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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분단의 근원 8.15, 민족분열의 서막!

2012.08.23 08:20

윤기하 조회 수:3617

조국분단의 근원 8.15, 민족분열의 서막![발제문]


 세계 제 2차 대전 말기 일제의 태평양 전쟁 패전을 계기로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이 아닌 전승국 미.소 연합군대 점령지가 되니 사실은 더욱 처참한 조국분단으로 전환되는 민족분열의 현대사가 되었다.


 따라서 남녘땅 동포들은 8.15날 광복 또는 해방 따위의 단어로 이를 기리며 기념하는 어리석은 망국적 축가(祝歌)를 부른 폐륜을 더 이상 저질러선 안된다.


 일제의 패전 8.15는 조선민족의 승전이나 해방 또는 광복도 아니며 제국주의 패권전쟁 당사국들끼리 승전과 패전한 제국주의 전쟁사로 조선민족에게 더욱 처참하고 비극적인 조국분단(남.북)과 민족분열(좌.우 대립) 책동이 강행되던 시발점의 서막!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남녘땅에 살아가던 동포들 중 대다수가 일제 강점에서 미제 군정체제로 전환되기에 이르면서 부터 친일 매국이 친미 매국으로 급속히 번져가는 추세로 매국 출세주의가 기생충들 처럼 득세하게 되니 미제의 식민지 통치전술은 그야말로 아무런 제동 없이 쉽사리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점령함에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군권(전시작전권 등)을 행사하며 오늘날까지 계속 영구적으로 제국주의 패권을 이어가고 있다.


 이로써 우리 조선민족의 자존과 조국에 대한 정체성 확립을 보다 명료하게 정리하여 다가 올 대 통일조국을 앞당기는데 크게 이바지 할 준비체제가 무엇보다 중대한 과제로써 우리네 조국통일운동가들은 이를 끊임없이 연구 논의 해 나가야만 잘못돤 과거를 새롭게 정리함이니 당년 8.15날이 다가오기 전에 이를 신중히 생각함이 매우 절실하다고 본다.


 하여 아래와 같이 발제자는 임의로 정리하여 본다.



일제 8.15 전제사 재정리!

[일제강점기의 상황]


 일제의 조선식민통치는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치밀하고 억압적인 것으로 조선의 산업구조와 인민의 삶을 파탄시켰다.


 1930년대 이후 함경도지방을 중심으로 공업화가 진전되었지만 그것은 자본·기술·경영체제가 일본인에 집중되고 핵심적 생산재 공업이 미발달한 파행적 산업화였다.


 농촌은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일본의 식량·원료의 공급지로 재편되었으며, 반봉건적인 지주제가 그대로 유지되어 2%의 지주가 전토지의 60%를 차지했다. 또한 비옥한 호남지대 토지들의 상당부분은 일본인 손에 들어가 있었다. 반면에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가운데 70% 이상이 단순한 소작농이거나 영세농민들로써 기본적인 생활 자체가 위협을 받는 실정이었다.



 일제는 3·1운동(1919. 3. 1)을 통해 폭압적인 무단통치(武斷統治)로는 더이상 독립운동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걸었다. 그것은 유화정책을 씀으로써 한국민족의 일부 지주와 상층세력을 회유하여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정책이었다.


 특히 1930년대 들어 세계대공황의 돌파구로 일본이 대륙침략을 감행하면서부터는 종래 문화통치의 허울조차 벗어던지고 무단적인 억압통치를 단행했다.


 일제는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설정해 조선 내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로 끌어내는 전시총동원 체제를 구축했고, 이를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구호 아래 창씨개명·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며 조선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 했다. 그 결과 8·15 일제 패망 직전까지 징용·징병 등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연행된 조선인은 480여 만 명에 달했다.


 당시 어리석고 어수룩하게도 이를 미제의 또다른 제국주의 침탈 야욕을 눈치채지 못한 조선의 민중들과 임시정부 인사들은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을 계기로 식민지에서 벗어난 해방인줄 또마치 광복을 되찾은냥 들떠서 잠시 달콤한 착각속에 잠겼었다.

 

임시정부의 요인들(김구-이유필-신익희-윤현진-안창호-손정도 등...

   

[일제하의 항일 무장투쟁과 독립운동사]


 8·15 일제의 항복과 몰낙이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태평양전쟁에서의 일제의 패망이다.


 그러나 일제 8·15를 단순히 미.소 연합군이 조선에게 어부지리로 안겨다 준 선물이 되었다고 8.15를 왜곡하려든다면 일제강점기 동안의 조선민족의 줄기찬 민족해방운동 및 항일무장투쟁 자체를 과소평가한 것이 된다.


 전국적으로 200여 만 명의 인원이 참가한 1919년 3·1운동은 그동안의 산발적인 독립운동을 집결시킨 쾌거였다. 이것을 계기로 민족해방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봉건적 복벽주의(復僻主義)가 사라지고 근대적 정치이념에 기초한 민족독립국가 건설이 민족해방운동의 목표로 떠올랐다.


 노동자·농민 등 일반민중들도 민족해방운동 대열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는 임시정부가 조직되었고,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의 무장항쟁도 활기를 띄었다.


 1920년대 들어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고 대중운동이 성장하면서 민족해방운동 진영은 이념에 따라 다양한 분화과정을 겪게 되었다. 그에 비례하여 민족해방운동전선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높아져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그결과 국내 독립운동세력은 1927년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했다.


 1930, 1940년대에도 민족해방운동의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제의 억압적 총동원 체제와 대륙침략 정책에 대항하여 조선민중들의 생존권 투쟁과 반전투쟁(反戰鬪爭)이 태업·파업, 징병·징용 기피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되었다.


 독립운동세력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극심한 감시와 탄압으로 외형적으로는 위축된 것같이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학생들의 동맹휴학, 비밀결사의 조직, 선전물 배포 등 저변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특히 여운형은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여 해방을 준비했다. 국외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에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세력이 통합되었고, 일제말기에는 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전투에 참여했다. 옌안[延安]에서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결성되어 중국 팔로군과 연합하여 대일 무력항전을 전개해 나가기도 했다.


 또한 만주에서도 항일유격대를 중심으로 동북항일연군이 결성되어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동북항일연군은 일제의 대규모 공격에 밀려 1940년 이후에는 소부대 활동을 하면서 본거지를 소련 영내로 옮겼다.


[연합국의 전후 조선 남.북 문제 논의]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발발한 태평양전쟁은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졌다. 이에 따라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 국가들의 전후 처리문제가 미국·소련 등 강대국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전후 한국에 국제적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고려했는데, 그는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영국의 처칠과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와 회동하여 이 문제를 협의했다(→ 카이로 회담).


 회담에서 발표된 선언에서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하면서 만주·타이완 등 일본이 탈취·점령한 모든 지역은 반환해야 하며, 한국의 경우는 적당한 절차를 거쳐서 독립하게 될 것임을 선언했다.


 이는 즉각적인 조선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1943년 11월말 테헤란 회담에서는 루스벨트가 소련의 스탈린에게 "조선인민은 40년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라고 제의하여 구두합의를 얻어냈다.


 1945년 2월 얄타 비밀회담에서는 조선 문제에 대해 미국은 미국·중국·소련 등 3국에 의한 20~30년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소련은 영국도 참여해야 하며 신탁통치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담에서는 구두합의에 그치고 공식적으로 합의하지는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 7월 개최된 포츠담 회담에서도 조선 문제는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일제 패망 8·15 ㅡ 조선의 38도선]


 미·소 간에 전후 조선문제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 협정에 따라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면서 일본군은 급속히 무너졌다.


 소련군은 당초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 관동군을 쉽게 격파하면서 제1극동방면군 산하 제25군 소속의 보조 공격부대가 10일 조선반도에 진주하여 12일에는 웅기와 나진, 14일에는 톈진[天津]에 진격했다.


 당시 오키나와[沖繩]까지 진격했던 미제 양키군은 소련군이 급속히 남하하고 일제의 항복선언이 확실해지자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군사점령하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38선 분할안을 제기했다.


 미제 육군부 작전국 정책과의 C.H.본스틸 3세와 D.러스크 대령이 기안하고, 국무·육군·해군 등 3부 조정위원회 안으로 제기된 38선 분할안은 8월 13일 합동참모본부의 동의와 14일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15일 맥아더 명의의 일반명령 제1호로서 공포되었다.


 소련은 얄타 회담 때부터 사할린과 만주지방의 이권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38선 분할 제안을 별 이의 없이 수락했다.


 이에 따라 자유주의 진영의 맹주로 등장한 미국과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8·15와 민족역량의 분출]


 미·소 양군의 진주를 전후로 하여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항일인사와 지방유지들을 중심으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 등 다양한 지방자치조직들이 자발적으로 결성되어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자치적으로 치안을 유지했다.


 일부 노동자·농민들은 일제와 일본인 소유의 기업체와 토지를 접수해 자주적으로 공동 관리했고, 한편 1945년 8월 16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조선건국동맹을 모태로 서울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했다.


 건준은 치안을 유지하면서 항일투사들의 석방, 물자공급과 행정대책을 강구했다. 건준은 미국군의 남한진주를 눈앞에 둔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었고 아직 미군정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9~11월에는 전국 지방자치조직의 상당수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좌파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미군정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독립국가를 건국하진 못했다.


[미국·소련의 군정]


 38선을 경계로 미·소 간의 분할점령이 결정됨에 따라 당시 오키나와에 있던 J. R.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국군 제24군단이 9월 8일 인천을 통해 남조선에 진주했다.


 미제는 일제 강점기 이래 민족독립운동의 전통과 해방 직후 표출된 자주민족국가 건설 움직임을 모두 부정하고 미군정만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며 군정을 강행했다.


 이에 따라 미제는 충칭[重慶] 임시정부까지 정부로 인정하지 않아 임시정부 요인들은 11월말과 12월초 2차례에 걸쳐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친일 매국인사들을 군정의 행정고문이나 고위관료로 임명하여 이들을 주축으로 일제강점기의 관료·경찰 기구를 부활했으며, 자본주의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친미 보수세력을 지원·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따라 미국식 양키주의가 사회의 주도이념으로 등장했으며, 이러한 이념에 따라 남조선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사회영역에서 또다른 식민지 재편기를 맞게 되니 미군정 체제의 제도권에 인민대중은 양놈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로 이른바 프락치가 곳곳에 감시활동을 벌이는 정보국(cia) 정찰이 본격화 되기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소련은 미국이 제안한 일반명령 제1호를 수락한 후 8월 17~18일 치스차코프 대장 휘하의 제25군 본대를 만주에서 북조선지역으로 남하시켰다.


 소련군은 24일 평양에 입성하는 한편 8월말까지 북조선 전역에 진주했다. 소련의 대 조선반도 정책은 미국보다는 소극적인 것이면서도 역시 조선반도에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정책목표로 삼았다.


 이때문에 미제와는 달리 군정청을 설치하여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지만 소련의 무력적 보장 하에서 사회주의 민족세력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소련은 북조선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일련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보장 해 주었다.


 이로써 북조선도 사회주의 이념하에 사회 전영역에서 커다란 변동기를 거치게 되었다.


[좌·우익의 분열]


 미·영·소의 3국 외상들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 모여 전후 문제를 토의하는 가운데 조선반도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을 확정했다.


 주요내용은, 미·소 양군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를 설립하고 조선의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들과 협의하여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 후 다시 협의를 거쳐 최고 5년간의 4개국 신탁통치 또는 후견(trusteeship)에 대한 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 결정안이 국내에 전해지자 임시정부 세력 주도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반탁운동은 민족감정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확산되었고, 또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주장했다는 언론보도가 널리 퍼지면서 반공·반소 운동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한편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인민세력은 처음 보도를 접했을 땐 미묘한 입장을 취했으나, 곧바로 신탁통치안을 지지하고 나왔다. 이런 지지의 배경에는 신탁통치 지지를 촉구하는 소련의 강력한 입장과 미·소 양군이 진주한 상태에서 이들의 협력 없이는 독립국가 운영이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였다.


 좌·우익 양 세력은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각기 결성하면서 심각하게 대립했다.


 이렇게 3상회의 결정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익 정치세력이 분열되면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각계 모든 세력이 협력해야 한다는 민족적 열망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또한 그 와중에서 청산되어야 할 친일파 매국세력들이 반탁운동에 적극가담함으로써 혼란이 가중되었다.


[남.북 분단정부의 수립]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 26일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5월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제 입장을 취한 매국노 이승만은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김규식·안재홍 등 중도 우익정치세력과 여운형·백남운 등은 중도 좌익세력이 손을 잡고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함으로써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좌·우익 양 세력의 반대와 미군정의 정략적 방해공작에 의한 분파책동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민족내부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는 것을 전후로 하여 냉전시대의 막이 열렸고 이와 함께 미제의 대 조선반도 정책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1947년 5월에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자 미제는 9월 17일 조선 문제를 국제연합(UN)으로 이관했다.


 이런 정책전환은 당시 소련이 미국 지배하의 UN 결의를 무시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사실상 기존의 남북분단상태를 용인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소련은 이에 대해 미·소 양군이 1948년초까지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수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제는 이에 반대하고 미·소 양군이 주둔한 상태에서 UN 조선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이의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UN은 11월 4일 UN 소총회의 결의로 미국의 제안을 통과시켰다. 1948년 1월 23일 UN의 결의에 의해 구성된 UN 조선임시위원단의 북조선 방문이 북 당국에 의해 거부되자, 미제는 남조선만의 선거실시안을 UN에 제출했고, 이는 2월 26일 UN 소총회에서 통과되었다.


 이에 기초하여 5월 10일 남조선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친미 매국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북조선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부터 북조선 사회주의 인민들의 정권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이 추진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46년 11월 선거를 통해 북조선인민위원회 대의원선거를 실시하고, 1947년 2월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한편 미제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정책이 제기되면서부터는 북조선 역시 단독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해 1948년 2월 임시헌법을 공표했고, 8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의원선거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결과 한반도에는 서로 이념을 달리하는 2개의 정부가 출현하게 되었다.


 한편, 이렇게 남북한에서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될 조짐이 보이자 이를 물리치려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47년말부터 중도파 정당들을 중심으로 미·소 양군의 철수와 남북 정당들의 직접적인 협상을 통한 자주적 남북통일정부 수립운동이 추진되었다.


 1948년 3월 25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제의했고, 김구와 김규식 등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1948년 4월말 입북했다.


 이에 따라 남북한의 정당·사회·종교·문화·청년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남북정치지도자들 간의 남북요인회담이 평양에서 잇달아 개최되었다. 그렇지만 그에 참여한 정치세력들은 남북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저지시킬 만한 실제적인 힘과 조직역량을 갖지 못했다.


[의의와 과제]


 일제의 패전 8·15를 맞은 조선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일제식민통치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8·15는 정녕 조선민족의 해방이 아니었고 조선민족 독자의 힘으로 버티어 낸 것도 그저 일제강점기이래 독립투쟁에 매진해왔지만 일제를 몰아내는 데 연합국의 일원이 되지도 못했고 따라서 큰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그결과 미·소 양군은 조선의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원조하기보다는 각기 자국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다.


 그 때문에 38선은 미·소의 이해가 충돌하는 체제간의 정치적 경계선으로 고착될 우려가 있었다. 이는 미·소 간의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점차 현실화되어갔다.


 또한 신국가건설을 둘러싼 좌·우익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체제간의 대립과 민족 내부의 대립은 사회저변으로 파고 들어 결국 남.북 조선은 서로 이념이 다른 체제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런 체제간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도 좌·우익 합작운동에서 남북협상운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민족통합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6·25전쟁을 거친 지금까지도 통일에 대한 민족의 염원은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어서 우리민족끼리 자주.평화.통일을 실현 할 대 역사적인 2000년 6.15남.북 공동선언과 2007년 10.4남.북 정상선언에 양측 정부가 대 합의 원칙을 세워놓은 상태에 있다.



[결 어]


세계 제 2차대전은 1945. 8. 15. 일제의 “항복선언”으로 일제가 패망하고 미.소 연합군은 각각 승전국이 되면서 일제가 물러난 자리에 결국 조선반도는 다시금 승전국인 미.소 강대국 손에 38도선 남.북으로 각각 분할 재점령 당하였고, 미.소 양 체제의 이념대립과 동북아 군사적 패권경쟁이 본격화 되어가기에 이르자 극심한 이데올로기에 희생양이 된 조선민족은 남.북으로 나누어진 상태로 두개의 국가 양체제가 격돌하니 곧 동족상잔(6.25)의 대전쟁에 돌입하여 약 300만명 이상이 희생당한 엄청난 민족분열을 맞기에 이르렀다.


 우리민족이 원하지 않는 전쟁이었고 미.소 양 제국주의 패권의 성격이 전제된 전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양체제로 조국분단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련군대나 중국군대는 이미 북조선에서 약속대로 이미 철군한데 반해 아직도 미제 양키군대는 남조선에 현재까지도 철군하지도 않았고 또 철군하기 커녕 전쟁연습을 지속적으로 벌이면서 늘 일촉즉발의 전운이 맴돌게 다량살생 신무기를 앞세워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준비에 열내고 있음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보다 명확한 정세분석 또는 정밀성이 담보된 특수 정보력을 통하여 면밀히 주시하지 않을 수 없고 조국분단 역사를 종식시킬 민족대화합의 기조와 그 토대 위에서 조국통일 대원칙을 충실히 이행하며 남.북이 상호 체제를 인정하는 평화협정체결안이야말로 가장 우선적 합의안이다.


 모든 상황이 이러함인데 오늘날도 대한민국 정부 또한 공공기관 할 것없이 남녘사회의 수많은 단체들이 해마다 8.15를 망국적으로 “광복절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마치 8.15가 민족해방 역사인냥 광복이나 된 것처럼 왜곡한다면 엄청난 현대사적 모순점에 부끄러운 일을 자처함인데 똥과 된장도 구분 못해서야 후대까지 욕보이지 말기를 바라며 일단락 마친다.



                          2012. 8. 1.


                    발제자 윤 기 하 (011 - 461 - 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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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geunerweisen, Op.20

사라사테 / 찌고이네르바이젠

Pablo de Sarasate, 1844∼1908

Irina Vinogradova, Piano / Vadim Repin, Vio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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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geunerweisen, Op.20
Vadim Repin, Violin
Irina Vinogradova, Piano

Vadim Repin는 1971년8월31일 시베리아에서 태여난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다. 어려서 Zakhar Bron과 같이 공부 하였고 또한 러시아 전역에서 이미 잘 알려진다. 그리고 특히 17살때 세계의 바이올린 콩쿨인 Queen Elisabeth competition에서 가장 젊고 어린 나이에 1등 수상을 하였다 이녹음판은 1986년 6월11일 모스코바 음악당에서 15세때 연주 실황으로 피아노에는 Irina Vinogradova가 맡았었다.

찌고이네르바이젠 Zigeunerweisen,Op.20

사라사테는 파가니니, 요아킴, 비에냐프스키와 더불어 근세 4대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운다. 그를 가리켜 신에 가깝다고 평하기도 하며 그의 아름답고 맑은 음색과 놀라운 기교, 우아한 표현 등은 불세출의 귀재로 경탄할만한 사람이었다. 작곡가로서의 그는 민족적인 멜로디와 리듬을 활용하여 기교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의 하나가 '찌고이네르바이젠'<'집시의 노래' 란 뜻>이다.

지고이너란 집시(Gypsy)를 가리키며 바이젠이란 선율 ·가락을 뜻하는말이다. 사라사테가 헝가리를 여행하였을때, 그 지방 집시들의 민요 몇 개를 소재로하여 그 기법과 표정을 가해 이렇게 바이올린곡을 작곡하였다(1878년 작곡). 빠른 패시지(선율음 사이를 빠르게 상행,하행하는 경과적인 음표의 무리)를 비롯하여 피치카토 ·하모닉스 ·도펠그리프 ·글리산도 등 모든 연주법상의 기교가 총망라된 난곡(難曲) 중의 난곡으로 당시는 사라사테 자신밖에는 연주할 사람이 없었다.

모두 연속되는 3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제1부에서는 잠겨 있는 정열과 억압할 수 없는 울분의 암시, 제2부에서는 집시적인 애조, 목메어 우는 애수가 넘쳐흐르며, 제3부에서는 앞서의 애조적이던 것이 집시 특유의 광적인 환희로 돌변, 잠재하고 있던 정열이 폭발하고 만다. 그 화려한 기교와 집시풍의 선율로 듣는 이를 곧잘 매료시키는 명곡이다. 전체적으로 볼때 제1, 2부는 집시들의 방랑생활의 호탕함과 애수를 노래했으며, 제3부는 그들의 제멋대로 날뛰는 광경을 암시한 것이다.

사라사테 (Pablo Sarasate, 1844-1908)

에스파냐의 바이올린 연주자·작곡가.8세 때부터 수도 마드리드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1856년 여왕 이사벨라2세와 함께 나바라주(州)의 장학금으로 파리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알라르에게 바이올린을 사사(師事)하였다.

졸업 후 61년 런던에서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유럽 각지와 남북아메리카에 걸친 대연주여행을 하여 성공을 거두고, 파가니니 (1782~1840) 이래의 음악의 거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70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와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계속하였다. 연주의 특색은 투명하고, 부드러우며 감미로운 음색과 화려한 기교의 구사에 있었다. 폭넓은 비브라토(떨려 울리는 음)와 개성적인 리듬의 매력을 잘 살린 연주, 특히 에스파냐풍의 연주 등에 뛰어났다.

프랑스의 작곡가 랄로는 그의 최초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스페인 교향곡》을 그에게 헌정(獻呈)하였고, 독일의 작곡가 브루흐(1838~1920)도 《바이올린 협주곡 제2 번》과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그를 위해 썼다. 또 비제(1838~75)로 하여금 《에스파냐 무곡집》과 《카르멘 환상곡》 《서주와 타란텔라》 《호타 아라고네스》 등 바이 올린 연주를 위한 기교적이며 화려한 효과를 가진 에스파냐풍의 관능적 선율의 작품을 작곡해 내게 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자신의 작품으로 《찌고이네르바이젠》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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