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의 아내로 살아오셨던 고난의 삶”

남민전 서기 이재문 선생의 부인 고 김재원 여사 추도식

 

  • 안영민 (사)평화의길 사무처장 
  •  
  •  입력 2022.01.30 02:10

 

지난 1월 27일 아침, 남민전의 서기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1년 옥사했던 이재문 선생의 부인, 김재원 선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1월 28일 저녁 남민전 동지회 주최로 열린 ‘고 김재원 여사 추도식’에 다녀온 안영민 (사)평화의길 사무처장이 고인의 삶을 돌아보는 추모기사를 보내왔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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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재원 여사 추도식’이  28일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에 있는 농협장례문화원에서 진행됐다.[사진제공-양심수후원회]
 

 

“어머니는 유복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셨죠. 도회지 분위기가 물씬 나는, 보기 드문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아버지는 경북 의성 산골마을의 엄격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셨죠. 어찌 보면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집안 분위기 모두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분이 연애하고 결혼하셔서 저희 두 남매를 낳았습니다.”

2022년 1월 28일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에 있는 농협장례문화원 202호실. 오후 6시부터 열린 ‘고 김재원 여사 추도식’에서 고인의 딸인 이경실 씨가 담담하게 유가족 인사를 했다.

“아버지가 수배 받고, 다시 체포 당해 감옥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어린 저희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생애와 유지를 알리기 위해 곳곳으로 뛰어다니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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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 인사를 하고 있는 고인의 딸 이경실 씨. [사진제공-양심수후원회]
 

 

고 김재원 선생은 남민전 조직의 지도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1년 11월 병마로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 이재문 선생의 부인이다. 남민전 동지회 주최로 열린 이날 추도식에는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이 함께 모여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했다.

김재원 선생은 1935년 1월 4일 원산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서울로 이주한 뒤 1941년 계성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경기여중에 입학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이 나면서 대구로 피난한 뒤 효성여고를 졸업했다. 이후 효성여대를 다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 불문학과 청강생을 거쳐 성균관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대학 졸업 후 1958년부터 가톨릭출판사에서 근무했고, 가톨릭시보사(지금의 가톨릭신문사)로 옮겨 기자로 활동했다. 이재문 선생을 알게 된 것도 가톨릭시보사 기자 시절이었다. 이재문 선생이 1961년 2월 창간된 민족일보에서 정치부 기자로 일할 때, 김재원 선생도 가톨릭시보사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던 것이다.

민족일보가 강제 폐간된 뒤 이재문 선생은 대구매일신문으로 옮겨 국회 출입기자로 재직하다 1964년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이때 김재원 선생은 구속된 이재문 선생의 옥바라지를 자청하고 나섰다. 기자 생활을 하며 곁에서 지켜본 이재문 선생에게 오래 전부터 마음이 끌렸고, 왠지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특히 불의 앞에서는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함을 지녔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몸에 밴 이재문 선생의 성품을 지켜봐 왔기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재문 선생이 1965년 2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온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큰딸인 경실이 태어났다. 1967년에는 대구로 이사를 했고, 1968년에는 둘째인 아들 원준이 태어났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김재원 선생은 1968년부터 효성여대 학보사 편집장으로 근무했다. 이재문 선생이 신문사를 그만두고 대구 지역의 혁신운동 인사들과 교류를 확대하며 분주히 뛰어다니는 동안 어린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 경제를 책임지는 것은 김재원 선생의 몫이었다. 당시에 대해 김재원 선생은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몰랐지만 남편이 뭔가 큰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느꼈고, 왠지 불길함 속에서도 자기가 집안을 잘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불길한 느낌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1974년 소위 인혁당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남편의 각별한 지인들이었다. 특히 이재문 선생이 대구 인근 와룡산에서 염소농장을 운영할 때 자주 찾아와 모임을 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검거를 피한 이재문 선생은 도피 생활을 시작했고, 남은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의 감시 앞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김재원 선생도 중정의 압력으로 효성여대에서 해직됐다.
 

김재원 선생(맨 오른쪽)이 인천 송현동성당 최분도 신부(오른쪽 두 번째)와 함께. 최 신부는 메리놀수도회 소속 독일 신부로 김재원 선생이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큰 도움을 주었다. [사진제공-안영민]
김재원 선생(맨 오른쪽)이 인천 송현동성당 최분도 신부(오른쪽 두 번째)와 함께. 최 신부는 메리놀수도회 소속 독일 신부로 김재원 선생이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큰 도움을 주었다. [사진제공-안영민]
 

 

그 다음부터는 어린 두 남매를 지키고 키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생계를 위해 대구 서문시장에서 노점을 했지만 남편을 찾기 위해 수시로 드나드는 경찰들 때문에 이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어린 두 남매와 떨어져 혼자 서울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1976년 인천 송현성당 최분도 신부님의 도움으로 인천에 정착했고, 성당에서 전교 회장 일을 하면서 다시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생사를 알지 못했던 남편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1979년 10월 4일이었다. 다름 아닌 남편의 체포 소식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인 10월 9일 신문에는 해방 이후 최대 지하당 간첩조직이라는 설명과 함께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이재문 선생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병마에 시달리다 결국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김재원 선생은 남편의 구명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다른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의 석방을 위해 또 뛰어다녔다.

당시의 모습에 대해 남민전 사건 무기수였던 고 이해경 선생의 부인 소혜련 선생(전 민가협 실행위원)은 추도식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도 다른 구속자들의 석방운동을 위해 정말 헌신적으로 활동하셨죠. 재원 형님을 보면서 과연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성당에서도 전교 활동에 참 열심이었죠. 형님이 전교 회장을 맡는 것에 대해 ‘간첩 남편’ 하면서 이런저런 뒷말도 있었지만 원체 똑 부러지게 일을 잘 하니 나중에는 그런 말들이 쏙 들어가더군요. 남민전 구속자 가족들에게는 정말 든든한 형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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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헌 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김재원 선생의 삶에 대해 “혁명가의 아내로 살아오셨던 고난의 삶”이라고 평가했다. [사진제공-양심수후원회]
 

 

남민전 사건 구속자였던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도 이렇게 회고했다.

“제가 감옥에서 나온 1983년 습한 여름날에 사모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인천의 아주 조그만 성당에 딸린 소박한 부속건물에서 사셨죠. 이재문 선생님 돌아가시고 3년상도 안 되었을 시간이지만 1982년 사형집행 당하신 신향식 선생님과 감옥에 갇혀 고통 받고 있는 남민전 동지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속죄인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내내 마음에 아렸습니다.”

남편을 먼저 보낸 슬픔을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민전의 서기로 조직을 책임졌던 남편, 하지만 그런 남편을 믿고 자신의 목숨까지 맡겼던 동지들이 끝내 고초를 겪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김재원 선생은 결코 슬픔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이재문의 아내’로서 남편의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모습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노력들이 있었기에 1985년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이 처음 결성됐을 때, 남민전 가족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민가협 결성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민전은 구속자 가족들 내에서 ‘왕따’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우리는 남민전과 다르다, 우리는 순수하게 민주화운동을 했지만 남민전은 다르지 않나.” 이런 인식들이 팽배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남민전 가족들은 묵묵히, 또 헌신적으로 활동했고, 그 결과 남민전 가족들도 ‘민주화 실천 가족’으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재원 선생은 큰 역할을 했다.

1988년 12월,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석방되고 난 뒤에도 김재원 선생은 남편의 뜻을 잇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성당에서 북녘동포 돕기 운동과 제3세계 어린이 돕기 운동을 꾸준히 벌여나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목도리나 모자를 뜨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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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객들. [사진제공-양심수후원회]

 

1999년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이 출소해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생활을 하게 되자 이들을 찾아가 식사를 챙기지 시작했다. 장기수 선생님들을 위해 주방 일을 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 분들이 건강하게 북녘의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식단도 건강하고 안전한 재료로 꼼꼼하게 챙기며 정성을 다했다. 그 뒤로도 2015년 병마로 자리에 누울 때까지 꾸준히 누군가를 위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김재원 선생의 삶에 대해 권오헌 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혁명가의 아내로 살아오셨던 고난의 삶”이라고 평가했다.

“남부럽지 않은 학력과 탄탄한 일터를 갖고 있었지만, 혁명가의 아내로 온갖 고난을 감내해야 했고, 홀로 두 자녀를 훌륭히 키우셨고, 스스로는 밀알이 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2022년 1월 29일 오전 6시 발인을 마친 김재원 선생은 이날 오전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있는 남편의 묘소에 함께 안장됐다. 40년 만에 남편이자 같은 언론인이었던 이재문 선생의 곁으로 돌아와 비로소 옛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름답고 빛나는 혁명가의 아내는 이렇게 그 삶의 빛을 발하고 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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