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가 갈라놓은 땅, 우리민족끼리 통일합시다

  • 민병래 작가
  •  
  •  승인 2022.03.2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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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벽보 할아버지 김영식의 소원

 

 

 

김영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연단 앞으로 나아갔다. 눈앞에는 광주교도소에서 당했던 고문이 또렷이 떠올랐다. 0.75평 방에 열다섯 명이 구겨 넣어져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아우성·슬픈 울음·신음소리...앉을 수도 없어 선 채로 밤을 지샜던 끔찍한 날들...

저는 서울에서 대전, 광주를 거쳐 전주교도소까지 26년이나 감방에서 살았습니다. 지난 1988년 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첫말을 뗀 김영식의 어깨는 들썩거렸고 소같은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듯 물기가 가득했다.

이미 국가보안법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데 다시 전향하라고 고문을 했습니다. 전향공작반은 우리들을 발가벗기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거기에 밧줄까지 내리치니 살이 찢어지고 뼈마디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광주교도소의 인간 백정인 교무과장 강00, 교회사 문00, 간수 정00과 백00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름을 거명하던 김영식은 몸이 메어 잠시 말을 멈췄다. 그예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날 전주 고백교회에서 열린 '강제전향 양심선언 및 송환촉구' 기자회견에는 불교계의 수경·경신 스님, 천주교의 문규현·최종수 신부, 원불교의 이재정 교무장, 개신교의 한상렬·김경섭 목사, 천도교의 이두원 선생이 참여했다. 또 장명수 우석대 총장, 양순창 전북대 총장, 천승훈 원광대 총장 등 학계 인사와 이강실 전북연합의장 오경숙 전북 민가협 회장 그리고 전북 지역에 살고있는 10여 명의 출소 양심수까지 80여 명이 함께 했다. 모두 숨죽이고 김영식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62년 3월 울산 바닷가 야산에서 붙잡혀...

“그들은 전향하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저는 제 신념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습니다. 거부하니 고문대 위에 눕혀 얼굴에 수건을 대고 주전자로 물을 부었습니다. 나중에는 고춧가루까지 섞었습니다. 숨이 막히고 목이 타들어 가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했습니다. 온몸이 터져나가는 고통으로 밀어넣고 그들은 ”교무과장 만날래 안 만날래?“하고 물었습니다. 만나겠다고 하는 순간 전향으로 간주했습니다. 내 손을 끌어다 강제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김영식의 어깨는 더욱 들썩거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음은 차라리 비명이었다. 1962년 공작선 무전수로 내려와 울산 바닷가 야산에서 잡힐 때 뭉개뭉개 피었던 진달래가 눈에 어른거렸다. 원산항을 떠나오던 날 껑충껑충 달려오던 두 남매 현일이와 경자의 머릿결이 눈앞을 지나갔다.

김영식은 1953년 제대 후 강원도 이천군 방장면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방 한구석에 놓여있던 <바다는 청년을 부른다>라는 책을 보았을 때 김영식의 마음은 뛰었다. 그는 무작정 원산 도인민위원회를 찾아가 배를 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인민위원회는 수산사업소로 가보길 권했다. 배멀미를 견뎌내는 지가 시험이었는데 김영식은 배 위에서 육지처럼 몸을 놀려 합격했다.

즐겁게 선원생활을 하던 1960년 어느 날 노동당연락부의 지도원이 김영식을 찾아와 통일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김영식의 집안내력과 군대 생활을 주의깊게 조사한 듯했다. 지도원은 “위험한 일이고 분계선을 넘나들다가 사고도 난다”며 신중한 결정을 주문했다. 김영식은 일제하에서 아버지가 보국대에 끌려간 일, 해방 후 이루어졌던 토지개혁 등을 떠올리며 기꺼이 조국을 위해 나서겠다고 뜻을 밝혔다. 그때 김영식은 1953년에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단꿈같은 생활을 버리고 통일사업에 뛰어들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는 공작선의 무전수로 몇 차례 분계선을 넘나들다 1962년 3월 29 울산에서 체포되었다. 그날 밤 신선바위에서 접선하려는 데 갑자기 조명탄이 터졌다. 타고 있던 고무보트가 뒤집혀 김영식은 장병락 조창손 등과 함께 물에 빠졌다. 3월의 밤바다는 찼다. 겨우 보트를 바로 세워 죽도록 저었고 땅에 닿자마자 산줄기를 바라보고 뛰었다. 이미 촘촘한 포위망에 갇힌지라 산속에서 이틀을 굶주리다 잡혔다.

196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영식의 징역생활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방에서 정좌 자세를 조금이라도 풀면 교도관들에게 구둣발로 무릎을 까였다. 겨울은 특히 힘들었다. 내의도 없이 달랑 관복 하나로 추위를 이겨야 했다. 담요는 다리도 못 덮을 정도로 짧고 얇았다. 추위를 막으려고 수건을 머리에 쓰면 불려나가 옷을 벗기우고 뒷수정을 찬 채 찬바람 쌩생 부는 계단에 끓어앉혔다. 1970년 대전에서 옮겨간 광주교도소는 방에 습기가 많아 옷이나 벽에 곰팡이가 피었다. 눅진눅진하고 쾌쾌한 냄새가 방안을 맴돌아 괴로웠다.

하루하루가 힘든 징역생활에 차원이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72년 유신체제가 만들어지고 반공을 국시로 이데올로기 전쟁에 나선 박정희 정권은 감옥 안의 장기수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20년 정도 유기징역 선고를 받은 비전향수들의 출소 시점도 임박했던 지라 박정권은 전향공작 계획을 세웠다. 당시 장기수들이 있는 감옥에는 중정은 물론 보안사, 치안본부 대공국의 담당관이 배정되어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중앙정보부법의 '조정권'을 갖고 대공심리전국이 주도하여 광주, 전주, 대전, 대구 등 교도소별로 전향공작반을 만들었다.

전향공작은 초기에는 금지였던 가족면회와 편지를 허용하고 운동시간을 늘려준달지 빵이나 일용품을 나눠주는 회유방식이었다. 또 “출역을 나가게 해주겠다, 가석방 심사를 받게 해주겠다. ”라고 꼬드기며 전향선언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게 효과가 없자 끔찍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공작반 밑으로 교도소 내 폭력 전과자들을 '떡봉이'라는 이름으로 동원,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런 고문 끝에 전향한다는 도장을 받아냈고 김영식도 이때 물고문과 여러 끔찍한 고문을 겪다가 강제전향을 당한 것이다.

도장을 찍은 이후 전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수치심에 괴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꿋꿋하게 버텨낸 동지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죄책감에 넋이 빠져 살았고 출소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젠가 북으로 돌아갈 그 날에 가족들을 당당하게 보지 못할 생각을 하니 죽고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전향취소 선언을 하고 인간이 되었습니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김영식은 울부짖듯 말을 이어갔다. 쩌렁쩌렁한 그의 외침은 고백교회의 벽까지 뚫을 기세였다.

김영식은 1973년에 이루어진 전향은 고문에 의한 것이기에 취소를 선언한다고 밝히며 “이제 나도 인간이 되었습니다. 마음속 암덩이를 이제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 전향취소 선언으로 박해를 받더라도 각오하고 맞서겠습니다.”라고 외치며 말을 마쳤다.

김영식이 이날 양심선언을 한 것은 2000년 9월 2일 일차송환에서 탈락한 게 중요한 계기였다. 2000년 615 정상회담에서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은 인도적 차원에서 ‘비전향장기수의 송환’을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그해 9월 2일 63명이 일차 송환되었다.

당시 실무를 맡았던 통일부는 송환조건으로 ‘비전향’을 기준으로 내세웠다. 수 많은 장기수와 인권단체, 통일운동 관련단체들이 고문에 의한 강제전향임을 들어 “희망자 전원 송환”을 내세웠지만 통일부는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일각에서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송환’을 요구하자 이를 의식한 듯했다.

결국, 김영식은 일차송환에 끼지 못했다. 한양대에서 열린 환송회에서 장기수들이 감사 인사를 하는 모습을 김영식은 미어지는 가슴으로 연단 아래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김영식은 2000년 9월 2일 공작선을 같이 탔던 조창손, 장병락이 가족의 품으로 떠나는 것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스러웠다. 자신도 오려니 기다릴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듯 했다. 다시 치떨리는 분노가 솟았다. “내가 원해서 도장을 찍은 게 아닌데...내가 원해서 전향을 한 게 아닌데...”

고문에 의해 이루어진 강제전향은 김영식과 장기수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장기수내에서도 ”고문에 의한 것이건 아니건 어쨌든 전향을 한 것 아니냐“는 의견과 ”사상 탄압으로 빚어진 일인데 어찌 이를 인정할 수 있느냐“ 등등 의견이 분분했다. 강제전향을 당한 이들은 징역안에서는 수치심에 얼굴을 들지 못했고 출소해서는 변절자라는 부끄러움에 연락을 끊고 외톨이로 목숨만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강제전향을 당해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고통까지 겪었다.

다행히 2002년과 2004년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강제전향은 위헌적인 사상전향제도에서 비롯된 국가의 위법 행동으로 이뤄진 일이기에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는 결정을 내려, 이들의 응어리진 마음에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다.

김영식 이전에도 용기를 내어 정순택과 유연철이 전향취소선언을 했었다. 1999년 4월 23일 자 한겨레신문의 광고면을 통해서였는데 기자회견 같은 공개행사를 통해 전향취소를 밝힌 경우는 김영식이 처음이었다.

김영식의 선언에 힘입어 2001년 2월 6일 서울 향린교회에서 비전향장기수 32명이 모여 ‘장기구금 양심수 전향취소선언과 북녘 고향으로의 송환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대부분 강제전향을 당해 송환 신청서를 썼지만 탈락했거나 출소 후 혼자 살면서 송환신청 자체를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또 남쪽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렸기에 가족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이날 선언을 했던 이들의 복역기간을 보면 30~35년이 5명, 20~29년이 17명, 20년 이하가 11명으로 2/3이상이 20년 이상을 복역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요구는 2005년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이 되면서 이루어질 듯했으나 보수단체의 반발과 그해 12월 정동영이 장관직을 사임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 후 20여 년이 흘러 2018년 4월 27일 문재인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갖자 기대가 싹텄으나 이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출소 후 극심했던 몸고생 

1988년 12월 출소해서 김영식의 생활은 고달팠다. 감옥 문을 나올 때는 으리으리했다. 김남주, 신영복 같은 쟁쟁한 인사들과 함께 나왔기 때문이다. 김영식은 이날 은근하게 배때미(배 터지게 먹는 다는 말로 김영식의 고향속어로 여겨짐)를 기대했다. 웬걸! 감옥문을 나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경찰은 김영식을 완주군 구이면 대덕리로 데려갔다. 동의도 구하지 않고 영장도 없이. 그곳은 머리빗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거의 구금하듯 공장으로 밀어넣었다. 그라인드는 크아앙 소리를 내며 재료를 잘라냈고 온갖 먼지가 휘날렸다. 하루 종일 일을 하는데 식사도 월급도 신통치 않았다. 차라리 교도소가 더 낫다고 김영식이 생각할 정도였다. .

그때 원암수양관을 운영하며 노숙인을 돌보던 백영규가 소식을 듣고 김영식을 찾아와 같이 살자고 했다. 김영식은 어딘들 머리빗공장보다 못하겠냐 생각하고 따라나서 수양관에서 장애인들을 돌봐주었다. 마침 수양관을 드나들던 목수 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이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하지 않는냐”면서 진안군의 마이산 근처 신천 부락에 있는 돌 공장을 소개해줬다.

김영식은 그곳을 찾아갔다. 채석장에서 실어온 돌을 망치로 깨고 분쇄기에 집어넣어 돌가루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이곳도 머리빗공장처럼 하루 종일 가루와 연기가 날렸다. 월급 역시 몇 푼 안 되는데 일은 빗공장보다 더 고되었다. 이때의 고통을 김영식은 1989년 12월 4일 일기에 남겼다

짧은 시간도 살기가 아득한 시간 망치는 돌을 때리고

돌은 나의 다리와 온몸을 사정없이 때리는구나

몸은 물에 빠진 것 같이 흠뻑 젖었다 말랐다 몇 번이던가

돌가루는 연기와 같이 온 몸을 휘감고 도는구나

이렇게 돌과 싸워야 생활 수단을 구할 수 있구나

그때 무기징역 받고 복역하다가 제일 나중에 출소한 김중종이 찾아왔다. 그는 다시 원암수양관으로 돌아가 같이 살자고 했다. 무슨 방안이 있는지 몰라도 수양관 직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영식은 그를 따라갔고 거기서 소개받은 여자와 잠시 살림도 차렸다.

평화로울 것 같은 수양관 생활은 뜻밖의 사건으로 깨졌다. 김영식은 화단 마당에 여러 꽃과 화초를 심었는데 이승만 밑에서 일했던 수양관 직원 하나가 김영식이 화단에 인민공화국 국기를 만들었다고 시비를 걸며 장작개비를 휘둘렀다. 할 수 없이 그는 도망치듯 나와 여기저기 건설현장을 돌아다녔다.

집도 없던 그는 현장 막사에서 아니면 스티로풀을 깔고 한뎃잠을 잤다. 건설현장에서 겪은 어려움을 1990년 6월 17일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그의 나이 쉰여덟 살 때다.

3층으로 흙을 지어 올려 채우는데 다리는 떨리고 흙은 등에서 짓눌어 더욱 무겁기만 하는구나 온 몸은 물에 빠진 듯이 처져 있고 숨은 가프고 아랫도리가 매세하구나. 있는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해도 주인은 더욱 채찍질이다. 짧은 인생 살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이 세상 떠나면은 무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쓰라린 고통을 겪으면서 순간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나? 잘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김영식이 출소할 당시만 해도 사회안전법이 있어서 한 달에 한번 전주경찰서에 동향보고를 해야 했다. 김영식은 전화도 없고 전주경찰서 전화번호도 모르고 보고할 마음도 없어 무시하고 살아가는데 김중종이 어떻게 알고 찾아왔다. 연락이 두절된 김영식에게 전주지방검찰청이 수배령을 내리며 김중종에게 “김영식을 찾아와라, 못찾으면 네게 책임을 묻겠다”며 닦달했다는 것이다.

그날로 김영식은 동향보고를 하러 전주경찰서에 들어갔다. 자진 출두한 김영식에게 전주경찰서 형사들은 무릎을 꿇게 하고 “김영식이 말이야 10리 밖을 못나가게 되어 있는데 옮겨가면 연락을 해야지 이게 뭐야”하며 발길로 툭툭 찼다. 그리고 경찰들은 자기네끼리 의논하더니 지역의 한 건설업체 대표에게 “이 사람 일도 시키면서 관리를 하라” 며 김영식을 감금하다시피 맡겼다.

 
 

김영식은 거기서 3년간 일을 했다. 그의 말대로 “이를 악물고 고생하면서”. 그런데 3년간 입에 풀칠만 시키고 월급 한 푼 주지 않았다. 김영식이 밀린 임금을 달라고 대들자 부도가 나서 돈이 없다고 발뺌을 했다. 김영식은 전주경찰서를 찾아가 해결을 요구했다. 전주경찰서는 김영식을 떠맡겼으면서도 문제가 생기니 자기네는 ‘재정’에 대해선 관계를 안 한다고 딴전을 피웠다. 한 달에 3, 40만 원 정도를 받기로 하고 일을 했는데 3년 치나 못 받았으니 큰돈이었다. 김영식은 변호사를 사서 겨우 일부를 받아냈다.

그 후 김영식이 찾아간 곳이 서지영이 있던 소양의 산장이었다. 거기서 밭을 일궈 옥수수와 고추를 심었는데 동네 할머니 하나가 김영식을 얕잡아보고 허락도 없이 다 따가고 말았다. 이게 주민들과 싸우는 빌미가 되어 김영식은 그곳에서도 쫒겨났다. 다음으로 간 곳이 비닐공장, 그리고 또 다른 공장들...

김영식은 출소 후 몸고생을 못지 않게 돈고생도 했다. 10여 년간 어찌어찌 모은 이천여만 원을 높은 이자를 쳐준다는 보험회사에 맡겼다. 그런데 전주에서 같이 고생하던 옛동지가 돈이 필요하다고 찾아왔다. 김영식은 보험회사에 묶여있어 찾기 쉽지 않다. 그게 되면 빌려주겠다고 했다. 옛동지는 보험회사에 가서 드러눕다시피 싸워서 김영식의 돈을 찾아 빌려갔다. 문제는 그 후, 이자는 말할 것도 없고 원금을 돌려주지 않아 얼굴 붉히는 일이 벌어졌다. 나중에야 원금 일부를 돌려받았을 뿐이다. 김영식은 그의 말대로 “여자한테도 안 가고...” 착실하게 돈을 모았는데 무일푼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보험에 들었다가 형편이 어려워 깨면서 180만 원이나 부었던 원금을 40만 원 밖에 못 받기도 했다. 전주 팔복동에 사는 아줌마 하나도 돈을 빌려 갔는데 다음 주, 다음 달하면서 2년간 이자도 한 푼 안 주더니 결국 다 떼먹고 말았다.

 

화원과 농장이 된 낙성대 

이런 고단한 삶에 안정과 평화가 찾아온 것은,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거주하던 장기수들이 1차 송환때 북으로 가고나서였다. 만남의 집 공간에 여유가 생기자 권오헌양심수후원회장은 김영식에게 어려운 전주생활을 정리하고 올라올 것을 권유했다. 김영식은 늙은 몸으로 공사판을 계속 떠돌 수도 없고 서울에서 2차 송환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마고 했다.

낙성대에서 같이 생활하게 된 이는 정순덕, 정순택, 문상봉 등이었다. 정순덕은 마지막 빨치산으로 유명했던 여전사였고 1921년생 정순택은 이미 80대로 가장 나이가 많은 큰 형님 격이었다.

김영식은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마당에 나무를 심고 화초를 키웠다. 그가 나서부터 보고 배운 일이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이다. 김영식에게 어린 시절 농사는 사무친 아픔이었다. 10대의 어린 소년으로 일본놈들에게 보국대로 끌려간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꿔야 했다. 엄마가 혼자 고생하게 놔둘 수 없었다.

추수가 끝나고도 손을 놀릴 수 없어 산에서 땔감을 해 장터로 나갔다. 몇 날 며칠을 힘들여 모은 땔감을 지고 가면 장꾼들은 서로 입을 맞춰 헐값만 불렀다. 그때 김영식은 세상이 농사꾼을 호구로 보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원산에 나가 배를 탔지만 농사는 몸에 배어 있었다.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숙식이 해결되니 몸에 밴 습관대로 김영식은 만남의 집을 꾸미는데 정성을 쏟았다. 양심수후원회장이었던 안병길 목사의 농장이 경기도 시흥에 있었는데 김영식은 거기서 가을배추를 심다가 난생 처음 빨간 나팔꽃을 보았다. 만남의 집에 어울릴 것 같아 그 씨를 가져다 심었다. 그는 매일 나팔꽃을 들여다보고 볏짚으로 끈을 꼬아서 줄을 매주고 돌봤다. 나팔꽃의 덩굴은 쭉쭉 뻗어 올라갔다. 그걸 지켜보는 건 기쁨이었다. 그는 “식물에도 눈이 있는지 꽃줄기가 여러 개인데 전부 다 시계방향으로 감아 올라간다”고 일기에 적었다.

김영식은 또 유실수를 심었다. 그가 낙성대에 왔을 때 마당에는 이미 앵두 모과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담장을 따라 철쭉, 진달래, 단풍나무, 고욤나무가 있었다. 그는 고욤나무에 감을 접붙여 열매를 거뒀다. 2006년, 한겨레신문사에서 북에 사과나무 묘목을 심어주는 운동을 했을 때 그는 전북 장수의 한 사과나무농장에서 가서 5만 원짜리 묘목을 사 ‘김영식’이란 이름표를 달아 동참했다. 거기서 버려진 묘목을 낙성대로 가져와 ‘통일나무’라고 이름 짓고 심었다. 그때 쓴 시가 한편 있다.

서울에서 장수로 왔다. 사과나무 만나러

사과나무야 네가 평양으로 간다지

가면 무럭무럭 자라 북 어린이들 건강 보장하려무나

남에서 북으로 간 사과나무가

북 어린이 도와 평화의 마음이 솟아나게끔 하려나

남북 어린이 화합에 외세가 분단시킨 조국을 하나 되게끔 하려무나

통일 사과여 조국 통일이 빨리 오게끔 더 많이 열리기를 바란다

지금 통일사과나무는 열여섯 나이가 되어 가을에는 제법 많은 열매가 열린다. 김영식은 또 고무다라에 관상용 벼를 심고 포도를 잘 키워 여름에는 울창한 숲이 될 정도로 만남의 집을 가꾸었다. 양심수후원회 사묵국장이었던 류제춘은 “만남의 집 텃밭은 씨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는 통일 세상을 그리는 마당이며 봄·여름·가을·겨울을 잇는 작은 우주다. 선생님은 우주를 가꾸는 멋진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로 인해 낙성대는 자그마한 농장이며 화원이 되었다. 봄에는 꽃이 가득하고 여름에는 푸르름에 눈이 즐겁고 가을에는 과실을 거두고 겨울에는 소출을 가지고 먹거리를 만든다. 쌀을 튀겨 한과를 만들고 쌀가루를 내어 부침을, 마당에서 딴 감으로 곶감을 치고 동치미도 담근다. 김영식은 이런 음식을 싸 들고 여기저기 농성장을 찾아가 크고 투박한 손으로 사람들에게 건넸다.

 

지하철을 타면 꼭 몸벽보를 했습니다

김영식은 만남의 집을 나설 때 꼭 몸 벽보를 두른다. 탑골공원에서 목요일마다 열렸던 민가협집회에 참석할 때 그는 싸움터에 나가는 전사가 갑옷을 두르듯 몸벽보를 걸쳤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국가보안법 철폐” “미군 철수” “후손에게 통일된 조국을 물려주자” 등 문구를 담았다.

몸벽보 투쟁의 원조는 낙성대에 있던 정순택선생이다. 그는 1차 송환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제외된 후 그 울분을 몸벽보 투쟁으로 풀었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가는 곳마다 언제나 몸벽보를 둘렀다. 그가 2005년 9월 세상을 뜨자 김영식은 이 몸벽보 투쟁을 이어받았다.

지하철에서 몸벽보를 두르고 짧은 연설과 구호까지 외치니 김영식은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노인들과 충돌이 많았다. “저 이북 놈 같으니”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주먹질에 얼굴을 맞기도 했다. 뿐아니었다. 목요집회가 끝난 2012년 11월 15일엔 5호선을 타고 강담과 신길역을 지나고 있을 때 신고를 받은 역무원 둘이 다가와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버텼더니 양쪽에서 팔을 잡고 끌어내렸다. 이날 과태료처분까지 받았다.

2012년 12월 9일에도 5호선 열차에서 몸벽보 홍보활동을 하다가 “소란행위’를 일으켜 경범죄처벌법 제1조 26호를 위반했다.”고 과태료 5만원을 먹었다. 판사는 “마이크를 쓰지 않았고 재산도 없으니 가볍게 처분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두 번의 과태료를 포함, 5호선은 김영식에게 악연이었다.

2016년 6월 8일에도 큰 봉변을 당했다. 지하철 4호선에서 선전을 하는데 30대 승객이 시비를 걸었다. 그는 김영식의 팔을 비틀어 꺾으며 전동차에서 끌어내렸다. 이날은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까지 받았다.

좋은 추억도 있었다. 한 칸 한 칸 옮겨가며 선전을 하다 보면 입이 갈라지고 목마를 때가 많은 데 김영식을 지켜본 사람들이 ‘수고한다’고 음료수를 내밀 때가 있다. 그에겐 달디단 감로주였다. 어떤 젊은이는 김영식에게 너무나 멋진 일을 한다고 안아보겠다 해 서로 껴안은 적도 있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어느 날인가 김영식이 탑골공원 민가협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데 어떤 여인이 길을 몰라 김영식이 안내해줬다. 그는 김영식의 어깨띠를 보고 “이거 하면 하루 얼마 받냐? 우리 아들이 놀고 있어서 그런다, 좀 알려달라”고 했다. 김영식은 빙그레 웃으며 여인을 돌려 세웠다. 때로는 지하철상인들과 같은 칸에서 만날 때가 있었다. 보통 그쪽에서 김영식선생에게 다른 칸으로 옮겨달라고 양해를 구하는데 김영식은 선선히 그 청을 받아들였다.

몸벽보 투쟁을 하면서도 평가와 반성은 충실히 했다. 함께 몸벽보 투쟁을 했던 최동진선생과 의논하기를 ▲감정을 너무 앞세우지 않는다 ▲차 안에 사람이 많으면 유인물만 나누어 준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으면 피한다 는 원칙을 세웠다.

2015년 가을부터 김영식은 건강이 나빠져 2016년에는 입원까지 했었다. 아픈 가운데서도 보안관찰법에 따라 조사를 받았다. 2016년 3월 21일 일기에는 아픈 몸을 이끌고도 몸벽보와 선전투쟁을 계속하다 조사를 받으러 가야하는 답답한 마음이 적혀있다. 김영식은 2016년 촛불혁명 때는 아픈 몸을 이끌고 광화문투쟁에 빠지지 않았다.

코로나가 시작한 2020년부터 조금 주춤했지만 지금까지 김영식의 투쟁은 쉼 없이 이어졌다. 그는 몸벽보 투쟁만 하는 게 아니다. 미대사관 앞에서는 전쟁연습 중단을 외치고 통일부 앞에서는 ‘2차 송환’을 즉각 실시하라고 1인 시위를 벌였다.

 

북에 가면 밤농사를 해 남녘의 동포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1933년생 김영식, 이제 그의 나이도 구십을 바라본다. 다행히 이곳에 결연을 맺은 양아들과 손주격인 어린이 둘이 있다. 그들의 따뜻한 보살핌, 낙성대 만남의 집이 지닌 온기 덕분에 건강을 유지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바램은 오직 하나 남북관계가 빨리 호전되어 고향에 가는 것뿐이다. 김영식은 2019년 이산가족 상봉 대상 명단에 올랐다. 적십자사에서 “상봉단 일원으로 추첨되었으니 신청서를 내라”는 연락을 받았다. 잠시라도 얼굴을 본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는 기대에 밤잠을 설쳤다. 그런데 적십자사는 실무접촉 결과 “가족들 생사 확인불가”로 방문자 명단에서 제외된다고 통고를 해왔다.

김영식은 공작원이기에 북측의 당국에서 자신의 가족을 특별관리 했을 터인데 생사확인이 안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적십자사에 항의했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김영식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때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 지금은 마음을 추슬러 남쪽에서 조금이라도 더 통일운동을 펼치다가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올라가겠다는 생각이다. 민족을 위해 희생을 각오한 터이니 주어진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통일의 기운을 만드는 일에 노력하겠다는 다짐이다.

살아서 북에 올라가게 되면 김영식은 조그만 밤 농장을 일구려 한다. 그는 즐겨 원산에서 선원생활을 했던 때를 회상한다.

아니 무슨 바다 밑에 고기가 그렇게 많아, 명태를 잡는 데 저만치 바다에서 하얀 달이 떠오르는 것 같아. 그물에 명태가 가득 차서 저절로 떠 오르더라고, 끌어당겨서 한 세 번만 실으면 배가 잔뜩 차 쟁일 데가 없어. 고기 무게에 배가 내려앉아 뱃전에 물이 찰랑찰랑거릴 정도야. 어떤 배는 욕심 사납게 싣고 오다 큰바람에 가라앉고 말았지. 명태만이 아니야 가자미 청어 한길도 넘는 다랑어도 잡았지.

하지만 이젠 배를 타기엔 나이가 너무 들어서 밤농사를 지겠다는 마음이다.

밤농사를 잘해 북녘 가족에겐 물론이고 남쪽 동포, 낙성대 식구들, 통일운동하는 젊은 청년들, 그리고 양아들과 손주에게 가을마다 밤을 보내는 게 꿈이라고 늘 말한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민병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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