서 발송

- 08. 18 정부 대한적십자사 장충식 총재 이름으로 조선적십자회 장재언 위원장 앞으로 62명 송환 대상자 명단 통보(당시까지는 62명이었지만 그 뒤에 통일부에 직접 신청하신 한 분이 있어서 63명이 되었음)

- 08. 21 비전향장기수 송환 대상자 62명 향린교회에서 기자 회견. 정순택, 전순덕 동지 제외 항의, 송환 촉구

- 08. 23 김호현 양심수후원회 운영위원, ’만남의 집‘과 ’우리 탕제원‘에 계신 선생님을 집으로 초청 환송 만찬. (0.75 독방 책 출판 인사) 책에 수록된 선생님들께 시계 선물

- 08. 26 범민련 남측 본부 – 송환 선생님들 초청 환송 오찬 (광화문)

   (1) 08. 26. 비전향장기수 범국민 환송준비위 주최. 송환추진위 주관 ‘비전향장기수 환송문화제-<눈부신 가슴 그대로 통일의 아침을 밝히소서> <한겨레>, 민화협, 노동조합. (경인방송) 후원. 연세대 대강당 3000여 명 함께 하다. 한충목 집행위원장 사회로 권오헌 상임대표 인사말. 박용길(민화협), 임기란(민가협), 오종렬(전국연합), 이종린(범민련), 단병호(민주노총) 문규현(사제단), 성관(불교), 이희철(한총련) 대표 등 송사.

   (2) 김중종 선생(송환자) 답사. 2부 문화 공연(생략) 후 최하종 선생 감사 말씀. -참가자 전체-‘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마침

- 08. 27. 통일부 송환 희망자 63명에게 9월 2일 통일부 남북회담사무국(삼청동)으로 집결할 것 통보

- 09. 01. 비-송추위, 종로 계동 한식집에서 송환 선생님들 점심 대접. 이어 평창동 북악파크호텔로 옮겨 세관검사를 받고 적십자사가 마련한 환송 만찬.

   1. 국립의료원 입원 조창손 선생님 입원비 지불-김지영 원장(양심수후원회 부회장) 밤샘 간호

   2. 이종 선생님 등 63명 비전향장기수, 통일광장 동지들·양심수후원회·민가협·사회단체 환송 속에 적십자사가 마련한 버스 2대에 나누어 타고 판문점 거쳐 북녘 조국으로!!

이처럼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당사자들의 통일 염원에 대한 불굴의 신념, 남·북·해외 단체들의 헌신적 노력, 그리고 남북 당국의 결정으로 이뤄졌다. 여기에 남북의 언론 역할 또한 적지 않았다. 송환의 당위성과 그 논리성을 사회 여론에 확산시키는데 언론과의 인터뷰·기고문 게재 등도 가볍지 않았다.

사례로 등 방송과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동아일보> <전교조신문> 외 많은 언론과의 생방송 인터뷰, 영상 인터뷰 등 헤아릴 수 없게 많이 했다. 또한, ‘비전향장기수를 가족들이 기다리는 북녘고향으로’<후원회 소식>100호(2000.2.14.), ‘비전향장기수 왜 송환돼야 하는가’<토론회 발제문>(2000.2.23.). ‘장기수 조건없이 보내자’<통일정보신문>(2000.6.21.) 등이 그 사례다.

4)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운동

‘9.2. 1차 송환’이 이뤄진 9월 양심수후원회는 (<우리의 주장>)글 ‘9·2 비전향장기수 송환 의미와 남은 과제’(2000.9.18.)를 통해 ‘2차송환 과제’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비전향장기수 송환의 계속사업 과제이다.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9·2송환’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9년 사회안전법 폐기와 관련, 풀려난 비전향장기수 102명 가운데 아직도 생사여부와 거소지를 알 수 없고 송환 의지를 밝히지 못한 이학근 노인 등 7명이 남아 있다. 또한, 1975년 사회안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비전향으로 출소한 사람 가운데 감호처분 등을 피해 갔던 송환 희망자들이 있다. 이들이 얼마나 되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송환추진위원회는 이미 지난해 법무부와 통일부에 이들의 명단과 거소지 확인을 위한 행정자료공개법에 따른 자료를 요청해 놓은 바 있다. 자유의사에 따라 이분들도 반드시 송환되어야 한다. 9·2 송환 이후 이미 통일부에 송환신청을 해 온 분들이 있다.

둘째, 9·2 송환에서 제외된 정순택·정순덕 노인을 비롯한 엄혹한 시대 본의 아니게 강제전향 당한 사람 가운데 송환을 희망하는 이들의 송환 문제이다. 사회안전법이나 사상전향제도가 위헌성으로 이미 폐지되었을 뿐 아니라, 군사독재시대 강압에 의한 전향은 본인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것으로 원칙적으로 무효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순택·정순덕 노인은 사상전향 취소를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선언했고, 비전향장기수들과 오랫동안 공동체 성원(구성원)으로 살아오면서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강제전향 되었음을 공유해 오고 있었다. 따라서 정순택·정순덕 노인들처럼 강제전향의 부당성을 말하며 그것의 무효화와 확고한 송환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대부분 전쟁포로이고 정치 공작 또는 안내원으로 남쪽에 왔던 고향이 북쪽이고 가족들 또한 북쪽에 있다. 아직도 보안관찰법에 묶여 생각과 행동의 제약을 받고 있으며 경제적 어려움 속에 북쪽 가족을 그리며 혼자 지내고 있다. 이들은 인도주의는 물론 거주이전의 자유 등 인권 차원에서도 반드시 송환되어야 한다.

셋째, 9·2송환으로 남겨진 가족들과의 재결합 문제이다. (이 항목은 이글에서는 생략)

이런 내용의 주장글은 뒤에 송환추진위의 공식문서(2001.1.19.)화 됐고 ‘비전향장기수 송환촉구 토론회 (성공회 성당, 2001.8.9.)의 발제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양심수후원회는 수도권(박종린, 강담 외)을 비롯, 광주·전남지역(서옥렬, 박창수), 전주·전북지역(맹기남, 김기찬, 문상봉, 김영식, 오기태 외-2000.9.19.), 대구·경북지역(김태수, 김종하, 이학천, 이준원, 최봉도 외-2001.1.15.), 대전지역(허찬형, 이찬근 외 날짜 미상) 등을 직접 현지 조사하여 2차 송환 의지를 갖고 있는 장기복역 양심수 실태를 파악했다. 필자는 또한 2000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55돌에 남측 사회단체대표 42명과 함께 참관단으로 평양에 갔었고 당시 북측 관계자로부터 지난일과 관계없이 오겠다는 사람은 다 보내라는 언질을 받았다.

2000년 1월 18일. 전주고백교회에서는 전북지역 종교인협의회 주관으로 ‘김영식 선생 양심선언 및 송환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전북지역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등 수장급 교직자와 전북대, 우석대, 원광대 총창 외 전북지역 원로들이 함께한 가운데 김영식 노인은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 나를 북녘 조국과 가족 품으로 보내주라!’고 강제전향 과정의 처절한 상황을 폭로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1년 2월 6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비전향장기수 추진위원회’와 ‘2차 송환 희망자’들이 함께하는 ‘전향무효’선언과 ‘송환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발표된 ‘2차 송환 희망자’는 비전향장기수로 1차 송환에서 신고 누락된 고성화 노인, 사실상 비전향 출소한 서옥렬·박종린 노인을 비롯, 상당수 전쟁 포로 출신들이 포함된 33명이었다.

전향 무효 배경 설명에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사상전향 무효선언 낭독에 강담 노인, 송환 촉구 기자 회견문 낭독은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이 맡아 했다. 회견이 끝나고 권오헌 대표와 노진민 집행위원장, 적십자사와 통일부를 방문 ‘2차 송환 희망자 명단’을 전달하고 빠른 시일 안에 송환할 것을 촉구했다.

뒤이어 같은 해 8월 9일 서울 성공회 대성당 프란시스홀에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위한 민족의 화해와 인도주의 실현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6·15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 주최. ‘비전향장기수 송환 추진위원회’ 주관. <한겨레신문> <민족21> 후원으로, 권오헌 송추위 대표 사회, 강정구(동국대 교수), 권낙기(통일광장 대표), 김원웅(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종걸(민주당 국회의원), 이종석(세종연구소 수석연구원), 천영세(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신준영(민족21 편집장)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토론회 결론은 발제문 내용을 공감하는 2차 송환의 빠른 실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2차 송환’은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통일부(정부)의 억지 주장으로 쉽지 않았다. 당시 통일부는 ⓵1차 송환으로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끝났다. ⓶2차 송환 희망자들은 사상전향자로 자격이 없다. ⓷꼭 송환해야 한다면 (북측에 있는) ‘납북자’와 ‘국군포로’와 상호교환해야 한다는 것. 통일부의 이 같은 주장은 당시 보수 야당의 반대와 ‘납북자 가족’들의 청원 등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정부 당국 의사에 송환추진위와 양심수후원회가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공청회, 기자회견, 기고문,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한 가장 치열한 반박 논리를 폈고 결론부터 말하면 2005년 하반기 판정승을 거두게 된다. 그 긴 과정을 생략하고 2차 송환 대상자의 자격문제와 이른바 상호주의론에서 판정승한 결과 내용을 밝히기로 한다.

⓵ 자격문제-(전향문제)

전향제도는 그 자체가 일제의 사상탄압 수단의 유제로 사상·양심의 자유에 배치되는 반인권·반인륜 제도이다. 사회안전법이 위헌성으로 폐지되었고(1989년) 사상전향제도 자체가 폐기되었으며(1998년) 대체 입법이었던 준법서약서(1998)마저 2003년에 폐기되었다. 사상전향 자체가 무효화된 셈이다. 예로써 1989년 사회안전법이 없어지면서 청주감소호에 감호처분당하고 있던 35명이 곧바로 풀려난 바 있다. 또한 사회안전법으로 감호처분되어 강제전향을 당했던 분들 일부는 전향 자체가 완전 무효화되어 비전향장기수로 인정되었으며 1차송환 때 북송된 바 있다. 따라서 정부당국은 자격문제를 논하기 전에 강제전향 당한 이들에게 국가 차원의 사과, 명예회복, 피해배상을 해야 한다.

또 국가기관인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비전향장기수의 의문사진상규명 진정을 조사하면서 잔혹한 고문 등 강제전향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것을 확인하고 (1974~76년 사이 대전·대구교도소에서 최석기, 박융서, 손윤구 등 강제전향과정에서 사망, 1980.7.11. 청주감호소에서 변형만 김용성 등 사회안전법과 감호처분에 항의 단식중 강제급식으로 사망) 사상전향제도의 위헌성과 강제전향공작의 위법성을 밝혀냈으며 이들 희생자들은 잘못된 법과 제도에 항의하다 희생된, 민주화운동에 기여했고 국가는 이들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 1기 2002년, 2기 2004년에 각기 결정)

사상전향 문제가 중요한 인권침해문제로써 유엔인권이사회도 이 제도가 국제인권규약에 위배된다고 78차 회의에서 결의했다.(2003.7.15.) 바로 세계인권선언 18조 사상·양심의 자유,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26조 평등권과 18조 1항 사상·양심의 자유, 19조 1항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규정했다. 이 같은 논리로 공박하여 결국 통일부도 더 이상 ’자격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으며 2005년경부터 ’2차송환 희망자‘를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로 정식 명명했다. 이에 따라 양심수후원회는 2005년까지 공식문건에 ’장기복역양심수 2차송환‘ 했던 것을 2006년부터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희망자‘로 기록하고 있다.

② 상호주의론

이는 한마디로 남쪽의 비전향장기수들과 북쪽의 이른바 납북자·국군포로들을 서로 교환한다는 이른바 ’상호주의론‘으로 어떠한 합리성도 가능성도 없었다. 통일부의 이 같은 억지주장은 앞서 밝혔듯이 남쪽의 보수진영 주장을 대변한 것으로 송환추진위원회는 즉각 반박논리를 펴왔다.

바로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6.15 남북공동선언의 합의사항인 반면 이른바 납북자·국군포로문제는 북측에서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예로써 남쪽에서 납치당했다는 인사들이 애국열사릉에 정중히 모셔져 있는 것이다.)

또 국군포로를 말하지만 그 주장을 정당화하려면 이승만에 의해 일방적으로 인민군 출신들을 ‘반공포로’라며 부당하게 석방 조치한(1953.6.19.) 27,000여 명을 찾아내어 돌려보내야 한다. 가능성도, 현실성도 없는 억지주장일 뿐이다.

다만 남과 북에는 분단과 전쟁, 대결 시대를 거치면서 이산가족문제와는 성격이 다른 인도주의 문제가 있게 되었다. 바로 분단과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이 같은 인도주의 문제는 남과 북이 새로운 신뢰구축과정을 통해서 인도주의와 동포애 정신으로 해결점을 찾아야 할 터였다. 이미 남과 북이 합의한 사항과 합의를 이뤄낼 미래문제를 ‘상호주의’라는 이름으로 교환한다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억지주장일 뿐이었다.

이 같은 논박 속에 통일부도 2005년경 이후 더 이상 상호주의론은 제기하지 않았다. 다행으로 남북은 남측에서 주장해온 이른바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를 ‘전쟁시기 및 그 이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한 생사확인문제’로 규정(제6차 적십자회담-2006.2.23), 앞으로 이산가족문제에 포함시키기로 했고 그뒤 이산가족 상봉사업에서 여러 차례 만나고 있었다.

2005년 하반기 한때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이 이뤄질 것으로 당사자들에게 송환의사를 묻는 등 그리고 언론들이 크게 보도하기도 했었다. 당시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비전향장기수 북송가능성을 묻는 여·야의원(신기남, 박성범)들에게 ‘인도주의적’, ‘인권’ 차원에서 검토할 용의가 있다며 “상호주의원칙을 굳이 적용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또한 같은 해 9월 30일 2차송환 희망자 고 정순택 노인이 세상을 떠나자 비록 생전에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유해송환’이란 이름으로 북녘가족에 유해를 인도했다. 당시 당국에서 ‘송환’이란 이름을 쓴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리인모 노인도 ‘9.2 63명’ 송환에서도 ‘북한방문’이란 형식을 갖췄었다. 그래서 ‘2차송환’이 임박했다며, 송환추진위에는 많은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이 줄잇고 있었다.

그러나 2005년 말께부터 ‘2차송환’ 분위기는 다시 얼어붙었다. ‘맥아더동상철거투쟁’에 대한 보수세력의 고소, 고발사태와 공안탄압, 강정구 교수의 ‘통일내전론’을 둘러싸고 이념대립, 파주 보광사 비전향장기수 묘역에 대한 극우세력의 패륜망동, 보수세력의 김남식 선생 묘소 훼손과 전국연합 앞 시위소동이 이어지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2차송환’은 수면 아래로 잠겼고 이명박, 박근혜 9년 잠복기를 지내야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취임하고 (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대표(권오헌 명예회장, 김호현 이사장, 김혜순 회장)들과 비공식 면담한 자리에서(2021.6.28)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의 분명한 의지와 이른바 ‘상호주의론’ 따위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남북 사이 대화만 재개된다면 우선적으로 송환할 것이란 확고한 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하고 정권을 내주었다.

끝으로, 비전향장기수 2차송환은 6.15공동선언과 4.27판문점선언의 합의사항이다. 또한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이고 형기를 마친 이들의 원적지 복귀권리이기도 하다. 거주이전의 자유,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 등 국·내외 인권규정의 권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외세와 분단, 냉전과 대결시대의 산물이면서 희생자이기도 하다.

최초 희망자 33명에서 추가 13명까지, 모두 46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조국과 가족품으로 그리고 신념의 고향으로 돌아가길 희망했지만, 지난 7.25일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출신 여성빨치산 이두화 노인(1928~2022)이 평생 염원인 조국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한 채, 무엇보다 그의 조국과 가족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숨을 거둠으로 이제는 9명만 남아있게 되었다. 정권교체와 관계없이 남측은 지체 없이 이들 남은 분들을 살아 있을 때 그들의 조국과 가족품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권오헌 / 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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