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자료실

국가 폭력과 0.75평의 광장’, 그리고 주체적 삶의

 

정찬대(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연구위원)

 

 

 

근대 이전 사상통제는 종교적 신념을 억제하고 억압하는 방식이었다. 국가권력이나 교회권력이 이단자를 박해하거나 탄압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신념과 행동을 규제했다. 근대 이후 사상통제는 개인의 정치적 신념과 행동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전쟁이나 전체주의, 파시즘, 군사독재 등은 현대적 사상통제를 가중시킨 계기가 됐다.

특정 이데올로기는 개인이나 집단을 손쉽게 탄압하는 도구가 된다. 더욱이 이것이 정치적 신념으로 굳어질 경우 폭력에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내게 된다. ‘고문 기술자이근안이 공안사범에 대한 고문을 애국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좌익수에게 가해진 폭압적인 형태의 공작은 간수들에게 애국 행위로 인식됐다. 그렇게 가해의 죄의식도 점차 무뎌져갔다.

한국 강제전향 정책의 역사적 뿌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향(轉向)’이란 용어 자체도 일제 사법부가 만들어낸 것으로 개인의 사상을 당국이 바르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국가 권력의 강제성이 동원된다. 때문에 전향은 물리적인 폭력과 더불어 이후 끊임없는 감시체제를 수반하게 된다. 사상전향 정책은 일제의 유산으로서 해방 후에도 청산되지 못한 채 이어져왔다.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황국신민화 정책은 반공국민 건설로 그 내용이 바뀐 채 개인의 양심과 사상을 철저히 유린했다. 직접적인 폭력의 수단이나 제도적인 억압 장치를 통해 인간 내면의 세계를 끊임없이 바꾸도록 강제한 것이다. 그것이 사상전향 정책이 갖는 절멸의 폭력성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체제와 반제국주의 운동이 급속히 확산됐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은 물론 식민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일본 천황제를 거부하고, 사유재산을 부정하며, 식민체제를 반대했다. 더욱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독립운동의 한 일환으로 관련 사상이 전파되기도 했다. 때문에 일제에 의해 강한 탄압과 감시의 대상이 됐다. 1925412일 법률 제46호로 제정·공포된 치안유지법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제재법이자 통제법이었다.

치안유지법은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억누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민족해방 운동을 지향한 사회주의 사상가나 식민지배에 저항한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치안유지법의 최초 적용이 식민지 조선에서, 그것도 사회주의 운동인 고려공산당창립준비위원회 사건이란 사실은 여러 시사점을 준다.

치안유지법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은 사상범은 전향의 대상이 됐다. 이후 시행된 사상범보호관찰법등에 따라 전향자와 비전향자로 구분된 이들은 당국의 엄격한 관리와 통제를 받았다. 193611월 일본 본토에서부터 시행된 사상범보호관찰법은 일제하 전향정책이 정식으로 제도화된 법령이었다. 관련 법령은 그해 12월 식민지 조선에서도 적용됐다. 해당 법령에는 전향자의 경제적 지원과 함께 비전향자의 추가 격리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특히 보호관찰 기간을 2년으로 하되 비전향할 시 2년을 갱신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해방 후 한국 정부에 의해 제정된 사회안전법(1975.7.16.)1989년 대체법으로 제정된 보안관찰법(1989.6.16.)과 유사한 형태다. 일제는 제도적으로 전향을 강제하고, 그 결과 드러난 성과를 선전함으로써 식민지배 체제의 안녕과 질서를 확보했다. 아울러 적극적인 전향정책을 통해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가진 다수의 조선인들을 황국신민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법제도로서 전향정책도 사라졌다. 하지만 1948121일 법률 제10호로 제정·공포된 국가보안법은 반체제범을 탄압하는 법적 무기가 됐다. 19484·310월 여순항쟁이 있고 얼마 뒤인 194812월 법무부차관 김갑수는 형무소 수용능력이 15,000명인데 반해 실제 수감된 인원은 4만 명이라고 밝혔다. 수감자의 80%는 좌익수였다. 국가보안법제정 후 1949년 한 해 동안만 118,621명 검거·투옥됐을 만큼 전국 형무소는 좌익수들로 가득 찼다. 정부는 전국 형무소 수용 한계를 넘어선 좌익수를 전향시킬 방법을 적극 모색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단체가 19496월에 출범한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었다. 19387월과 194012월에 각각 설립된 일제의 사상전향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대화숙(大和塾)’을 모체로 만들어졌다. 보도연맹 가입 인원만 전국에서 30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이것이 전쟁 발발과 함께 살생부 명단이 되어 돌아온다. 그것이 바로 국민보도연맹 사건이었다. 해당 사건은 이른바 예방 학살측면에서 이뤄진 집단 학살이었다.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전쟁 이전부터 극우 반공주의 정책이 견지돼 왔으나 반공이 실체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 절대적이었다. 한국전쟁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으로 대한민국은 초반공국가가 됐다. 극우로의 지형 변화는 한국 정치의 전개 방향을 근본적으로 조건 지웠다.

한국전쟁기 빨치산을 비롯해 수많은 좌익수형자들이 폭압적인 전향공작의 대상이 됐다. 형무소에서 자행된 수많은 고문과 공작 등으로 한 개인의 인격은 철저히 말살됐다. 좌익수형자들에 대한 전향정책이 해방 후 다시 제도화된 것은 19561029가석방심사규정’(법무부령 제19)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 도구로 강화된 사상전향 제도가 한국전쟁 이후 부활한 셈이었다.

좌익사상범에 대한 폭압적인 테러 행위는 박정희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1961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획책한 박정희는 과거 자신의 좌익 이력 때문에 강한 레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더욱이 남로당 동료를 밀고한 채 전향한 이력 또한 갖고 있었다. 온갖 고신에도 전향을 거부한 좌익장기수들은 박정희에게 열등감의 대상이자 아킬레스건 같은 존재였다. 비전향장기수들이 교도소 내에서 상상을 초월한 국가 폭력의 대상이 된 것도 이러한 배경이 깔려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이뤄진 전향공작은 정교하고 치밀했다. 이승만 정권과 달리 이때의 공작은 조직적이면서 체계적인 형태를 띠었다. 196112월 법률 제858호로 행형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했다. 형무소는 교도소로 명칭이 변경됐고, 형무관도 교도관으로 개칭됐다. 행형 정비와 더불어 전국 각 형무소에 수용돼 있던 비전향장기수들은 1961년 말까지 대전교도소로 집결했다. 대전교도소 내 특별사동은 지옥과도 같은 살인 감방이다. 1930년대 사상범의 규제와 통제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특정 감옥 내 특별사동형 감옥시설이 만들어졌고, 해방 후에도 여전히 같은 목적으로 운영됐다. 특별사동은 0.75평의 비좁은 독방감으로 돼 있어 한 사람이 발을 펴고 편안히 누울 수조차 없는 시설이었다. 당시 대전교도소에 집결한 좌익수형자는 8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에 대한 관리는 새로 창설된 중앙정보부가 담당했다.

대전교도소 특별사동에 수용돼 있던 좌익수들은 1968121일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나면서 대전, 대구, 전주, 광주 등 전국 4개 교도소로 분산 수용됐다. 비전향수들을 분산 수용한 것은 게릴라 기습 등 불의의 사태 하에서 수용된 좌익수의 탈취 석방 등 발생 사태가 예상된다는 중앙정보부 및 내무부로부터의 통보가 있은 뒤 이뤄진 조치였다.

197210월 유신체제가 시작되고 이듬해인 197382일 법무부 예규 108좌익수형수전향공작전담반운영지침이 시달됐다. ‘떡봉이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떡봉이는 사람을 떡 매질하듯 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폭력배 출신의 강력범들로 구성된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좌익수를 수시로 구타했다. 더욱이 이들에게는 전향서 한 장당 얼마만큼의 수고비까지 따랐다. 국가는 감형 등을 조건으로 강력범들에게 공작을 지시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 전향공작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배경에는 유신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내적 저항과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 남북관계의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특히 1960년 장면 정부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된 이들이 1970년대 초중반 출소를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살인적인 사상전향 공작은 반공적 위기감을 고조시키면서 내부 균열을 외환으로 극복하려는 정책을 취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박정희 시기 전향 전담반은 심리학자, 종교인, 가족 등을 적극 동원했다. 육신의 고통만으로는 전향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 당국은 인간의 심리와 내면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사상전향을 시도했다. 인간의 고립감을 극대화시켰고,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없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전향공작은 한 개인의 육신과 정신을 철저히 파괴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1975716일 법률 제2769호로 사회안전법이 제정된 것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결국 관련법에 따라 전향을 거부한 이들은 교도소 밖을 나갈 수 없었고, 혹여 석방된 이들도 전향심사를 거쳐 보안감호처분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청주보안감호소 독방에 수감된 비전향수들은 2년 갱신, 2년 갱신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전향을 강요당했다. 독방에서 나올 수 있는 건 구타와 고문을 받을 때, 그리고 2년 뒤 전향심사 갱신을 받을 때였다.

강제전향 정책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다. 또한 양심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조항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10)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19)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에서 규정한 양심의 의무는 윤리적 의미의 양심만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헌법학계 통설이다.

비전향장기수는 사상범이다. 또한 국가 폭력에 정면으로 맞선 양심수다. 온갖 고신 속에서도 그들은 스스로의 신념을 지켜내고자 했다. 수십 년 복역 끝에 형집행정지 등으로 풀려났으나 그런 그들에게 사회는 또 다시 감시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그러한 감시는 계속될 것이다.

한국 정부는 여전히 ()전향이란 용어를 쓴다. 아직 전향하지 않았으나 앞으로 할 것이란 기대감이 내포된 단어다. 반면, 전향을 거부한 이들 입장에선 ()전향이란 용어를 쓴다. 현재도 전향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란 다짐이 담긴 용어다. ‘송환역시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는 송환을 부정한다. 1993319일 북한으로 간 이인모 선생의 경우도 당국은 장기 방북을 허용했을 뿐 송환한 것이 아니었다. 용어에서도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담겨있는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로 19년을 복역한 서승 선생은 회고록에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사동이 비전향수들로 채워진 탓에 도리어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가장 넘치는 곳이 됐다고 역설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비전향장기수들은 좁은 독방에서 분리되고 격리됐다. 0.75평 독방에 갇혀 폭압적인 형태의 고문을 받으며 전향을 강요당했다. 0.75평 공간은 극한의 싸움터였다. 또한 국가 권력에 맞선 광장이었다. 그들에게 그곳은 주체적 삶이 내면화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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